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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21:53:47

윌리엄 S. 버로스

<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윌리엄 S. 버로스
William S. Burroughs
파일:Burroughs.jpg]
본명 윌리엄 시워드 버로스
William Seward Burroughs
필명 윌리엄 리
William Lee
출생 1914년 2월 5일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사망 1997년 8월 2일 (향년 83세)
미국 캔자스주 로렌스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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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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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모교 하버드 대학교
서명
파일:William_S_Burroughs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과 학생 시절2.2. 하버드 대학 시기2.3. 유럽 시기2.4. 비트세대의 시작2.5. 문학 활동의 시작2.6. 해외 생활2.7. 미국으로 돌아가다2.8. 캔자스에서의 말년
3. 각종 신념과 사고방식
3.1. 정치적 신념3.2. 마법신앙
4. 시대별 문학 스타일5. 여담6. 국내 정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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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소설가, 작가이자 시각 예술가.

비트 세대의 주요 인물이자 대중 문화와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친 포스트모던 작가이다. 18개의 소설, 6개의 단편 소설 모음집과 4개의 에세이 모음집을 썼고, 인터뷰와 편지 등에 대한 5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작품 활동 초반에는 초기작인 정키(Junkie)에서 사용한 윌리엄 리(William Lee)라는 필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말년에 수많은 공연자 및 음악가들과 콜라보레이션을 했고, 영화에도 출연했으며, "샷건 아트" 등 수천 개의 시각 예술 작품을 만들고 전시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가 최초의 실용적인 계산기를 발명하고 버로스 회사를 설립한 발명가 윌리엄 시워드 버로우즈 1세[1]이다.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공부했으며, 비엔나의 의과 대학에 다니기도 하였다.

대학 졸업 후 1943년 뉴욕에서 지내며 앨런 긴즈버그, 잭 케루악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그들의 상호 영향력은 비트 세대의 초석이 되었고, 이는 나중에 1960년대 반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1944년 모르핀을 시작하는데, 이는 남은 생애 동안 그에게 영향을 미친 헤로인 중독으로 이어진다. 그는 첫 번째 소설 정키 Junkie (1953)로 성공하기 시작했으며, 세 번째 소설 네이키드 런치 Naked Lunch (1959)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총 두 번의 결혼 관계를 가졌다. 그중 두 번째 부인인 조앤 볼머는 윌리엄의 손에 의해 사망했다. 1951년 집에서 빌헬름 텔 놀이를 하다가 볼머의 이마를 총으로 쐈다. 초기 작품 ‘퀴어 Queer’의 서문에서 해당 사건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는 그 사건이 자신이 작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작품 대부분이 반자서전적으로, 헤로인 중독자로서의 그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멕시코시티, 런던, 파리, 모로코 근처의 탕헤르 국제 구역 등 다양한 국가에서 살았었다. 그의 소설과 이야기에 여러 번 등장하는 배경인 아마존 열대우림 역시 그가 직접 여행했던 장소이다.

친구이자 시각예술가인 브리온 기싱과 함께 컷업 기법을 발명하고 대중화했다.

어릴 적부터 오컬트, 저주, 마법 등의 주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으며 이는 작품 전반에 녹아들어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과 학생 시절

윌리엄 버로스는 1914년에 태어났으며, 모티머 페리 버로스[2]와 로라 하먼 리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 중 차남이다. 그의 가족은 저명한 영국 혈통이었다. 친할아버지 윌리엄 시워드 버로스 1세는 최초의 실용적인 계산기를 발명한 발명가로, 버로스 회사를 설립한 CEO이기도 했다. 즉,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그러나 그렇게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은 아니었는지, 윌리엄은 스스로의 가족에 대하여 "감정의 표현이 창피하다고 여겨지는 가족"이라고 표현한 적 있다.

윌리엄은 후에 어머니의 성 리Lee를 따서 윌리엄 리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그는 어린 시절 아일랜드인 유모의 영향을 받아 마법과 오컬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학생 시절, 윌리엄은 뉴멕시코에 있는 로스 알라모스 랜치 학교에 다녔다. 알라모스 학교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부자들의 교활한 아들들이 남자적인 표본으로 변모할 수 있는", 부자들을 위한 기숙 학교였다. 윌리엄은 당시 한 남학우에 대한 에로틱한 애착을 기록한 일기를 쓰기도 했는데, 즉 그가 어렸을 때부터 동성애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나중에 그 일기를 전부 파괴하고 몹시 부끄러워 했다.

윌리엄은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성적 지향을 가족으로부터 잘 숨겼다. 그는 친구와 함께 산타페에서 클로랄 하이드레이트를 복용한 후 학교에서 추방되었다.(본인의 말로는 자발적으로 떠난 것이라고도 한다.)

2.2. 하버드 대학 시기

윌리엄은 1932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입학하며 세인트 루이스의 집을 떠난다.

하버드에 다니며 그는 뉴욕으로 여행을 다녔고, 그곳에서 소위 게이 하위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부유하고 방탕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레즈비언 다이빙, 피아노 바, 할렘과 그리니치 빌리지의 동성애 언더그라운드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는 1936년에 하버드를 졸업했다.

