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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2:24:48

김현구 임나일본부설 주장 날조 사건

이덕일 세력의 역사왜곡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 주장 '김현구 임나일본부설 주장' 날조 정조실록 기록 왜곡 해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
식민사관 주장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동북아역사재단이 독도 누락' 주장
두음법칙·한글 맞춤법 통일안
식민국어학 주장

1. 개요2. 이덕일의 주장
2.1. 김현구 교수의 논리 곡해2.2. 김현구 교수의 주장 날조2.3. 김현구 교수 개인에 대한 허위사실과 인신공격2.4. '군사원조'에 대한 논리를 결여한 해석과 날조2.5. 일본서기에 대한 김현구 교수의 실제해석
3. 이덕일 세력의 왜곡과 주장이론
3.1. '김현구가 백제가 야마토에 군사원조를 간청했다고 주장'했다는 주장3.2. '김현구가 백제가 군사원조를 받기 위해 공주,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 천황을 섬기게 했다고 주장'했다는 왜곡3.3. 천황이라는 표현을 쓰면 친일이다?3.4. 김현구는 '천황가가 백제왕가의 시조라고 주장'했다는 왜곡3.5. "김현구는 야마토에서 온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가 영산강 유역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을 했다"는 날조3.6. "김현구가 야마토왜가 식민지 백제를 통해서 임나를 경영했다고 주장"했다는 왜곡3.7. "김현구가 천황의 전범 면제 찬양을 했다"는 주장
4. 그 외 인터넷 사례
4.1. 김현구가 "일본속의 한민족사탐방"에서 임나일본부설에 가까운 주장을 했다?4.2. 통계처리를 하는 행위는 '참'이라고 주장한 행위다?4.3.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영향력을 설명하는 것은 "치켜세우는 행위"다?4.4. 진구 황후와 관련된 년도를 이주갑인상하는 것은 "일본서기를 억지로 진실"이라 주장하는 행위이다?4.5. 위사가 있는 일본서기를 사료로 쓴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이다?4.6. 김현구 교수는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말 못한다?4.7. 김현구 교수가 일본 극우세력과 같은 지도를 사용했다?4.8. 김현구는 학문의 영역을 법으로 규정지으려 한 것이다?4.9.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김현구는 임나일본부를 긍정한다?4.10.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제목 자체가 문제다?
5. 이덕일의 고의성 여부6. 요약7. 판결8. 참고문헌

1. 개요

이덕일이 '우리안의 식민사관'에서 말한 허위사실로 적어놓은 명예훼손이다. 거기다 김현구 교수를 향해 '내면이 일본인'이라는 모욕과 인신공격까지 벌인 경우이다.

실제로 김현구 교수가 처음 고발한 서울지검 이지윤 검사는 "학문의 자유및 표현의 자유보장"이란 측면과 함께 "이 소장이 자신의 분석견해와 재해석 견해를 표명한 것"이라며 불기소처분을 한 것인데 이를 다시 김현구 교수와 같이 동북아역사재단에 근무했던 서울 고검의 모검사가 기소했다고 한다.[1]

2014년엔 김현구 교수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는 날조를 저질렀다.기사참고. 사실 더 큰 문제는, 김현구 교수가 임나일본부설 비판의 선두주자라는 점이다.

'김현구는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쓴 인물이다'(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338쪽)라든가 '백제를 야마토조정의 속국이라고 주장한다(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345쪽)'는 등 책 어디에도 없는 허위 사실을 퍼트렸다. 김현구 교수는 다만 '야마토 정권은 임나와는 직접적인 교류조차 없었고, 주로 백제와 교류를 했는데, 백제와 야마토 정권과의 관계는 백제가 야마토 정권에게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야마토 정권은 백제에게 군사적인 원조를 제공하는 특수한 용병관계였다'는 주장을 했을 뿐이다.

실제 김현구 교수 책을 보면 임나일본부설과는 무관하다. 김현구 교수는 일본학자들의 임나일본부설을 객관적으로 분석한 뒤 '그것은 왜곡인데 이런 맥락에서 왜곡됐다'고 설명할 뿐이다.
위의 첫째 주장에 대해서는 설화전승일 뿐이며 위조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다수였다. 김현구 교수는 이에 적극 동의하면서도 위의 징구우 황후 당시의 설화가 실제로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의 백제부흥군 지원의 역사와 일치한다는 사료를 제시한다. 일본 학자들이 이 두 가지 기록을 놓고 각각 전쟁의 주체, 대상, 성격 면에서 비슷한 면에 기대어 사실을 왜곡했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둘째 주장에 대해서 김현구 교수는 이 책의 2장부터 5장까지를 할애해 그 논리적 모순을 밝혀낸다. 일본 학자들이 연대순으로 엮어낸 저 기록들의 허구를 밝혀내기 위해 저자는 그 기록들을 연대순으로 검토하며 그 기록 안에서 미처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을 밝혀내고 이를 토대로 그 왜곡의 실체에 접근한다.
셋째 「광개토대왕비문」의 주장에 반박하는 부분에서는 한일간의 주장들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학자적 태도가 돋보인다. 저자는 그동안 한일 학계에서 비문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391년 기록에 집중하기보다 그런 논란이 전혀 없는 연도의 기록을 택해 이를 논박한다. 결국 당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왜는 단지 지원군에 지나지 않았을 뿐, 그 주도세력은 백제였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개연성이 크다.

이덕일이 사학계 보고 식민사관, 노론사관이라 말한 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건 특정주체를 제대로 말하지 않거나 주어없음 해석 자체가 억지스러웠을뿐이지, 허위사실을 적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완벽하게 허위사실이다.

진짜 임나일본부론자는 오히려 이덕일이다.

2. 이덕일의 주장

이덕일은 김현구 교수에 대해 다음같이 주장한다.
김현구는 임나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은 사실인데, 이 임나는 백제가 지배했고, 야마토 정권은 백제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우리안의 식민사관

2.1. 김현구 교수의 논리 곡해

김현구 교수는 일본서기를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쓰에마쓰의 주장이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만큼 507~562년의 60여년 간 일본서기에 보이는 야마토 정권과 한반도 각국의 인적, 물적 교류를 살펴보면 야마토 조정과 한반도 각국의 관계는 자연히 밝혀지리라 생각한다.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김현구 교수는 스에마쓰의 주장이 정말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주장이 맞는지 그 사료를 한번 보겠다는 것이다. 해당 사료를 사실로 받아들이겠다고 한 적 없고, 이후 내용을 보면 더욱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덕일은 그걸 이렇게 곡해한다.
스에마쓰의 논리를 검토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명분이다. 일본서기가 왜곡과 과장이 많은 것은 국제적 상식인데, 스에마쓰가 그랬고,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그랬던 것 처럼 일본서기를 사실로 전제하고 논리를 펼치는 것이다. - 우리안의 식민사관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일본서기처럼 문제있는 사료라도 비판적 검토하는 것은 학계에서 흔하게 벌어진다. 김영택 박사의 5.18 민주화운동 박사학위논문만 봐도 계엄군의 기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한국 전쟁당시 국군이 벌인 민간인 학살을 연구할 때도 국군 측 기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런데 이덕일은 그런 '비판적 검토' = '사실로 전제'라는 괴상한 논리를 펼치고 있다.

2.2. 김현구 교수의 주장 날조

김현구 교수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검토해보면서 '이런 내용이 있다'는 걸 소개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507년에서 562년 사이의 기록 가운데 야마토 정권과 한반도 각국의 인적, 물적 교류를 조사해보면 신라, 고구려와는 각각 왕복 2회의 교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교류 내역을 보면 야마토 정권은 신라나 고구려에 전혀 사자를 파견하지 않은 반면 신라와 고구려는 각각 2회씩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했다. 임나와는 왕복 8회의 교류가 있었는데 그 중 야마토 정권은 3회에 걸쳐 임나에 사자를 파견한 반면 임나는 5회에 걸쳐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한 것으로 씌어있다.-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마지막 문장을 보자. 분명히 씌어있다고 나온다. '사료가 맞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료 내용은 이렇다'고 소개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런 소개를 '김현구 교수의 주장이다'고 날조를 벌였다.
김현구는 야마토 정권의 시각으로 고구려, 백제 및 임나를 본다. 야마토 정권은 신라, 고구려에 사신을 전혀 파견하지 않은 반면 신라, 고구려는 사자를 파견했다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야마타 정권이 신라, 고구려로부터 조공을 받는 상국이란 뜻이다. -우리안의 식민사관
글은 제대로 읽고 말하는건지, 아니면 정말 특정의도를 갖고 날조한건지 알 수가 없다.

