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재야 민주운동가였던 장준하의 의문스러운 죽음.2. 상세
2.1. 의문스러운 사망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시 약사봉 등산을 갔다가 의문사하였고[1]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실족사로 발표했다. 아직까지 고인의 사망에 관한 의혹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2.2. 타살 의혹
2013 장준하 두개골 부검 검색 결과당시 정권이 장준하를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정권이 고인이 계획했던 '유신개헌운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고인을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신개헌운동'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미 고인이 된 법정과 김대중이 증언했다.
KBS 인물현대사.E27.장준하 2부-거사와 죽음의 진실(57:26) 동영상
1993년 3월 결성된 민주당의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진상 조사 위원회'는 장준하의 사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 추락 지점이 경사 75도의 가파른 암벽이어서 장비 없이는 내려갈 수 없는 곳이다.
- 시신이 발견된 암벽은 경사도를 볼 때 굴러떨어지는 물체가 멈출 수 없는 곳이다.
- 시신에는 외상이나 골절이 전혀 없고, 휴대한 보온병[2]과 안경이 깨지지 않았다.
- 당시 시신을 검안한 조철구에 따르면, 오른쪽 귀 뒤에 가로 세로 2cm 가량의 흉기로 찍힌 자국이 있고, 또 팔과 엉덩이에 치료 목적이라고 볼 수 없는 주사바늘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 어깨 안쪽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3]
- 문국진 박사의 법의학적 소견에 따르면, 우측 귀의 함몰된 작은 상처가 인공적인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충격을 가해서 생긴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당시 두개골을 직접 검시한 서울대법의학연구소 이윤성교수의 소견서는 "이 손상이 뭔가에 맞아 생긴 것인지 또는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쳐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였다.
- 사고 당시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의 증언이 명확하지 않다. 증언을 계속적으로 번복하였다.
- 김용환은 1967년에 장준하가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에 장준하 선거캠프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준하가 낙선하자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묘하게도 1975년 8월 17일 장준하가 등산하는 날에 홀연히 나타나 동행하고선 그대로 목격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의 상도동계나 김대중의 동교동계 처럼 그당시엔 유력 인들 주변지인들의 모임, 가신단이 자연스럽게 형성돼있었다. 김용환이 거기에 있음을 추측할수 있다.
- 1993년 민주당에서 한광옥 최고위원을 위원장으로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진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8월 20일 2차 답사때 당시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과 함께 사고 현장을 답사하였는데 김용환은 산행입구를 찾지 못했고, 산악회 일행이 점심 먹었던 장소도 찾지 못했으며, 뛰어넘었다는 2개의 능선과 계곡도 없었고 계곡으로 내려가는 하산길도 찾지 못했으며 지금까지 추락했다고 알려진 14m 70cm 지점이 아닌 엉뚱하게도 훨씬 높은 75m 지점에서 추락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당시 의정부지청 검사였던 서돈양은 김용환이 장준하 선생의 시계를 차고 있어서 머리를 쥐어박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18년 동안 계곡 지형이 변하거나 산길도 변할 수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못 찾을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 중 한 명이었던 고상만 씨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사건 당일에 장준하의 가족에게 장준하의 사고소식을 알린 전화가 걸려왔는데 중앙정보부 문서를 확인해본 결과 김용환이 걸었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그 일대에서 전화라곤 행정용 전화인 마을 이장의 전화 밖에 없었다는 것. 마을 이장은 자신의 전화가 행정용 전화였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김용환의 행적이 이래저래 수상하다는 점도 의혹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정리하면 모든 정황을 따져봤을 때 장 선생의 죽음 30분 전과 12시간 후의 이 사람의 행적이 불명이다.
- 고상만 씨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과 관련된 엄청난 양의 조사기록물이 국가기록원에 있는데 약 70년간 그러니까 2074년까지 비공개로 처리되었다. 국가기밀이라도 30년 후면 해금된다는 점을 봤을 때, 여러모로 74년까지 의혹을 늘릴 생각이라는 무리수로밖에 안 보인다.국가기록원기밀문서는 최장 30년이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타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조사하여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망 원인이 추락사가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진상 규명 불능으로 최종 발표했다. 그러나 2004년 보도된 주간동아 기사를 보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이러한 최종 결론에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었다는 의문을 제기했는데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실험을 주도한 홍익대학교 교수의 말이 나온다. 고인의 유족들은 수사 방식이나 성과에 대해 회의를 느꼈고[4], 일부러 관을 꺼내 유골을 검시해야 한다는 점에 부담을 느끼기도 하여 그 동안은 모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들(1993, 2002, 2004)에 응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앞선 조사들은 유골의 검시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등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던 조사들이었다.
