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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00:29:36

전거리교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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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巨里第十二號敎化所

Chŏngŏri Concentration Ca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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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거리 수용소_구글 어스.png
▲ 전거리 제12호 교화소의 위성 사진
<colbgcolor=#ED1C27,#222222><colcolor=white> 설립 1980년대
목적 북한 형법에 의거한 공식적 구금시설
✔ 노동교화형 선고자 수용
수용자 활용을 통한 노동력 착취
규모 부지면적 약 0.03㎢
수용인원 최소 2,000명 이상
상위 조직 파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안전성 휘장.svg 사회안전성 교화국
운영 여부 운영 중
주소

전거리 제12호 교화소
(함경북도 회령시 전거리)

1. 개요2. 역사3. 구조4. 실상5. 참고 문헌 및 관련 링크

[clearfix]

1. 개요

북한로동교화소. 탈북이 북한에서 가장 흔한 곳으로 꼽히는 함경북도 북단에 있기에 그 실상이 외부에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었다. 남서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함북선 전거리역이 있다.

2. 역사

2005년까지 일반적인 범죄자들이 수용되는 평범한 교화소였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으로의 탈북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국경과 가까운 함경북도에 위치한 전거리교화소에 중국에서 북송된 탈북자들과 한국과 대북송금 혹은 전화 통화를 하다 잡힌 사람들이 수감되면서 졸지에 준정치범 수용소화가 되어버렸다. 이로인해 교화소의 수감 인원이 늘어나버린 것이다. 2007년부터 여자교화소가 생겼는데, 함경북도 여자들이 개천교화소나 증산교화소에 수감되면 가족이 면회가기가 힘들어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기에 여성 수용시설이 증축되었다. 그러다가 아예 2009년을 전후해서 정치범수용소 수준의 고강도로 노동을 시키는 교화소가 되었다.

3. 구조

파일:전거리교화소 설명.jpg
전거리교화소의 용도에 따른 시설 구조

가로 350m, 세로 150m의 조그만 수용소. 가운데에는 세 칸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 구조이다. 사실 칸막이가 확실한 건 가장 오른쪽의 가로 150m 세로 150m의 정사각형 모양의 구역인데 여기가 바로 수용소의 중요 부분이다. 이 좁은 수용소에 300명의 경비가 몰려 있다. 모두 중화기를 장비한 상태이다.

4. 실상

이곳에서 수감 생활을 한 뒤 다시 탈북에 시도해 성공한 탈북민의 증언이 많기 때문에 전거리교화소는 다른 10여곳의 교화소와는 다르게 실상이 비교적 알려진 편이다. 삼촌을 사고로 죽인 리준하가 이 곳에 수감되었다가 탈출에 성공했는데 이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수용소의 실상은 다음과 같다.
2001년 2월 5일 그는 전거리교화소에 입소했다. 북한의 공식명칭은 12호 교화소이다. 당시 전거리교화소는 800명 수용능력에 보통 1100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를 경비하고 지키는 보안원이 모두 240명이나 됐다.