또한 이덕일은 여기서 김현구 교수가 말한 파견횟수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김현구 교수는 야마토 정권이 신라, 고구려한테 조공을 받는 상국이라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명백한 날조다. 위에서는 분명 상국이 아니라 교류라 말하고 있다. 거기다 다음 내용을 보면, 이덕일의 말이 더욱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말송보화가 근거로 삼고 있는 일본서기에 의거하는 한, 야마토정권과 한반도 각국의 관계는 과거 말송보화설로 대표되던 통설처럼 임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해당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듯, 김현구 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서기를 기준으로 따져도 임나일본부설 세력의 주장은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 부분도 날조를 한다. '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됐다.'는 문장을 '야마토가 백제의 상국이다'고 말한 것으로 날조를 한 것이다.

오히려 김현구 일본서기에 왜곡이 있다고 분명히 책에 써넣었다.
일본서기 509년의 기록에 '일본현흡;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당시엔 "일본"이란 말이 없었으니 이 기록은 조작이라고 반박했다.[2] 543년 일본서기 기록에도 일본부가 등장한다. 역시 김현구 교수는 후대의 조작이라고 설명했다. [3] 544년 기록에 등장해서 임나에 활동한 일본인들도 백제 성왕의 명을 따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거로 써서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했다. -[4]

2.3. 김현구 교수 개인에 대한 허위사실과 인신공격

또한 김현구 교수의 책에는 일본 측 학자와 논쟁한 내용이 있다. 이덕일은 이 부분을 이렇게 소개했다.
일본학자 S의 이 질문에 대해서 김현구는 "『일본서기』에는 야마토 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한 예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의사도 대부분 백제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씌어 있다고 말하자 아무 말이 없었다"라고 썼다. 자신이 한일역사공동위원회에서 일본 학자의 반론을 물리친 것처럼 호도했다. …… 김현구는 임나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은 사실인데, 이 임나는 백제가 지배했고, 야마토 정권은 백제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외형도 내면도 일본인인 일본국적인 S씨와 한국인이지만 내면인 일본인인 한국 국적의 김현구 사이의 논쟁 같지도 않은 논쟁이다.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5, 344쪽.

사실 여기부터 뭔가 이덕일이 문맥을 무시한 인용을 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왜냐면 김현구 교수는 씌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현구 교수의 책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일본서기에는 야마토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한 예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의사도 대부분을 백제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씌어 있다고 말하자 아무 말이 없었다. -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보다시피 일본 측 학자의 주장을 반박해서 버로우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이다. 여기서 잘못하면 의사라는 것이 '명령 아니냐'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앞의 대목과 이 문장을 연결해서 논리적으로 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에서 일본 측 S씨는 이렇게 주장한다.
야마토 정권의 임나와의 인적, 물적 교류가 백제와의 교류에 비해 아주 미미한 것은 임나가 야마토정권의 직할지이거나 임나에는 직접 책임자를 주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김현구 교수가 말한 '의사'라는 것은 분명히 명령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그건 '교류'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교류'라는 단어 자체가 명령-복종의 관계가 아니다. '임나와 교류가 없는 것은 일본이 임나를 직접 지배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 일본 측의 주장이다. 하지만 김현구 교수는 '야마토 정권은 임나를 통해 의사를 내린 적 없다. 의사를 백제를 통해 하고 있다. 직접 지배한 적 없다'고 반박한 것이다.

또한 김현구 교수가 말한 '의사'가 명령이 아니라는 것은 해당 문장에서도 알 수 있다.
위 내용을 보면 야마토정권은 임나에 대한 의사를 전부 백제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다. 그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일본서기에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토 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기록은 거의 없고, 하나같이 백제를 통해서만 의사를 전달한다는 것은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토정권은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는 위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분명 김현구 교수는 '그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서기가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분명 아니다. 다만 그 사료를 기준으로 따져도 임나일본부설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야마토정권은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는 위치라고 말하고 있다. 야마토 정권은 신라에 '명령'을 내리는 위치는 커녕 오히려 '지원하는 위치'였을 뿐이라고 대놓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덕일의 책에선 정작 이런 내용을 무시하고 있다. 이덕일은 실제 책의 내용은 무시하고 곡해하면서, 김현구 교수를 향해 일본인이라는 모욕과 인신공격 행위를 벌인 것이다.

2.4. '군사원조'에 대한 논리를 결여한 해석과 날조

이덕일은 '군사원조'에 기본 논리가 결여된 해석을 보이고 있다.
김현구에 의해 백제는 졸지에 야마토조정에 군사 원조를 구걸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우리안의 식민사관
군사원조 = 구걸하는 신세라 해석한 것이다. 외교관계에 대한 기본적 상식도 없다. 그러나 이런 걸 떠나, 김현구 교수는 분명히 '군사구걸'이나 그런 뜻을 포함한 문장을 단 하나도 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에 반대되는 문장을 서술한다.
야마토 정권은 전후 5회에 걸쳐 한반도에 원군 내지는 인부들을 파견하고 있는데 그 특징은 전부 백제를 위해 파견했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임나 문제에 대해서도 야마토정권이 직접 임나와 관계를 맺은 흔적은 거의 없고 오히려 백제를 도와주는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씌어 있다.-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여기서 '군사구걸'이란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2.5. 일본서기에 대한 김현구 교수의 실제해석

결국 일본서기에 야마토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처럼 되어버린 것은 일본서기편자의 관계자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오해가 천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임진왜란이나 한일강제병합이라는 한일 양국간의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다시 말해 임나일본부설 자체는 일본 측의 오해에서 비롯한 착각이라고 대놓고 말하고 있다. 이걸 어떻게 봐야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고 말한 것인가?

2002년에 낸 책에도 분명히 이렇게 되어 있다.
외국 교과서에서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임나일본부 문제가 생겨나게 된 과정이 제대로 알려져 한일관계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가 진실을 분명히 이해하고, 잘못된 교과서가 고쳐질 때 우리 역사에 대해서 스스로 자긍심을 갖게 되고 한국에 대한 외국의 인식도 한층 높아질 것이다. -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77쪽

3. 이덕일 세력[5]의 왜곡과 주장이론

3.1. '김현구가 백제가 야마토에 군사원조를 간청했다고 주장'했다는 주장

*고구려·백제·신라가 모두 야마토왜에게 원조를 구걸했다고 주장
“당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자국 주도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전개하고 있었다. 따라서 삼국은 모두 일본에 대해서 군사원조를 요청하거나 적어도 상대국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삼국 중에서 어느 나라를 파트너로 삼을 것인가 하는 캐스팅 보트는 일본이 쥐고 있었다(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9쪽)”

*백제가 야마토에 군사원조를 간청했다고 주장
“『일본서기』에는 507년에서 562년 사이에 백제가 야마또정권에 파견한 24회의 사자 중에서 백제의 요구가 명확히 적시되어 있는 경우는 14회라고 되어 있다. 그중에서 임나에 관한 내용은 5회이고 나머지 9회는 전부 원군이나 군수물자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당시 야마또정권과의 관계에서 백제가 일관되게 추구하던 것은 군사원조였다고 볼 수 있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142~143쪽)”

보다시피 요청이라고 쓰여있는데 간청이라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 저런 요청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나? 이 논리에 따르면 미국은 여러나라가 지배하는 괴뢰국이 된다. 미국은 군사원조 요청한 게 한 두번이 아닌데, 누구도 미국영국부설 이나 미국한국부설 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논리적으로 이런 게 성립될 수가 없으니깐.

