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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7 11:48:36

율리우스 가문


1. 개요2. 상세
2.1. 기원과 어원2.2. 가문의 역사와 주요 지파2.3. 가문의 전통
3. 인물

1. 개요

IVLIVS[1](Julius)

고대 로마의 유서 깊은 명문가(家)의 노멘(nomen, 성씨). 로마의 모체인 알바롱가에서 시작된 전통세습귀족(파트리키) 성씨로, 여러 지파 성씨(코그노멘) 중 카이사르가 유명하다. 7월을 의미하는 영어 July, 여러 언어의 이름들인 영어의 줄리아 Julia, 프랑스어 Juillet, 스페인어 julio, 아랍어 يوليو 등이 카이사르의 가문명 율리우스에서 유래된 것이다. 율리우스의 표기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데, 영어로는 줄리어스(Julius), 프랑스어로는 (Jules), 스페인어로는 훌리오(Julio), 이탈리아어로는 줄리오(Giulio), 포르투갈어로는 줄리우(Júlio), 폴란드어로는 율리우시(Juliusz)다. 일본에서는 ユリウス라 표기하기 때문에 유리우스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인물은 통칭 '카이사르'라고 불리는 정치가이자 군인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카이사르 이전까지는 코르넬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가문만큼 영향력이 크거나 화려한 인물들을 배출하지 못했지만 공화정 초기인 기원전 5세기에 많은 집정관을 배출했고, 공화정 후기까지 살아남아 꾸준히 법무관 등 고위 관직을 맡았다. 공화정 후기에는 카이사르 가문만이 율리우스 씨족을 실질적으로 대표하게 되었는데, 카이사르 가문은 전통적인 파트리키 귀족에 해당되는 가문이었지만 옵티마테스(원로원파)를 꾸준히 지지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포풀라레스(민중파)와도 제휴하고 개혁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다.

기원전 90년의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동맹시 전쟁의 승리를 이끈 장군이었지만 전쟁의 발발 이유였던 라틴 동맹시들의 로마 시민권을 인정하는 율리우스 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또한 군제 개혁을 이끌어 내어 로마를 위기에서 구했던 위대한 전쟁 영웅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카이사르의 고모 율리아와 결혼했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안토니우스 가문도 율리우스 가문과 인척관계에 있었다.[2]

적자가 없었던 카이사르는 유언을 통해 누이 율리아의 외손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를 입양하여 후계자로 삼았고, 이 사람은 이름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3]로 개명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 그는 거듭된 내전에서 승리한 후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5대 황제 네로까지 황위를 계승했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3대 황제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를 끝으로 단절되었다. 칼리굴라 암살 이후의 제위는 아우구스투스와 결혼, 상호 입양으로 사실상 한 가문이 된 클라우디우스 가문(정확히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내의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에 속한,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 클라우디우스 1세가 이어받았다. 이때 그는 자신의 분파 코그노멘으로 카이사르를 즉위와 함께 결합해 사용했다. 클라우디우스 1세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와 사위이자 양자 네로 역시 이런 배경 때문에 카이사르를 가문명으로 취했다.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부터 네로까지 내려온 다섯 황제와 그 가문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칭한다.

2. 상세

2.1. 기원과 어원

전설과 기록에 따르면, 율리우스 가문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아이네이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알바롱가라는 도시에서 비롯되었다.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ιουλος(ioulos)로 젊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전설에 따르면, 트로이의 후예이자 그리스 혈통이며 미의 여신 비너스에서 기원한 로마귀족처럼 보인다. 허나 고대 로마 왕정 ~ 공화정 중기부터 내려온 여러 비문들에 따르면, 율리우스 씨족 가문은 고대 로마와 라틴족의 원류인 보빌레에서 처음 시작된 라틴 혈통의 알바롱가 명문가라고 한다. 이런 역사처럼 율리우스 씨족은 상당히 긴 기간 동안 고대 로마의 정치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문중의 하나로 보인다. 기록을 보면 유력한 관직인 감찰관(켄소르), 집정관(콘술), 법무관(프라이토르)등에 여러 가문 구성원들이 당선되었다고 언급된다.

2.2. 가문의 역사와 주요 지파

율리우스 가문이 로마로 편입된 시기는 왕정 로마 제3대 국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시절인데, 이때 알바롱가가 로마에 편입되고 파괴될 때 강제 이주 후 로마귀족이 됐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 시대의 율리우스 가문 역사는 사실상 로마 자체의 역사와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율리우스 가문은 로마 건국때부터 그 역사를 함께한 파트리키의 양대 명문 코르넬리우스발레리우스, 로마와 이탈리아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씨족들인 파비우스, 만니우스, 세르기우스, 유니우스 가문, 2대 왕 누마의 아들을 시조로 시작된 칼푸르니우스 가문, 아이밀리우스 가문[4] 못지 않은 왕정 중기 이래 로마 최고의 명문귀족이었다.

