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08:06:12

장병준

장현숙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본명이 장현숙인 영어강사에 대한 내용은 오렌지(강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장병준
張柄俊[1]
俊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파일:장병준.png
이명 장현숙(張玹淑)
포양(包洋)
출생 1893년 6월 10일
전라도 나주목 장산도 대리
(現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대리)[2]
사망 1972년 3월 16일[3]
전라남도 광주시 백운동
(現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동 35-8번지 자택)[4]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19호
본관 인동 장씨 상장군계[5]
학력 보성전문학교 (졸업)
니혼대학 (법학 / 중퇴)
소속 신간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한민당[6] → 민주당
직업 독립운동가, 정치인, 사회운동가, 교육인
정당 한국민주당민주당
경력
[ 펼치기 · 접기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7]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라도 대표위원[8]
신간회 중앙 대표
신간회 목포지회장
한성정부 일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선과도입법의원
한국민주당 광주지부장
전라남도당 위원장
민주당 전라남도당위원장
사인 자연사
부모 아버지 장진섭, 어머니 하동 정씨
형제 동생 장병상[9], 장홍재[10], 장홍염
가족 배우자 박금례[11], 슬하 1남 5녀
아들 장경식[12]
서훈 대통령표창 수훈 (1963)[13]
건국포장 추서 (1980)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0)

1. 개요2. 생애
2.1. 생애 초반2.2. 독립운동2.3. 일제강점기 후반 ~ 광복 후2.4. 사망
3. 가족관계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파일:장병준.jpg
노년의 모습.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이후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하며 반독재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독립유공자 장홍염은 그의 막내 남동생이다.

2. 생애

2.1. 생애 초반

파일:장병준 일가.png

1893년 6월 10일 전라도 나주목 장산도 대리(現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대리)에서 정6품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아버지 장진섭(張鎭燮, 1873. 5. 11 ~ 1900. 7. 20)과 어머니 하동 정씨(1879 ~ 1959. 1. 11)[14]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안국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160번지에 거주했고, 1949년 당시에는 전라남도 광주부 월산동(현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 43번지에 거주했다.

그는 인동 장씨 함평파 22대손이며 장산도 대리마을 입향조로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낸 장인걸(張仁傑, 1751 ~ 1791. 3. 20)[15]의 6대손이다. 그의 집안은 조부 장도규(張道奎, 1842 ~ 1902. 5. 6) 대에 이미 장산도 내에서 상당한 규모의 지주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둘째 큰아버지 장진방(張鎭邦, ? ~ ?)이 주변 섬들의 간척사업을 주도하면서 일가는 대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그의 아버지 장진섭은 조부의 셋째 아들이었던 탓에 그리 많은 토지를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평소 신학문에 관심이 많아 네 아들들을 전라남도 목포부경기도 경성부, 일본까지 유학을 보내어 새로운 근대학문을 익히게 했다.

이러한 가정 배경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장남인 장병준 또한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전라남도 목포부에서 중등교육을 수료한 후, 곧 상경하여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니혼대학 법학과에 다니다가 유학 3년차인 1917년 돌연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2.2. 독립운동

천도교가 운영할 당시에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던 그는, 재학 시절 쌓은 인맥을 통해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귀국 후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1919년 3.1 운동 당시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해 3월 18일 고향 장산도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마을 주민들에게 광무황제 안장식(安葬式)을 거행한다고 사정(射亭)에 집합시킨 후, 주민들 수천명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도록 유도하고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했다.[16]

이 때문에 그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1919년 4월 23일 조직된 대한국민대회에 합류해 이후 만들어진 한성정부에 참여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들어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전라도 대표의원에 선출되었다. 특히 제4차 의정원회의에서 그는 한위건·손두환(孫斗煥)·장도정(張道定)·임봉래(林鳳來) 등 의원과 연서(連署)하여 "한 나라에 국회가 둘이 될 수 없으니 임시의정원과 국민의회는 시급히 통일하여야 한다는 것과, 상해에 설립된 의정원은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이를 분립(分立)하기 어려운 즉 다른 곳에 설립된 의회를 속히 본 의정원에 통일케 하자"는 제안을 제출하여 통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임시정부 위치를 상하이에 둘 것인지 러시아로 옮길 것인지에 대해 갈등을 빚어 위원 직임에서 해임됐으며, 물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공식 문서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장현숙(張玹淑)'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북간도, 연해주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집, 선전물 우송과 조직원 포섭 등의 일을 했다.

1920년 초 그는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귀국하였으며, 경성부에서 이동욱(李東旭) 등과 함께 3.1 독립운동 1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할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본 경찰에 탐지되었고, 같은 해 3월 20일 결국 체포되었다. 같은 해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 처벌령 위반,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에는 신간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신간회가 창립되자 목포(木浦)지회장에 취임하고 동시에 중앙대표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진상규명을 위한 민중대회운동을 경성부에서 열어 재차 체포되기도 했다. 그는 이후에도 지역에서 일어나는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2.3. 일제강점기 후반 ~ 광복 후

파일:vbnm.png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창씨개명, 황민화 정책을 모두 거부하였으며, 조카, 동생들과 함께 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했다.

8.15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에 입당해 전라남도당부 총무, 광주지부 총무 등을 역임했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도 가입하여 전라남도 광주지부 부지부장을 역임했다.

또한 친척들과 함께 자신들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 1947년 11월 조카 장동식(張東植)과 함께 고향 인근 마을인 장산면 도창리에 장산중학교[17]를 세우는 등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그는 정치 관련해서 여러 직책을 받았지만 나이가 많아 동생들이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그 뒤 이승만이 제4대 대통령 선거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를 저지르자 장병준이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2.4. 사망

그 후 1972년 3월 16일 전라남도 광주시 백운동(현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동) 35-8번지 자택에서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2006년 11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3. 가족관계

파일:장병준-1.1.jpg
위에 '장하진 장관 가계도'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무시하자

4. 관련 문서


[1] 1920년 12월 21일 판결문에는[2]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 출생지인 88번지에 장병준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3]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와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3월 15일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5] 함평파 23세, 시조 28세 홍(洪) 항렬. 족보명은 장홍채(張洪採).#[6] 광복 후부터 이승만이 자유당을 만들며 한민당에서 탈당하자 조병옥 등이 민주당을 만들었다. 그는 민주당으로 갔다.[7] 임시정부 위치에 관한 갈등으로 해임.[8] 임시정부의 위치에 대한 갈등으로 해임됨.[9] 張炳祥. 족보명 장홍협(張洪莢). 1899 ~ 1957. 4. 15.[10] 張洪㘽.[11] 朴今禮. 밀양 박씨 박정흠(朴廷欽)의 딸이다.[12] 張璟植. 1918. 11. 13 ~ 1984. 11. 15. 학교법인 장산중학교 이사장을 역임했다.[13] 이 표창은 생전에 받았다.[14] 정치순(鄭致順)의 딸이다.[15] 1770년 전라도 함평현, 해남현을 거쳐 진도군 가사도에서 장산도 대리마을로 이주했다.[16]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던 1919년 5월 10일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또한 1920년 2월 27일에도 광주지방법원 검사국 목포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받았다.#[17] 1982년 3월 26일 공립중학교로 전환되었다.[18] 족보명 장홍협(張洪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