김현구도 이점을 대놓고 말했다.
"야마또정권과 신라나 고구려의 교류는 각각 왕복 2회에 그쳤고, 임나와의 교류도 왕복 8회에 그친 반면 백제와는 왕복 39회에 이르고 있어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와의 교류는 그 내용도 대부분 우호적인 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스에마쯔가 근거로 삼는 『일본서기』에 의하는 한 적어도 야마또 정권이 임나를 근거지로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다는 설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33
"적어도 『일본서기』에 의한다면 케이따이천황(재위 507~31)이 등장하는 507년에서 임나가 멸망하는 562년 사이의야마또정권과 한반도 각국과의 관계는 일본 학계가 주장하는 것 처럼 임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백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백제와의 관계는 특수한 용병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48

3.2. '김현구가 백제가 군사원조를 받기 위해 공주,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 천황을 섬기게 했다고 주장'했다는 왜곡

*백제가 군사원조를 받기 위해 공주,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 천황을 섬기게 했다고 주장
①“한편 「웅략기(󰡔일본서기󰡕)」 5년(461)조에 의하면 왕녀들 대신으로 파견되기 시작한 곤지도 도일 목적이 천황을 섬기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의다랑(意多郞)이나 마나군(麻那君)·사아군(斯我君:모두 백제 왕자들임) 등은 곤지 파견의 연장선상에서 도일하고 있다. 따라서 의다랑이나 마나군·사아군 등의 파견도 천황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 왕족들의 파견이 천황을 섬기기 위해서였다면 왕녀들의 파견 목적과 일치하게 된다(김현구, 「백제와 일본 사이의 왕실외교」, 『고대 한일관계사의 제문제』, 169쪽)”

백제가 왜에 왕족을 볼모로 보낸 것은 삼국사기에서도 나온다. 그리고 저것도 교묘한 편집이 있다.

책에서 인용한 부분의 바로 앞뒤 구절이다.
그러나, 백제 왕족들이 일본 천황을 섬기기 위해서 파견되었다는 것은 왜왕권에 대한 백제의 복속을 전제로 하고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당시 백제와 야마토 정권은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백제 왕족들이 도일한 참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고 생각된다.김현구, 고대 한일교섭사의 제문제, p.169
백제에서 파견된 왕족의 자손들이 일본에 정착하여 유력한 호족이 되었다면 그것은 장기적으로 백제와 일본과의 우호관계에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됐으리라고 생각된다.- 김현구, 고대 한일교섭사의 제문제, p.171~172
곤지의 파견은 왕녀들의 파견 연장선상에서 파견되었고, 직지의 파견 이유와도 일치한다. 그리고 음다랑이나 사마군과 사아군 등은 곤지 파견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웅략기 5년조에는 곤지의 파견이 개로왕과 일본과의 우호를 다지는 데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백제 왕족의 파견은 장기적으로 일본과의 우호를 다지는 데 있었던 셈이 된다. - 김현구, 고대 한일교섭사의 제문제, p.172

책을 제대로 인용하면 "천황을 섬기게 했다"는 주장이 없으면 오히려 대놓고 반박하고 있다.

오히려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이덕일이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드러다로 왜는 한반도 정세에 여러 차례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6년(397)에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진지를 인질로 보냈는 기사내용과, 신라본기 실성왕 1년(402) 3월에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혼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당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덕일, 교양한국사, 225

3.3. 천황이라는 표현을 쓰면 친일이다?

-김현구는 모든 책에서 천황을 반드시 천황이라고 씀.
②“그런데 「웅략기」 5년(461)조에는 옛날에는 여(女)를 보냈는데 무례하여 나라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므로 동생인 곤지, 즉 남자를 보내서 천황을 섬기게 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직지왕이 누이동생인 신제도원을 파견한 이래 461년 곤지(昆支)를 파견할 때까지는 백제의 왕녀들이 왜에 파견되는 관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제도원·적계여랑·지진원 등이 그 왕녀들에 해당되는 것이다(김현구, 「백제와 일본 사이의 왕실외교」, 『고대 한일관계사의 제문제』, 167~168쪽)”
③「천황이 “(백제 왕녀)지진원을 취하려 했는데 이시까와노따떼(石川楯)와 관계를 맺었으므로 화형에 처하였다”(김현구, 「백제와 일본 사이의 왕실외교」

천황이란 단어는 중국도 쓴다. 바이두 백과에서도 나온다. 중국도 친일국가라 할 기세 천황이란 용어가 식민사관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데 백범일지에도 천황이라고 나온다. 또한 천황을 대놓고 깐것으로 유명한 카리야 테츠일본인과 천황에서도 천황이 제목으로 쓰였다. 천황과 일본의 전쟁범죄 은폐를 지적한 박진우 교수의 책에도 "천황의 전쟁 책임- 봉인.망각과 왜곡.미화의 역사인식"이라고 제목이 쓰여있다. 책 소개도 이렇다. "1989년 천황 사후 봉인되어있던 1차 자료들이 공개됨으로써 천황이 얼마나 적극 적이고 주도적으로 전쟁지도에 관여했는지 밝히는 연구가 심화되고 있지만, 천황 의 전쟁 책임을 은폐하려는 움직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일본정부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침략전쟁과 가해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불충분하나마 ‘사죄’와 ‘반성’을 되풀이해 왔지만, 천황의 전쟁 책임은 부정하는 모순을 보인다. 이런 모순이 지속되는 한 일본의 역사인식의 근본적 문제점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식민사관인가?

원나라 칭기즈칸의 칸처럼 천황도 일본의 왕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보아야 한다는 건 해석은 학술적으로 제기된 내용이다. 이걸 옳냐아니냐는 개인의 몫이지만 이 천황이라는 용어자체는 개인적이지 식민사관과 무관하다.

3.4. 김현구는 '천황가가 백제왕가의 시조라고 주장'했다는 왜곡

①「그러나 지진원사건이 발생하자 백제에서는 461년 왕녀 대신 개로왕의 동생 곤지를 필두로 의다랑, 마나군, 사아군 등 백제 왕족들을 보내기 시작한다……야마또정권은 직지가 귀국하기에 앞서 그를 일본 여인과 혼인을 맺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동성왕이나 무령왕의 부인도 일본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백제 왕가에도 일본 천황가의 피가 수혈되기 시작한 셈이다(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186~188쪽)」
②“백제왕이 비다쯔(민달)천황의 손자라면 백제왕들이 일본천황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는 되지만 일본 천황가가 백제인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문면(文面)만으로는 천황가가 백제인이라는 결론을 끌어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 프로그램을 본 시청자들이 ‘일본 천황가는 백제인들이었던 모양’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6쪽)”

글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냥 서로 혼인해서 피가 섞였다는 주장뿐이다. 시조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다.

그러긴커녕 오히려 천황이 백제의 자손이라 주장한다.
일본서기에는 부레쯔천황이 죽고 후사가 없어서 적당한 사람을 찾다가 아버지가 16대 오오진천황의 5대손이고 어머니가 11대 스이닌천황의 7대손인 케이따이를 옹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케이따이천황 아버지의 5대조로 되어 있는 16대 오오진천황은 두 번째 왕조의 천황이고 어머니의 7대조로 되어 있는 11대 스이닌천황은 첫 번째 왕조의 천황이다. 따라서 일부 학계에서는 케이따이천황의 출신이 불분명하므로 그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모를 이전 두 왕조 천황들의 자손으로 하는 계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케이따이천황의 ‘케이따이’라는 말 자체가 새로이 왕조를 계승했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무령왕이 ‘남동생 왕’이라고 칭한 일본천황이 케이따이천황이 틀림없다면 케이따이천황이야말로 행방을 알 수 없는 곤지의 세 아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90~191

백제왕조의 시조를 왜라고 하긴 커녕 대놓고 천황의 백제의 자손이라 주장했는데 이런 구라를 친 것. 일본인과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일본인이 시조"라는 논리는, 유전학적으로 따지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괴논리다.

3.5. "김현구는 야마토에서 온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가 영산강 유역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을 했다"는 날조

*야마토에서 온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가 영산강 유역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
「그런데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가 지방장관으로 있던 차리(영산강 유역)는 전방후원형 고분이 발견되는 지역과 중복된다. 다시 말하면 전방후원형 고분이 발견되는 지역은 왜계 백제관료가 지방장관으로 배치된 지역 중에서 백제조정이 직접 장악하고 있던 지역이나 중앙에서 군을 파견하여 상주시키던 지역이 아니라 조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산강 동안 차리의 지방장관으로 있던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야말로 ‘백제중추의 왕통이 아니라 직접 왜와 교류 관계가 있던 지방수장’이라는 성격에 맞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된다(『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192쪽)」

단장취의가 끝이 없다. 교묘하게 짤린 것까지 자세히 따져보라.
더욱이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가 최초로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513년(케이타이천황 6년 4월조)으로 영산강 유역에 축조된 전방후원형 고분의 축조연대와도 잘 합치한다. 어느정도 독자성을 보유하고 있던 지역의 지방장관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왜계 지방장관들과는 달리 백제와 왜의 색체를 띈 전방후원형 고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93쪽

어느정도 독자성을 보유한 지역이니 왜 지방관이 자기출신 문화를 섞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일본이 지배했다는 주장인 것으로 왜곡한 것. 반기문UN사무총장이니 한국이 UN을 지배했다는 것만큼 망언.

