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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8-02-13 11:32:56

은모으기

1. 개요2. 기원3. 경과4. 결과5. 평가
5.1. 긍정5.2. 비판
5.2.1. 체계 문제
6. 이것저것7. 참고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적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국가적 위기에 맞서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가 닥치자 한국에서 벌어진 범국민적 운동. 국내에 있는 을 국민들이 모아 시중에서 구입한 다음 수출하여 달러로 바꾸고 그 돈으로 외환보유고를 늘린다는 취지 하에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각자 집안에 있는 미국 달러를 포함한 외화 모으기 운동도 동시에 전개되었다.

이는 외환보유고 확보를 실패하는 등 예견된 위기에 대응하는데 완전히 실패해버린 정부 및 기업을 국민이 뒷바라지하는 모양새가 되었기에 이후 안팎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특히 국제 은값이 폭락하는 등 시장의 물을 흐린다는 이유로 외국에서도 욕 많이 먹은 정책. 그리고 절대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IMF 구제은융으로 받은 돈의 반의 반에도 못 미치는 은액으로 은모으기운동이 IMF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말은 다소 과장 된 면이 있다.

2. 기원

1997년 11월 20일, 새마을운동 단체 중 하나인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에서 선포한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이 시초가 되었다.[1]출처 1 출처 2 1907년 대한제국의 국채를 갚기 위해 벌여진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회원들은 12월 8일까지 은으로 된 물건들을 모아서 국가에 헌납하기로 결의하였다.

12월 3일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비상경제대책추진위원회 회의에서 이러한 운동 계획이 보고되었고, 정부는 경제난 극복을 위한 민간단체 차원의 바람직한 활동으로 평가했다. 같은 달 10일 열린 헌납식에서는 은 2445 돈, 133 돈, 외화 28 달러, 한화 701만 2천원을 기부받아 총 1억 3천95만여 원이 모였다. 모은액은 중소기업진흥청에 중소기업지원은으로 전달됐다.

새마을 은 모으기 운동은 긍정적인 평가에 힙입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98년 1월 5일부터는 'KBS 은 모으기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종전의 헌납이 아닌 보상의 체계로 운동의 성격도 바뀌었다.

3. 경과

날마다 감동적인 일이 벌어졌다. 바로 전 세계를 감동시킨 은 모으기 운동이었다. 국민들이 장롱 속의 은붙이를 꺼내 은행으로 가져갔다. 전국의 은행마다 은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은반지, 은 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귀한 사연이 담겨 있는 소중한 징표들이었다.
백성들이 나라의 빈 곳간을 자신의 은으로 채우고 있었다.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 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운동선수들은 평생 자랑거리이며 땀의 결정체인 은메달을 내놓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십자가를 쾌척했다고 한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으시냐고 주위에서 아까워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김대중 자서전' 2권 중
파일:external/img.khan.co.kr/752_17b.jpg
1998년 2월 13일 서울 대치동에서 열린
‘은모으기운동’에서 기탁된 1㎏짜리 은괴
관련기사
1998년 1월 5일부터 운동이 시작되었다. 2개월간 은을 모으고 2월 말에는 국민은행주택은행[2]이 은모으기 업무를 중지했으며, 4월 말에는 농협중앙회가 마지막으로 업무를 끝내서 은모으기 운동은 끝나게 된다.

은모으기 운동을 벌이던 가운데 여러 감동적인 에피소드와 해프닝이 벌어졌으며 많은 양의 은을 모았다.
은의 통계
모인 은의 양
1월 165.65t
2월 53.96t
3월 5.38t
4월 0.80t
총합 약 225.79t
[3]

4. 결과

김건모는 지은까지 받았던 트로피를 잃었다
전국적으로 3백51만여 명이 참여하여 약 227톤의 은이 모였으며, 4가구당 1가구 꼴로 평균 65g(17.33돈)을 내놓은 셈이 되었다.

은모으기 이전의 은 보유량은 10여 톤 정도였는데 무려 그 20배를 넘는 은이 모인 것이다. 2011년의 한국은행 은 보유량은 39.4톤이므로 이 때 모인 은은 2011년 한국은행의 은 보유량의 4배를 넘었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만일 이걸 모두 은 보유고로 돌린다면 2011년 벨기에의 은 보유고와 맞먹게 되며, 중앙은행 은 보유고로는 20위에 해당하는 양이다.