윌리엄의 부모님은 그가 졸업한 후 월 200달러의 생활비를 주기로 결정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으며, 그는 그때부터 약 25년 동안 부모의 생활비 지원을 받으며 살았다.[3]

2.3. 유럽 시기

하버드를 졸업한 후 그는 콜럼비아[4]의 인류학 대학원을 다니거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모두 금세 싫증내어 그만둔다. 그 후 유럽을 여행하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바이마르 시대의 LGBT 문화를 즐기기도 한다(비엔나의 한증탕에서 향락에 빠지거나, 망명자, 동성애자, 도망자들의 서클에 참여하는 등...) 그곳에서 그는 나치 정부를 탈출한 유대인 여성을 만났고, 그녀가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비자 발급을 돕기 위해 크로아티아에서 그녀와 결혼(혼인신고)했다. 즉 로맨스나 섹슈얼한 사랑으로 결혼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정의 마음으로 결혼한 것이다. 그들은 뉴욕으로 돌아간 이후 곧 이혼했지만, 수년 동안 친구로 남아 있었다.

윌리엄은 미국으로 돌아온 후 1939년, 당시 사랑에 빠졌던 남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왼쪽 새끼손가락의 마지막 관절을 의도적으로 절단하였다. 윌리엄의 사진들 속 왼손을 보면 새끼손가락이 뭉툭하게 짧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그의 단편 The Finger에도 녹아들어있다. 윌리엄은 이 사건때문에 부모님에 의해 정신병원에 보내지기도 한다.

2.4. 비트세대의 시작

이후 윌리엄은 미군에 입대한다. 하지만 장교가 아닌 보병으로 분류되자 결국 이전의 우울증과 정신적 불안정을 이용하여 의무 면제를 받아 제대한다. 제대 후에는 시카고로 이사하여 사설탐정, 해충구제업자[5] 등을 포함한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지낸다. 이후 그의 친구인 루시엔 카와 데이빗 캐머러가 뉴욕으로 떠나자 그 뒤를 따른다.

1944년, 윌리엄은 잭 케루악과 그의 아내 이디 파커의 아파트에서 조앤 볼머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볼머에게는 딸이 있었다.

버로스와 케루악은 데이빗 캐머러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한다. 데이빗 캐머러는 체육 교사로 일하던 시절 학생으로 처음 만난 루시엔 카에게 성애적인 욕망을 느끼고, 그때부터 루시엔을 꾸준히 스토킹하며 쫓아다녔었다. 루시엔은 데이빗과 어울려주기도 했으며 자연스레 데이빗의 친구였던 윌리엄과도 친분을 갖게 된다.[6]

1944년, 루시엔은 결국 데이빗 캐머러를 살해한 후 케루악과 윌리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윌리엄과 케루악은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심문받게 된다. 윌리엄은 아버지가 보석금을 내주어 풀려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버로스와 케루악이 1945년에 공동집필한 And the Hippos Were Boiled in Their Tanks라는 제목의 소설로 쓰이게 된다. 원고는 당시에는 출간되지 못하였으나 2008년 11월에 그로브 프레스와 펭귄 북스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사건은 2013년 영화화되기도 하였다.[7]

이 기간 동안 버로스는 여러 약물 중독자와 마약 판매상들[8]과 어울리며 모르핀을 사용하게 되고, 금세 중독된다. 부모님에게 받는 생활비로는 약값을 충당하기 힘들어졌고 또 약물 수급을 원활히 받을 수 있었기에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헤로인을 팔기도 한다. 이러한 마약 판매상 경험은 그의 첫 소설 정키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한편 이 시기에 조앤 볼머는 벤제드린에 중독되고, 윌리엄은 볼머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는다.

1946년 봄, 윌리엄은 마약 처방전을 위조한 혐의로 체포된다. 조앤 볼머는 그녀의 정신과 의사에게 버로스의 석방을 위한 보증서에 서명해 달라고 부탁하고, 조앤 덕분에 윌리엄은 감옥에서 풀려난다. 이후 조앤이 벤제드린 중독으로 정신병동에 갇히게 되자 윌리엄은 즉시 그녀의 석방을 위해 뉴욕으로 돌아와 그녀에게 청혼한다. 즉, 서로가 서로를 한 번씩 석방시킨 것이다.

그들의 결혼은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둘은 사실혼 관계였다. 그들은 바로 텍사스 뉴 와벌리로 이사했고 윌리엄은 그곳에서 농장 일을 한다[9]. 조앤은 1947년에 윌리엄과의 아들을 낳는다. 이렇게 윌리엄과 조앤, 조앤의 딸 줄리와 조앤-윌리엄 사이의 아들 윌리엄 S. 버로스 주니어까지 총 4명의 가족이 만들어진다.

1947년, 윌리엄은 켄터키 렉싱턴에서 약물 재활치료를 받는다. 1948년에 그들은 뉴올리언스로 다함께 이사한다. 재활치료가 무색하게, 윌리엄은 이사 후 금세 다시 약물에 중독된다(...)


