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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18:26:37

정강산 투쟁

1. 개요2. 배경
2.1. 추수폭동의 실패2.2. 정강산으로 이동2.3. 공산당의 위기
3. 전개
3.1. 저우루의 등장과 거짓말3.2. 주더와의 합류3.3. 토지개혁과 공포정치3.4. 토벌군과의 싸움
4. 결과5. 참고 문헌6. 관련 문서

1. 개요

1927년 10월부터 1929년 1월까지 마오쩌둥이 지휘하는 홍군이 호남성과 강서성의 접경지대의 정강산을 점거하고 국민정부에 대항하여 벌인 유격전을 말한다.

2. 배경

2.1. 추수폭동의 실패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중국 국민당은 우파 성향의 난징 국민정부와 좌파 성향의 우한 국민정부로 분열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우한 국민정부와 국공합작을 지속하기로 하였으나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직접적으로 장악하고 공산당의 무장세력을 갖추라는 지시를 하달한 것이 폭로됨에 따라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도 공산당과 완전히 결렬하게 되었다.

이후 우한과 난징은 영한합작을 통해 통합하였고 천두슈가 영도하던 중국 공산당8월 1일 난창 폭동을 일으켜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한 무장폭동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난창 폭동은 실패로 끝났고 8월 27일, 우한에 위치한 소련인 고문 미하일 라주모프의 자택에서 취추바이, 마오쩌둥, 쑤자오정, 장타이레이, 차이허썬, 샹중파 등 22명의 각급 공산당 지도자들과 코민테른 대표 로미나제가 참석한 가운데 8.7 긴급회의가 개최되었다. 8.7 긴급회의는 천두슈를 우경 기회주의자, 멘셰비키로 비난하며 <전체 당원 동지들에게 보내는 글>을 채택하여 난창 폭동의 실패를 천두슈의 탓으로 돌리고 천두슈를 실각시켰다. 천두슈의 뒤를 이어 취추바이가 총서기에 올라 임시정치국을 조직했고 노동자와 농민의 무장화와 무장폭동을 촉구하는 새로운 당 노선을 채택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취추바이 노선이다. 취추바이 노선에 따라 중국 공산당은 도시에서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무장화를, 농촌에서 추수기를 이용한 농민들의 무장폭동을 지시했다.

1927년 9월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호남, 호북, 광서, 광동의 농촌에서 추수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마오쩌둥은 처음에 상하이의 중앙위원회에서 일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큰 도시로 나가 높은 빌딩에서 살고 싶지 않고 시골로 가서 산에 올라 녹림 친구들을 사귀고 싶다."는 이유로 호남으로 보내줄 것을 청했다. 마오쩌둥은 호남 지역의 폭동을 지휘하기 위해 호남성 전적위원회를 구성하고 장사의 노동적위대와 농민자위대를 동원해 장사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마오쩌둥과 함께 호남으로 파견된 펑공다의 회고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추수폭동의 목표가 비현실적이라고 여겼지만 중앙의 명령을 거스를 순 없었으므로 8월 31일 장사를 떠나 하남과 강서의 접경 지대로 이동, 5천명 규모의 노동자농민혁명군[1] 제1군 제1단을 조직하여 폭동을 준비했다. 하지만 9월 9일부터 시작된 추수폭동은 농민, 노동자들의 호응 부재와 압도적인 전력 열세 때문에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국민혁명군의 반격으로 마오쩌둥 산하의 4개 연대 중 2개 연대가 궤멸당했으며 9월 15일 마오쩌둥과 호남 당위원회는 장사 공격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격 계획을 포기했다.

자신의 부모가 폭도들에게 조리돌림 당해 공산당에 깊은 적개심을 품고 있던 호남 군벌 허젠은 1927년 마오쩌둥의 아버지의 묘를 찾아 파헤치려고 시도했으며 1930년 리리싼창사 폭동을 일으켜 장사를 점령하자 보복으로 11월에 마오쩌둥의 두번째 아내 양카이후이를 처형했다.