교화소 생활을 끔찍했고 매일 사람이 죽어나갔다. “총지령공이란 자리에 있으니 매일 몇 명이 들어오고, 몇 명이 나가는지 다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집계해 보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균 1100명이 수감돼 있었던 교화소에선 사람이 안 죽은 날이 없었습니다. 제일 적게 죽은 날이 2명이었고, 하루 평균 5~7명이 죽었습니다. 겨울에는 10명 이상씩 죽습니다.” 그는 만약 일반 재소자로 있었다면 자신도 2년 이상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2001년부터 6년간 전거리교화소에 수감된 탈북민 권효진의 증언
“제가 총지령공으로 있을 당시 전거리교화소는 수용 능력이 800명이었지만 보통 1100명이 수감돼 있었고, 이를 관리하는 보안원과 경비병이 240명이었습니다. 당시 33개 교화반이 있는데 동 정광을 채취하고, 임업과 감자 농사 등을 했습니다. 이렇게 전국 교화소에서 죄수들이 생산한 것으로 사회안전성이 먹고삽니다. 즉, 죄인은 안전성의 노예들인 셈입니다.”
불망산 화장터
“죄수가 죽으면 ‘사체보관실’에 쌓아두었다가 저녁에 불망산으로 부르는 외딴 화장터에서 태웁니다. 시체를 처리할 때는 총지령공과 수레꾼 4명 등 모두 8명이 갑니다. 화장터엔 굵은 철근으로 만든 직사각형의 틀이 있는데, 아래에 나무를 쌓고 시체를 올려놓습니다. 죄수들이 삐쩍 말라 시신은 통나무 두께도 안 됩니다. 한 구는 머리를 오른쪽에, 다음은 머리를 왼쪽에 놓는 식으로 차곡차곡 놓으면 틀에 모두 12구의 시신이 올라갑니다. 저녁에 불을 지피고 내려갔다가 아침에 올라가면 재들이 선반 아래에 수북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걸 삽으로 퍼서 화장터 주변에 막 뿌리고, 빗자루로 씁니다. 무덤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저녁에 또 반복됩니다. 화장에 쓰는 통나무는 죄수들이 산에서 끌고 내려온 것입니다.”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전거리교화소의 ‘불망산’
강철환칼럼에 따르면 2007년 이전까지는 북한은 탈북자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서 관리했는데 이 중 가장 정도가 낮은 식량난으로 인한 단순 탈북자는 3등급으로 되어서 6개월의 로동단련형이나 2년 이하의 로동교화형으로 처벌받는 정도였으나 당국에서 국경을 넘은 자들은 민족반역죄로 다스리라는 명령이 하달되면서 무조건 교화형을 받아 전거리에 수감된다고 한다. 동 칼럼의 말미에 보면 한 탈북자가 말하길 '차라리 요덕 제15호 관리소가 나을 정도로 전거리는 사람 잡는 곳'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니 말 다 했다.[1] 아무리 건강해도 석 달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간다고. 원칙적으로는 수감 생활을 한 뒤 사회로 되돌아가야 하지만, 전거리로 올 정도면 선고되는 형량도 길고 교화소의 노동 강도도 참혹해서 수감자들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나가는게 현실이다.

북한 내 인사도 데일리NK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전거리교화소를 "살아있는 지옥"에 비유하며 내부 생활은 "너무 한심한 최하층 바닥 그 이하"로 평했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참고로 해당 소식통의 증언대로라면 이 수용소의 연간 사망자는 100명 정도라고 하며,[2] 당과 법기관은 탈북자들을 '국제사회가 인권 공세를 취하는 데 빌미를 제공한 사람들'로써 '국가를 망신시킨' 요주의 인물로 간주해 이들이 죽는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고 한다. #
북한 주민이 직접 이야기하는 전거리교화소
죄수들은 가족들이 면식을 가져다 주지 못하면 버티지 못하고 굶어죽으며, 교화소 안전원들은 전거리교화소로 면회를 오는 가족들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2017년 전거리교화소 수감자 20명을 조사한 결과 이들이 목격한 동료 수감자 276명 중 24.3%가 사망했다고 한다. 물론 중복 집계 가능성도 감안해야 한다. #[3] 그러나 김정은 집권 초 로동교화소에 수감자 가족들의 면회를 허용하면서 수감자들이 가져온 음식에 따라 사망자 비율이 대폭 감소했다고 한다. #

결론을 말하면 한마디로 완전통제구역의 트라이얼판. 그나마 이곳이 완전통제구역보다 나은 점은 형량을 받아 수감되는 곳인지라 형기를 마치면 석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탈북 기도로 전거리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출소한 뒤 다시 탈북에 성공한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전거리교화소의 실상에 대해 증언을 한 사례가 많기에 살아서 나가는게 불가능한 곳은 아니다. 또한 사면을 받거나 병보석으로도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 강도만 따지면 5년만 살아도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사람 잡는 곳이라 중형을 받으면 형량을 다 채우고 살아서 나올 확률은 희박하다.

5. 참고 문헌 및 관련 링크


[1] 물론 이는 요덕수용소의 생존자들이 전부 혁명화구역(석방이 가능한 구역이다. 완전통제구역은 석방 자체가 불가능하다.) 출신이기 때문이란 것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2] 상술한 수감자 수(약 2000명)를 고려하면 연간 사망률이 무려 5%에 육박하는 셈이다. 이는 정치범수용소의 연간 사망률과 비슷한 수준이다.[3] 해당 연구에서는 로동교화소의 사망률을 0.1%로 추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