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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13:25:36

이란 7대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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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 7대 가문은 페르시아 제국으로 흔히 인식되는 고대-중세 이란에서 페르시아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일곱 가문을 일컫는다. 페르시아는 전통적으로 귀족들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한 정치 문화를 가졌다. 귀족들은 세습할 수 있는 영지와 사병, 재산을 가졌다.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규모의 귀족 가문들이 산재하여 중앙과 지방에 영향력을 발산했으나, 어느 왕조에서도 일곱 대가문이 가장 강한 영향력을 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2. 목록

2.1. 아케메네스 왕조

고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는 기본적으로 전제군주제 국가였으나, 행정력이 약할 수 밖에 없던 고대의 제국이라 부족한 행정력을 보충해주는 귀족들의 영향력 역시 막강했다. 아케메네스조는 장자상속제를 채택했으나, 새 샤한샤의 즉위에는 12개 대가문의 투표가 필요했다.[1] 이 중 7개 가문이 찬성표를 던져야 샤한샤의 즉위가 아후라 마즈다의 뜻이라고 간주하고 이를 승인했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이 투표에서 떨어진 샤한샤는 없어, 실질적으로는 일종의 요식행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귀족 가문들의 이름은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다리우스 1세의 재위 과정을 보면 공교롭게도 일곱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하여 이를 아케메네스조 대가문들과 연결짓기도 한다.

키루스 대제가 실질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을 건국한 후,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제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는 외정에만 집중하며 내부적으로는 동생 바르디야[2]를 죽임을 시작으로 폭정을 자행했다. 결국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는데, 반란의 지도자는 가우마타라는 마기[3] 출신으로 황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인물이었으나, 리더십을 얻기 위해 자신이 바르디야라고 참칭했다. 반란에 참여한 하급 귀족이나 백성들은 바르디야가 살해된 사실을 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란은 성공했고, 캄비세스 2세는 찬탈당한 후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캄비세스 2세의 폭정과는 별개로 비귀족 출신이 제위에 오르는 것을 황족과 귀족들이 가만 놔둘 리 없었다. 파르스 사트라프의 아들이자 선왕의 6촌이던 다리우스를 중심으로 7명의 인물이 수도 슈쉬에서 뭉쳐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가우마타는 메디아의 니사야라는 곳에서 살해당했다. 쿠데타 직후 일곱 인물들은 앞으로의 페르시아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인지 회의를 열었다. 오타네스는 민주정 수립을, 메가비주스는 과두정 수립을, 다리우스는 전제정 수립을 주장했다. 이 토론에서 다리우스가 승리하여 새 정부는 전제군주정을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다음 의제는 일곱 인물 중 누가 샤한샤가 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토론 끝에, 다같이 밤에 말을 타고 나가서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가 뜬 직후 처음으로 말이 우는 인물이 샤한샤가 되기로 했다. 자유에 대한 신념이 있던 오타네스는 여기서 기권하였으며 이에 다른 여섯 인물은 오타네스의 뜻을 존중하여 그의 가문이 샤한샤에게 질 의무와, 그의 가문이 황가가 될 권리를 없애주었다. 말 빨리 울기 시합에서는, 하인을 시켜 암말의 냄새를 모아두었다가 해가 뜨자마자 슬쩍 자기 말의 코에 갖다대어 말이 흥분해 울게 만든 다리우스가 승리하여 다리우스 1세가 되었다. 다리우스 1세 즉위 이후 다른 여섯 인물들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샤한샤와 1대1 알현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고 다리우스 1세 정권의 고위인사가 되었다. 오타네스는 군사령관이 되었음은 물론 자손 대대로 고위직을 역임했고, 아스파티네스는 '왕의 궁수'직을 맡았고 그 아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의 그리스 원정 당시 해군 제독이 되었고, 고브리아스는 본인은 다리우스 1세의 여동생과, 아들은 다리우스 1세의 딸과 결혼하였고, 대 히다르네스는 메디아 사트라프에 이어 아르메니아 사트라프를 역임했다. 그 아들들이 육군 사령관에 올랐고, 아예 아르메니아를 대대로 통치하여 반독립 국가인 오론테스 왕조[4]를 창건하기에 이른다. 메가비주스도 대대로 육군 고위 장군을 역임했다.

