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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8:27:54

유다 복음서

기독교의 위경 및 제안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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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목차 | 위경 및 제안된 문서


1. 개요2. 발견과 공개3. 내용
3.1. 복음서의 형태로 기록된 내용3.2. 동성애적 내용에 대한 논란3.3. 카인파 = 동성애?
4. 영향5. 분류6. 가치

1. 개요


The Gospel of Judas

총 26쪽으로 구성된 외경/위경 문서로 서기 130년~170년 무렵 영지주의의 한 분파인 카인파(Cainites)가 작성했다고 추정한다. 원래 본문은 그리스어(헬라어)로 쓰였으나, 4세기 무렵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콥트어로 번역되어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이 발견되었다.

예수12사도이며 배신자인 유다 이스카리옷이 중요 인물이다.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것은 메시아로서의 완성을 위한 예수의 안배, 혹은 밀명이란 내용을 영지주의적 시점으로 서술했고, 다른 그리스도교 집단을 비난하며 자신들이 예수의 참된 계승자라고 주장한다.

2. 발견과 공개

1976년 이집트의 한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되었으며 2006년 4월 6일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의해 복원,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 동시에 공개되었다.

그리스도교계에서 신학적인 점에서 의문이 제기되곤 했던[1] "예수는 왜 이스카리옷 유다의 배신을 방관했는가?"에 대해, 초대 교회 시절 영지주의의 일부 분파가 어떠한 논리로 유다를 긍정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다. 특히 이 계열은 영지주의파 중에서도 소수였기 때문에 당시의 다양한 해석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다.

실물로 발견되기 전에도 이름은 알려져 있었다. 성 이레네우스 주교가 행한 이단 논박에서 "유다에 대한 기록(유다복음)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다."라는 식으로 언급한 기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유다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매우 대중적이었다. 예수를 높이 받드는 사람이라면 배신자를 좋게 생각하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거꾸로 유다야말로 진정한 사도라고 주장한다면 대다수 사람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영지주의파에서도 이쪽 계열은 세력이 매우 약한 계파였다. 영지주의의 기반인 발렌티누스파가 최대 계파인 시기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니 사실상 이 계파는 기존 영지주의와도 분할되는 분파 운동이다. 다수 영지주의파는 바오로의 후계를 주장했으니, 당연히 이 주장은 대다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즉, 누가 예수의 진정한 제자인가라는 논쟁에서 베드로바오로가 지지를 받았는데, 이 계파는 이들이 아닌 유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사실 후대 사가들은 카인파와 시몬 마구스 역시 모작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 만큼, 유다복음서는 카인파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 단지, 사료로서의 가치를 보자면 당시 로마 교구의 권한에 대해 신학적인 반론을 제기하는 무리가 있었다는 정도가있을 것이다.

다만 오해와는 달리, 유다복음을 지지하던 계파가 주류 신자들의 탄압을 받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카리옷 유다를 호의적으로 해석하는 공동체는 영지주의 중에서도 철저한 소수였고, 이 정도의 소수 계파도 당시 기독교에서는 탄압할 역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2] 결국 탄압을 받아 사라졌다기 보다는 신자들이 줄어들어 자연소멸한 것에 가깝다.

3. 내용

3.1. 복음서의 형태로 기록된 내용

복음서의 형태로 기록된 내용은 이러하다. 예수12사도이스카리옷 유다가 다른 사도들에 비해 훨씬 더 우위에 있다는 내용으로 종말과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거론한 뒤, 유다에게 "너는 나머지 11명을 능가할 것이다. 유다, 너는 인간의 형상을 빌려 이 땅에 온 나를 희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대화를 기록하여 유다의 배신이 예수의 지시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예수의 메시아적 완성이 유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들어있다.

사실 유다 복음서는 확실히 영지주의 문헌이 맞다. 예수12사도 중 다른 11명은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면 유독 유다만이 예수의 신비로운 가르침을 온전하게 알아들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제자들과 만나는 첫 장면에서 파스카 만찬의 감사 기도를 조롱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예수는 유대교 사제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많은 죄악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전례 자체와 사제들의 제사 행위 자체, 성찬례가 불필요하다는 반성사주의적인 입장을 담고 있다. 또 예수가 열두 사도들을 불러 천국의 비밀과 세계의 종말에 관해 언급한 것을 기록하는 도입 부분에서 유다가 다른 사도들에 비해 훨씬 더 우위에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너는 그들 모두를 능가할 것이다. 너는 인간의 형상을 빌려 이 땅에 온 나를 희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유다는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가 육신을 벗어야 부활할 수 있음을 유일하게 인식한 수제자로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 육신을 악한 것으로 보는 이분법적 시각은 당시 성행하던 영지주의 사상에 속하는 것이다.

또 유다 복음서는 유다가 예수를 고발하여 로마 제국의 병사들에게 내주는 것으로 끝난다. 부활 대목이 없는데, 그 이유는 예수가 영지주의자들이 악한 것으로 여기던 육신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영생을 얻기에 굳이 무덤에서 되살아나 승천하는 과정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당시 영지주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영지주의는 육체와 정신을 나누는 이원론으로, 인간이 어떤 직관(신비로운 지식)을 통해 육체를 벗어남으로써 신과 같은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구원을 위해서 부활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예수는 구세주로서 하늘의 참된 지식을 전하려 이 세대에 왔으며 그 목적을 이루면 거룩하고 위대한 세계로 가기 위해 육체적 모습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 구조다. 따라서 유다의 예수 배반은 예수가 자신의 목적을 이룬 뒤 거룩하고 위대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그려진 것이다.