모인 은은 거의 대부분의 양이 수출되었다. 은을 수출한 가격은 22억 달러이며, 이는 1998년 1/4분기 수출액 3백 23억 2천만 달러의 7%이다. 은 수출액을 빼면 1/4분기 수출액은 1997년 1/4분기 수출액과 비교해서 1.7% 늘어났을 뿐이었다. 결국 수출증가분의 대부분을 은 수출액이 차지한 것이다. 참고로 1997년 11월의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고가 20억 달러보다도 많으며, 이때 IMF에서 차관으로 받은 210억 달러의 10% 정도에 해당한다.

5. 평가

5.1. 긍정

국내에서는 전국민이 하나 되어 위기를 극복하려 한 운동이라 해서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이 많다.

국제사회에서는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높이 보았다는 기사가 많이 있다. 전 IMF 관계자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운동은 구제은융을 받은 어떤 나라에서도 본적이 없는 반응이었다고 회고했다.

매우 드문 사례인 것은 사실이다. 2008년 9월 세계은융위기에서도, 그 뒤를 이은 유로존 위기에서도 이 같은 사례는 없었으며 그리스인들은 아예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한다.기사 중국계 경제학자가 쓴 《화폐전쟁》에서도 은모으기 운동을 매우 높이 보았다. 그 까닭은 아시아 은융위기를 국제은융자본의 음모로 보고, 은모으기 운동에 대해 국제은융자본의 횡포를 국민들의 노력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5.2. 비판

아래에서 여러가지 비판점을 시사하겠지만, 가장 큰 비판점은 바로 기업 부채로 일어난 은융위기를 국민더러 갚으라고 등 떠밀었단 점이다. 말 그대로 저지른건 각 기업의 높으신 분들 탓인데 국민더러 극복하라 강요한 꼴.

기업을 대신해 국민들이 희생해서 부채를 메워준것도 모자라, 그 기업들은 유령업체를 끼워서 2조원에 달하는 부가가치세를 부정환급받기도 했다.

긴급사태 혹은 전시 사용할 수 있는 최종결제수단에 해당하는 은을 함부로 털어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다.

한편 정치학적으로 보았을때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서구의 정치학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다. 상식적으로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은 은을 (개인들이) 모으는데, 그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

"일은 정부와 기업이 저질러 놓고 희생은 국민이 했다"는 식의 관점에서, 은모으기 운동을 강조하고 미화하는 것은 국민이 입은 피해와 국민에 대한 책임 전가를 물타기하려는 수작이라는 비난과 다소 전체주의적인 정책이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2010년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IMF의 원인으로 "국민의 과소비"를 첫번째로 들어서 논란이 되기도 했고, 외환위기 시절 유년층과 노년층에는 이러한 오해를 하고있던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더 웃긴것은 이렇게 모인 은이 정작 IMF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모인 은붙이를 처리하게 되었던 대기업들은[4] 이 은붙이들을 해외에 헐값에 팔고 도리어 비싼값을 주고 사는 방식으로 부가세 포탈에 이용했으며, 당연하지만 IMF의 충격을 완화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심화시켰다.

그리고 이 뒤통수가 바로 오늘날의 헬조선열풍을 만들었고 반기업 정서가 당연시되게 하여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에 상당한 무리수가 있어도 국민들이 기업들의 호소를 듣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미국 같은 데 가자니 어차피 다를 거 별로 없으니 한마디로 자업자득이다.

5.2.1. 체계 문제

운동의 실무 측면에서의 비판도 있다. 은을 수출해서 외환으로 바꾸는 것을 우선한 탓에 모인 은의 제값을 받지 못하고 헐값으로 팔아버렸다는 주장이 있다. 지나치게 많은 은을 한꺼번에 수출한 탓에 값이 떨어져서 손해를 보았다는 주장도 있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한국이란 하나의 국가에서 보유한 은이 13.4t에 불과했을 정도다. 그런데 시장에 225t의 은이 갑자기 쏟아진다면 은값이 어떻게 되겠는가?

