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923년 1월 3일 |
경상북도 안동군 풍남면 하회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1] 735번지) | |
사망 | 1989년 10월 23일 (향년 66세) |
경상북도 안동군 | |
본관 | 풍산 류씨(豊山 柳氏)[2] |
학력 | 안동공립농림학교[3] (졸업) |
상훈 | 1979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2002년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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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2. 생애
1923년 1월 3일 경상북도 안동군 풍남면 하회동(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하회마을 735번지에서 아버지 유준우(柳濬佑, 1897 ~ 1954.11.29.)[4]와 어머니 구 안동 김씨(1896 ~ ?) 사이에서 3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5촌 당숙인 유인우(柳仁佑, 1885 ~ 1907.3.24.)[5]에 입양되었다. 외조부 우강(雨岡) 김호직(金浩直, 1874.7.26. ~ 1954.2.15.)은 1894년(고종 31) 식년 진사시에 3등 제697인으로 입격하였고, 외종증조부 김상종(金象鍾, 1848 ~ 1909.2.25.)·외증조부 김회종(金會鍾, 1852 ~ 1916.7.12.)과 함께 을미의병에 참여하여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인물이다. 1936년 4월 안동공립농림학교[6]에 입학하여 1941년 3월에 졸업하였고, 이후 모교의 교유(敎諭)로 부임하였다.1944년 10월 중일전쟁·태평양전쟁 등으로 인한 전시 시국에 의해 달성군 동촌면 지저동 동촌비행장의 확장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안동공립농림학교의 제8·9·10기생들이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공사 현장에서 항일 비밀결사 조선회복연구단을 조직하자, 지도교사로 추대되었다. 이들은 민족의식 고취에 머물지 않고,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일제의 관공서를 파괴하여 후방을 교란하고 연합군의 국내 상륙을 지원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또한 1945년 2월 일제 패망과 봉기를 선동하는 벽보를 붙이고, 거사가 성공할 경우 비밀리에 교류하던 안동공립농림학교와 경주공립중학교[7] 학생들로 조직된 또다른 항일 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와 연합하여 의성군으로 진출하여 대구부 대봉정[8]에서 출동하는 일본 제국 육군 경북방위군 제24부대와 결전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이후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일부 단원들이 주고받은 편지로 인해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자 계획을 연기하였고, 새로이 논의를 거쳐 이른바 일본 제국 육군 기념일인 1945년 3월 10일에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앞서 체포된 단원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단원 명단을 비롯한 조직의 실체와 거사 계획이 발각되어 3월 12일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복역하였다. 1945년 8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9] 이튿날인 8월 17일 출옥하였다.
이후 대구농과대학 강사를 거쳐 1952년 안동농림고등학교[10] 교감, 영주농업고등학교[11] 교장, 예천농업고등학교 교장, 대구농림고등학교[12] 교장을 지냈다. 1979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였다.
1989년 10월 23일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사망하였다. 200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3. 여담
[1] 인근의 광덕리와 함께 풍산 류씨(豊山 柳氏) 집성촌이다.[2] 서애(西厓) 찰방공파(察訪公派)-기목(祈睦)파 26세 시(時) 항렬.[3]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4] 자는 문현(文顯).[5] 자는 사원(士元).[6]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7] 현 경주고등학교[8] 현 대구광역시 남구 이천동[9] 1945년 8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형사사건부[10]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11] 현 영주제일고등학교[12] 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