2.2. 정강산으로 이동

잔여 부대를 통솔하여 장사에서 동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문가(文家)에 도착한 마오쩌둥은 호남성과 강서성의 경계에 위치한 나소산맥 중부의 험준한 정강산으로 향하겠다고 선포했다. 정강산은 해발 1500~1700미터의 넓은 고원 모양의 산지로 주위가 모두 절벽으로 둘러쌓여 있었으며 호박을 비롯한 많은 양의 농작물이 생산되어 그야말로 천험의 요새였다.

9월 21일, 1사단의 패잔병 1500여명이 정강산으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피로와 패배감에 절어 군기와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태였고 군관과 병사들 모두가 동요하고 있었다. 게다가 여정을 위한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아 열병이 돌았고 9월 29일 영신현 삼마촌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1개 연대 만을 편성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병사들에게 5일 간의 휴식을 취하게 하였고 전투력 강화를 위한 삼만 개편을 단행하였다. 삼만 개편을 단행하는 동안 마오쩌둥은 강서성 성위원회의 소개로 강서성 영강현의 당 조직 및 츠핑전의 원문재의 농민자위군과 연락하였다. 마오쩌둥은 원문재에게 자신의 병력이 정강산에 정착하는 것을 받아준다면 소총 100자루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원문재의 농민자위군은 고작 낡은 소총 60자루로 무장하고 있었고 나머지 무기는 모두 창과 칼에 불과해서 마오쩌둥의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10월 27일[2] 마오쩌둥은 1천명이 될까말까하는 병력을 이끌고 츠핑전에 도착하여 영강현 위원회 서기 용초청과 원문재의 문서 담당 진모평의 영접을 받았다. 원문재는 마오쩌둥에게 100자루의 소총을 받은 답례로 1000원을 건넸고 마오쩌둥은 매우 깍듯한 자세로 감사를 표했는데 공산당에서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마오쩌둥이 자신에게 예의바르게 대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원문재는 자신이 1년 전에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정강산은 원문재(袁文才 위안원차이)와 왕좌(王佐 왕줘)의 농민자위군 600여명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말이 농민자위군이지 실제로는 비적떼나 다름없었다. 마오쩌둥은 왕좌에게도 70자루의 소총과 탄약을 주며 그와 친분을 맺었고 원문재와 왕좌는 마오쩌둥의 해박한 지식과 예의바른 모습에 감탄하여 마오쩌둥과 의형제를 맺고 이후 마오쩌둥을 깍듯하게 '마오 따거'라 부르며 모시게 되었다. 왕좌는 마오쩌둥에게 츠핑전에 근거지를 만들 것을 충고했고 마오쩌둥은 정강산에 입법기관과 행정기관을 설치하여 소비에트를 수립했다.

하지만 원문재와 왕좌가 마오쩌둥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어서 둘은 마오쩌둥이 자신들의 세력을 모두 먹어치우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이를 위해 원문재는 마오쩌둥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마오쩌둥의 세번째 부인이 되는 18살의 허쯔전을 지역 사투리를 통역해줄 통역사라는 명목으로 마오쩌둥에게 소개해주었고 1928년 5월 마오쩌둥과 허쯔전은 원문재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2.3. 공산당의 위기

