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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682B4> 위(魏)나라 초대 왕 혜왕 惠王 | ||
성 | 희(姬) | |
씨 | 위(魏) | |
휘 | 앵(罃) | |
아버지 | 위무후(魏武侯) 위격(魏擊)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319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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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魏)의 3대 국군, 초대 왕. 위무후의 아들. 시호는 문혜왕(文惠王) 혹은 혜성왕(惠成王). 약칭 시호로는 혜왕(惠王)으로 호칭된다. 맹자에서는 양혜왕(梁惠王),[1] 장자에서는 문혜군(文惠君)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칭왕하기 전에 후작이라서 혜후(惠侯)로도 불리기도 한다. 이름은 앵(罃).특히 '양혜왕'이 맹자의 한 편 제목으로도 나와서 '양혜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맹자를 펼쳐 보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맹자현[2]양혜왕(孟子見梁惠王: 맹자께서 양혜왕을 알현하였다)' 대화로 유명하다.
행적상 위나라 전성기 최후의 군주이자 위나라가 쇠퇴하는 시기의 첫 군주지만 이 모든 게 그의 실책에 의한 것으로 자업자득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위 무후 25년(기원전 370년), 위앵은 동생 공중완(公中緩)과 태자 자리를 두고 싸웠는데, 이때 조나라(趙)와 한나라(韓)가 개입해 위앵을 공격하고 대패시키며 안읍까지 포위하니 이를 후세에 탁택전투라고 했다.조성후는 위앵을 죽이고, 공중완을 세운 뒤, 적당히 땅을 떼어갖자는 의견을 냈고, 한의후는 둘 다 후로 세우고, 위나라를 아예 찢어버리자는 의견을 냈는데, 조성후가 한의후의 의견을 거절하자, 한군은 그냥 귀환했다. 맥빠진 조군도 그냥 돌아가버렸고, 안읍에서 위앵과 공중완이 피터지게 싸운 끝에 위앵 세력이 승리해 위앵이 위나라의 군주로 즉위하게 되었다.
2.2. 즉위 초기
위 혜후 2년(기원전 368년), 공숙좌(公孫痤)가 한나라 및 조나라와 회수의 북쪽에서 싸워 조나라의 장수 악조를 사로잡고 공을 세우자 밭 1백만을 상으로 내렸는데, 공숙좌가 사양하면서 오기의 가르침과 파녕, 흔양 등에게 공을 돌렸다. 이에 위혜후는 오기의 후손을 찾아 밭 20만을 상으로 내리고, 파녕, 흔양에게는 밭 10만을 내리면서 공숙좌에게는 밭 40만을 더해 모두 밭 1백 40만을 상으로 내렸다.위 혜후 4년(기원전 366년), 택양에서 한나라의 군주와 회동하고, 무도에 성을 쌓았다.
위 혜후 9년(기원전 361년), 공숙좌가 병석에 눕자 혜후가 문병을 갔는데, 이때 공숙좌가 공손앙(公孫鞅)[3]을 천거했지만 혜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왕족인 공자 앙도 공손앙을 적극 추천하였지만 역시 듣지 않았다. 이때문에 공손앙이 서쪽의 진(秦)나라로 도망가 개혁을 진행하여 진나라를 부강시켰다. 훗날 강성해진 진나라에 패하여 영토를 빼앗기자 공숙좌의 유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위 혜후 13년(기원전 357년), 조나라의 군주와 호 땅에서 회동했다.
위 혜후 14년(기원전 356년), 노(魯), 위(衛), 송(宋), 정(鄭) 등의 군주들에게서 조현을 받았다. 혜후는 제후들을 범대에 모아놓고, 주연을 베풀었는데 노공후가 나라를 망치는 요소에 대해 이야기하자 혜후는 노공후를 칭송하면서 그가 말한 것을 경계로 삼았다.
위 혜후 15년(기원전 355년), 진효공(秦孝公)과 두평에서 회동했다.
위 혜후 19년(기원전 351년), 한단을 조나라에 돌려주면서 장수에서 맹약을 맺었다.
위 혜후 21년(기원전 349년), 진나라 군주와 동 땅에서 회동했다.
위 혜후 27년(기원전 343년), 중산군을 위나라의 재상으로 삼았다.