멕시코와 남아메리카 (1950-1952)

1949년 윌리엄은 경찰에게 집 수색을 당하고, 마리화나와 각종 무기들이 발견되어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한다. 윌리엄은 재판을 피해 멕시코로 도망쳤고 조앤과 그들의 아이들은 그를 따라간다. 윌리엄은 그의 혐의의 시효 기간인 최소 5년 동안 멕시코에 머무를 계획이었다. 1950년, 윌리엄은 멕시코에 머물면서 멕시코시티 대학에서 수업에 참석하여 스페인어뿐만 아니라 메소아메리카 원고(코드)와 마야어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첫 소설인 "정키"의 집필을 시작한다. 당시 그가 붙인 제목은 정크Junk였다.

볼머의 죽음

멕시코에서의 그들의 삶은 모든 면에서 불행했다.

1951년. 윌리엄은 멕시코에서 약물 금단증상에 시달리며 다른 남자들을 쫓아다니고 구애하기 시작했다. 특히 멕시코시티 대학을 다니며 그 근처의 학생 펍에서 루이스 마커라는 어린 청년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강하게 끌림을 느껴 처절하게 구애하고 집착하게 된다. 심지어는 그 청년을 돈과 물질로 꼬셔 잠자리를 하거나 함께 야헤(환각제)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가정이 있는 놈이.... 당시의 경험은 그의 저서인 Queer에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다.

역시 벤제드린 금단증상으로 불건강한 삶을 살고 있던 조앤은 그러한 윌리엄의 행동에 분노하며 버림받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조앤은 점차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시고 윌리엄을 공개적으로 조롱하며 다니기 시작한다. 이러한 조앤의 태도와 더불어 윌리엄의 지속적인 동성애 행각으로, 둘의 관계는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밤 파티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동안, 술에 취한 윌리엄은 볼머에게 "우리의 빌헬름 텔이 행동할 시간이다"라고 말한다. 술에 잔뜩 취한데다 벤제드린 금단증상을 겪고 있던 볼머는 자신의 머리에 하이볼 잔을 얹어 총을 쏘라고 말했다. 버로스는 볼머의 머리에 총을 쏘고, 조앤은 이마에 총알을 맞아 즉시 사망한다.

사건 직후 윌리엄은 손에서 총을 떨어뜨리고 실수였다고 말한다. 추후 진술에서 윌리엄은 당시 자신이 7잔 넘는 술을 마셨고 만취했으며 아무것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말했으나, 사건 당시 함께 있었던 다른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윌리엄과 조앤은 합쳐서 두 잔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윌리엄은 감옥에서 13일을 보내고,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멕시코 변호사와 관리들에게 뇌물을 먹인다.
재판은 계속 지연되었고 그는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향후 ‘퀴어’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후 그는 결국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윌리엄은 재판 결석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고작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야헤 편지

멕시코를 떠난 후 윌리엄은 야헤라는 약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야헤는 사용자에게 텔레파시 능력을 준다고 알려진 마약이다. 그는 몇 달 동안 남아메리카를 표류했다. 이 시기의 윌리엄과 앨런 긴즈버그 사이의 편지로 구성된 책인 야헤 편지들The Yage Letters은 1963년 City Lights Books에 의해 출판되었다.

2.5. 문학 활동의 시작

윌리엄은 볼머의 죽음을 그의 인생에서 중추적인 사건으로 묘사한다. “추악한 영혼”이라 불리는 악의적인 존재가 그의 글쓰기를 자극했다고 묘사하는 등 특유의 오컬트적인 사고가 돋보이는 서술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조앤의 죽음과 이 사건이 내 글에 동기를 부여하고 공식화한 정도를 깨닫지 못했다는 끔찍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 나는 소유의 끊임없는 위협, 그리고 소유와 통제에서 벗어나야 할 끊임없는 필요성과 함께 살고 있다. 그래서 조안의 죽음은 나를 침략자, 추악한 영혼과 접촉하게 했고, 나를 평생의 투쟁으로 이끌었고, 나는 나가는 길을 쓰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소유"에 대한 이 언급을 절대적으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소유에 대한 나의 개념은 현대의 심리적 설명보다 중세 모델에 더 가깝다... 내 말은 확실한 소유 실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글은 "마법"의 한 형태로 의도되었다. 컷업 기법과 같은 방법을 통해 언어를 파괴하고, 따라서 소유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후 그는 추악한 영혼을 "독점적이고 탐욕적인 악. 추악한 악. 추악한 미국인."이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추악한 영혼을 쫓아내려는 목적으로 샤머니즘 의식에 참여했다.