김현구 교수는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73~74쪽에서도 544년 기록에 등장해서 임나에 활동한 일본인들도 백제 성왕의 명을 따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거로 써서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한 적이 있다.

그 외 제대로 인용하면 김현구 교수는 대놓고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반도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이 발견되는 5세기말에서 6세기 전반경에 걸쳐 일본열도에서도 고구려나 백제에서 기원하는 횡혈식 석실분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왜와 백제는 여러 형태로 교류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열도에 나타나는 횡혈식 석실분이나 한반도에 나타나는 전방후원형 고분은 백제와 일본의 다양한 형태의 교류 결과로 이것들을 근거로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론’이니 ‘한반도 남부경영론’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93~194쪽

그러니깐 왜가 백제를 지배했다는 것이 아니라, 백제와 왜가 서로 교류하던 상태에서 왜계 출신이 자기출신 문화를 섞었다는 것이며.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론’이니 ‘한반도 남부경영론’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고 대놓고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있다.

3.6. "김현구가 야마토왜가 식민지 백제를 통해서 임나를 경영했다고 주장"했다는 왜곡

*야마토왜가 식민지 백제를 통해서 임나를 경영했다고 주장
“임나문제에 대해서 야마토 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한 예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통해서 의사를 표시하는 예는 4회나 확인된다. (김현구, 「6세기의 한일관계」, 『고대 한일교섭사의 제문제』, 226쪽)”

단장취의다.

제대로 인용해보자.
"야마또정권과 신라나 고구려의 교류는 각각 왕복 2회에 그쳤고, 임나와의 교류도 왕복 8회에 그친 반면 백제와는 왕복 39회에 이르고 있어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와의 교류는 그 내용도 대부분 우호적인 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스에마쯔가 근거로 삼는 『일본서기』에 의하는 한 적어도 야마또 정권이 임나를 근거지로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다는 설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33
"(중략) 위 내용을 보면 야마또 정권은 임나에 대한 의사를 전부 백제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그 내용의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일본서기』에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또정권은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는 위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 136

3.7. "김현구가 천황의 전범 면제 찬양을 했다"는 주장

*천황의 전범 면제 찬양
“결국 미국은 한 일본 연구가의 연구를 바탕으로 천황을 이용하여 700만 일본군을 저항 없이 항복시킨 것이다. 그리고 공산혁명을 막고 일본으로 하여금 극동(極東)의 반공 보루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만들었다(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17쪽)”

글에서 면제를 찬양한 내용은 단 한마디도 없다. 다만 "역사가의 연구가 국가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로 소개한 것이 다이다. 저게 면제 찬양인지 알려면 그 맥락을 설명하는 문장이 있어야하는데, 그런 건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다.

2015년 10월 30일 14시에 벌인 재판에서 변호사가 '히로히토는 전범이니 처벌 받아야하죠?'라며 김현구 교수는 화를 내며[6] '당연히 처벌 받아야죠!라고 직설로 대답했다.

대화형식이 이런 식이었다.
변호사: 히로히토는 전범이니 처벌 받아야하죠?
김현구: 당연히 처벌 받아야죠!
변호사: 그런데 책에서 그런 내용 쓰셨어요?
김현구:?????[7]

대화형식은 한국논단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했던 사상검증(?)을 생각나게했다.

4. 그 외 인터넷 사례

4.1. 김현구가 "일본속의 한민족사탐방"에서 임나일본부설에 가까운 주장을 했다?

이덕일의 주장과 관계없이 김현구교수의 의견이 식민사관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예를 들어 김교수는 "(일본에서) 임나일본부라는 기구의 부정이 곧 한반도 남부에서 활약한 왜(倭)의 주체적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학계는 한반도남부 지배기구로서의 임나일본부의 부정을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남부 지배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받아들여 임나에서 활약한 왜의 자리에 가야연맹을 채워 넣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기술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야연맹을 마치 가상의 것인양 묘사하고 있다.더 나아가 "하지만 사실 『일본서기』는 차치하고 한국의 『삼국사기』나 「광개토왕릉비문」, 중국의 『송서』 왜인전 등을 보아도 왜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약한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http://tour.chosun.com/journal/index01.php 따라서 김현구에 대한 이덕일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보기 힘든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그러나 해당 문서에 나와있지만 김현구 교수는 백제에게 용병제공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건 "일본속의 한민족사탐방"에서도 나온다.
야마토 정권은 세 나라 중 백제를 파트너로 선택한다. 당시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3국 가운데 백제가 동양문화의 중심인 남조(南朝)와 빈번히 교류하면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세기 양 왕실 간의 돈독한 교류가 그 바탕이 된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백제는 불교나 유교의 경전, 한자, 의학, 약학 등의 선진문물이나 건축기술자, 와박사(瓦博士) 등의 기술자, 그리고 이마키노 데히토(今來才伎)라고 불리던, 철, 그릇, 비단, 가죽, 안장 등을 만드는 기술자들을 제공한다. 이에 대해 야마토 정권은 백제가 고구려, 신라, 가야 등과 분쟁이 있을 때마다 500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원군을 제공함으로써 양국 간에는 특수한 용병관계가 성립한다.

백제 = 선진문물 제공
왜 = 용병 제공

백제가 선진문물 제공하니깐, 왜는 용병을 제공한 것이라고 분명히 서술되어 있다. 김현구 교수가 말하는 "왜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다"는 건 백제에게 용병으로 고용된 군인들을 말한다. 단장취의(斷章取義)인 것이다.

용병이라는 말자체도 왜군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내용이다. 왜군이 어떤 활동을 했다고 가설을 세워도 용병이라고 전제하면 주체성이 부정당한다. 베트남 전쟁/한국군 문서만 봐도 용병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모욕스러운 단어로 취급한다.

4.2. 통계처리를 하는 행위는 '참'이라고 주장한 행위다?

김현구 교수는 책에서 이런 표를 쓴 적이 있다.
한반도 각국과 일본의 사절 교환(507~562년)
일본에 보낸 사절 일본이 보낸 사절
백제 25 15
임나 5 3
신라 2 0
고구려 2 0
중국 0 0
그래서 이걸 근거로 "김현구가 이 내용을 참으로 주장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너님은 김현구가 저 일본서기 통계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왜가 임나를 경영했다는 주장은 안 나와-라고 맘대로 해석하시는데, 김.현.구.가.그.렇.게.판.단.하.지.않.았.다.구.요. 그러면서 자기가 허위사실임을 주장한 일을 통계처리해서 사용하고 있으니까 모순이죠. 김현구는 "일본서기를 근거로 일본이 임나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야기"를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라고 결정했지요. 왜냐하면 임나는 백제의 경영 대상이기 때문에- 그게 이 책의 핵심 내용이죠. 그렇죠? 그리고 그 "근거"로 저 통계를 제시하는 있는거죠. 저 통계 따로, 주장 따로 투톱 공격이 아니라, 통계가 주장을 위해 활용되는 것입니다. 저 "근거=통계"가 없으면 김현구가 주장하는 내용은 그냥 지 혼자 망상에 쩔어 지껄이는 거 밖에는 안되지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사실인지 아닌지 난 모른다는 식으로 빠져나가실까봐 미리 써두는데, 만약 김현구가 일본서기 통계 내용을 사실이라고 전제했다면, 그 통계의 내용(왜가 백제에 임나 경영의 일로 명령을 하고, 사신을 보내고 등)도 사실이 되는거죠. 모순이 없으려면, 왜가 임나를 경영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내용을 부정해야 합니다(그럼 자동으로 통계 제외 처리됨). 현재는 자기 주장을 다시 근거로 활용하는 순환논리오류가 됩니다. 현재로서는 일본인들이 일본서기를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어요. "임나는 왜의 속국이었다"고 쓰인 기사 100개를 통계처리해서, "임나는 왜의 속국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이끌어 낼 수는 없지요. 그런 방식으로 뭔가 주장하고 싶으면, "임나는 왜의 속국이었다"라는 기사는 뺀 나머지를 통계처리해야 설득력이 있는거죠. 김현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현구 주장=근거없음=무효 가 되죠. - 김현구 문서 토론에서
그러나 통계처리하는 행위에는 '100% 참이다'는 뜻이 존재하지 않는다.
1 . 한데 몰아서 어림잡아 계산함.
2 . 어떤 현상을 종합적으로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일정한 체계에 따라 숫자로 나타냄. 또는 그런 것.
3 . <수학> 집단적 현상이나 수집된 자료의 내용에 관한 수량적인 기술. 대상이 되는 집단을 일정한 시점에서 파악하는 것을 정태 통계, 일정한 기간에서 파악하는 것을 동태 통계라 하며, 사회나 자연 현상을 정리ㆍ분석하는 수단으로 쓰기도 한다.네이버 사전
네이버 사전에 나온 2번 뜻에 따르면 통계란 '종합적으로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일정한 체계에 따라 숫자로 나타냄'이란 뜻이다.