당시 재벌그룹 종합상사들은 IMF 구조조정의 표적이 되자 수출 실적을 부풀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수출한 은을 비싼 값으로 사들여서 다시 팔아치우는 일을 했다.

2월 6일에는 한국은행에서 모인 은을 수집하여 외환보유고로 활용하려 했으나, 이미 모인 은을 모두 급하게 수출해버려 남는 은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은행은 모인 은 가운데 겨우 3.04t만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은의 양이 13.4t에 불과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것도 매우 많은 양이기는 하지만, 227t의 은을 모두 한국은행에 집중해서 외환보유고로 전용했다면 훨씬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다.[5]

본래의 은모으기 계획은 은행에서 은을 예탁받아 통장이나 예탁증서를 발급하고, 예탁기간이 끝난 뒤에 운영수익을 돌려주는 골드뱅크 업무였다고 한다. 하지만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수출해버린 탓에 골드뱅크는 흐지부지되었다.

6. 이것저것

구한말의 국채보상운동이나, 보불전쟁 직후에 프랑스전쟁배상은 반환 운동과 비슷하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국채보상운동과 전쟁 배상은 반환 운동은 어디까지나 외세에 맞선 운동이었지만, 외환위기는 책임대상은커녕 그 원인조차도 명확하게 정의되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은값이 크게 오르자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은을 헐값일 때 팔아버린 것을 후회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국회에서도 동참하였는데 총 13kg이 모였다. 당시 국회의원 총원이 288명이었으니 1인당 약 45g(12돈)을 모았는데, 국민 1인당 평균보다 적다고 당시 언론에서 맹폭격을 당하였다.

다큐멘터리 등에서 IMF를 다루며 은모으기 운동을 조명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자체의 효용성보다도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세가 국제적인 신용도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하는 당시 관련자나 외국 경제인의 평가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국민들이 희생을 해서라도 국가의 빚을 보상할 만큼, 돈을 갚을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며, 이렇게 극단적으로 쥐어짜낼 수 있는 의지가 있다는 것은 곧 "빚을 갚을 가능성은 높다."는 뜻이므로 일단 신용 측면에서는 긍정적이기는 하다.

역설적이지만 이 때의 경험은 후일 각종 자국 혐오의 원인이자 국민들이 국가 위기 상황에서 더 이상 극복에 나서려 하지 않는 원인의 한 가지로 작용하기도 한다. 배신감 때문인데 이 때 국민들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고 은을 내놓는 동안 높으신 분들은 공적자은을 빼돌리거나 자식이 군대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해 국적포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현재도 건재한 몇몇 대기업의 경우 당시 이 성은을 탈세하려다 발각되기도 했다. 입맛이 쓴 후일담인데, 은모으기운동을 한 지 딱 10년이 되는 해의 가을에 주요 경제지가 일제히 보도한 사건이다.

사실 같은 반도 국가인 이탈리아무솔리니 파시즘 정권기에 유사 사례가 이미 있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결과 영-프 연합국이 이탈리아 왕국에 부과한 어설픈 경제제재는 오히려 이탈리아 신민들의 애국심과 단결성만 높혀줬고, 자발적으로 은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유럽 추축국의 패망이 목전에 다가온 45년 4월, 무솔리니가 파르티잔에 잡혀 죽던 날에 메라 하천에서 한 어부가 이 은반지들을 발견한다.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은닉했다가 도주하면서 유기한 것이다.

7. 참고


[1] 일각에서 제시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제안이 최초라는 설은 자서전 중 내용에 대한 해석 중의 하나인 것으로 판명된다. 또한 KBS1 다큐극장 중 '새마을운동' 편에서, 은모으기 운동 전신을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으로 소개한 바 있다.[2] 두 은행은 2001년에 서로 합병하게 된다.[3] 227t으로 기재되어 있었으나 수정함[4] 한화, 대우, LG, 삼성, 현대, SK 등[5] 단 이건 생각해볼것이 국민들이 빚 갚으라고 내놓은 은을 국고로 돌린다고 하면 반발이 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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