이런 역사처럼 율리우스 가문은 고대 로마의 주요 파트리키 가문들인 파비우스, 유니우스, 발레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만니우스, 세르기우스, 아이밀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가문 등과 달리 주요 지파가 모두 파트리키 신분이었다. 이는 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에게 모국 알바롱가가 초토화되고 강제 편입됐지만, 율리우스 가문이 가주 루키우스 율리우스를 시작으로 일찍부터 로마 안에서 부와 권력을 누렸던 것이 컸다. 즉, 사비니족에서 귀화한 사비니-라틴계 귀족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이나 건국 초부터 합류해 평민과 귀족이 두루 섞인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유니우스, 파비우스 가문 등과 달리 로마로 올때부터 집안 전체가 알바롱가 시절 권세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율리우스 가문 중 종가집이며 가장 오래된 지파 성씨(코그노멘)인 아울루스 가문과 이 가문에서 분가 혹은 가부장 루키우스 율리우스의 아들, 형제에서 기원한 리보, 카이사르, 멘토 가문들은 모두 호민관 직에 입후보할 수 없는 전통귀족(파트리키) 신분이었다.
초기 로마 왕정부터 공화정 초기까지 율리우스 가문이 코르넬리우스, 발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파비우스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한 명문대가였던 것을 보여주는 지파 가문답게, 이 지파 가문의 역사는 곧 율리우스 가문 전체의 역사였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당연히 지파의 시조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울루스와 동명이인의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울루스, 그리고 시조의 손자인 보스피쿠스 율리우스 아울루스다. 삼대에 걸쳐 아울루스 가 사람들은 모두 집정관을 지냈고, 공화정 초기를 상징하는 대정치가였다. 이중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울루스는 기원전 489년 집정관을 지내는 동안, 공화정기 귀족이 오를 수 있는 모든 경력을 최초로 모두 경험했고, 보스피쿠스 율리우스 아울루스 역시 기원전 473년 집정관에 올랐다. 허나 보스피쿠스 율리우스 아울루스가 집정관을 맡았던 이 해, 평민들의 대표인 호민관이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따라서 보스피쿠스는 올바르고 단호한 대처를 보여줌에도, 공화정 수립 이후 로마 집정관의 권위를 실추시킨 집정관이라고 욕을 먹었다.
아울루스 가문은 기원전 352년 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울루스와 그 아들인 기원전 388년 트리부니 밀리툼 콘술라리 포테스타테[5]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아울루스를 끝으로 사실상 실권을 잃고 쇠락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후 이 가문은 혈통이 기원전 300년대경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아울루스 가문의 멸문 이후 율리우스 가문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종신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세가 기울어 몰락귀족에 가까울 정도로 위세가 현저히 꺾인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의 아들인 종신독재관 카이사르에게 적자가 없어,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를 입양해 대를 이었다. 입양으로 대를 잇게 된 양자가 바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즉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다. 허나 이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아우구스투스 역시 외동딸 율리아 외에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그 이후부터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남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의 혈육들을 입양해 가문을 존속시켰다. 이중 정식 입양되어 가문을 직접 물려받은 이가 리비아 드루실라의 장남인 2대 황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사실상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지파 귀족가문인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과 상호입양 및 결혼으로 하나의 가문이 되었다. 따라서 3대 황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암살 이후 율리우스 성씨를 사용하는 율리우스 남성이 없었음에도, 로마인들과 원로원은 카이사르 가문의 마지막 적자를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그 아들 브리타니쿠스, 양자이자 사위 네로를 마지막으로 봤다.
티베리우스 이래 아우구스투스 후손들은 이 가문에서 전통적으로 애용한 루키우스를 대신하여 네로, 드루수스, 티베리우스를 개인이름(프라이노멘)으로 널리 사용했다.

2.3. 가문의 전통

율리우스 가문은 초창기에는 프로쿨루스, 보스피쿠스, 스푸리우스를 가이우스, 루키우스와 함께 사용했다. 그렇지만 모든 지파가 전통적으로 애용한 프라이노멘(개인이름)은 가이우스, 루키우스, 섹스투스 등 3개였고, 로마인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던 초창기 3개의 프라이노멘은 보스피쿠스 율리우스 아울루스 이래로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아우구스투스 이래 카이사르 가문은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하나의 가문이 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남성들은 루키우스라는 개인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관습에 따라 루키우스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하여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 내 카이사르 집안 사람들은 가이우스, 네로, 드루수스, 티베리우스를 애용했는데, 이중 아우구스투스 일가에서 남녀 모두 애용한 이름은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였다고 한다.[6]

여담으로,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할 때 갈리아 부족의 많은 유력자들에게 '율리우스'라는 씨족명을 하사했다. 갈리아인들과 자신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동맹자들을 확보하려는 수단이었다. 그 덕분에 많은 ‘율리우스’들이 제정 시대에 활약했지만, 이들은 카이사르와 직접적인 혈연 관계는 없었다. 비록 그들 중 카이사르의 사생아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3세기 이후의 황제들이 아우구스투스 칭호와 더불어 율리우스를 칭하는 일도 있었다.

3. 인물

제정 초기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항목도 참고.

[1] 고대 로마 시대 라틴어식 표기. J와 U는 중세시대에 와서 고안된 문자로, 고대 로마 시절의 로마자 알파벳은 J, U가 없었다. 소문자(abcd~) 역시 고대 로마 시절에는 없었기에, 모두 대문자(ABCD~)로 표기했다. 초기 라틴식으론 I와 J 발음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울리우스'라고도 발음된다.[2]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어머니인 율리아 안토니아가 독재관 카이사르의 8촌이다.[3] 전통적으로 그 가문을 잇기 위해 입양된 로마인은 본래 성씨 뒤에 '-anus'를 붙여 자신이 어느 가문에서 입양되었는지 명시했다.[4] 누마의 아들에서 기원한 칼푸르니우스 가문과 달리 아이밀리우스 가문은 알바롱가의 귀족 가문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5] 직역하면 "집정관 권위를 지닌 트리부누스 밀리툼"이라는 뜻을 가진, 직책이다.[6] 여성의 경우, 드루수스의 여성형인 드루실라와 아우구스투스의 본가 성씨 여성형인 옥타비아,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정 리비우스 가문에서 시작된 리비아와 리빌라(작은 리비아)를 율리아, 클라우디아 뒤에 붙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