그리고 김현구 교수가 이 통계를 참으로 쓴 게 아니라는 건 이 문장에서 드러난다.
"일본서기의 507년에서 562년 사이의 기록 가운데 야마토 정권과 한반도 각국의 인적˙물적 교류를 조사해보면 신라·고구려와는 각각 왕복 2회의 교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교류 내역을 보면 야마토 정권은 신라나 고구려에서 전혀 사자를 파견하지 않은 반면 신라와 고구려는 각각 2회씩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했다. 임나와는 왕복 8회의 교류가 있었는데 그중 야마토 정권은 3회에 걸쳐 임나에 사자를 파견한 반면 임나는 5화에 걸쳐 야마토 정권에 사자를 파견한 것으로 씌어 있다."-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31
(일본서기에 씌인 내용을 소개하는 문장이다.)
"야마또정권과 신라나 고구려의 교류는 각각 왕복 2회에 그쳤고, 임나와의 교류도 왕복 8회에 그친 반면 백제와는 왕복 39회에 이르고 있어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와의 교류는 그 내용도 대부분 우호적인 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스에마쯔가 근거로 삼는 『일본서기』에 의하는 한 적어도 야마또 정권이 임나를 근거지로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했다는 설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133
(해당 설의 근거로 쓰인 사료에 근거해도, 해당설은 성립할 수 없다는 문장이다.)
이 맥락으로 보면 저 통계는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일본서기 내용을 '종합적으로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숫자로 나타낸 것'일뿐이다.

4.3.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영향력을 설명하는 것은 "치켜세우는 행위"다?

김현구 교수의 책에는 이런 내용이 씌어있다.
"...그들이 한반도에 온 목적과는 전혀 다른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아라따와께, 카가와께) 가공의 인물이라는 점은 '일본 근대사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쯔다 소오끼찌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반면에 목라근자는 이때 평정한 것으로 되어 있는 가야7국..."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P48-
이걸 근거로 다음처럼 해석한 주장이 있다.
쯔다 소오끼찌(쓰다 소우키치)는 왜 점령의 임나일본부가 실재했고, 그들이 경상남도 인근에 존재했다고 주장한 일본의 역사학자다. '일본 근대 사학의 아버지'라는 소개가 문맥 상 왜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기왕 소개할 거면 '식민사학자의 수괴 중 1인'으로 소개하는 것이 더 사실에 부합한다.- 나무위키 김현구 문서 r143
"그들이(아라따와께, 카가와께) 가공의 인물이라는 점은 '일본 근대사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쯔다 소오끼찌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 아라따와께, 카가와께라는 인물이 가공인물이라는 점을 증명하고자, '일본 근대사학의 아버지' 쯔다 소오끼찌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의견을 인용했잖아요? 너님이 뭐라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김현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잖아요? '쓰다 소우키치가 맞다는 뜻으로 인용했다'는 거 증명되었죠? - 김현구 문서 토론에서
그러나 김현구 교수는 '쓰다 소우키치가 하는 말은 옳다'는 뜻으로 쓴 적이 없고, 증명을 목적으로 쓴 건 더더욱 아니다.
김현구 교수의 저 문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일본서기에서 그 내용은 (가공인물이니깐) 허구다." 그리고 보충하는 근거로 "일본근대사학의 아버지조차도 이를 지적했다"를 들은 것이다.

그러니깐 이건 "일본서기 진사[8]론"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다시말해 일본의 주장에 있는 문제점을 지적한 내용이고 그 무기로 같은 일본의 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을 인용 한 것이다. 쯔다 소오키치 란 사람의 말이 옳다거나 증명을 위해 쓴 것이 절대 아니라 일본의 주장을 같은 일본의 주장으로 반박한 것이다. 한국의 주장을 대상으로 해서 일본인의 위용을 무기로 쓴 게 아니라, 일본의 주장을 대상으로 해서 같은 일본인의 위용을 무기로 써서 반박한 것이다.

맥락을 따지면 "근대사학의 아버지"란 건 "치켜세우는 뜻"이 아니라 "일본의 어떤 주장이 틀렸다는 건, 일본에서 이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말을 근거해도 드러난다"는 뜻이다.

4.4. 진구 황후와 관련된 년도를 이주갑인상하는 것은 "일본서기를 억지로 진실"이라 주장하는 행위이다?

해당주장
해당 주장에서 생겨난 토론
이 주장의 논리를 정리하면 이렇다.
'진구 황후와 관련된 년도를 이주갑인상하는 것은 임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 '이 임의적인 해석은 "일본서기를 어떻게해서라도 사실로 만드는 것"이다. → '이것은 임나일본부설을 기다리는 행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주갑인상문서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왜국 관계자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앞당기위해 년도를 길게 끌어 올렸고, 3세기 ~ 4세기 사이의 백제 등 외국 관련 기록에선 2갑자(120년) 끌어 올려진 부분이 존재한다 것은 이미 밝혀진 것이며 그건 진구 황후라는 가상의 인물이 존재하는 시대와 관련된 것이다. 일본서기는 근초고왕의 붕어와 근구수왕의 즉위를 254년/255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는 이를 375년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약 120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하니 결국 일본서기는 120년을 앞당겼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론 여기서 120년이 앞당겨졌다는 건 "모든 사건"이라거나 "100%정확"이라는 뜻은 아니다.

김현구 교수가 이주갑인상을 해서 가설을 세운 행위는 일본서기 완전 진사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김현구 교수 본인은 "근초고왕이 벌인 정벌을 가 한 것이라고 일본서기는 조작했다."는 주장을 한다.
일본이 임나를 중심으로 백제와 신라까지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출발점이 되는 기사가 『일본서기』369년의 기록이다. 『백제기』를 원용한 369년 기록……이 기록의 요지는 일본이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7국을 평정한 다음 침미다례(강진)를 취해서 백제에게 주자, 백제왕이 영원히 일본의 서번이 될 것을 맹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일본이 임나(가야)지역을 중심으로 신라 백제까지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중에서도 이 때부터 200년 가까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가야7국에 대한 평정이 임나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야7국을 평정한 중심인물인 목라근자가 분주에는 백제의 장군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분주에서는 목라근자의 성을 알 수 없다고 했으나, 당시 백제에는 목(木)이라는 유력한 성씨가 존재했고 일본에는 '목(木)'이나 '목라(木羅)'라는 성씨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야7국을 평정한 중심인물인 목라근자는 백제 장군이 분명하다. 가야7국을 정벌한 작전을 보면, 탁순, 즉 대구에서 시작하여 가야7국을 평정하면서 한반도의 남해안을 서진한 백제장군 목라근자와 백제의 수도 한성에서 서남쪽을 향하여 남하한 근초고왕과 왕자 귀수의 군대가 고해진(강진)에서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결과 양군에 둘러싸인 형태가 된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구 마한 지역이 자연히 항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라근자와 근초고왕이 중심이 된 이 작전은 전체적으로 구 마한지역에 대한 백제의 작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야7국을 평정한 주체가 일본이라면 작전은 일본에서 도착하는 한반도의 남해안에서 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라근자가 중심이 되어서 진행한 작전은 내륙인 대구에서 출발하고 있다. 대구는 백제가 가야7국을 평정하는 집겹지는 될 수 있지만, 왜군이 가야7국을 평정하는 집결지는 될 수 없는 곳이다. 또 가야7국 평정의 주체가 일본이 아니고 백제라는 사실은 목라근자 등이 "남만 침미다례"를 취해서 백제에게 주었다는 표현으로도 알 수 있다."남만 침미다례"에서 '남만'은 '침미다례'의 방향을 표시하는 말인데, 침미다례는 백제의 입장에서 본 다면 '남만'이 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만'이 된다. 이로써 침미다례나 가야7국을 평정한 주체는 백제였음을 알 수 있다. '남만'이라는 표현은 가야7국 평정의 주체를 일본으로 바꿔 쓰면서 부주의로 남겨놓은 하느님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역사를 완벽하게 날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창비, 56~61쪽
'김현구 교수 임나일본부학자설', '김현구 교수, 일본서기 완전 진사론 학자설'을 주장하는 사람중에서 "백제의 가야정벌설이 근거가 없다"는 점을 들어 논점을 돌리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가설을 비판하는 것과, 김현구 교수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는 논점이 다른 이야기다. 6.25 전쟁 논쟁을 예로 들어보자. 정통주의자들 중에서도 "소련 모르게 김일성이 침략해서 스탈린이 당황했다"는 '소련경악설'을 주장한 사람이 있다. 이런 주장들은 소련문서 공개후엔 폐기됐다. 그러나 이 가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게 곧 이 전통주의자들이 공산주의, 스탈린주의라는 걸 뜻하는 것 아니다. "백제의 가야정벌설"이 틀렸다고 해도 그게 곧 임나일본부설 학자를 뜻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4.5. 위사가 있는 일본서기를 사료로 쓴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김현구 교수는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김현구 교수의 추측은 '백제가 한 것을 왜가 한 것으로 조작했다'는 것. 예로 '근초고왕의 정벌을 왜가 한 것으로 일본서기가 조작했다'는 주장이 책에 나오고 실제로 "완벽하게 조작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일부 조작이 있다고 해도 사료로서 쓰지 못한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일부에 조작이 있다고 사료자체를 못 쓴다면 삼국사기도 쓰지 못한다.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왕은 53년에 7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46년에 왕위를 아우 수성에게 물려주었고, 165년에 119세의 나이로 죽었고 기록에 충실하자면 태조왕의 생몰년은 46~165년이 된다. 그런데 그의 아우인 수성 즉 차대왕은 146년에 76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165년에 95세의 나이로 죽었으니, 그 생몰년은 71~165년이 된다.