3.2. 동성애적 내용에 대한 논란

내용 중 세마포를 두른 흰 피부를 가진 소년[3]에게 예수가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알려준다는 부분이 있어 동성애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이들은 유다복음만이 세마포를 두른 소년과 예수가 1대1 면담을 나누었다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계파가 다른 영지주의 저작에서는 마리아를 상대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유다 복음서를 쓴 계파로서는 성적인 의미 없이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신비를 논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세마포를 두른 젊은이에게 예수가 비밀 가르침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역시 위경 논란이 있는 마르코의 비밀 복음서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예수가 살린 라자로와 동일 인물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3.3. 카인파 = 동성애?

유다복음을 작성한 영지주의자가, 육체적인 탐닉과 쾌락에 대한 추구는 살아가는 요소이므로 부정할 수 없다는 의견을 표한 카인파의 인물이라면 '유다복음=동성애를 긍정하는 복음서'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유다복음을 작성한 계파가 육체적 쾌락을 긍정한 분파였다고 해도, 성적인 교합은 단지 쾌락을 맛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동성애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4. 영향

엄청난 금서로 알려진 이름값에 비해 기독교나 관련 학계에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다. 학술적인 의미에서 영지주의 사상들의 양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야 중요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최초 공개 당시 자극적인 언론 보도를 등에 업고 공개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지만 보도가 끊기자 관심이 식었다. 초대 교회에 있었던 여러 분파들이 남긴 문서들 중 하나일 뿐이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것도 아니다.

5. 분류

기독교에서는 위경으로 분류하며, 위경 중에서도 영지주의 계열 문서로 구분한다. 내용 자체가 다른 정경과 많이 다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결합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느님이자 동시에 참인간'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 제대로 된 복음서로 분류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어느 문서가 정경이냐'는 명확한 기준은 사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의 각 종파마다 입장 차이가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70인역 성경, 397년의 카르타고 공의회[4] 등에서 채택된 정경 목록을 기반으로 각 교파의 해석에 따라 몇몇 경전을 제외한 것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정경(특히 복음서)과 상당한 내용적 모순을 보이고 있는 유다복음이 정경으로 채택될 이유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물론 현재의 4대 복음서도 내부적으로는 서로 간에 모순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 내용들은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일치하는 형태를 보인다. 초기에는 필사와 구전에 상당수 의존했음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어느 정도의 모순은 있으나 맥락적으로 일치하는 4개의 문서'와 '앞의 4개 문서와는 맥락적으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소리 소문 없이 잊혀진 별개의 문서'를 같은 선상에 두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유다복음은 정경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현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불쾌하게 여길 만한 내용이 많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는 신자들이 많다. 한국내 여름 성경 학교에서는 가짜라고 일축하거나, '사탄의 성서'라며 내용 자체도 알 필요 없으니 읽지도 말라고 권고하기도 한다.

6. 가치

유다복음의 가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영지주의 계열 소수 분파의 주장을 담은 원사료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지주의는 분파가 많았고, 그중 세력 있는 분파의 주장 정도나 문서로 많이 남았다. 당연히 연구도 이런 큰 종파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소수파가 직접 남긴 문서가 영지주의 내부 연구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참고로, 영지주의 연구의 핵심은 무수히 분파가 많은 영지주의 분파별 주장을 꿰뚫는 공통점을 짚어 체계화하는 것이다. 즉 영지주의라는 말로 묶여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별개의 주장을 하는 전혀 다른 계파들을 영지주의라는 말로 묶어둔 것. 따라서 이 항목에서 서술되고 있는 계파와 대표적인 영지주의 계파인 발렌티누스주의를 '영지주의'라는 공통점으로 묶기에는 차이점이 매우 많으며, 완전히 별개의 계파라고 알고 접근하는 게 훨씬 안전하다. 그렇기에 유다복음을 가지고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이러이러했겠군'이라고 보는 것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으며, 냉정하게 말하면 이들의 주장은 초대 교회 내부에서는 엄연히 '듣보잡'에 속하던 논리이다. 단지 '유다를 으뜸으로 치는 계파도 있다' 혹은 '로마 총대주교(교황)의 수위권에 불만을 제기하던 신자들도 있다'는 정도의 의미가 이 문서에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


[1] 이 문제 자체가 뜨거운 감자 수준의 논쟁은 되지 않았다.[2] 로마 제국밀라노 칙령으로 공식적 박해를 중단한 때가 313년으로, 유다복음이 집필되었다고 추정되는 시기보다 약 200년은 후의 일이다.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기 전에도, 이미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 내에서 어느 정도 신자를 확보한 상태였기 때문에 소수 종교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유다복음의 지지층을 탄압할 정도로 세가 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주류파는 영지주의 집단과 직접 대립하는 것을 되도록 피했는데, 이들에게 원한을 사서 공권력에 고발이라도 한다면 박해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맞서기보다는 신자들을 교육하고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책을 쓰는 것에 집중하여, 귀한 식자층 신자가 영지주의 집단으로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막는 방향으로 갔다.[3] 마르코의 복음서에는 "세마포를 두른 청년이 잡혀가던 예수 가까이 왔으나 붙잡히자 세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쳤다"는 대수롭지 않은 에피소드 정도로 기록됐다. 유다복음의 저자가 마르코 복음서에 나온 이 청년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4] 카르타고 공의회를 기점으로 정경이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카르타고 공의회는 어디까지나 정경 목록을 채택한 공의회일 뿐이다. 신약 성경의 핵심이 되는 4대 복음서는 모두 AD 1세기에 쓰여졌고, 가장 늦게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 복음서도 AD 1세기 후반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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