그는 1945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윌리엄과 케루악이 루시엔 카와 데이빗 캐머러의 상황을 기반으로 쓴 And the Hippos Were Boiled in Their Tanks가 그 시작이었다. (윌리엄은 후에 그것을 "매우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라고 묘사했다.[10])

윌리엄은 조앤의 사망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미 첫 번째 소설 정키Junkie를 대부분 완성했었다. 그는 집필 과정에서 앨런 긴즈버그의 도움을 아주 많이 받았고 덕분에 작품을 상업적으로 성공시킬 수 있었다. 에이스 북스는 1953년에 윌리엄 리[11]라는 필명으로 해당 소설을 출판해주었고, 초판은 Junkie: Confessions of an Unredeemed Drug Addict(정키: 회복되지 않은 어느 마약 중독자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며, 나중에 Junkie로 재출판되었고, 1977년에 Junky로, 그리고 마침내 2003년에 Junky로 재출판되었다. 윌리엄은 원래 제목을 Junk로 하고 싶었으나 출판사의 요청으로 Junkie가 되었다고 밝혔다.

2.6. 해외 생활

1953년. 윌리엄은 플로리다 팜 비치에서 잠깐동안 부모님과 지내다가 뉴욕으로 가 앨런 긴즈버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때 윌리엄은 앨런에게 로맨스적으로 구애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로마로 휴가를 떠났고, 폴 볼스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탕헤르 국제구역(international zone)으로 향하기로 결정한다.

1956년까지 탕헤르는 국제구역, 즉 국가의 국경 통제 정책이 완전히 적용되지 않는 일종의 특별 경제 구역이었다. 윌리엄은 그곳에서 마약 중독자이자 동성애자로서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며 수많은 글을 쓴다.평화롭고 자유롭게 스스로를 망치기

탕헤르는 이후 그의 대표작인 네이키드 런치에 등장하는 인터존이라는 가상공간의 배경이 된다.

그는 탕헤르에서 무니리아 빌라Muniria Villa에 살며 약 4년동안 수많은 글을 집필한다. 그 글들은 Junkie의 문학 대리인이자 그의 절친인 앨런 긴즈버그에게 보내졌는데, 대부분 1989년 인터존Interzone이라는 제목의 단편집으로 출간된다. 한편 그는 이때 탕헤르에서 시각 예술가 브리온 기신을 처음 만나 친해진다.

1956년, 윌리엄은 잠깐 런던에 방문하여 덴트 박사에게 아포모르핀 치료를 받는다.

윌리엄은 집필 과정에서 마준으로 알려진 마리화나 과자와 유코돌이라고 불리는 독일산 오피오이드에 강하게 의존했고, 원고는 순서조차 알아볼 수 없게끔 뒤죽박죽이었다.

결국, 1957년에 탕헤르를 방문한 잭 케루악이 버로스가 그 글들을 네이키드 런치로 만들 수 있도록 타이핑하고, 편집하고,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그 외에도 앨런 긴즈버그, 피터 올로프스키, 앨런 안센 등이 탕헤르에 가서 윌리엄의 원고 작업 타이핑을 돕기도 하였다. 1957년은 케루악의 첫 출간 작품인 길 위에서가 발매된 해이기도 하다.


네이키드 런치

그의 앞선 작품인 정키와 퀴어는 비교적 전통적인 스타일인 반면, 네이키드 런치는 비선형 스타일에 대한 그의 첫 번째 모험이었다. 네이키드 런치가 출간된 후 윌리엄은 1959년 10월 파리의 비트 호텔Beat Hotel에서 그의 친구이자 예술가인 브리온 기싱과 컷업 기법을 발전시킨다. 컷업 기법은 쓰여진 텍스트를 말 그대로 잘라내고 재배열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만드는 우연에 기반한 문학적 기법이다.

네이키드 런치는 출판 직후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악명높은 소설이 되며 동시에 1960년대의 반문화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메리 매카시와 같은 문학 평론가들로부터도 많은 관심을 끈다. 미국에서 출판된 네이키드 런치는 여러 주에서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기소되기도 하였다. 여러 번의 재판 끝에 1966년, 매사추세츠 대법원은 마침내 그 책이 "외설적이지 않다"고 선언한다.

네이키드 런치 외설 법적 공방은, 여전히 미국에서 기소된 문학 작품, 즉 삽화나 사진을 포함하지 않고 단어로만 구성된 작품에 대한 마지막 외설 재판으로 남아 있다.


파리와 "비트 호텔"

네이키드 런치가 여전히 출판사를 찾고 있던 1959년, 윌리엄은 파리의 라틴 쿼터에 있는 황폐한 호텔로 이사했다.정치적 불안, 그가 연루된 범죄자들 등의 이유로 더 이상 탕헤르에 머무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탕헤르에서의 범죄 연루 때문에 파리에서 뒷덜미를 잡혀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가 탕헤르에서 만난 한 범죄자가 프랑스로 마약을 수입한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그가 넘긴 증거들 탓에 윌리엄까지 프랑스로 마약을 수입하는 데 연루되었다는 혐의에 몰린 것이다. 윌리엄은 아편제 수입 혐의로 파리에서 형사 고발까지 당할 처지에 놓였다. 네이키드 런치의 출판은 이러한 사건들이 진행되는 동안 동시에 이루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학가는 프랑스에서 존경받는 직업이었으며 윌리엄은 그 덕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풀려난다.

