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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17:12:37

윤포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尹誧
(1063 ~ 1154)

1. 개요

고려의 문신. 개명하기 전 이름은 윤해(尹諧), 시호는 열정(烈靖). 문학과 정사, 음율에 두루 통달해 여러 업적을 남긴다.

2. 생애

8세에 부친상을, 10세에 모친상을 당해 누이에게 의지하게 된다. 일찍이 국자좨주 김근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문종 36년(1082) 남궁시에 합격한다. 이어서 선종 5년(1088) 상국 최사추최석이 주관한 진사시에 급제하며 내시로 등용된다. 선종 7년(1090) 비서교서랑에 임명되고 숙종이 즉위한 뒤에는 직사관에 임명됐다가 권(權) 직한림원으로 옮긴다.

숙종 8년(1103) 전중내급사로서 영암군에 지방관으로 나가는데 지방을 다스림이 제일 뛰어났기에 부임지에서 조정에 포장(褒狀, 칭찬하는 문서)을 보고한다. 예종 2년에 시(試) 합문지후로 임명되고 예종 7년(1112) 호부원외랑으로서 광주목의 수령으로 발령돼 잠깐 개경을 떠난다. 이듬해 예부원외랑 지다방사로 임명돼 바로 개경으로 복귀했으며 여러 번 승진을 거듭해[1] 예종 17년(1122) 예부시랑 보문각직학사 지제고에 이른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는 『정관정요』에 주석을 단 일이 있다. 인종 4년(1126) 이자겸이 정권을 장악하고 척준경이 궁궐을 방화할 때 윤포는 왕을 지켰으며 그 공적이 대사(大史)에 실린다. 이자겸 등이 실각한 뒤인 인종 5년(1127) 남궁시의 시험관이 돼 진사와 명경 백여명을 선발하게 된다. 내시 대부소경 서순, 예빈소경 겸 어사잡단 한정 등이 이 과거에서 급제한다.

인종 10년(1132) 여름 나이가 70세에 이른 윤포는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로 은퇴하는데, 윤포의 업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종 11년(1133) 왕명을 받들어 고사(古詞) 3백수를 가려서 모은 『당송악장』 한부를 바치고, 인종 24년(1146)에는 『태평광기촬요시일백수(大平廣記撮要詩一百首)』[2]를 편찬해 표와 함께 바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한다. 인종은 지주사 최유청을 윤포에게 보내 "경은 나이가 많은데도 총명함과 글 짓는 재주가 처음과 같으니 가상하고 잊을 수가 없도다."[3]라고 칭찬한다. 은퇴 후에도 여러 공을 세웠기에 이 해 12월에 검교태사 수사도 참지정사 주국에 오른다. 그 외에도 당나라 현장의 『서역기』를 바탕으로 지도 「오천축국도(五天竺國圖)」를 지어 바쳤으며, 명을 받고 온 우승선 김존중과 함께 악보(樂譜)를 자문하기도 한다.

윤포는 말년에 항상 내전(內典, 불경)을 읽었는데 인종에게 『법화경』을 헌상하기도 한다. 의종 8년(1154) 7월 16일(음력) 92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열정공(烈靖公)의 시호가 추증되고 8월 3일 개경 동쪽 법운산(法雲山) 기슭에 장사된다.

3. 가족관계

윤포의 조상은 춘주(春州) 횡천현(橫川縣) 출신이다. 윤포는 고려 개국공신 윤신복의 6대손이고 또 태조의 6대 외손이기도 하다. 증조부 윤수현은 공부상서로, 조부 윤수기는 우복야 호부상서 상장군으로, 부친 윤조명은 우복야 행형부낭중 겸 태자중사인으로 추증된다. 윤포의 외조부 검교태자첨사 유설(庾說)은 유금필의 후손이다.

부인 왕씨와 사이에서 5남 3녀를 뒀다. 셋째 아들 윤영수와 세 딸은 모두 일찍 죽는다. 윤영준과 윤영식은 과거에 급제했고 차남은 법명이 경소(警韶)로 출가해 중태사(重太師)가 된다. 막내 윤영원은 윤표묘지명이 지어진 시점(1154년)에 아직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가) 녹봉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묘지명의 찬자인 황문통(黃文通)은 이를 안타까워한다.


[1] 고려사에는 예종 11년(1116) 직보문각에 임명되고 청연각에 불려가 눈에 관한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의 이름은 개명 전인 윤해였다.[2] 직역하면 "태평광기에서 모은(撮) 중요한 시(要詩) 100수"이다.[3] 卿年高, 聰明藻思如新, 嘉歎不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