왕위에 오른 차대왕은 명림답부의 쿠데타로 인하여 죽게 되었는데,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수성의 아우인 백고 즉 신대왕은 165년에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179년까지 즉위하다가 죽었다. 그에 따르자면 신대왕은 91세에 죽었으니, 그 생몰년은 88~179년이 된다. 그런데 이 백고라는 사람은 바로 위의 형인 수성과는 나이차이가 17세나 되고, 큰 형인 태조왕과는 무려 42년이나 차이가 난다. 거기에다가 신대왕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워 고구려 역사상 최초로 국상(國相)이 되었던 명림답부는 179년에 113세에 죽었으니, 그 생몰년이 67~179년이 된다. 이에 따르자면 명리답부는 165년에 이미 100세가 거의 다된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100세를 훌쩍 넘긴 172년에는 직접 기병을 이끌고 좌원에서 한의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장수왕장수왕 일까?

태조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본래 그의 아버지인 재사가 왕위를 이어야 했으나, 당시에 그의 나이가 너무 많아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들인 태조왕이 즉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늙어 왕위에 오를수도 없다는 노인이 이후로 최소 40년을 더 살면서 두 아들을 더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이왕의 수명도 매우 이상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개루왕의 아들이자 초고왕의 아우. 그런데 고이왕의 형인 초고왕의 재위시기는 166~214년. 초고왕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사반왕이 즉위하였으나, 그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고이왕이 대신 왕위에 올랐고 나서 고이왕은 234~286년까지 52년간 재위에 있었다. 만일 그가 아버지인 개루왕이 죽고 형인 초고왕이 즉위하던 해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나이는 120세를 넘어가게 된다..

비류왕의 수명도 매우 의심스러운 일면이 있다. 백제본기에 따르면 비류왕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로, 고이왕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인 책계왕과 분서왕이 연이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비류왕의 재위 기간은 304~344년에 달한다. 그런데 비류왕의 아버지인 구수왕의 재위기간은 214~234년. 만일 비류왕이 아버지 구수왕이 죽은 해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대략 110세까지 살았다는 것이 된다.

신라본기 초기기사에 보이는 왕의 수명도 문제. 그중에 하나로 유명한 예가 탈해이사금의 수명. 신라본기에 따르면 석탈해가 처음 아진포에 표착한 것은 기원전 19년이었다. 이후 석탈해는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었고, 대보의 벼슬을 거쳐 서기 57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의 나이가 당시 62세였다. 그에 따르면 석탈해가 태어난 시기는 기원전 5년이다. 그런데 그런 석탈해가 기원전 19년에 아진포에 도착했다고 하니, 그는 태어나기도 십수년 전에 아진포에 표착한 것이 된다.

탈해이사금 이후로 석씨로는 두번째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 벌휴이사금이다. 신라본기에 따르면 벌휴이사금은 탈해이사금의 손자다. 그런데 탈해이사금은 80년에 사망하였는데, 벌휴이사금이 왕위에 오른 시기는 184년이었다. 벌휴이사금인 할아버지가 사망한지 100년이 넘고 나서야 왕위에 오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석우로의 아들인 흘해이사금의 수명에도 문제가 있다. 신라본기에 따르면 석우로는 249년에 사망했다. 만일 신라본기보다 석우로 열전의 기록을 취하자면 253년에 죽었다. 그런데 흘해이사금은 310년에 즉위하여 356년에 죽었다. 만일 그가 석우로가 죽은 해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역시 100년은 넘게 산 것이 된다.

왕계의 문제는 계속된다. 예컨데 284년에 사망한 미추이사금에게는 3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은 내물이사금의 비가 되었고, 또 한 명은 실성이사금의 비가 되었다. 그런데 내물이사금과 실성이사금은 각기 402년, 417년에 사망하였으니, 장인인 미추이사금이 죽고 나서도 족히 120년은 더 살게 된 것이 된다.

거기다 일본서기처럼 비현실적인 설화는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당장 지증왕문서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일제식민학자는 이런 이유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자체를 부정했다. 그러나 한국에선 식민학자들과 달리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비판적이지만 부정하지 않는다. 노태돈 교수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부정론을 반대했다.

김현구 교수는 "일본서기의 내용은, 백제가 한 것을 왜가 한 것으로 조작한 것"이라고 가설을 세우고, 일본서기의 내용을 하나하나 인용해가며 비판한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부정론을 내걸고 나온 식민사학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 맥락인 것이다. 분명하게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는데도, 단지 일본서기를 인용했다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된다면, 같은 논리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도 인용 못 한다.

4.6. 김현구 교수는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말 못한다?

2015년 10월 30일 14시에 서부지방법원의 재판에서 변호사가 독도가 어디땅인지 물으니깐 황당해하며 "당연히 한국땅이죠!"라 화를 내며 대답했다.

변호사가 문제건 건 대중들에게 강의할 때 "독도문제는 잘 모른다."고 대답한 적이 있는 것인데, 독도문제를 잘 모른다는 것이지, 어느나라 땅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한 게 아니다! 북한문제 모르면 다 친북이라 할 기세 물론 변호사도 "김현구가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냥 오해를 할 수 있다고만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변호사가 '독도가 어느 땅이냐'고 물을 때 김현구 교수는 "당연히 한국땅이죠!"라고 화를 내며 대답했다.

4.7. 김현구 교수가 일본 극우세력과 같은 지도를 사용했다?