파리에서 그가 머물렀던 비트 호텔은 모든 층에 공용 화장실이 있으며 방에서 개인 요리를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유럽 스타일의 작고 허름한 하숙집 호텔이었다. 이 초라하고 저렴한 호텔은 네이키드 런치가 처음 등장한 후 몇 달 동안 그레고리 코르소, 앨런 긴즈버그, 피터 올로프스키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윌리엄은 비트 호텔에서 각종 오컬트 실험을 자행했다. 개중 하나는 한 번에 몇 시간 동안 거울을 응시함으로써 얻은 "비전"에 대한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그의 손은 촉수로 변했고, 또는 그의 전체 이미지는 어떤 이상한 존재로 변모했고, 또는 먼 장소의 환상, 또는 빠르게 변형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환상으로 변했다.”라고 묘사한 적 있다.

네이키드 런치는 윌리엄과 브리온 기싱이 본격적으로 컷업 기법을 개발해내기 전이지만, 사실상 컷업 기법의 시초였다. 당시 출판사가 윌리엄에게 인쇄용 원고 최종본을 열흘 안에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워낙 마구잡이로 취해서 글을 썼던지라 원고를 정리할 시간이 없었던 윌리엄은 결국 브리온 기싱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원고들을 순서 없이 마구잡이로 준비해서 보내버렸다. 윌리엄은 그렇게 무작위적인 방식으로 출판된 버전을 원래의 계획보다 더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원래의 계획이 있긴 했다는 건가. 네이키드 런치는 3,000달러에 판권이 팔렸고 윌리엄은 그 돈으로 마약을 구입했다.[12]


각종 예술 활동의 확장

1960년 3월, 윌리엄은 약물 중독 치료를 위해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향한다. 그는 아포모르핀 약물을 사용하여 고통 없는 헤로인 금단 치료를 주도한 유명한 영국 의사 덴트를 만나 치료받는다. 궁극적으로는 중독이 재발했지만, 치료 덕분에 한동안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런던에서 그는 작은 출판사에 작품을 출판하며 작가 생활을 이어나간다. 이후 히피와 대학생들이 그의 초기 작품을 발견하면서 점차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런던 시기에 윌리엄은 안토니 발치와 친밀하게 지냈고, 윌리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젊은 여자들을 집으로 데려와 붙어먹은 존 브래디(애칭 Dilly Boy)라는 젊은 마약상과 함께 살기도 한다.

1961년 여름, 윌리엄은 당시 어울리던 이안 섬머빌, 포트만, 안센, 긴즈버그, 올로프스키, 코르소, 브리온 기신, 보울스, 리어리 등과 함께 탕헤르에 간다. 윌리엄은 거기서 그의 첫 번째 모음집을 만들고 스크랩북을 편찬하기 시작한다.

1962년에는 에든버러에서 열린 국제 문학 컨퍼런스에 참가하였으며 마침내 네이키드 런치가 그로브 프레스에서 출판된다. 컷업 트릴로지의 두 번째 파트인 '폭발한 티켓'은 올림피아 프레스에서 출판된다. 윌리엄은 안토니 발치와 함께 단편 영화 "타워스 오픈 파이어"를 촬영하며 그의 예술 영역을 영상 분야로까지 확장하기 시작한다.

1963년 여름에는 이안 서머빌과 함께 탕헤르에서 지낸다.

1965년에는 뉴욕으로 돌아가 브리온 기신과 예술 활동에 매진한다. 그들의 합동 대표작으로는 '제3의 마음The Third Mind'이 있다.

1966년 1월, 윌리엄은 런던으로 돌아와 이안 서머빌과 함께 러쉬모어 호텔에서 생활한다. 당시 이안 서머빌은 폴 매카트니가 소유한 녹음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윌리엄도 그 스튜디오에서 녹음 실험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7월 7일, 매사추세츠 대법원은 네이키드 런치가 "외설적이지 않으므로 미국에서 판매할 수 있다"고 판결했고, 이 판결로 사실상 미국에서의 문학 검열은 폐지된다.

1967년 윌리엄은 다음 소설인 '와일드 보이즈'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어릴 적부터 오컬트와 샤먼 등에 관심이 많았던 윌리엄은 이 해에 사이언톨로지 교회에 가입하기도 했으나, 곧 탈퇴한다. 그는 사이언톨로지의 기술과 철학이 자신을 도왔고 사이언톨로지에 대한 추가 연구가 훌륭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조직 자체에 회의감을 느꼈고, 비판적인 토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환경이라고 여겨져 그만둔다고 하였다. 사이언톨로지에 대한 그의 후속 비판적인 글과 로버트 카우프만의 인사이드 사이언톨로지에 대한 그의 리뷰는 롤링 스톤 잡지의 페이지에서 버로스와 사이언톨로지 지지자들 사이의 편지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968년, 그는 여전히 런던에서 존 브래디와 함께 생활한다. 이 해에 윌리엄은 뉴욕에서 오랜 친구 잭 케루악을 만나는데, 그것이 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잭 케루악은 다음해에 과음으로 사망한다.

