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육종관 陸鍾寬 | |
출생 | 1893년 6월 13일 |
충청북도 옥천군 | |
사망 | 1965년 12월 26일 (향년 72세) |
서울특별시 | |
본관 | 옥천 육씨[1] |
부모 | 아버지 육용필, 어머니 이씨 |
형제자매 | 이복형 육종윤(1863년생) 이복형 육종운(1867년생) 이복형 육종면(1880년생) 이복 누나 넷째형 육종선(요절) 다섯째형 육종욱(1891년생) |
배우자 | 이경령 첩 3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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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정희의 두 번째 아내 육영수의 부친. 그리고 박정희 - 육영수 사이에서 태어난 박근혜와 박지만, 박근령, 육인순과 홍순일의 아들딸인 홍세표와 홍소자에게는 외할아버지다.2. 생애
1893년 충청북도 옥천군 능월리에서 대지주 육용필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육종관은 형들이 출향하여 출세하자, 자신은 고향에 남아 집안의 재산을 관리했다. 형인 육종윤은 소설가인 삼촌 육용정의 양자로 갔는데, 갑신정변에 가담하기도 했다. 육종윤의 아들은 육정수(1885~1949)였다.[2]그는 본처인 이경령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은 1남 3녀이지만, 본처 이경령 이외에 3명[3]의 첩으로부터 18명의 자식을 더 낳아 도합 22명(12남 10녀)의 자식을 두었다. 딸 육영수와 박정희의 결혼에 반대하여 1950년 12월에 있었던 결혼식에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육종관은 박정희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성공하여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청와대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그의 성격상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고 화해를 요청하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이후 비서실에서 대통령 인척에 대한 청탁을 방지하기 위해 형사들을 파견하여 집 근처를 감시하자 육종관은 사위놈이 자신을 감시한다고 펄쩍 뛰었으나 직접 항의할 수가 없으니 육영수의 사촌 송재관에게 형사들 좀 치워달라고 말 좀 전해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육종관은 사위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에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다만 청와대 정원과 잔디가 그렇게 좋은데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고 넌지시 말은 했다고 한다. 육영수는 이경령과 육종관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했지만 남편에게 질려버린 이경령은 거부했다.
이후 육종관은 폐암에 걸려 메디컬센터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는데 이후 1965년에 암이 악화되었다. 육영수와 홍정자가 가끔 문병을 갔고 박정희도 육영수와 함께 병문안을 왔는데, 일설에 따르면 이때 육종관은 박정희에게 "내가 부덕하여 큰 인물을 못 알아봤다."라고 사과했다고 하지만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에는 그런 내용이 없으며, 육종관은 암이 심하게 악화되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말도 할 수 없어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고 한다. 병이 돌이킬 수 없는 처지가 되어 12월 초에 아들 육인수 의원의 창성동 자택으로 옮겼고, 이미 의식을 잃은 상황에서 아내 이경령이 마지막으로 문병을 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박정희도 최후의 문병을 다녀왔다.
12월 26일 오전에 육종관은 사망했고 박정희는 12월 30일에 열린 발인식에 참석했는데, 박정희는 무표정하게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같이 갔던 이석제 총무처 장관이 둘이 화해를 못했다는 걸 직감했다고. 박정희는 하관식은 참석하지 않고 청와대로 돌아왔다. 박정희를 대신해 참석했던 이석제가 장례식이 잘 끝났다고 보고하자 박정희는 "내가 그 영감에게 밉보였어"라고 한마디 했다고 한다.
3. 여담
- 어떤 커뮤니티에서는 육종관이 친일파 거두라는 설이 돌고 있지만 근거는 하나도 없는 유언비어이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만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과 광복회에서 만든 친일파 708인 명단은 물론 민간단체에서 만든 친일인명사전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이는 육종관이 부자라는 점에서 나온 억측, 박정희의 장인이라는 데서 나온 음해도 있겠으나 육종관의 형 육종윤이 갑신정변에 참여한 거물 혁명가로 일본 정계에 지인이 많아서 일본인들이 평소 육종관에게 문안을 자주 온 것 때문으로도 추정된다.
- 아마도 그 시절에 손에 꼽을 자동차 수집벽이 있었으며 유명한 포드 T형을 비롯하여 많은 차를 수집하여 마굿간을 개조하여 거기에 보관했다. 운전수를 조수로 고용했지만 육종관이 하도 차를 좋아해서 운전수가 핸들도 못잡게 했고 늘 자신이 직접 운전했다. 운전수는 조수석에 따라타면서 타이어에 바람 넣을 때나 일하는 정도였다. 1933년 12월 7일, 동아일보에는 육종관이 직접 화물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전북 태봉산에서 우마차와 충돌해서 소가 뿔이 빠지는 부상을 입었단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 근데 기묘한 것은 충북도 경찰부에서 실시한 운전수 시험에 육종관이 합격했다는 기사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936년 12월 19일자 조선일보에 실렸다. #
무면허?? - 그외에 기계류 전반을 좋아해서 사진기, 시계, 총기까지 수집해서 장식해놨다. 일제시대에도 이미 브라우닝, 윈체스터 등 엽총만 30여정에 권총 10여정을 수집해서 일본인들에게도 자랑했는데, 6.25가 터진 후에 사방에 총기가 널리게 되자 동네 아이들에게 돈을 주고 닥치는대로 총과 탄환을 주워오게 해서 그것도 수집했다.
4. 가계
- 육종관 (1893 ~ 1965) / 이경령 (1896 ~ 1976)
- 육인순 (1914 ~ 1972) / 홍순일 (1910 ~ 1950)
- 3남 5녀 / 사위 한승수 (1939 ~ )
- 육인수 (1919 ~ 2001) / 박심자 (1925 ~ 2004)
- 3남 3녀
- 육영수 (1925 ~ 1974) / 박정희 (1917 ~ 1979)
- 박근혜 (1952 ~ )[4]
- 박근령 (1954 ~ )
- 박지만 (1958 ~ ) / 서향희 (1974 ~ )
- 박세현 (2005 ~ )
- 박정현 (2014 ~ )
- 박지현 (2015 ~ )
- 박수현 (2015 ~ )
- 육예수 (1929 ~ 2024) / 조태호 (1923 ~ 1988)
- 조○○ (1961 ~ )[5]
본처 이경령 소생 1남 3녀 외에는 나머지 자녀들의 이름과 생몰년 등은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