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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룽청현, 안신현, 슝현 및 주변 지역은 실질적으로 국가급 신구인 슝안신구의 관리를 받고 있다. [3] 런추시 내부의 화베이유전지구는 허베이성의 지급행정구 대우를 받으며, 허베이성 인민정부와 중국 석유 천연가스 공사 양자의 관리를 받는다.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background-color: rgba(255, 0, 0,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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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북쪽 정딩현의 후주 시기 고성과 971년 송태조의 지시로 세워진 23m 높이의 룽싱사 천수관음보살상. 후자 역시 허베이 4대 보물 중 하나이다 |
당나라 대의 건축이 다수 남아있는 융흥사 (隆兴寺)
1. 개요
正定영어 Zhengding
허베이성 스자좡시의 현. 스자좡시 북쪽에 위치하며, 시가지가 이어져 있어 같은 생활권이다. 인구는 약 60만명이다. 스자좡시의 전통적인 중심지로, 상산 혹은 진정이라 불리며 하북 지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조자룡의 고향이자 1982년 시진핑이 정치에 입문한 곳으로 유명하다.
중세에는 선종 불교의 중심지 중 하나로, 문화대혁명의 광풍에도 불구하고 융흥사 (룽싱스), 임제사 (린지스), 개원사 (카이위안스) 등 여러 고찰이 남아있다. 당나라 양식의 문묘 및 조운묘[1]와 명대의 거대한 성벽 (진정부성) 등도 볼거리이며, 홍루몽 실사 드라마를 찍은 세트장도 있다. 다만 대기오염으로 유명한 스자좡답게 미세먼지가 삼한 편이다.
2. 역사
구도심 전경
춘추시대에 소국인 선우 (鲜虞)의 수도였고, 전국시대에는 중산에 이어 조나라에 속했다. 조나라 시기 일대에 항산군(恒山郡)이 설치되었고, 진나라 시기에는 현 시가지에 군의 치소인 동원현 (東垣縣)이 설치되었다. 진한교체기 시기인 기원전 206년, 항우가 항산국(恒山國)을 신설하고 장이를 봉하였으나 1년여만에 장이가 진여에게 축출되어 소멸하였다. 전한 들어 재차 항산군이 되었고, 동원현은 진정현 (眞定縣)으로 개칭되었다. 기원전 196년, 한왕 신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진회가 진정을 포위하기도 하였으나 한고제가 친정하여 격퇴하고 난을 진입하였다.
2.1. 상산의 중심
융흥사의 독특한 유적인 마니전 (摩尼殿)
9세기 종루와 636년에 세워진 수미탑이 남아있는 개원사 (开元寺)
기원전 187년, 한혜제의 서자 유불의가 상산에 분봉되어 항산국이 재설치되었다. 7년 후 항산국이 폐지되고, 다시 군으로 전환되며 한문제의 피휘를 위해 상산군(常山郡)으로 개칭되었다. 봉국인 조국에 속하던 상산군은 오초칠국의 난으로 조국이 폐지된 후, 기원전 145년에 한경제가 아들 유순을 상산국 (常山國)에 봉하며 재차 자체적인 봉국이 되었다. 다만 기원전 114년, 한무제가 유순의 아들 유발을 폐위하며 상산국은 재차 군이 되었다. 이듬해 한무제는 진정현 등 4개 현 3만 7천호[2]를 진정국으로 편성하고 유순의 서자 유평을 봉하였다.
유평-유언-유유-유옹-유보-유양 계보로 이어지던 진정왕은 유양 대에 신나라가 세워지며 폐지되고 진정현 역시 사치현으로 개칭되었다. 다만 유양은 왕망의 몰락을 틈타 왕랑 (유자여)를 이용해 봉국을 회복했고, 조카 곽씨를 광무제에 혼인시켜 외척이 되었다. 하지만 권력을 탐하던 유양은 서기 26년, 광무제가 파견한 친척 경순에게 주살되었다. 이후 광무제는 유양의 아들 유득을 진정왕으로 삼았다가, 서기 37년 그가 황실과 촌수가 멀다는 이유로 진정후로 강등시켰다. 이로써 진정국은 폐지되었고, 진정현은 상당군에 편성되어 조위 시기에 그 치소가 되었다. 2세기 후반, 진정에서는 촉한의 대장군 조운이 출생하였다.