9월 19일 스탈린은 모든 중국 공산당원에게 국민정부는 탈퇴하되 국민당에는 잔류하라는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국민당을 탈퇴하라고 지시했다. 9월 20일 한커우의 취추바이에게 스탈린의 지령이 하달되었다. 하지만 국민당의 탄압이 거세져서 공산당 중앙은 9월 말 여전히 지하활동이 왕성했던 상하이로 이동해야 했다. 위기 상황에서 공산당 중앙은 마오쩌둥에게 책임을 물었다. 장사 주재 소비에트 영사 겸 소비에트 대표인 쿠추모프는 마오쩌둥이 장사를 공격하지 않은 것을 두고 맹비난을 퍼부었고 마오쩌둥이 직무 유기를 통해 수치스러운 배신을 저지른 비겁자라고 주장했다. 취추바이는 런비스를 전권대표로 장사에 파견하여 즉각 행동을 취할 것을 명령했지만 런비스는 폭동의 시기가 이미 지나갔다고 판단하여 당위원회 지도부 조직 개편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1927년 11월 7일부터 14일까지 로미나제와 올가 미케비치의 주재로 임시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상하이에서 열렸다. 확대회의는 <정치기율결의안>을 채택하여 마오쩌둥과 펑공다를 비롯한 후난성의 인물들을 비난했다. 마오쩌둥은 중앙 임시정치국 후보 위원 자격을 박탈당함으로 정치국에서 축출되었고 마오쩌둥을 군사 기회주의자로 규정했다. 저우언라이도 마오쩌둥을 맹비난했다.
"마오쩌둥의 부대는 토비들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 그런 지도자는 일반 군중의 역량을 믿지 않기 때문에 '군사적 기회주의'에 빠지기 쉽다."

허나 중국 공산당이 기획한 12월 광저우 폭동 역시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이 과정에서 장타이레이가 사망했다. 6만을 헤아렸던 공산당원의 수도 급감하여 1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대다수의 공산당원들은 마오쩌둥처럼 시골의 오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3. 전개

3.1. 저우루의 등장과 거짓말

마오쩌둥이 정강산 근거지를 건설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하이 임시 당중앙은 마오쩌둥같은 인물이 독자적인 군세력을 거느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밀국제연락부 대표 알렉산드르 알브레히트는 1928년 2월에 마오쩌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홍군 창설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들의 군대는 근거지도 없고 지원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많은 부담을 지우고 있다. 일부 병사들은 출신으로 볼 때 반 토비나 다름 없다. 마오쩌둥의 부대를 예로 들자면,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흩어지고 그들 스스로 농민들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특히 우려할 점은 그들 부대가 군벌을 공격하기 위해 번번이 농민에게서 멀리 떠난다는 것이다."

1927년 12월, 상하이 임시 당중앙은 호남 남부에 당위원회를 새로 재편하고 12월 31일 전적위원회 지도부에서 마오쩌둥을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당위원회는 마오쩌둥을 군사 기회주의자로 규정하여 당위원회는 호남 남부의 군대를 책임지고 있는 저우루에게 전권을 부여하여 마오쩌둥의 지휘권을 박탈할 것을 지시했다. 1928년 3월 정강산에 도착한 저우루는 마오쩌둥에게 그가 정치국 후보위원 자리를 박탈당했으며 심지어 마오쩌둥에 중국 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마오쩌둥은 대단한 충격을 받았지만 저우루의 말이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속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우루의 주장에 대응할 수도 없었다. 저우루는 마오쩌둥의 당무를 정지시키고 제1단 사단장으로 전출시켰다.[3] 저우루는 전적위원회를 해산하고 1사단의 당권을 1단 3영 당대표인 22세의 허팅잉에게 맡겼다. 저우루는 젊은 허팅잉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사실 허팅잉은 추수폭동부터 마오쩌둥과 함께하면서 마오쩌둥을 매우 신뢰하는 인물이었고 그 외에도 정강산에는 마오쩌둥을 추종하는 인물이 굉장히 많았다.

저우루는 마오쩌둥에게 정강산에서 나가서 호남 남부로 이동해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현지의 농민 운동을 지원하라고 지시했고 마오쩌둥은 이를 거부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개월 후 마오쩌둥은 저우루를 설득하여 정강산에서 복귀할 수 있었다. 주더가 정강산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마오쩌둥은 저우루를 몰아내기 위해 주더와 손을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3.2. 주더와의 합류

