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10-18 15:02:11

이영호(1893)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강문(康雯) / 석전(石田)
본관 진성 이씨[1]
출생 1893년 7월 14일
경상도 예안현 의서면 온계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353번지)
사망 1964년 7월 5일[2]
경상북도 안동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33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3년 7월 14일 경상도 예안현 의서면 온계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353번지)에서 퇴계 이황의 12대손인 아버지 이중인(李中寅, 1857. 5. 10 ~ 1944. 11. 8)과 어머니 예안 김씨(1856. 2. 3 ~ 1893. 7. 16)[3]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온혜리 553번지로 이주해 거주하기도 했다.

5대조 이귀응(李龜應, 1729 ~ 1789. 8. 25)은 배천군수(白川郡守, 종4품)를 역임했고, 고조부 이지순(李志淳, 1762 ~ 1807. 2. 14) 또한 한산군수(韓山郡守)·익산군수(益山郡守) 등을 역임했다. 증조부 이휘녕(李彙寧, 1788 ~ 1861. 2. 13)은 1816년(순조 16) 식년 생원시에 1등 4위로 입격하여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종2품)에 올랐고, 조부 이만희(李晩憙, 1825 ~ 1859. 12. 20)는 1846년(헌종 12) 식년 진사시에 3등 30위로 입격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을미의병 당시 예안의병진에서 활약했던 19촌 지간의 족숙(族叔) 이중린(李中麟)과 22촌 지간의 족조(族祖) 이만도(李晩燾) 등의 이야기를 듣고 일찍이 이들의 뜻을 계승하고자 했다. 이에 국권회복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 공동묘지, 도로 보수 등 일제 정책의 부당성을 역설하며 항일사상을 고취하고자 했다.

그 뒤 1919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비밀리에 경상북도 대구부로 갔고, 기회를 엿보다가 그해 3월 10일 오후 5시에 대구부 남문 밖 장터에서 학생 및 기독교인 등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다수의 일본군과 일본 경찰들의 진압으로 시위행진은 중지되었고, 장터 안에서 독립만세를 외쳤으나 결국 당일 현장에서 그를 비롯한 65명의 주동급 인물이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30일[4]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6월 4일 대구지방법원으로 이감되었다. 그해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형으로 감형받아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귀향해서도 고향 예안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다가 재차 체포되어 구류되기도 했다. 이후 13대조인 퇴계 이황의 문집 《퇴계선생문집부록(退溪先生文集附錄)》을 경기도 경성부 사직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번지에서 편집해 1935년 7월 19일 안동군 자택에서 발행했다.

1964년 7월 5일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별세했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낙모봉(落帽峰)에 안장되었다가 2012년 5월 2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1] 온혜종파(溫惠宗派)-상계종파(上溪宗派) 20세 호(鎬) 항렬.[2] 음력 5월 26일.[3] 김석규(金碩奎)의 딸이다.[4] 1919년 형사사건부에는 5월 31일로 기재되어 있다.[5] 정대식(丁大植)의 딸이다.[6] 석사 학위 논문 : 李朝傳奇小說硏究(이조전기소설연구, 1956).[7] 박사 학위 논문 : 燕巖小說硏究(연암소설연구, 196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