2.3. 대외 원정
위 혜후 29년(기원전 341년), 혜후가 태자 신(太子申)을 시켜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자 어떤 세객이 태자의 출정을 만류하기 위해 유세했지만, 혜후가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강행하는 바람에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대장군 방연과 태자 신을 잃게 되었다. 이에 제나라에게 복수하려고 했는데, 혜시의 계책에 따라 제나라에 신하가 되길 청하고, 입조해서 초나라를 분노하게 해 초나라로 하여금 제나라를 치도록 조장했다. 결국 초나라가 조나라와 연합해 서주에서 제군을 격파했다.위 혜후 30년(기원전 340년), 진(秦), 조, 제(齊) 등의 공격을 받아 여러 차례 패배해 하서 지역을 잃었다. 이때 진나라가 수도인 안읍과 가까웠으므로 대량으로 천도하고 공자 혁(公子 赫, 훗날의 위양왕)을 태자로 삼았다.
위 혜후 34년(기원전 336년), 제선왕과 평아의 남쪽에서 회동했다. 혜후는 여러 차례에 걸친 대외 정벌의 실패로 국력이 피폐해지자 순우곤, 추연, 맹가 등의 여러 현자들을 국내로 초빙했다.
2.4. 외교
위 혜후 34년(기원전 336년), 방총이 태자와 함께 조나라에 인질로 가게 되었을 때, 방총은 자신을 헐뜯는 사람을 믿지 말도록 혜후에게 당부했는데 이것이 곧 삼인성호의 일화로, 방총이 조나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에 대한 참언이 돌았다. 훗날 태자는 인질 생활이 끝나 귀환했으나 혜후가 참언을 들었기에 방총은 돌아올 수 없었다.위 혜후 35년(기원전 335년), 제나라의 견 땅에서 제선왕과 회동했다.
위 혜왕 후원 원년(기원전 334년), 혜후는 칭왕하였고, 연호를 후원 원년으로 바꿨다.[4]
위 혜왕 후원 2년(기원전 333년), 공손연으로부터 동쪽의 제나라와 연합하면서도 은밀히 남쪽의 초나라와 결속해 제, 초 두 나라가 서로 싸우게 하고, 이긴 국가에 편승해 어부지리를 취하라는 간언을 들었다. 혜왕은 친교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혜시를 초나라에, 공손연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위 혜왕 후원 3년(기원전 332년), 제위왕이 연(燕), 조, 초(楚) 등과 위(衛)나라에서 만나 위(魏)나라를 제외시키려 하자 혜왕은 공손연을 불러 상의해 4국 회동을 막았다. 당시 전수와 공손연의 사이가 나빴는데 계량으로부터 공손연을 장수로 등용해 놓고도 전수의 계책을 쫓으라고 한 것은 잘못이라는 말을 들었다.
위나라의 공손연, 제나라의 전반이 위, 제 연합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이를 원하지 않았는데, 공손연이 전반을 설득해 위, 제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했다. 군사들이 국경을 넘어가 조군에게 패배할 것을 우려하여 제위왕과 함께 전군을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가 조군을 격파했다.
제나라의 세객 진진이 위나라의 공손연을 설득해 제후국들에 관한 외교를 주관하도록 했다. 공손연이 진진의 말대로 자신을 연, 조 두 나라에 사신으로 보낼 것을 청하자 위혜왕이 허락했다. 공손연이 연, 조 두 나라에 가게 된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이 이야기를 듣고 제나라가 위나라와의 수교가 늦어질 것을 우려해 공손연에게 제후국들에게 대한 외교를 맡겼다.
제나라에 이어서 초나라, 연나라, 조나라도 공손연에게 맡기자 위혜왕은 공손연이 조, 연 두 나라로 가는 것을 중지시켰으며, 그가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사신으로 보내지 않으려 했다가 공손연이 조, 연, 초, 제 등 네 나라의 외교에 대한 것을 맡게 되자 그에게 위나라의 외교를 맡겼다.
위 혜왕 후원 11년(기원전 324년), 공손연이 말하길 전수가 자신을 모함한다면서 전수가 망명하면 대왕을 섬기지만 전수가 계속 있으면 자신이 망명하겠다고 했다. 이에 혜왕이 사이가 나쁘다는 이유로 죽이거나 내쫓을 수는 없다면서 전수가 일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또다시 개입하면 죽이거나 내쫓겠다고 말했다. 소대가 전수를 위해 공손연과 전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것을 설득하자 위혜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전수를 곁에 두었으며, 전수와 주소가 서로 사이가 좋아 공손연을 모함하려 하자 공손연의 설득으로 공손연과 사이가 좋은 전문을 불러 재상으로 삼았다.