2012년 8월 15일 천주교 공동묘지에서 경기도 파주시에 조성될 장준하 공원으로 묘지를 이장하는 김에[5] 드디어 사망 후 처음으로 유골을 검시하였는데 그 결과 머리뼈에 직경 6cm짜리 동글동글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것만으로는 타살 여부를 밝히기 힘드나 다른 신체 부위에서 추락시 발견되는 골절이 1군데도 발견되지 않아 타살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를 토대로 유족인 장남 장호권[6]은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하였으며 정부가 진상 조사에 나서지 않을 경우 직접 과학적 분석을 의뢰할 것임을 밝혔다. 검시의 자세한 내용과 유족의 주장은 여기를 참조할 것. 나는 꼼수다 봉주 19회에 장남인 장호권 씨와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고상만 씨가 출연해 언론에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사실들을 말하기도 했다.
2012년 9월 1일 그것이 알고싶다 팀에서 지난 1993년 방송분에 법의학적 과학적 해석을 추가한 내용을 방송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추락사 혹은 타살이라는 2가지 가설이 대립 중이다.
- 다만 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2가지 가설 중에서 접점을 이루는 것은, 계곡에서 떨어졌을 때 당시 이미 장준하는 기절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7]
- 사고 당시 현장을 찾아간 검사가 본 군인들은 누구인가?[8]
- 장준하 사망 당시 오간 군 내부 전보들의 내용은 무엇인가?
2013년 3월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는 정밀감식 후 이정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이정빈 교수는 유골 감식 결과 '타살 후 추락'으로 결론을 내렸다. 머리를 가격당해 즉사한 후 추락해 엉덩이뼈를 손상당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결론은 이정빈 교수의 개인적인 조사 결과라는 것. 대한법의학회에서는 이러한 이정빈 교수의 조사 결과에 대해 타살 후 추락이 아닌 실족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직접 반박까지 하기도 하였다.
2012년 의사 출신인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장준하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정 전 국회의장은 보수 진영 소속 중진 국회의원인 데다가 머리뼈 외상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신경외과 전문의 출신이라 더욱 임팩트가 컸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자신만큼 많이 머리뼈 외상 환자를 치료한 의사가 없다고 자부하며 장준하의 머리뼈를 본 순간 타살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이후 2014년에 다시금 장준하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주장을 확고히 하였다.
-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은 현재 한결같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지금은 말할 수 없다."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 몇몇 문제제기를 한 프로그램, 심지어 종편방송인 JTBC에서도 김용환을 찾아가서 취재를 요청했으나, "기존의 내 설명대로라면 문제제기 된 부분은 모두 해소된다"고 발언하며 추가적인 인터뷰는 거부[9]한 채 2017년 9월 20일 사망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3. 관련 문서
장준하 의문사와 마찬가지로 아래 사건 모두 박정희 정부 시절 발생하였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종 배후에 있는 것으로 강력히 의심되는 사건들이다.[1] 백기완을 비롯한 후배들과 가기로 했지만 너무 무더울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보고 취소했다가 자신이 회원으로 있던 산악회장 김용덕, 마침 자신을 만나기 위해 충청남도에서 올라온 김용환 두 사람과 함께 새 약속을 잡았다. 약사봉 입구에서 점심을 먼저 먹기 위해 준비하는 중 장준하는 먼저 좀 올라가 보겠다면서 혼자 출발했는데 얼마 뒤 김용환이 따라갔다가 절벽 아래 숨져 있는 장준하를 발견하고 달려와 알렸다.[2] 지금 생각하면 납득이 안 갈지도 모르는데, 당시 보온병 하면 당연히 단열재가 유리였다.유리로 된 병이 다른 재질로 된 더 큰 병 안에 입구만 결합된 상태로 공중에 떠있는 형태 해외에서도 쓰이며 사용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분리하는 과정에서 박살나는 것은 예삿일이고 높이 30cm 정도에서도 땅에 떨어지면 단열재인 유리가 깨지고, 그러면 그 보온병 버려야 했다.[3] 어깨를 붙들려 억지로 끌려간 듯한 흔적으로 보인다.[4] 당시 유족들은 국군기무사령부 등을 전부 조사할 수 있도록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전권을 가지고 수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조사들은 전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유족들은 조사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5] 원래 이장하려 했던 것은 아니고 홍수에 의해 묘가 파손되어 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파주시가 유해를 모시겠다 하여 장준하 공원이 조성되기로 한 것이다.[6] 아버지 사후 정체 불명 4인조의 피습을 받아 턱 골절상을 입은 후 야반도주하다시피 외국으로 나갔다고 한다.[7] 보통 사람이 추락할 경우, 무의식적으로 자기 보호본능 때문에 팔등이 땅에 먼저 닿는 식이라, 이런 부위에 골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장준하의 시신에선 이런 골절이 발견되지 않았다.[8] 장준하 사망 다음날에 박정희가 "보안사령관을 독대했다"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바 있다.[9] 김용환은 추가적인 인터뷰와 수기를 월간조선에서 한 적은 있다. 다만 이 때는 가명으로 처리되었다. 다만, 그것이 알고 싶다 1993년 방송 마지막에 나오는 의미심장한 발언은 방송국에서 임의 편집했다는 판결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