1969년 시나리오 형식의 소설 The Last Words of Dutch Schult가 출간된다.

1971년 뉴욕의 그로브 프레스에서 '와일드 보이즈: 죽은 자들의 책The Wild Boys: A Book of the Dead'을 출간했고, 케임브리지의 블랙무어 헤드 프레스에서 '전자 혁명The Electronic Revolution'을 출간한다.

1972년, 안토니 발치와 함께 컬러 영화 "빌과 토니 Bill and Tony"를 제작한다. 이 해에 네이키드 런치에서 이름을 따온 로스앤젤레스 출신의 록 그룹 스틸리 댄이 첫 번째 LP를 발매하기도 한다.

2.7. 미국으로 돌아가다

1974년, 헤로인 중독이 심각했던 윌리엄에게 앨런 긴즈버그가 뉴욕 시립 대학의 글쓰기 교수직을 제안한다. 그는 약물을 끊는 것에 성공하고 뉴욕으로 이사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단 한 학기만에 교수 일을 관두고, 그가 좋아하지 않는 직업 목록에 "교사"를 추가한다. 수입이 절실히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버팔로 대학교의 한 학기 15,000달러짜리 교수직을 거절하기도 한다.

그의 구세주는 21살의 서점 신입 직원이자 비트 세대의 팬이었던 젊은 청년 제임스 그라우어홀츠였다. 그들은 1974년 뉴욕에서 처음 만난다. 그라우어홀츠는 서점에서도 일했지만, 윌리엄을 위해 시간제 비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는 윌리엄이 작가로서 또 예술가로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고 안정적으로 수입을 얻으며 각종 출판 계약을 하는 것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비서 역할을 수행한다. 윌리엄은 그라우어홀츠를 통해 1975년에 유명 대중 문화 잡지 Crawdaddy의 월간 칼럼니스트가 되었으며 같은 해, 그의 마지막 트릴로지(붉은 밤 삼부작)의 첫 작품인 붉은 밤의 도시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76년, 마침내 오랜 해외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 해 윌리엄의 생일이었던 2월 5일, 그와 여러 작업을 함께 했던 친구 이안 서머빌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리고 6월, 그는 뉴욕의 어느 창문 하나 없는 대형 벙커 방으로 이사한다.

1979년, 다시 한번 헤로인에 중독된다. 아포모르핀 치료 등으로 인해 한동안 중독에서 자유로웠던 때도 있었으나,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정기적으로 헤로인 중독 상태였다. 제임스 그라우어홀츠는 자신의 일의 일부가 "윌리엄의 마약을 구하기 위해 각 도시의 "저승세계"와 거래하는 것"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편 윌리엄이 미국으로 돌아오자 그의 아들 빌리(윌리엄 버로스 주니어)가 긴즈버그의 집에 찾아오고, 버로스 부자는 오랜만에 서로를 조우한다. 그들은 1년이 넘도록 만나지 못하던 상태였다. 빌리 주니어는 1970년대에 두 편의 단편 소설을 성공적으로 출판했고, 문학 비평가들에 의해 진짜 "2세대 비트 작가"로 평가받으며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랜 기간동안 심각한 알코올 중독을 앓았고, 모두와 오래 연락을 끊고 은둔하며 불건강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몇 년동안 아버지(윌리엄)와 연락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등의 기사를 잡지에 넘기기도 했고, 탕헤르에서 그의 아버지의 친구들 중 한 명에게 14살 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버로스 부자가 연락을 끊고 사는 동안, 긴즈버그가 그를 대신하여 종종 빌리를 보살피고는 했다.

어느 날 버로스 부자와 앨런 긴즈버그 셋이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다가 빌리 주니어가 갑작스럽게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오랜 알코올 중독으로 간이 망가져 생명이 위독해진 것이다. 유일한 치료법은 당시에는 드물게 시행되던 간 이식 수술이었다. 빌리는 그 수술을 받았고, 30%의 생존 확률을 뚫고 수술에 성공한다. 윌리엄은 1976년부터 1977년까지 콜로라도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들이 추가적인 수술과 합병증을 이겨내는 것을 도왔고, 앨런 긴즈버그 역시 긴 회복 기간 동안 버로스와 그의 아들 모두를 도왔다.

그러나 1981년, 빌리는 결국 3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간 이식 수술 이후에도 술을 끊지 못해 결국 심각한 건강 합병증으로 고통받던 그는 어느 날 플로리다 고속도로 옆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긴즈버그로부터 빌리의 사망 소식을 듣던 때, 윌리엄은 뉴욕에 있었다. 같은 해에 그와 함께 생활하고 영화를 제작했던 안토니 발치 역시 런던에서 사망한다. 한편 그가 지내던 벙커의 임대료가 두 배로 뛰면서, 그는 그라우어홀츠와 함께 캔자스의 로렌스로 이사한다동거. 그해 그가 집필하던 붉은 밤의 도시들이 발매된다.

2.8. 캔자스에서의 말년

윌리엄은 1981년 캔자스 주 로렌스로 이사하여 여생을 보낸다.