이후 피고 측 이덕일 소장이 증인 신문에 나섰다. 이 소장은 김현구 교수의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에 실린 지도를 놓고 문제제기를 했다. 이덕일 소장과 김현구 교수의 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덕일 소장: “증인은 ‘임나=가야’라는 일본 극우교과서의 지도와 거의 같은 지도를 왜 (책에) 10여장이나 실었나?”
김현구 교수: “앞의 얘기를 비판하며 넣어둔 지도다. 본문에 일본서기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써놨다.”
이덕일 소장: “이 지도들에 일본서기를 비판하기 위해 실은 거라고 한 번이라도 표기한 적 있나?”
김현구 교수: “책 본문에 써놨는데 또 굳이 (지도에) 주석 달아야 하나. 마르스크 비판하기 위해 마르크스 책 인용하면 마르크스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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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에마쯔설에 의하면 야마또정권이 직접 지배했다는 '임나'는 백제·신라의 통일권 내에 들어가지 않은 한반도 남부의 모든 지역으로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가야'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당시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돌에 새겨져 있으므로 대단히 신뢰성이 높다. 이 비문의 400년 기록에는 고구려군이 왜를 추적하여 '임나가야'에 이른 것으로 씌어 있다(영략 10년조). 이 경우 '임나가야'는 'ㅇㅇ가야' 중의 하나인 특정한 가야를 지칭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임나가야'의 약칭이 '임나'라는 사실도 더 이를 나위가 없다. (중략)
『일본서기』의 이와 같은 특정 내용 이외에는 어디에도 '임나'가 모든 가야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된 예가 없다. 따라서 '임나'가 원래는 특정 의미를 의미했지만 『일본서기』에서만 모든 가야를 의미하는 광의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현구 ,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18~19)
비판하기 위해 지도를 인용한 것이다.

4.8. 김현구는 학문의 영역을 법으로 규정지으려 한 것이다?

.- 악질이라고 단정지어놓고 이야기한다면 이건 편견에 지나지 않은 일방적인 의견일 뿐이다.
학자된 사람으로 김현구교수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은 학문의 영역을 법으로 규정짓고자 하는 것이다. 학자는 논문과 연구로 말해야하는데 명예훼손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공개토론이나 다른 논문으로 이에 대항해야되는 것 아닌가.-r82
김현구 교수는 학문적 영역을 고소한 게 아니라 자기가 하지않은 걸 했다고 한 것을 고소한 것이다. 학문적 외로 고소한 것이다.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한 것.[9]
거기다 법적으로 보면 말이 안 되는 주장까지 있다. "명예훼손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공개토론이나 다른 논문으로 이에 대항해야되는 것 아닌가"이다. 허위에 근거한 명예훼손이면 이미 학문적 영역이 아니라 법적인 영역인데? 학문에선 인신공격부터 문제라 비판받는데 인신공격을 넘어 허위에 근거한 학자는 학문적 영역이 아니다.

4.9.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김현구는 임나일본부를 긍정한다?

해당 사건에 대해서 "일본어 위키피디아에서도 김현구를 마치 임나일본부를 긍정하는 사람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라며 이에 대한 반박을 요구하는 글을 김현구 관련 문서에 작성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3번 항목
이 문단은 중립적 관점에 근거하여 의문이 제기되어,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치우친 관점에서 기사가 구성됐을 우려가 있습니다. 논의는 노트를 참조하세요(2009년 12월).

다분히 정치적(한국의 민족주의 문제 등)인 문제도 포함되면서, 그 실체가 어떤 것인지는 학계에서도 합의를 보지 않았다.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왜의 행선지 통치 기관이라는 견해에는 부정적이고, 이는 일본의 일부 좌파계, 재일계 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려대 교수이자 일본 고대사학자인 김현구는, 『일본서기』에는 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해서,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며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의 문화를 반출해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의 중고교 교과서에서는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의 문화가 일본에 전파되는 국제 관계는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이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이야기만을 가르치고 있으며, 게다가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의 문화를 일본에 전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서는 12세기 『삼국사기』로, 그 이전의 고대사 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 『일본서기』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이 『일본서기』를 인용하고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자 한국 학계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며, 이러한 이중 잣대 때문에 일본 학계가 한국 학계를 가볍게 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했다.

그러므로 김현구가 임나일본부를 긍정한 것이 아니냐는 답을 은근슬쩍 유도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 글의 출처이다.

첫째, 일본어 위키피디아는 한일관계사에 대한 부분은 넷우익에게 완전히 점거당하여 지독하게 왜곡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
당장 일본 위키의 임나일본부 문서 역사만 찾아봐도 임나일본부는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고 있다고 주장을하며 이 문서를 삭제하려는 시도도 보이지만 오히려 이것을 반달로 취급하고 있는 경향이 보인다. 그런 일본 위키에서조차 중립적인 서술인지에 대한 의심 틀이 달려있으니 말 다 했다.

둘째, 발언의 출처이다. 발언의 출처는 정대균이 만든 '일본의 이미지'라는 책인데, 이 정대균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해당 문서를 참고하자.

셋째, 문맥을 무시한 인용, 해당 문서는 김현구 교수가 그러한 말을 했으니, 따라서 일본서기를 무시하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임나일본부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해당 문서에서 김현구 교수의 발언이라고 적힌 내용은 개요에 불과하고, 정작 본론은 밑에 나와 있다. 해당 항목은 임나일본부의 '연구와 논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하는데, 정작 임나일본부를 일본서기를 바탕으로 반박을 한 김현구의 연구 내용을 잘라먹고 위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만 실려있다.

넷째, 해당 주장은 임나일본부에 대한 긍정이 아닌 일본서기 부정론에 대한 비판이다. 실제로 김현구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비판을 할 때 일본서기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일본서기를 통해 보더라도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일본서기를 인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냐는 주장이 있지만, 한국에 대한 역사 왜곡을 제외하고 본다면 오히려 한국에 대해 자세히 서술된 부분도 찾을 수 있으며, 일본 측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반박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위 사항을 알지 못하고 일본 측에서 임나일본부설에 긍정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이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는 것은 김현구가 임나일본부에 대한 허구성을 지적한 것을 침묵한 채 오히려 일본 넷우익의 주장에 긍정하고 김현구를 모함하는 행위이다.

4.10.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제목 자체가 문제다?

가끔 이덕일의 지지자들이 "제목 자체를 오해의 소지가 있도록 붙였기 때문에 김현구가 원인제공을 한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이미 김현구 교수 본인이 "임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주체가 일본이 아니라 백제라는 내 주장을 환기시키고자 반어법적으로 설정한 제목이다. 애시당초 일본이라는 국명 자체가 생긴 시기를 감안하면 임나일본부는 존재할 수 없다." 라고 밝힌 바 있다. 즉 반어법적 제목에 가까울 뿐, 임나일본부설 긍정 취지로 볼 수 없다.

만약 제목이 문제가 된다는 논리대로면 우리는 현진건에게 가서 "왜 《운수좋은날》이라 제목 붙여놓고 아내 죽는 결말을 해놨느냐. 이건 사기다" 라고 항의해야 마땅하며, 올더스 헉슬리에게 가서 "왜 제목을 《멋진 신세계》로 해놨느냐? 당신은 모든 인간이 인위적으로 태어나는 끔찍한 사회를 멋진 신세계로 생각하는 것인가?" 라고 항의해야 한다. 헉슬리가 정말 소설 속 세계관을 멋진 신세계로 인식해서 그러한 제목을 붙인게 아님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5. 이덕일의 고의성 여부

위의 상황을 보면 이덕일이 책을 대충 읽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덕일의 책을 보면 해당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덕일의 책에선 김현구 교수의 주장이 제대로 인용되었다. 그러면서도 김현구 교수를 임나일본부설 지지자로 왜곡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김현구 교수가 대놓고 반박한 부분만 잘라내고 있다. 위에서 대한 신라-야마토 정권의 관계만 해도 그렇다. 분명히 김현구 교수는 대놓고 '야마토 정권은 신라에 명령을 내리는 위치는 커녕 오히려 지원하는 위치였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부분만 자르고 부분 편집해서 인용하고 있다. 그야말로 '단장취의(斷章取義)'.[10]

정말 이덕일이 모르고 한 것인지, 특정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인지는 이덕일 혼자만 알 수 있다. 후자라면 본격 한국판 파울 요제프 괴벨스, 트로핌 리센코 탄생이다,[11]

6. 요약

1. 위서는 서지사항이 조작된 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는 내용이 조작된 책이지, 서지사항이 조작된 책이 아니다. 따라서 일본서기는 위사이지만 위서는 아니고, 내용에 조작이 가해진 위사라 하더라도 그 베이스가 된 역사적 사실(fact)을 추출할 수 있다. 단군신화에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하려고 하는 시도도 이러한 맥락인 셈. 하다못해 위서에 위사인 환단고기에도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이 들어가 있는 것이고, 진서에 진사인 삼국사기에도 태어나기도 전에 즉위한 석탈해와 같은 거짓이 들어가 있는 것이 문헌사료다. 그렇기에 사학자는 문헌을 검증하고 팩트를 추출해내야 한다.