위 혜왕 후원 13년(기원전 322년), 사거가 공손연을 헐뜯자 공손연이 장의를 통해 사거가 자신을 자주 찾아오도록 했는데, 사거가 공손연을 헐뜯으면서도 자주 그를 찾아가는 것을 알고는 사거를 신임하지 않게 되었다.
장의가 진, 위 두 나라의 재상을 겸임하기 위해 유세했다. 그는 진나라로 하여금 삼천을 치도록 하고, 위나라에서는 그 틈을 이용해 남양을 제압하면 한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장의를 상국으로 삼으려고 했다. 한나라의 한공숙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나라에서 공손연이 공을 세우도록 만들어서 위나라에 땅을 떼어주자 위혜왕이 공손연을 재상에 임명했다.
위 혜왕 후원 16년(기원전 319년), 혜왕이 사망하자, 그 아들인 위사가 이어서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위양왕이다.
그리고 시기는 불명이나 한나라 및 위나라의 친교를 위해 태자 위명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으나 위혜왕이 태자 명을 보고 싶어했다. 이때 병에 걸린 척 해서 초나라가 공자 고를 돌려보내도록 조장하면 제나라에서도 명을 보낼 것이라는 계책을 들었다.
3. 기록 문제
위 혜왕 후원 2년(기원전 333년), 소진이 조나라를 위해 합종을 성사하기 위해 유세하자, 위양왕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연도상 시기로는 위양왕이 아닌 위혜왕이고, 위혜왕의 재위 기간은 소진의 활동 시기와도 맞지 않기에 다른 군주로 보인다.위 혜왕 후원 3년(기원전 332년), 장의가 위로 하여금 진, 한 두 나라와 연횡시켜 제, 초를 치려 했는데, 혜시가 위를 제, 초와 합종시켜 군사 동원을 저지하려고 했다. 대신들이 모두 장의를 지지하자 혜시는 위양왕에게 어떤 사안에 대해 한 쪽만 지지하게 된다면 다른 견해가 전혀 용납될 여지가 없어 어느 한쪽 견해만 받아들여질 것이라면서 이는 군주의 대권을 상실하는 것으로 나아간다고 경계했다.
또 동일한 해에 제나라의 세객 진진이 위나라의 공손연을 설득해 제후국들에 관한 외교를 주관하도록 했다. 공손연이 진진의 말대로 자신을 연, 조 두 나라에 사신을 보낼 것을 청하자 위양왕이 허락했다. 공손연이 조, 연 두 나라에 사자로 가게 된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이 이야기를 듣고 제나라가 위나라와의 수교가 늦어질 것을 우려해 공손연에게 제후국들에게 대한 외교를 맡겼다.
제나라에 이어서 초나라, 연나라, 조나라도 공손연에게 맡기자 위양왕은 공손연이 조, 연 두 나라로 가는 것을 중지시켰으며, 그가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사자로 보내지 않으려 했다가 공손연이 조, 연, 초, 제 등 네 나라의 외교에 대한 것을 맡게 되자 위양왕도 공손연에게 위나라의 외교를 맡겼다.
그런데 기원전 332년은 연도상으로는 위혜왕의 재위 기간이다. 기원전 332년에 대한 다른 기록에서도 위혜왕으로 나온 것으로 보면,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저술할 때, 분서갱유로 인한 기록 소실로 인해서 군주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4.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 13 |
삼국지 시리즈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 '위앵'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1] 진나라에게 하서 땅을 빼앗긴 후 수도를 ‘대량(大梁)’으로 옮겼다고 하여 위혜왕을 양(梁)혜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 다만, 현은 낮은 지위의 사람이 높은 지위의 사람을 뵌다는 뜻인만큼, 아성 맹자께서 양혜왕 ‘따위’를 알현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하여 ‘견’이라고 발음하는 경우도 있었다.[3] 상앙이란 이름은 공손앙이 후에 진나라에서 변법 개혁을 이룬 공로로 상군이란 작위를 받음으로써 얻게 된 호칭이다.[4]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저술할 때, 분서갱유로 인한 6국의 역사서 소실로 인해서 위혜왕의 칭왕 및 연호를 고쳤던 기록을 위혜왕이 사망했다고 잘못 기록하여 위혜왕과 위양왕의 재위기간이 뒤틀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