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황실 4대조 인조 | 仁祖 | ||||
조선 제11대 국왕 인종 | 仁宗 | ||||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A] | ||||
인조헌문의무장숙흠효태황 仁祖獻文懿武章肅欽孝太皇[A] |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 인종(仁宗) → 인조(仁祖) | |||
시호 | 조선 | 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A] | ||
대한 | 헌문의무장숙흠효태황 (獻文懿武章肅欽孝太皇)[A] | |||
명 | ||||
출생 | 1501년 | |||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 ||||
즉위 | 1506년 11월 (음력 11월) | |||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 ||||
사망 | 1553년 | |||
조선 한성부 경복궁 청연루[A] | ||||
능묘 | 효릉(孝陵)[8] | |||
재위 | 조선 국왕 | |||
1506년 11월 ~ 1553년 (음력 1506년 11월 ~ 1553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colbgcolor=#ffffff,#1f2023>전주(全州) | ||
휘 | 황(𩔇) | |||
전호 | 영모전(永慕殿)[A] | |||
부모 | 부왕 무종, 모후 성렬왕대비 | |||
부인 | 황후 유씨[10] 등 | }}}}}}}}} |
1. 개요
명군이 되어보세!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인종 포지션이나 다른 사람이며, 이름은 폐세자 이고와 같으나 폐세자 이고가 1498년생인 반면 본작의 이고는 1501년생이기 때문에 동명이인이라고 보아야 한다.[11]2. 작중 행적
1부에서 주인공이 연산군(무종) 시절 중전 신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왕세자로 1501년생이다. 원 역사 연산군과 같은 해 무종이 비명횡사한 후 자순왕대비의 도움으로 만 5세의 나이에 즉위했다. 원 역사 조선 시대의 모든 왕을 통틀어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헌종이 만7세에 즉위했고,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들도 대체로 10대 초반이었음을 고려하면 독보적으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너무 어려서 숙부인 진성대군(원 역사 중종)에게 왕위가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만[12] 대신들이 무종의 아들인 왕세자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당시 왕실 최고 어르신이었던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아무리 진성대군이 자신의 친아들이라지만 혼란에 빠질 것을 우려하여 어린 왕세자를 즉위시켰고, 이로 인해 정현왕후의 섭정이 매우 길었다고 한다.[13]
주인공과 신씨가 사랑으로 애지중지하며 키워 성품이 선했다고 하며 철권통치를 펼친 무종과 달리 무종 대에 귀양 간 이들을 많이 사면해주는 등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렇다고 성종처럼 사림이 날뛰도록 용인한 것은 아니어서 수렴청정이 끝나자마자 삼사의 특권이자 폐단인 풍문거핵과 불문언근을 폐지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리학 교조화를 막기도 했다. 주인공은 이황이 자신과 달리 성군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부모의 바람대로 잘 큰 것이다.
기술 유출이 우려된다며 기껏 아버지가 개발한 강선조총의 사용을 금지하고 다시 활강조총만 사용하게 했는데, 이는 2부에서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다.
강선총에 대한 노하우나 기술 등이 많이 실전되어 복구하는 데 애먹게 된 점은 문제점으로 작용했으나, 2부 시점에서 이미 군에서 쓰던 활강조총이 유출된 뒤 복제되어 민간에 활강조총이 10만 정이나 돌아다니고 있던 걸 생각하면 강선조총을 76년간 계속 사용했을 경우 실제로 강선이 명이나 일본으로 유출되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그리고 제조기술은 실전되지 않은 걸 보면 정말로 기밀유출 방지가 목적이고,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으니 만약에 통치 중 큰 전쟁이 있었다면 다시 사용했을 것 같다.
