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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7-04-07 17:34:01

유시민/대학 시절


1. 서울대 재학
1.1. 서울역 회군
2. 서울대 민간인 감금폭행 고문조작 항소 이유서

1. 서울대 재학

입학 후 농촌법학회[1]라는 서클에서 가입하게 되는데 신입생 환영회에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변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해 선배들을 당혹시켰다. 이 말은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가 남긴 말이다. 왜인가 하니, 당시 운동권의 주류사상은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하여 역사는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필연적인 발전을 겪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유시민이 이 같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기초로 하는 운동권의 중심에서 이걸 정면에서 부정했으니 당황할 수밖에. 이후에 유시민은 2009년에 쓴 《청춘의 독서》에서 당시만 해도 랑케의 《젊은이를 위한 세계사》를 읽고 랑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바람에 나왔던 무지의 소치였다고 회고했다.

그때부터 그의 토론 실력은 발군이었다고 동문들은 회자했다. 그렇게 학생운동을 시작한 후 선배들이 법정에 나와 유신헌법으로 처벌 받는 것을 목격한 후 법관의 꿈을 접는다. 그러나, 공부 못해서 법대 못 갔다는 말은 듣기 싫어서 그 당시 서울대에서 법대 못지 않은 인기 학과였고 가장 뛰어난 인재들만 간다는 경제학과를 전공한다. 이후 공업단지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에 활발히 참여하는데 이때 그를 야학으로 이끌어 준 사람이 바로 심재철.

이름이 비슷하여 친척 간이냐고 오해받을 수 있는[2]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지만 (성씨의 한자부터 다르다) 대신 중학교 대학교 2년 선후배 사이다. 대륜중-서울대 경제학과. 근데 사실 유시민은 유승민이 대학교 선배인 줄만 알았지, 중학교 선배인 줄은 몰라서 정치인이 된 뒤 만났을때 선배대접 같은거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3]

그래서 100분토론 배틀도 했었고 유승민에 대해 어떤 과거의 인연이 있단 생각을 전혀 안 했는데, 시간이 지나 중학교 동문회에서 유승민을 보게 되어 중학교 선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알고보니 한때 같은 지역(국회의원 지역구)에 살았었다고 한다.[4] 시민이 동네형 승민이 썰전 출연 당시 유시민이 "유승민 의원은 21세기 합리적 보수 성향이다"라고 하자, 전원책이 유시민에게 "유 장관이랑 유승민 의원이랑 같은 과 아닙니까?"고 했고, 유시민이 어이없어하며 "무슨 소리세요? 우리는 전혀 (정치적으로) 같은 과 아니에요."라고 반발했다가, "물론 대학은 같은 '과' 나왔는데.. (정치 성향은) 달라요."라고 하고 넘어갔다.

실제로, 유시민이 참여정부 시절 두 사람은 정치적 입장으로 대립하던 사이였다. 100분 토론에서 만났었던 두 사람 장관 시절 국정감사에서 만난 두 사람

1.1. 서울역 회군

3학년 때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 된다. 이때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심재철이었다.[5]

이후에도 교내 학생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다가 군사 정권에 의해 투옥된다. 당시 민주화 운동가들을 감옥에 보내는 대신, 최전방으로 입대시켜 고생을 좀 하게 하는 이른바 녹화 사업에 의해 1980년 강제 징집되어 화천군에서 복무한 후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입대해서도 군사 정권에 의해 관심사병으로 지정되어 몇 번이고 전출과 전입을 반복하고 사상 검증이랍시고 끌고 가서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2. 서울대 민간인 감금폭행 고문조작 항소 이유서

서울대 프락치 사건 피의자 당시의 모습이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도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ㅡ 본인의 항소이유서 중에서. 자신이 민간인 감금과 조사에 가담했으며 폭행을 묵인했다고 시인하는 부분이다.

유시민의 흑역사이면서, 동시에 그의 필력을 통해 일약 유명세에 오르게 만든 사건.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학생운동권의 민간인 고문 사건)으로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를 써서 화제가 되었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역사적으로 굳어진 사건명이지만, 프락치로 몰린 전기동 씨가 언론중재위원회의 중재 요청 등으로 일부 언론에서는 '서울대 민간인 감금폭행 고문조작' 사건으로 변경해 부르기도 한다.