1982년, 스프레이 페인트 캔을 빈 표면 앞에 놓고 산탄총으로 페인트 캔을 쏘는 독특한 페인팅 기법을 개발한다. 이는 1987년 뉴욕의 Tony Shafrazi 갤러리에서 처음 전시되었다. 잉크, 스프레이, 페인트 콜라주, 버섯과 플런저 등 특이한 물질들을 사용하여 포괄적인 시각 예술 형태.

1984년, 그는 출판사의 7개의 저작권 계약에 서명한다.

1985년, 마지막으로 탕헤르를 여행한다. 그곳에서 마지막 소설인 The Western Lands를 집필한다. 그가 아주 예전에 썼던 소설 퀴어가 마침내 출간된다.

1986년 윌리엄은 유럽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같은 해 그의 오랜 친우이자 동료인 브리온 기싱이 7월 13일 7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윌리엄은 그의 죽음에 무척 큰 타격을 받고 힘들어 한다.

1989년, 윌리엄은 구스 반 산트의 영화 Drugstore Cowboys에 마약 중독자 신부 역할로 출연한다. 그리고 수많은 시각예술 전시를 연다.

1990년, 세인트 루이스 명예의 거리에서 별 하나를 따는 영예를 얻었다.

1991년 6월, 3중 우회 수술을 받고 얼마 후 골반 골정상을 입는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친구와 자원봉사자 도우미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는 동시에 수많은 고양이들을 기르며 전세계에서 오는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정기적으로 사격을 하러 나가기도 했다.

그는 1993년 카오스 마법 조직인 타나테로스의 일루미네이트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1995년 비디오 게임 다크 아이에서 성우로 활동했으며, 여기서 그는 "애너벨 리"를 암송했다.

버로스의 마지막 촬영 공연은 아일랜드 록 밴드 U2의 "Last Night on Earth" 뮤직비디오로,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촬영되었으며, 리치 스미스가 연출했으며 소피 달도 출연했다.

1997년 4월 5일, 그의 평생의 벗이자 조력자였던 앨런 긴즈버그가 71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사망한다. 윌리엄 버로스는 그로부터 약 4개월 후인 8월 2일에 8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인은 전날 겪었던 심장마비 합병증.

그는 세인트의 벨폰테인 묘지에 있는 가족 묘에 묻혔다. 그의 무덤은 그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시워드 버로스 1세(1857-1898)의 하얀 화강암 오벨리스크 오른쪽에 있다.

3. 각종 신념과 사고방식

3.1. 정치적 신념

윌리엄이 동경한 유일한 신문 칼럼니스트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신문 체인의 우익 여론 형성자인 웨스트브룩 페글러였다. 그는 정부의 권위를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입법하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세력들의 집합체로 간주하며 자유주의관료주의적 횡포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의 전기 작가 테드 모건에 따르면, 인생을 살기 위한 그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경제계와 공유하는 신념인 자유방임주의적인 길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윌리엄은 총기 애호가였다. 소닉 유스의 보컬리스트 서스턴 무어는 버로스와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많은 총기와 탄약 잡지를 가지고 있었고, 오직 사격과 칼질에 대한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총기에 대한 애착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오리 사냥을 다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3.2. 마법신앙

윌리엄은 어린 시절부터 마법과 오컬트에 오랫동안 몰두했으며, 평생 동안 우리가 "마법의 우주"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법의 우주에는 우연이 없고 사고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그것을 발생시키기를 원하지 않는 한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과학에서는 의지가 항상 외부의 힘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하죠. 그리고 저는 그건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관점은 과학적 관점과 정반대입니다. 저는 거리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면, 그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원시인들 사이에서는 누군가가 뱀에게 물려 죽으면 그가 살해당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 "마법"이라는 단어는 혼란스러운 사고를 유발하는 경향이 있지요, 저는 "마법"과 소위 현실에 대한 마법적 해석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말해두고 싶습니다. "마법"의 근본적인 가정은, 이 우주의 주요한 동력이 "의지"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또는 어떤 존재가 의지를 가지지 않는 한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깊은 확신입니다. 저에게 이것은 마법의 관점에서 항상 명백해 보였습니다. 죽음, 질병, 사고, 전쟁, 혹은 전쟁 사고는 없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고를 일생동안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도 마법을 적극적으로 연습하고는 했는데, 연습을 통해 신비한 "비전"을 찾고, 자신을 건드린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리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그러한 마술적인 관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니는 걸 거리끼지 않았다.

버로스의 전기작가 테드 모건은 "그레이엄 그린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타락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그의 관점이었듯이, 버로스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마법의 우주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저주를 내리게 한 동기는, 그의 글의 근원이었습니다... 버로스에게는 매일의 현실 뒤에 영적 세계의 현실, 심령적 방문, 저주, 그리고 유령의 소유와 존재가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윌리엄은 꾸준히 그의 글 자체가 마법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컷업 기법을 사용할 때 특히 그러했다. "컷업은 예술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즉, 컷업을 "정치적인 전쟁, 과학적인 연구, 개인적인 치료, 마법적인 점술, 그리고 컨버전스"(conjivation)을 위해 사용했다고 말한다.

