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2-22 17:14:06

일본의 성/도루이

파일:pixta_43055576_M.jpg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의 거대한 도루이.

[ruby(土, ruby=ど)][ruby(塁, ruby=るい)]

1. 개요2. 역사3. 구조4. 분류
4.1. 축조 방법4.2. 기능

1. 개요

한국식으로 발음하면 토루(土壘)이다. 일본식 성에서 적이나 동물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로 성토(盛土)를 통해 쌓은 구루와(曲輪)의 축대이자 외곽 방벽의 한 가지. 나머지 한 가지는 도루이의 겉을 돌로 두른 이시가키(石垣)이다.

2. 역사

가장 기본적인 축대의 종류인 도루이는 잠깐잠깐 나타나다 중근세부터 서일본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확산세를 보인 이시가키와는 달리, 선사시대부터 근세까지 일본 열도 전역에서 골고루 나타났다. 환호마을, 야카타(館), 진야(陳屋), 사찰, 성 등 다양한 방어시설에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이시가키를 두른 근세의 성들도 외곽인 소가마에(総構え)는 토루로 이루어진 부분이 반드시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을 정도. 아즈치(安土 ・ 的土, あづち)라고도 한다.

일본의 성은 흔히 야요이(弥生) 시대의 환호집락(環濠集落)에서 출발한다고 하는데, 이 당시까지만 해도 해자를 판 바깥에 도루이를 쌓았다고 한다. 이 시대 유적의 대표격인 곳이 요시노가리(吉野ヶ里). 그러나 아스카 시대 이후부터는 해자 안쪽에 도루이를 쌓는 것이 일반적이게 되었다.

아스카 시대에는 규슈다자이후(大宰府) 근방에 조선식 산성이 축조되는데, 그 중 오노 성(大野城) 곁에 펼쳐진 평야 부분을 방어하기 위한 미즈키(水城)가 판축토루의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무사나 영주가 거주하는 야카타(館)가 주로 축조되고, 센고쿠 시대에는 일본 열도 전역에 수없이 많은 토성이 건축되었다. 센고쿠 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 때에는 한반도 동남부 해안에 많은 왜성(倭城)들이 건축되었다. 왜성은 보통 이시가키를 두른 것들이 많이 남아 있으나, 견내량왜성(見乃梁倭城), 망진왜성(望晉倭城)과 같이 처음부터 대부분 도루이로 이루어진 성도 있었으며 순천왜성과 같이 도루이로 된 외곽(外郭)을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현재까지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기록에만 남아 있는 여러 왜채(倭寨)들은 도루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가키가 널리 퍼지는 에도 시대에 들어와서도 도루이는 지속적으로 축조되었으며, 특히 동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도루이로 된 성이 많다. '서국(西國)은 이시가키, 동국(東國)은 도루이(土塁)'라는 말도 있다. 이것은 동일본에서 이시가키의 재료가 되는 화강암의 산지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토루로 유명한 근세성곽은 우츠노미야 성, 히로사키 성(弘前城) 등이 있다.

3. 구조

파일:5dba6e1a22b181572498970.png

도루이는 보통 호리(堀)[1]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호리를 파서 나온 흙인 배토(排土, はいど)를 성벽으로서 쌓으면 저절로 도루이가 완성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쌓은 도루이를 가키아게도루이(掻揚土塁, かきあげどるい)라고 한다. 이렇게 도루이를 쌓으면 멀리에서 흙을 운반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으므로 효율적이었다. 도루이 경사면의 기울기는 45° 정도가 보통이다. 이는 각도가 더 완만해져 버리면 적의 공격을 막기가 어려워지고, 더 급해져 버리면 토사가 무너져 내릴 위험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도루이의 윗면을 히라미(褶, ひらみ) 또는 마부미(馬踏, まぶみ)라고 하며, 기단면을 시키(敷, しき), 경사면을 노리(法 ・ 矩, のり)라고 한다. 바깥쪽 경사면을 소토노리(外法), 안쪽 경사면을 우치노리(內法)라고 부른다. 도루이의 높이는 통상 윗면과 기단면 사이의 거리로 치지만, 도루이 바깥에 있는 호리의 깊이를 포함하는 경우에는 해자 바닥에서부터 잰 거리로 높이를 측정한다. 물을 채운 미즈보리(水堀)의 경우는 수면 위로부터 잰 거리가 기준이 된다. 경사면과 윗면이 만나는 꼭짓점을 노리카타(法肩, のりかた), 아랫면과 만나는 꼭짓점을 노리지리(法尻, のりじり) 또는 노리사키(法先, のりさき)라고 부른다[2].

도루이의 윗면에는 실질적인 성벽이자 성가퀴(女牆) 역할을 하는 헤이(塀, へい)나 목책(柵, さく)을 두르는데, 통상적으로 중심선보다 약간 바깥쪽에 설치한다. 이때 설치물 안쪽을 무샤바시리(武者走り, むしゃばしり)[3], 바깥쪽을 이누바시리(犬走り, いぬばしり)[4]라고 한다. 무샤바시리가 이누바시리보다 넓은 이유는, 도루이는 이시가키와는 다르게 직각의 경사를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해서 이누바시리가 적병이 다닐 수 있는 통로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물론 성 안쪽에서 방비를 더 수월하게 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누바시리를 아예 없앨 수는 없었는데, 설치물의 기초를 안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누바시리의 넓이는 1척 5촌 정도로 하는 것이 적당했다고 한다.

도루이의 안쪽 경사면에는 윗면으로 오르기 위해 비탈과 계단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시설을 간기(雁木, がんぎ) 또는 사카(坂)라고 한다. 계단이 마주 보도록 하여 V자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아이자카(合坂, あいざか), 평행하게 설치한 것을 가사네자카(重ね坂, かさねざか)라고 한다. 많은 병사들이 동시에 오르락내리락하기 위해서는 가사네자카를 설치하는 것이 더 편리했다. 도루이의 높이가 높을수록 계단의 기울기를 완만하게 하여 병사들이 오르기 쉽게 하였다. 시대가 흐르면 안쪽 경사면 전체를 계단으로 덮어 어디에서나 성벽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경우도 왕왕 나타난다.

4. 분류

4.1. 축조 방법



4.2. 기능




[1] 해자를 뜻한다. 물을 채웠든 채우지 않았든 구루와 사이를 분리시켜 놓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2] 직관적으로 이해하면 쉽다. 가타(肩)은 어깨, 시리(尻)는 엉덩이라는 뜻이다.[3]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회곽로(回郭路)가 이에 해당한다.[4] 한국어로는 벼랑길에 가까운 용어이다.[5] 구마자사(熊笹)는 얼룩조릿대의 일본어 명칭이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