거기다 당시는 활강조총만으로도 여진, 일본보다 조선의 군사력이 우위에 총기제조 기술도 명보다 한 수 앞서있는 상태였다. 북방개척을 계속하고 남한산성을 완공하는 등 군사력 발전을 게을리 한 인물은 아니다. 결국 기술 유출은 막긴 했으니 재평가나 반박의 여지는 있긴 하다.[14]
아버지를 닮아서 첩을 별로 들이지 않았고 아들 복이 없었다고 하며, 유일한 아들 명종 이환이 태어났을 때 대대적인 사면을 했다. 하지만 유일한 아들 명종 또한 생전 외아들을 자신보다 먼저 잃고 아들 없이 사망하게 되면서 결국 무종과 인종의 생물학적인 대는 명종 대 단절되었고, 명종이 진성대군의 증손자이자 자신의 7촌 조카인 경성군을 양자로 삼아 즉위시키면서[15] 법적으로는 인조의 후손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진성대군의 후손이 왕위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1553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버지가 미래에서 준 정보[16] 등도 없었음을 감안하면 나라를 잘 다스렸다 볼 수 있다.
본래 묘호는 인종대왕이었으나 명나라 멸망 이후 인조의 양손자인 경성군의 손자이자 법적 4대손인 선조 건원제(宣祖 建元帝)[17]가 대한으로 칭제건원하면서 인조태황으로 추존되었다.[18] 원 역사의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으로 칭제건원할 당시 4대조를 추존할 때 마지노선이 진종대왕(효장세자)과 장종대왕(사도세자)을 진종황제와 장조황제로 추존시킨 것이었음을 고려하면 사도세자와도 어느 정도 포지션이 겹치는 셈.
3. 기타
원 역사의 인종과 묘호가 동일하나, 무려 47년이나 재위했으며(1506–1553) 원 역사의 중종(1506–1544)·인종(1544–1545)·명종(1545–1567) 재위 초기를 합친 수준으로 매우 길다.본작에서는 장경왕후와 인종에 대한 언급이 일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인종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나,[19] 설정상 인종 이고와 원 역사의 인종 이호는 사촌지간이다. 인종 이고는 무종(원 역사 연산군)의 아들이지만 인종 이호는 무종의 동생 진성대군(원 역사 중종)의 아들이기 때문.
원 역사와 달리 4부 시점까지 모든 왕들이 친정 가능한 나이에 즉위하여 인종의 수렴청정은 4부 시점까지 조선 시대 마지막 수렴청정 사례로 남았다.
[A] 작중 묘사 없음. 원 역사 인종에 대응해서 추정.[A] [A] [A] [A] [B]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 추정.[A] [8] 원 역사 인종의 능호.[A] [10] 유순정의 손녀.[11] 원 역사의 폐비 신씨가 1501년에 아들을 낳았다가 곧 죽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와는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12] 조선 초기에는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처럼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에서 배제되기도 했다.[13] 세는나이 15살에 철렴(撤簾)했다 쳐도 8~9년 정도는 갔을 듯하다.[14] 조선은 실제로 애기살의 유출을 우려해 국경에서의 사용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15] 본작의 가공인물로 진성대군이 원 역사 단경왕후인 신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창녕군의 아들 은성대원군의 아들이다. 본작에서도 진성대군은 서자 덕흥군을 가졌지만 덕흥군이 워낙 늦게 태어난 데다(42살 차이) 경성군과 덕흥군의 아들들이 서로 5촌지간임에도 나이가 비슷했던 것을 보아 부자지간 수준으로 나이 차이가 났던 모양이다.[16] 주인공은 죽기 전에 이황에게 자신이 미래인이라는 것과 미래 정보들을 알려줄 생각을 했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원 역사대로 요절하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했다.[17] 묘호는 원 역사 선조와 같지만 재위기간(1620~1650)이 원 역사 인조(1623~1649)와 거의 겹치기 때문에 실제로는 인조 포지션이다. 원 역사의 선조 포지션은 2부 주인공인 장조이다.[18] 대한에서는 황제(皇帝)가 아니라 태황(太皇)을 호칭으로 사용한다.[19] 문정왕후는 다른 사람과 혼인했다고 확실히 나오나, 장경왕후는 후궁 출신 왕비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