사건은 그가 복학한 후인 1984년 9월 17일 있었던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창립총회(회장 경제 4학년 유시민)부터 시작된다. 총회 이후 이어진 술자리에서 한 학생이 자신이 '78학번 공법학과 출신으로 군에 강제징집되어 복학한 임신현'이라고 소개했는데, 당시 워낙 군에서 프락치를 많이 파견할 때라[6] 학생들이 수상히 여겨 조사한 결과 "나는 가짜 학생이다. 복협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보러 왔다."라는 자백을 얻어 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총 4명이 프락치로 몰렸고 폭행이 있었다.

단순한 폭행이 아니라 안기부 스타일의 고문이 행해졌다. 고문방식은 구타와 함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코에 주전자 물을 들이 부었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보던 방식인데 운동권 학생들이 평소 기관에 끌려갈 때마다 당하던 고문을 그대로 써먹은 것이다.

손현구 씨의 경우, 당시 서울대 학생들에게 자신이 프락치였음을 고백해 의혹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가짜 대학생' 노릇을 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프락치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중 하나가 전기동 씨로 앰뷸런스에 실려서 관악병원 응급실로 갈 정도로 중상이였다. 다시 말해 독재정권에 항거하시는 분들이 독재정권과 똑같은 짓을 한 것이다. 설렁탕 살돈이 부족했나?

이 사건이 서울시 경찰에 의해 '학생들이 임군을 감금, 기관원 자백케 하고 철야심문하며 구타했다."라고 발표된 것이다. 재판결과 유시민 등 3인은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후 2006년 2월 당시에 서울대 프락치 사건을 수사했던 관악서 수사과장은 앰뷸런스를 부르고 수습한 사람이 유시민이었으며, 피해자 중에는 유시민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고, 상부에서 유시민으로 엮으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 여기서 전동차 사고 사진 오른쪽에 나와 있는 기사를 보자. [7]

항소이유서는 원래는 변호사가 쓰지만 당시 사건을 담당하던 이돈명 변호사가 피고인 유시민에게 작성을 권유하여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황호택 기자가 그 항소이유서를 작은 박스 기사로 신문에다가 기재했는데, 그것으로 인해 독자들의 격려 전화가 많이 왔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는 1992년에 졸업하였고, 이후 독일로 건너가 마인츠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8] 석사 전공으로는 보건경제학을 택했고, 석사 논문은 「국제교역의 확대가 국내 임금격차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였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유시민이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된다고 하자 전기동이 자신을 프락치로 몰았던 사람이 장관이 되면 안 된다며 1인 시위를 하여 보수 언론과 한나라당에서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매우 좋아하였다. 이에 한나라당에서는 전기동을 유시민 인사청문회 증인으로 신청하였는데 거부당하자 대신 기자실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유시민에게 폭행당한 사실을 증언하라고 하자, 전기동은 "유시민은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 고 증언을 했다. 그럼 누가 폭행했냐고 묻자 "현직 한나라당 의원이자 '서울역 회군'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인 심재철 의원이 폭행에 가담했다"어? 고 증언했고, 이에 당황한 한나라당 이성구 의원이 즉시 기자 회견을 중단시키고 전기동을 돌려 보내며 이 사건은 어영부영 끝나 버렸다.

당시 전기동의 주장은 자신은 (가짜 서울대생이였지) 프락치가 아님에도 여러 사람이 자신에게 폭행을 가했고, 유시민은 폭행이 일어날 때마다 자리를 피했다가, 끝나고 나타나는 등 교묘하게 뒤에서 지시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자신을 보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폭행 가담자들에게 자신은 돌려 보내라 지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폭행을 뒤에서 조종한 자가 유시민이 확실하다는 주장이다. 다만 직접 폭행을 가한 사람은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이라고... 이 때문에 보수 언론의 관심이 급속히 냉각되어 이후 전기동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유시민의 주장과 전기동의 주장은 서로 일맥상통하며 서로 대립되는 부분이 없다. 유시민도 항소이유서를 통해 자신이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감금과 조사에 가담하였고, 폭력행위를 알면서도 방치했다고 시인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복학생 협의회에서 전기동 씨 등 가짜 대학생 4명을 적발하였다.
2. 그리고 실제로 손현구 씨 등이 프락치로 밝혀졌다.
3. 이 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이 수반되었고, 유시민은 직접 린치를 가하지 않았을 뿐 뒤에서 조정하였다.