한편 난창 폭동에 참여했다가 참패한 주더는 천이, 린뱌오 등이 포함된 패잔병들을 수습하여 임천을 거쳐 루이진으로 피신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봉기에 호응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농민들은 오히려 적대적이었고 농민들은 낙오한 홍군을 공격해 살해했다. 4천명 이상을 잃은 주더는 루이진에 이르러 국민혁명군의 공세를 받았으나 이를 격퇴했고 여세를 몰아 8월 24일 회창을 공격해서 점령했다. 회창에서 주더는 1천정 이상의 총기와 많은 장비를 습득하고 8월 27일 산터우로 이동했다. 주더의 부대는 9월 24일 산터우에 도착했는데 이 시기에 폭동이 시작될 때 3만에 달했던 병력 중 잔류한 병력은 6천명 정도였으며 무기는 3분의 1을 겨우 무장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1927년 9월 30일, 국민혁명군이 산터우를 포위하려 하자 주더는 서남쪽으로 160킬로미터 떨어진 육풍으로 퇴각했다. 11월에 주더는 마오쩌둥 소속의 유격대와 조우하여 마오쩌둥이 정강산에 근거지를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마오쩌둥과 연계하기 위해 자신의 휘하에 있던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탄을 파견했다. 11월 말, 마오쩌탄은 츠핑전에 도착해 마오쩌둥과 만났다. 주더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 마오쩌둥은 후난 당위원회에 자신의 부대와 주더의 부대를 통합하고 싶다는 통합 계획을 제출했고 당위원회는 이를 비준하여 주더에게 마오쩌둥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정강산에서 멀리 떨어진 주더가 마오쩌둥과 합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주더는 산터우에서 빠져나온 후 강서성 신풍으로 전진하다가 1927년 11월 19일 국민혁명군 16군 사령관 범석생이 자신의 동창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그에게 거짓 항복했다. 주더의 부대는 16군 140연대로 개편되었고 주더는 왕해라는 가명을 쓰고 군사령관을, 천이는 연대 정치지도원을, 린뱌오가 1대대 3중대장을 맡았다.[4]

1928년 1월,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주더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범석생의 16군을 빠져나와 대유를 경유해서 호남성 의장을 점령했다. 1월 23일, 상당한 숫자의 유민들을 흡수한 주더는 자신의 부대를 28연대[5]와 29연대[6]로 개편하고 정부군과의 싸워가며 침현을 거쳐 1928년 4월에 래양에 도착했다. 그의 휘하 병력은 신풍에 도착했을 때 1천명까지 감소되었으나 다시 차차 증강되어 래양에 도착했을 때 1만명에 달했다. 주더의 부대가 래양에 도착하자 마침내 마오쩌둥과 연락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1927년 4월 21일 혹은 22일에 정강산 서쪽 링현의 용강서원에서 마오쩌둥과 주더가 처음으로 만났다. 마오쩌둥은 주더를 통해 자신이 공산당에서 축출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오쩌둥군과 주더군은 완전히 통합되었고 5월 4일 강서성 령강에서 합류대회를 열었다. 후난 위원회는 주모군에게 중국공농혁명군 제4군[7]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제4군은 3개 사단 9개 연대로 편성되었다가 2개 사단 6개 연대로 재편되었다.[8] 군단장에는 주더가, 정치위원에는 마오쩌둥이 참모장에 왕이탁이, 정치부 주임에 천이가 취임했다. 막강한 군대를 이끌게 된 마오쩌둥은 더 이상 저우루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마오쩌둥은 저우루를 몰아내고 츠핑전 북쪽 롱스에 사령부를 구축했고 저우루는 국민당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공농혁명군 제4군 1차 당 대표대회를 소집, 23명으로 구성되는 제4군 군사위원회를 설립했다. 마오쩌둥이 서기로 선출되었고 주더, 천이 등이 위원이 되었다. 1928년 5월 강서 위원회로부터 상공변계특위 서기로 임명된 마오쩌둥은[9] 정강산을 장악한 후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의 주요 임무는 우리가 보기에 두가지다. 토지 분배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 건설이다. 우리는 이러한 임무를 보다 가속화하기 위해 대중을 무장시킬 필요가 있다."

1928년 6월 공농혁명군 제4군은 중국공산당 중앙이 5월에 발표한 <군사공작대강>에 따라 홍군 제4군으로 개칭했다.