2. 따라서 사료에 내재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fact)이 어떠한 것인가는 결국 학자의 검증에 달린 것이고, 이 과정에서 고고학과 인류학 등 연계분야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라야 최대한 설득력 있는 추출이 가능함은 불문가지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양심적인 학자라 하더라도 서로 관점의 차이에 따라 추출된 팩트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김현구 교수가 목라근자를 실존인물로 보는 데 반해 백승충 교수가 목라근자를 허구의 인물로 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설득력 있는 추출 시도가 거듭되고 교차검증되어야 역사의 진실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인데, 팩트를 추출하려는 시도 자체를 비난하는 이덕일의 선동은 몹시 잘못된 것이다.

3.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일본을 대하는 자세는 그 시대의 외교적 상황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적어도 자신을 넘어서는 수준의 문명국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점은 고고학적 기반에 비추어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지만, 삼국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저울추'로 작용할 수 있는 외부 변수인 왜국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는 것은 오늘날의 국제지형에 비추어 보아도 불합리한 일이다. 왜와 인접하는 신라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국혼을 제의받을 정도로 동등한 교류의 관계에 있었으나, 이후 석우로 사건을 겪으면서 적대관계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왜가 삼국의 속국과 같은 존재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7. 판결

2016년 2월 5일 서울서부지법에서 "피고인은 피해자가 주장하지도 않은 허위사실을 전제로 피해자를 식민사학자로 규정했다", "피고인의 학력과 경력 등을 보면 피해자가 임나일본부설을 아무 비판 없이 수용하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았을 것",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역사학자인 피고인의 영향력을 볼 때 명예훼손 정도도 매우 크다", "그럼에도 자신을 식민사학 카르텔의 피해자로 포장하고 이 사건의 논점을 역사 논쟁으로 흐리려 하는 등 범행 후 정황도 좋지 않다"고 이덕일에게 일침을 가하며 이덕일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내린 이유는 대충 이렇다.

첫째, 이덕일도 김현구가 임나일본부설을 전부 그대로 따랐다고 말한 건 아니지 않느냐? 김현구의 주장은 임나가 일본이 아니란 건데, 이덕일도 김현구가 임나일본부설의 주체를 다르게 본 점만큼은 어쨌든 써놨다.[12] 그러니까 그걸 보고 허위사실 적시라고 할 수 없다.

이걸 보고 법원이 마치 김현구가 식민사학자임을 인정했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오히려 정반대다. 김현구는 임나일본부의 주체를 부정해버림으로써 식민사학계의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다. 그리고 이덕일도 김현구가 이렇게 주체를 백제로 본 부분까지는 어쨌든 책에 써놨으니까 허위사실 적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덕일이 '김현구는 식민사학자다'라고 말한 것이 진실이라는 게 아니라, '김현구도 이러이러한 부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돌려보는 거 같더라'라고 말한 점 때문에 허위사실 적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이덕일의 주요 논지 중 김현구가 백제는 일본에 종속되었던 것마냥 썼다고 한 부분이 있는데, 이거는 그냥 이덕일의 의견표명으로 봐주자. 명예훼손죄는 '사실'을 적시한 것만 처벌하지 '의견'을 표명한 거로는 처벌하지 않는다. 이덕일은 김현구가 임나일본부설의 주체를 백제라고 하면서도 백제는 일본에 종속된 것처럼 썼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결국 일본이 백제를 통해 임나를 지배하는 셈이므로, 김현구는 임나일본부설을 따른 것이라 주장했다.[13] 그런데 설령 김현구의 주장은 그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즉 백제가 일본에 종속된 것이라고 말한 게 아니라 할지라도)[14] 이 부분은 단지 이덕일의 의견표명으로 봐야 한다. 쉽게 말하면 이덕일의 얘기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그냥 자기 생각 말한 거 뿐이니까 명예훼손죄로 처벌하기엔 좀 그렇다는 뜻.

셋째, 첫째 논지에서 이덕일이 허위사실을 적시한 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현행 형법상 진실을 적시하면서 명예를 훼손해도 처벌대상이다. 그런데 왜 무죄냐고? 형법 제310조를 보면 명예훼손이 '진실한 사실로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때'에는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나와 있다. 더군다나 이렇게 공공의 이익을 위한 때에는 '비방할 목적'이 부정되어 출판물 명예훼손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이다. 그런데 이런 학문의 세계에서 이덕일이 김현구 비판해 본 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명예훼손죄로도 처벌하기엔 곤란할 거 같다.[15]

정리하면 이덕일도 김현구가 임나일본부설을 무조건 따른 사람처럼 쓴 건 아니라는 점, 김현구의 주장을 곡해한 부분은 허위사실이라기 보단 그냥 의견표명 정도로 봐줄 수 있다는 점, 이덕일이 그런 내용을 쓴 거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 항소심은 이러한 점들을 토대로 이덕일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현구를 식민사학자라고 보았기 때문에 무죄판결을 내린 것은 아니다.

2017. 5. 11. 대법원은 항소심의 무죄판결을 확정했다. 주된 요지는 '사실적시'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예훼손은 진실을 적시한 형태이든 허위를 적시한 형태이든 '사실'을 적시해야 하는데, 여기서 '사실'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 의견표명이나 주관적 평가에 대치되는 개념으로서의 사실을 말한다. 즉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말할 때의 '사실'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표현들은 '사실적시'가 아니라 단순 의견표명을 하고 이를 강화하기 위하여 사실적시스러운 표현을 사용한 것이고, 쉽게 말해 '김현구가 임나일본부학자다.'라고 말한 것은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걸 비판하는 사람은 '잘못된 해석에 기반한 뇌내망상'쯤으로 치부할 것이고 지지하는 사람은 '타당한 분석'이라고 생각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이건 사실적시 영역보다는 가치판단 영역에 가깝단 소리다.

8. 참고문헌


[1] 학문의 자유를 빙자한 특정인의 명예훼손 및 공익훼손이라는 점에서 윤지선 남성혐오 논문 게재 사건과 일맥상통한다.[2]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71쪽[3]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72쪽[4]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73~74쪽[5]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카페 http://cafe.daum.net/hangaram-forum/ 이덕일은 알다시피 한가람문화연구소 소장이다. 이 카페 회원들이 주장한 내용은 이 곳에서 원문으로 볼 수 있다. 첨부파일이 있는데 그걸 보면 원문에선 뭐라 주장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6] 왜 이런 질문이 이 재판에서 나오는지 몰라서 화를 낸 것이다.[7] 물론 이건 '허를 찔러'서 대답 못 한게 아니라 왜 이런 질문이 나오는지 이해를 못해서 당황한 것이고, 김현구 교수는 증언에서 그점을 계속 반복해서 설명했다.[8] 진서하고는 다른 개념. 일본서기는 진는 아니지만 진는 맞다.[9] 오항녕 교수는 김현구 비판 측의 허수아비 공격을 논문에서도 지적한 적이 있다. 오항녕, 역사와 현실 제100호, 2016,6, 91-128[10] 문장을 잘라서 인용하여, 원작자의 뜻과는 상관없는 자기 의도를 취함.[11] 다만 책 자체만 읽어보면 진짜로 그렇게 믿는 듯하다.[12] 위 <2. 이덕일의 주장>에 나오듯 "김현구는 임나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은 사실인데, 이 임나는 백제가 지배했"다고 말한 부분[13] "김현구는 임나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은 사실인데, 이 임나는 백제가 지배했고, 야마토 정권은 백제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 우리 안의 식민사관[14] 항소심 판결문을 읽어보면 오히려 김현구가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김현구는 당시 일본이 백제의 용병 정도였다고 해석하면서, 백제가 일본에 선진문물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세상에 선진문물을 제공받는 국가를 상국으로 보는 사람이 어디있을까? 이렇게 김현구는 백제가 일본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한 바 없는데도 이덕일은 그렇게 이해했다. 항소심이 이 부분을 의견표명으로 처리하지 않았다면 재판의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15] 그러나 만약 둘째 논지에서 법원이 이덕일의 곡해(김현구의 주장이 마치 일본이 백제의 상국이었음을 주장한 것처럼 이해한 부분)를 의견표명이 아니라 허위사실 적시로 받아들였다면, 이 부분 재판의 결과 역시 달라졌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위법성 조각의 법리는 원칙적으로 표명한 내용이 '진실한 사실'일 때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다만 법리상 행위자가 표명한 내용이 진실한 사실이 아니라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믿은 데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위법하지 않다고 볼 여지도 있어서,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