2.2. 중세
10세기 초에 세워진 정딩현 문묘
중국 선종 5가 중 하나인 임제종의 본원인 임제사 (临济寺). 경내의 징령탑 (澄灵塔)은 당대인 867년에 세워져 금대인 1185년에 재건되었다.
북위 시기 정주 (定州) 상산군에 속했고, 북제 시기 진정현은 그 치소가 되었다. 당나라 들어 정주는 진주 (鎭州), 진정현은 의곽현 (倚郭縣)으로 개칭되었다. 안사의 난 후에는 성덕군절도사 (成德军节度使)의 치소가 되었다. 당나라가 쇠락하자 성덕절도사는 사실상 독립하였고, 907년에 절도사 왕용은 후량에게서 조왕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몇년 후 그의 양자 장문예가 왕용 및 그의 일가가 멸족하고 찬탈하였다. 장문예는 왕 대신 다시 절도사를 칭했다. 그의 아들 장처근 (張處瑾)이 계승한 922년, 후일 후당을 세우는 사타족장 이존욱 휘하의 장수 이존심 (부존심)이 진주를 공격해 장처근과 그의 형제들 및 모친을 사로잡아 노주 (현 창즈시)로 압송했다. 왕용의 복수를 바라는 진주 백성들의 요구대로 장처근은 처형된 후 젓갈이 되었고, 장문예의 시신이 파헤쳐져 시장에서 수레로 뭉게졌다. 이로써 중국 사상 마지막 조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북송 말엽 진주는 진정부 (眞定府)로 승격되었고 하북의 주요 지역 중 하나로 중시되었다. 1126년,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 군이 진정부를 함락했고 지부 이막 (李邈)은 처형되었다. 원나라 시기의 작가 갈라록의 하삭방고기에 따르면 진정은 번영하는 도시였고, 금나라의 멸망 후 변량 (카이펑)과 정주 (정저우) 주민들이 이주해왔다 한다. 원나라 시기 진정부는 진정로 (眞定路)가 되었다가 명나라 대에 진정부로 환원되었다. 동시에 의곽현은 진정현으로 돌아갔다. 청나라 시기인 1723년, 진정부 진정현은 옹정제의 피휘를 위해 정정부 (正定府) 정정현 (正定縣)으로 개칭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2.3. 현대
진정부성 남문 일대
1990년대에 정비된 조운묘 (趙雲廟). 조운고리 (趙雲故里)로도 불린다.
2천년 가량 일대의 중심지이던 정딩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20세기 들어 광공업으로 급격히 발전한 스자좡에 소속되었다. 1982년에는 베이징에서 비서 생활을 마친 시진핑이 28세의 나이로 정딩현 서기로 부임했다. 그는 자신의 첫 정치 경력인 정딩현 서기직에서 1985년까지 3년간 재직하며 정딩의 경제 발전을 위해 힘썼다. 특히 부친의 후광을 이용한 낙하산 인사 이미지를 상쇄하기 위해 매일 자전거를 타고 민생을 살피고 고위 간부들의 비위를 적절히 맞추는 등 고도의 처세술을 보였다. 또한 지역 발전을 위해 홍루몽 실사 드라마의 세트장인 룽궈푸를 유치하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시진핑은 2005년 “정딩현은 제2의 고향이며 지도 간부로 성장한 출발점”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타지역으로 전임한 후에도 그는 5차례 정딩을 방문했으며, 그의 주석 취임 후 중국 관용 언론들은 일제히 시진핑 동지의 정딩 시절을 배우자는 취지의 기사를 내기도 하였다. 시진핑의 정치적 고향 이미지 덕에 2010년대 들어 땅값이 폭등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