3.3. 토지개혁과 공포정치

"중국 토지 문제의 해결은 무엇보다 먼저 사실이 있어야 하며, 그런 다음에 법률로써 그것을 승인하면 된다."
마오쩌둥, 1927년 4월 12일.

마오쩌둥과 주더는 군대를 증강시키기 시작했다. 계속된 폭동과 약탈로 인해 호남 지역의 경제가 이미 파탄 상태에 놓였기 때문에 주더는 야펀 장사를 시작했고 커자인이라 불리는 유랑인들과 빈민들이 주더의 군대를 따라 정강산에 모이기 시작했다. 1928년 5월 시점에서 정강산에 모인 병력은 1만 8천명에 달했는데 이들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유랑민들은 혼란을 틈타 약탈과 살육을 일삼던 폭도들이었고 마오쩌둥도 이들이 '규율이 갖추어지지 않은 엉망인 사람들'임을 인정하고 엄격한 통제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만든 것이 바로 삼대기율 육항주의였는데 1929년 삼대기율 팔항주의로 정착하게 되었다.

또한 정강산은 호박 이외의 농작물이 별로 생산되지 않아 소금, 쌀, 고기, 의약품을 구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당시 정강산의 1만 8천명의 병력 중 6천명 정도가 질병을 앓거나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의약품의 공급이 시급했다. 또한 무기도 형편없이 부족하여 2천정의 소총과 약간의 기관총이 그들이 가진 무기의 전부였다. 병사들을 위한 무기와 군복, 군량의 공급이 절실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원문재와 왕좌가 했던 것처럼 인근의 농민들을 수탈하고 지주들을 학살하면서 자금을 마련했지만 그럼에도 군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마오쩌둥이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내놓은 방법은 바로 토지개혁이었다.[10]

마오쩌둥은 정강산 인근의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소비에트 정부의 노동자, 농민, 병사에게 분배했다. 토지매매는 금지되고 토지를 받은 사람은 위무적으로 경작을 해야 했다. 1928년 11월 25일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6월까지 관할 지역의 대부분의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했다고 보고했으며 나머지 토지도 가을까지 모두 재분배되었다. 모든 토지의 몰수와 평균분배라는 마오쩌둥의 토지정책은 1928년 12월 정강산토지법을 통해 명문화되었다. 혁명사관에서는 이러한 토지개혁 때문에 마오쩌둥이 농민의 민심을 얻어서 국민혁명군에게 저항하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선전했지만, 농민들은 마오쩌둥의 토지개혁을 반기지 않았다. 소비에트 정부를 반긴 사람들은 앞서 언급한 커자인이라 불리는 유랑민들이 중심이었고[11] 그외에는 몰락하는 중소 지주 출신의 젊은이들이나 중등교육 이상의 신식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중심이었다. 일본의 저명한 중국 근현대사 연구자 이시키와 요시히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산당이 군을 이끌고 농촌으로 들어왔을 때, 먼저 호응한 것은 인구 다수를 점하고 있는 빈민들이 아니라 농촌 사회에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무뢰들'이었다. (...) 기존 질서를 타파하는 단계에서는 성실한 농민이 아니라 이렇듯 '정상에서 벗어난 자가' 혁명의 동반자였고, 황폐한 화남의 농촌 사회에는 이런 실업자가 늘 존재했다.
중국 근현대사 3권, 140페이지

땅을 빼앗기는 지주와 자작농들이 반발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고 소작농들도 지주들의 땅을 뺏어서 자신들에게 나누어주기 보다는 소작료 인하와 세금 절감을 원했다. 그리고 씨족 공동체로 이루어진 마을들에서는 토지개혁에 대한 저항이 심했는데 홍군은 토지개혁에 저항하는 농민들을 학살했고 이에 농민들은 정강산에서 달아나거나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사보타주로 저항했다. 달아난 농민들은 국민당 지배 지역으로 가서 홍군을 토벌해줄 것을 요청했고 토벌군의 길잡이를 자처했다. 그리고 마오쩌둥을 따라 온 외지인들은 토착민들의 재산을 약탈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 때문에 토착민들의 반감과 적백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여기에 국민당의 경제 봉쇄로 경제 위기는 심화되었다.