삶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는 혼돈의 마법 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IOT 모임에서 연설했고, 타나테로스의 IOT에 완전히 입문했다. 제임스 그라우어홀츠는 "윌리엄은 그의 IOT에 대한 공부와 IOT에 대한 입문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오랜 친구인 더글러스 그랜트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4. 시대별 문학 스타일

버로스의 주요 작품은 네 개의 다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날짜의 기준은 출판이 아닌 집필 시기이다.

초기 작업 (1950년대 초반)

정키, 퀴어, 야헤 편지들The Yage Letters은 1950년대 멕시코시티와 남아메리카에서 쓰여진 비교적 간단한 선형 내러티브이다. 대부분 강하게 자전적이고 진솔한 내용을 담는다.

컷업 기법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탕헤르, 파리, 런던에서 쓰여진 원고와 남아메리카에서 쓰여진 원고들. 컷업 기법과 접이식 소설이 섞여 있다. 소프트 머신The Soft Machine, 노바 익스프레스Nova Express, 폭발한 티켓The Ticket That Exploded 세 작품은 "노바 삼부작The Nova Trilogy" 또는 "컷업 삼부작The Cut-Up Trilogy"으로도 불린다. 윌리엄은 이 삼부작을 "우주 시대를 위한 신화"를 만들려는 시도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네이키드 런치는 버로스가 본격적으로 컷업 기법을 발견하기 전에 쓰였지만, 이 시기의 작품에 포함된다.

실험과 전복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반)

이 기간의 글에는 정치적 내용이 다소 증가했다. 또한 그의 활동 영역이 영화나 녹음 등 멀티미디어적으로 확장되면서 글쓰기에서의 실험적 시도 또한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쓰여진 주요 소설은 The Wild Boys와 Port of Saints이다. 이 시기에는 주로 브리온 기싱과 협력하여 기사, 단편 소설, 스크랩북 및 기타 작품을 썼다. 이 시기의 작품을 대표하는 주요 선집은 The Burroughs File, The Adding Machine 및 Exterminator이다.

붉은 밤의 도시들은 처음에는 비교적 직선적인 이야기로 쓰여졌으나 이후 독자가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을 알아서 분류할 수 있는, 사실상 무작위적인 패턴으로 편집되었다. 이 기술은 애초부터 우연으로만 구성되었던 작가의 초기 컷업 방법과는 조금 달랐다. 즉, 여전히 직선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이야기 간의 단절성은 다소 줄어든 것이다. 그의 마지막 트릴로지인 붉은 밤 3부작은 등장인물들이 인류를 개혁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가는 시간 여행적 요소를 특징으로 한다.

붉은 밤의 도시들에 대한 평은 매우 엇갈렸다.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앤서니 버지스는 "이해할 수 있는 세계관이나 신학이 부족한 소아성 판타지와 성적인 교살의 반복적인 에피소드들로 지루했다"고 말한다. 반면 J. G. 발라드와 같은 다른 비평가들은 버로스가 새로운 문학적인 "신화술"을 형성하고 있다고 평했다.

붉은 밤 3부작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붉은 밤의 도시들Cities of the Red Night, 죽은 길의 공간The Place of Dead Roads, 웨스턴 랜드The Western Lands. 그의 말년의 마지막 삼부작이다. 이 시기에는 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는 책(My Education: A Book of Dreams)을 포함하여 수많은 에세이와 많은 자서전 자료를 제작했다.

5. 여담

6. 국내 정발작



[1] 윌리엄의 이름과 같다. 윌리엄의 풀네임은 "윌리엄 시워드 버로우즈 2세"[2] 윌리엄의 형 이름이기도 하다. 즉, 윌리엄은 그의 친할아버지 이름을, 윌리엄의 형은 그의 친아버지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다.[3] 그는 50살까지 부모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4] 앨런 긴즈버그잭 케루악이 다니던 학교이기도 하다.[5] 이후 그는 해충구제업자로서의 경험을 담은 소설 Exterminator!!을 쓰기도 하였다.[6] 소위 비트세대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루시엔 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윌리엄-데이빗-루시엔 / 루시엔-케루악-이디 파커-조앤 볼머 / 루시엔-앨런 긴즈버그. 결국 세 무리 전부 루시엔을 매개로 이어지며 관계를 맺은 것이다.[7] 영화 킬 유어 달링. 해당 영화에서는 배우 벤 포스터(배우)가 윌리엄 버로스 역할을 맡았다.[8] 대표적으로는 허버트 헝크와 필 화이트 등. 허버트는 윌리엄에게 처음으로 모르핀을 놓아준 사람이기도 하다.[9] 대마초 농사를 지었다(...)[10] 다큐멘터리 What Happened to Keruac?에서[11] 리는 어머니의 성을 따온 것이다.[12] 오늘날의 가치로는 약 3만 달러에 해당[13] 루카 구아다니노동명의 영화로 영화화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