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윤성좌(尹聖佐), 윤용재(尹溶在) |
호 | 백암(白菴) |
본관 | 무송 윤씨[2] |
출생 | 1868년 12월 12일 |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운전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신촌마을) | |
사망 | 1941년 2월 12일 |
북만주 | |
가족 | 남동생 윤세복, 6촌 동생 윤세주 |
종교 | 대종교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20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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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대종교 교주이자 독립유공자 윤세복의 형이고, 윤세주의 6촌 형이다.
2. 생애
윤세용은 1868년 12월 12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북면 운전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신촌마을)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문·무관의 품계)를 지낸 윤희진(尹熺震)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0년 한일병합 후 동생 윤세복과 함께 조국 광복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고 1912년 1월 중화민국 봉천성 회인현(懷仁縣)[3]으로 이주했다. 그는 동생과 함께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여 애국 사상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고자 노력했고, 3.1 운동 후 박장호, 조맹선, 조병준, 전덕원 등이 유하현에서 조직한 대한독립단에 가입했다. 이후 1920년 6월에는 간부 홍주와 함께 총탄운반 작업을 하였다.
1921년, 윤세용은 제3 국제공산당 동양민족대회에 한교민단 대표로서 손서하(孫西夏)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또한 부민단·한족회 등에 가입하여 교육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참모를 맡아 손병헌·이장녕·독고욱(獨孤旭) 등과 함께 천무부장 이천민(李天民)과 부감 전덕원 등을 보필했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원으로서 현천묵·조성환 등과 함께 임명되었으나 사정이 좋지 않아 부임하지 않았으며, 1926년 10월 10일에 다시 임명되었지만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또한 1926년 봄에 참의부의 참의장(參議長)으로서 금남(琴南)·이관진(李觀鎭)·이춘(李春)·김우일(金又一)·송남형(宋南亨)·김백헌(金伯憲) 등과 함께 참의부의 체제 정비에 만전을 기하여 계속 항일 전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후 대종교 신자로서 북만주에서 포교 활동에 전념하다가 1941년 2월 12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윤세용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2000년 11월 3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