홍군의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토호열신에 대한 노략질이 기반이었는데 한번은 분탕을 쳐서 자금을 모을 수 있지만 살해당한 지주들과 토호들이 게임 몹처럼 도로 부활해서 다시 자금을 내놓을 리는 없으므로 이런 노략질은 한계가 분명했다. 이시카와 요시히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분석한다.
혁명 근거지의 재정은 지배 지역에서 징발 강화와 출병에 따른 주변 지역 지주, 토호의 재산 몰수라는 임시변통에 빠질 위험성을 늘 안고 있었다. 당 중앙은 이러한 행동을 유구주의, 토비적 작풍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지만, 무장투쟁이라는 엄혹한 현실에서 특히 근거지의 영역이 불안정하면 할수록 쉽게 근절될 수 없었다. (...) 안정적인 근거지 건설에 실패한 후에 남은 것은 잦은 수탈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중국 근현대사 3권, 144페이지

결국 소비에트 정부의 변경은 계속되는 토벌과 농민들의 저항으로 사실상 전쟁터로 전락했고 소비에트 정부는 군사화되어 공포정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홍색행형대를 조직하여 야간에 마을을 습격하였고 커자인이 중심이 된 이런 홍색행형대는 토착민 습격에 열을 올렸다. 마오쩌둥은 전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농촌 투쟁에서 우리의 총체적 전략은 현재 (...) 지주와 토호열신, 그들의 앞잡이들을 가차없이 학살하고, 부농들을 적색테러 수단을 통해 위협하여 더 이상 지주 계급에 동조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3.4. 토벌군과의 싸움

당시 국민정부국민당의 2차 북벌에 나서느라 굉장히 바쁜 시점이라서 주모군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928년 6월 강서성 주석 주페이더가 양여헌에게 6개 연대의 병력을 주어 호남의 2여단과 함께 정강산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홍군은 강서성에서 파견된 양여헌 부대에 대해 공격을 집중했고 호남과 광동에서 온 토벌군은 강서성 토벌군이 패주하는 것을 구경만 하다가 철수했다.

1928년 11월 6일, 국민정부는 주페이더를 호남-강서 양성초비 총지휘에 임명하여 18개 연대를 동원해 정강산을 다시 공략하게 했다. 하지만 호남성과 강서성의 부대들이 감정 대립이 심하여 작전 공조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홍군은 이번에도 병력을 집중하여 황양제 전투에서 토벌군을 섬멸했다. 4군단 예하 4개 연대의 맹공에 토벌군 제8병단 소속 4개 연대가 섬멸되었고 토벌군은 다시 패주하였다. 마오쩌둥은 크게 고무되어 시를 지어 자축했다.
산 아래는 온통 저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산 위로 서로 알리는 북소리 들리누나.
적군은 겹겹으로 우리를 에워싸고 있지만
나는 거대한 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네.

삼엄한 방어 진지 이미 구축하고
뜻 뭉쳐 성곽처럼 단단히 이루었나니.
황양제 위로 포성이 울리더니
적은 어둠타고 도망갔다고 하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정강산의 경제위기는 여전히 심각했다. 호박 외의 식재료를 구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호남 출신 병사들의 불만이 심각했으며 영양 섭취가 불균형하여 위통,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고 마오쩌둥도 변비로 고생했다. 그리고 민중에 대한 가혹한 정책이 계속되어 정강산 주위 15만 명의 민중들 대다수가 이미 마오쩌둥의 적으로 돌변한 상황이었다. 1928년 5월 1만 8천명에 달했던 홍군은 12월 6천명 이하로 감소했고 정강산의 재원은 완전히 바닥났다.