그러나 위에 링크된 당시 관악서 수사과장 김영복의 주장은 다르다.
"임신현 씨의 경우 서울대복학생협의회 술자리에서 수상한 점이 발견돼 후배들이 당시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인 유씨에게 말했지만, 유씨는 단지 '학생과에 알아보면 되지 않겠냐'는 말만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유씨가 학교로 와 보니 이미 폭행사건이 벌어져 있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조정이 폭행과 린치 지시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폭행을 가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유시민의 선배이자 총학생회장인 심재철 현의원이라면 교묘하게 뒤에서 지시했다는 전기동의 주장은 더욱 더 설득력을 잃는다. 위에서 언급된 서울역 회군도 유시민과 이해찬의 반대를 무릅쓰고 회군을 결정한 심재철이 후배인 유시민 폭행하라고 해서 폭행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단 유시민은 학생들의 조사과정에서 폭행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위치에도 불고하고 묵인하고 방조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보여진다. 본인도 항소이유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본 피고인은 복학생 협의회의 사실상의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비폭력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소극적 의무에 부가하여 학생운동의 전체수준에서도 이 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적극적 의무 또한 완수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9월 26일 밤 전기동, 정용범 양인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신현, 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도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17대 총선의 홍보책자에서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 유공자'가 되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다가 검찰에 기소되었다. 판결 자체는 무죄가 났으나 이는 '허위사실을 기재하였지만 본인은 허위라고 생각을 안했으므로'라는 이유로 무죄가 뜬 것이다. 이 허위사실 기재로 인해 선관위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민주화운동가들이 옳은 가치를 위해 투쟁했고 항소이유서는 명문이지만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민간인에 대한 납치, 감금, 폭행을 정당하게 여긴다면 그들이 저항하던 불의를 향한 한 발걸음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항소이유서가 나온 경위나 시대상황을 감안해서 글을 읽되 잘못한 점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비판적인 독서 자세를 견지하는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당시 이른바 프락치로 인해 학생운동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피해를 감안한다면 마냥 비판만 하는 것도 옳지는 않다. 많은 학생들이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혹은 고문당하고 혹은 그로 인해 평생 회복되지 않을 상처를 강요당해야 했던 현실을 감안했을 때 당시는 사실상 전시상태라 봐야 옳았다. 군사독재라는 거대한 적과 불가능해보이는 싸움을 계속해야 했던 아직 어린 학생들의 공포와 절망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주장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다시 유시민의 재학 시절로 돌아가서, 당시 선배가 경영하는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기도 하고, 졸업 후에는 그와 친한 방송국 PD의 배려로 드라마 각본가로도 활동했는데, 앞서 서술했던 학생 운동 때문에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라 위장을 하며 '유지수'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그가 각본을 썼던 1988년에 방영한 MBC 드라마 《그것은 우리도 모른다》에서도 '극본 유지수'라고 소개되었다. 썰전에서 유지수 시절을 흑역사라고 말한 적 있다.

이후 몇 년간 언론인[9]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를 거치며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 당시 농촌문제를 고민하는 서울법대생들의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유신독재를 거쳐 서울에 주요 운동권 서클로 발전했다.본인이 책에서 촌스러운 이름이라 언급한다.[2] 종종 유시민이 출연하는 방송이나 팟캐스트에서 유승민 얘기를 할 때 다른 출연자나 진행자가 발음을 어설프게 해서 유승민을 유시민에 가깝게 불러서 유시민이 "왜 저한테 그래요"라고 농담을 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3] 아무래도 정치계에 서울대 출신이 많다보니 정치성향이 다른데 선후배로 신경쓰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느끼며 정치생활을 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4] 유승민의 아버지 유수호 의원이 대구의 국회의원이었다. 심지어 선거운동을 할 때 유시민의 본가에도 와서 유시민이 본 적도 있다고.[5]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1980년 봄이 되면서 민주화 운동은 더욱 가속화 되고 5월 15일 서울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 이날 서울역 광장에서 수만 명의 학생들이 계엄 해제 및 신군부 퇴진을 요구한다. 밤 8시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서울지역 1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은 시위를 계속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회의를 하고 결국 해산하게 되는데, 이것을 '서울역 회군'이라고 한다.[6] 유시민도 군에서 프락치 권유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말로 권유하는 게 아니라 코렁탕과 함께.[7] 여담이지만, 저 전동차 사고는 대한민국의 철도 사고 중에서 첫 전동차 사고로 알려진 휘경역 열차 사고.[8] 당시 독일 유학은 양질의 교육과 저렴한 유학 비용으로 가성비가 좋은 선택이었다. 있는 집 자식들은 도미해서 미국 대학에서 석박을 따셨겠지만...[9] 아나운서나 기자 같은 방송이 아닌 칼럼가의 부류였고, MBC의 100분 토론 사회자도 맡은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