유일하게 뒤끝이 안 좋았던 인물은 인타프레네스였다. 그 역시 고위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러다 어느 날 깊은 밤에, 인타프레네스는 샤한샤를 알현하려 입궁했다. 하지만 다리우스 1세는 이미 침전에 들어 황후와 관계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근위병들은 이미 샤한샤께서 침전에 드셨으니 내일 찾아오라며 인타프레네스를 돌려보내려 했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인타프레네스는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근위병들의 귀와 코를 잘라버리고는 자기 말의 굴레를 풀어 그들을 궁전 기둥에 묶어놓고 가버렸다. 밖에서 벌어지는 소동에 뛰쳐나온 다리우스 1세는 참상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인타프레네스가 감히 혼자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상기한 여섯 인물들이 자신을 폐위하려 쿠데타를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즉각 인타프레네스를 제외한 다섯 명에게 사람을 보내 지금 반란을 준비하는 지 물었다. 당황한 다섯 인물은 급보로 자신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며 샤한샤께 충성한다고 답했다. 이에 상황 판단이 된 다리우스 1세는 다음 날, 근위병들을 데리고 인타프레네스의 저택을 습격했다. 인타프레네스 본인은 물론 그의 삼족까지 멸해졌고, 오직 그의 아내와 처남, 아들만이 살아남았다. 다리우스 1세는 인타프레네스의 아내에게 오빠와 아들 중 한 명만 골라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주저하지 않고 오빠를 골랐다. 샤한샤가 그 이유를 묻자 아들은 새 남편을 만나 또 낳으면 되나, 오빠는 오직 한 명 뿐이며 다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기백 있는 답변에 감명받은 다리우스 1세는 둘 다 살려주었다.

2.2. 아르사케스 왕조-사산 왕조

본격적으로 일곱 가문의 전통이 시작된 것은 파르티아 시대이다. 파르티아의 건국 세력은 기존에 페르시아 본토인들로 인식되던 아리아인이 아닌 동북방 유목민인 다하이족이었고, 따라서 이란에 들어가 왕족이 되는 데는 현지 귀족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아르사케스 1세가 나라를 세울 때 지원해 준 일곱 가문이, 이란 귀족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또 아르사케스 왕조가 약해지자 파르스의 귀족 가문 사산 가문이 반란을 일으키고 제위를 찬탈하여 사산 왕조를 세우는 데, 이 귀족들은 그대로 충성의 대상을 바꾸어 사산 왕조의 대귀족으로 존속했다. 사산 왕조 시대에는 다른 귀족들과 격을 두어 '바스푸라간'이라는 고유 호칭으로 불렸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들이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전설 속의 왕조인 카야니아 왕조의 샤 비슈타스파를 모신 귀족 가문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으며, 사산 왕조에 잊혀졌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역사가 다시 알려진 후에는 아케메네스 가문이나 아케메네스조의 귀족 가문과 자신들의 계보를 이어맞추기도 했다.

이들은 파르티아 시대에는 거의 황실과 맞먹을 만한 권한을 누렸다, 봉건제에 가까웠던 파르티아 시대인만큼 귀족 평의회가 있어 황권을 제한했으며, 황권이 약해지는 시점에는 제위 계승 등 민감한 문제까지 이들이 개입했다. 하지만 사산 왕조 때부터는 황권이 강화되어 황족과 황족 출신의 부왕(샤흐르다란) 밑의 계급에 위치했다. 그럼에도 나라 전체로 보았을 때 매우 높은 지위인 것은 변함이 없었으며, 각 가문 고유의 업무는 물론 국정 전반에 관여했다.

보통 위의 일곱 가문을 바스푸라간 가문으로 분류하며, 사산 왕조 이후에는 지크 가나 바라즈 가를 빼고 황족인 사산 가를 넣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사산 왕조가 망하는 그날까지도 권세를 유지했으나, 이슬람 제국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에 점점 축출되어 사라진다.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존속한 조로아스터교 세력의 지도자들도 사산 가문의 이름을 빌렸으면 빌렸지 굳이 귀족 가문의 이름을 빌리려 하지는 않았다. 단, 사만 왕조메흐란 가의 후예임을 천명하였다.


[1] 아케메네스조는 숫자 12를 신성히 여겨 숭상했다. 페르세폴리스에 남은 부조들을 보면 모든 연꽃이 12개 잎으로 조각되어 있다.[2] 스메르디스로도 불렸다.[3] 조로아스터교 사제 계층을 일컫는 말.[4] 아르메니아어로는 예르반드 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