그러던 중 1928년 7월 22일, 호남 군벌 하건 휘하의 호남 독립 제5사단장 펑더화이가 평강에서 반란을 일으켜 공산군에 합류했다. 공산당은 이들을 공농홍군 제5군단으로 편성했고 12월 정강산의 주모군에 합류했다. 정강산에 도착한 홍5군 병력과 펑더화이는 큰 충격을 받았다. 펑더화이는 정강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홍군 제4군단 병사들은 아직도 여름옷에 짚신을 신고 있었다. 겨울옷이 전혀 없었으며, 식량을 저장하는 데 필요한 소금도 없었고, 일일 군량에 필요한 동전 세닢조차 지급할 돈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4군과 5군을 통합했고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했는데 불길한 일이 벌어졌다. 마오쩌둥과 주더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단상에 오르자 급조됐던 단상이 무너져내린 것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주더가 소리쳤다.
"염려할 것 없소. 설사 떨어진다 해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 싸울 것이오. 자, 다시 만들도록 합시다."

하지만 병사들 사이에서는 이 사건으로 불안이 퍼져나갔고 불과 며칠 후 마오쩌둥은 정강산을 포기했다.

4. 결과

1929년 1월 1일, 공산군과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허젠이 호남-강서 양성 초비 대리 총지휘에 임명하여 10여개 연대를 동원, 주모군에 대한 토벌 작전을 시작했다. 토벌군이 포위망을 서서히 좁혀오자 마오쩌둥과 주더는 "들판의 호랑이가 개들의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곳"인 정강산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으나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고 토벌군들이 몰려오자 정강산을 떠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마오쩌둥은 궁벽하지만 국민당의 통제가 약한 강서 남부와 복건의 접경지대인 루이진으로 근거지를 이동하여 결정했다.

1929년 1월 14일, 마오쩌둥과 주더가 이끄는 3600명의 병사들이 정강산을 떠나 남쪽으로 향하면서 마오쩌둥의 정강산 투쟁을 종언을 고했다. 마오쩌둥은 중앙위원회에서 보내는 편지에서 정강산에서의 실험은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정강산에는 환자와 부상자를 포함한 1500명의 잔여 병력을 제4군 제30연대 휘하 5개 중대로 재편성하여 4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된 펑더화이의 지휘 아래에 남겨두었다.[12] 펑더화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혁명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강산을 버리고 루이진의 마오쩌둥에 합류하게 된다.

5. 참고 문헌

6. 관련 문서

6.1. 인물

6.2. 사건

6.2.1. 국민혁명

6.2.2. 1차 국공내전

6.2.3. 반장전쟁

6.2.4. 초공작전



[1] 혹은 노농혁명군, 공농혁명군.[2] 혹은 10월 7일.[3] 훗날 마오쩌둥은 이에 대해 자신이 민주 인사가 된 덕분에 사단장이 되었다고 빈정댔다.[4] 문화대혁명홍위병들은 이를 두고 주더가 국민당에 투항한 반역자라고 마구 비난하며 그를 매도하는 대자보를 붙히고 주더 타도 운동을 벌였다.[5] 난창 폭동에 참여했던 원래 병력들.[6] 후일 합류한 유민 부대.[7] 혹은 노농홍군 제4군단.[8] 28연대, 29연대, 30연대, 31연대, 32연대, 33연대, 교도연대.[9] 마오쩌둥이 상공변계특위 서기로 임명되자 4군 군사위원회 서기는 천이가 맡았다.[10] 사실 주도한 사람은 원문재였다.[11] 1930년 마오쩌둥의 강서 소비에트에서도 18명의 지방정부 관리 중에서 노름꾼 출신이 7명이고 이들을 포함해 유민 출신이 반이 넘었다.[12] 허쯔전은 훗날, 그 당시에 자신이 마오쩌둥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오쩌둥을 따라가지 않고 정강산에 남으려고 했으나 마오쩌둥이 자신을 강제로 끌고 가는 바람에 울면서 정강산을 떠났다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 평전의 저자 알렉산드르 판초프는 이미 임신 5개월이었던 허쯔전이 마오쩌둥을 떠날 이성적인 이유가 없다면서 허쯔전의 주장이 신빙성을 의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