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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령부 특임대/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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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의왕시 청계산 중턱에 위치한 북파공작원 충혼탑[1]

1. 개요2. 과거
2.1. HID2.2. AIU2.3. 설악개발단2.4. 과거 출신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요구
3. 슬로건 · 다짐4. 과거 육군 첩보부대 산하 북파공작부대5. 현재6.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가담

[clearfix]

1. 개요

파일:질풍작전.png
북한이 많이 사용하는 An-2와 특수임무요원(2003년 질풍작전)
대한민국 국군의 첩보부대인 정보사령부 산하에서 특수작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2]의 육상 편제이다. 통상적으로 설악개발단의 상급부대였던 AIU(Army Inetlligence Unit)의 과거명칭인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로 불린다.[3] 설악개발단은 김신조 일당의 침투 이후, 이에 응징보복하기 위한 부대로 1968년, AIU(Army Intelligence Unit)산하 특수부대로 창설되었다. 1.21사태 응징보복을 위한 특수부대들이 당시 육해공군에서 여럿 창설되었는데[4] 남북 화해분위기를 타고 응징보복이 흐지부지되며 응징보복부대들이 폐쇄와 통폐합을 거쳐가며 역사속으로 사라졌음에도 설악개발단은 여러차례 개편되는 부침속에서 살아남아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는 부대이다. 본 문서에선 과거 역사를 다룬다. 현재의 관련 정보는 정보사령부 특임대 문서 참조.

과거에는 대한민국 육군 소속으로 명령, 인사, 예산 등 모든 부분에서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통제를 받았으나,[5] 현재는 대한민국 국군의 3군 첩보부대가 모두 국방정보본부 산하 정보사령부로 통합되었기에 국방정보본부로부터 명령, 인사, 예산 등 거의 모든 부분을 통제 받는 군적만 육군인 부대이다. 과거 공개모집시절 '특수정보부사관'이라는 명칭으로 모병했으며 현재는 '육상 특수요원'이라는 명칭으로 모병 중이다.[6]

2. 과거

자세한 것은 북파공작원 문서 참조.

북파공작원이란 한국전쟁 중인 1952년부터 휴전 후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때까지 북한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한 무장첩보원이다. 정보사에 따르면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뒤 남북이 공동으로 공작원 파견을 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북파는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북파공작원들은 최초 한국 전쟁 당시 남한에 있는 지리산 빨치산처럼 북한의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양성됐다. 적 생포 및 사살, 적군진지 주요시설물 폭파, 적지에서 각종 테러를 통한 사회혼란 야기, 첩보수집, 첩보망 구축 등이 주임무였다.

이들은 조선인민군 복장을 위장 착용하고 육해공군의 보급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했고 미숫가루, 생식, 칡뿌리, 소나무껍질을 주식으로 했다. 임무수행 중 부상을 당했을 때는 자결이나 자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작전에 투입돼 살아 돌아온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파일:external/www.militaryreview.com/spy_9.jpg
무장공작원을 훈련시키고 북파를 담당하였던 부대가 바로 육군첩보부대(HID) 제1교육대이다. 대한민국 정보부대는 최초 1946년 1월 경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로 발족하여, 1948년 8월경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국으로, 같은 해 11월 말경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개편되었다. 1950년 7월경 육군본부 정보국 내에 공작과가 생겨서 주로 첩보수집 임무를 담당하게 되는데, 한국전쟁에 따른 첩보업무의 활성화 필요성에 따라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를 1951년 3월에 별도 조직으로 독립시켜서 확대 개편시킨 육군 첩보부대(HID)를 만들게 된다. 일명 돼지부대라고 불리는 부대가 바로 여기다.

1961년 7월 HID라는 부대명을 AIU(Army Intelligence Unit)로 바꾼 뒤, 1972년 육군 정보대(MIG : Military Intelligence Group)를 통합해 육군정보사령부(AIC : Army Intelligence Command)가 된다. 그리고 1990년 각군 정보부대를 통합한 것이 국군정보사령부이며, 현재에는 국방정보본부 예하 정보사령부(DIC: Defence Intelligence Command)이다.

2.1. HID

현재 대중적으로 HID라는 명사는 육군 산하로 존재했었던 수많은 각기 다른 북파공작관련 부대들을 모두 지칭하며 통용되고 있으나 그 부대들은 분명히 각기 다른 부대들이다. 육군 첩보부대가 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tachment)라는 명칭을 사용한 기간은 1950년 7월부터 1961년 7월까지며 1961년 7월, HID라는 명칭을 폐기하고 AIU(Army Intelligence Unit)로 변경하였다.

HID는 직할대와 36지구대, 18지구대 등 여러 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각 군단과 사단에 이러한 지대들을 파견했다. 한국전쟁 당시 HID소속 첩보부대는 30여 개가 있었다. HID 직할대가 제1교육대였고 36지구대와 18지구대는 각기 동해안과 서해안 지역을 맡아 첩보활동을 벌였다. HID 제1교육대는 1952년 10월 말경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청수장에서 창설되어 1953년 6월까지 3기의 교육생을 배출하게 된다. 교육생들은 공수훈련·유격훈련·중요건물 및 교량폭파·도피 및 탈출·사살·납치·교란·사격술·독도법·도둑질 등의 특전유격훈련과 공작에 필요한 훈련, 정신교육 등 16주 과정의 공작원양성교육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훈련시 분대별로 행동했는데, 야간에 북한산 계곡을 누비는 행군을 했으며 담력을 키우기 위해 야영할 때는 동굴에 낙엽을 깔고 담요 한 장으로 몸을 덮고 돌멩이나 해골을 베고 잤다고 한다. 훈련을 마친 제1기생은 1953년 봄 김종벽 소령의 인솔하에 2개 중대로 나뉘어 제1중대원들은 해주 앞 용매도에, 제2중대원들은 진남포 앞 취라도 등 서해안으로 침투했다. 제2기생들은 평안북도 묘향산 일대에 공수낙하하여 침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기상악화에 의해 일부만 투하되었고, 일부는 원산 앞 여도에 합류하였다. 제2기생 일부는 휴전 후 설악대원으로 해상·육지로 침투작전에 참가했다.

제3기생은 김석환 대위가 이끌고 원산 앞 여도에 침투했던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중 HID요원들은 그 당시 한국군이 갖고 있던 장비가 열악해 주로 미군 등 유엔군의 비행기와 선박을 이용해 공중과 해상으로 북한지역에 침투하였다. 설악대는 여도에서 철수한 제1교육대원들과 일부 잔류병들이 그 후 36지구대 예하부대로 개편된 것으로 휴전 후 침투공작을 주로 담당해 여러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들은 10명 내외의 조별로 활동했는데, 다른 조의 활동에 대해 서로가 전혀 몰랐으며 교육내용은 제1교육대와 별 차이가 없었다. 설악대의 대표적인 전과는 1954년 5월 김윤탁 소대장 외 5명이 장전항 인근에 침투하여 인민군 대좌를 생포한 사건이다. 이 전공으로 김동석[7] 36지구대장(소령)은 1954년 5월경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2.2. AIU

육군 첩보부대가 1961년 7월 HID라는 명칭을 폐기하고 새로 지은 명칭이 AIU(Army Inetlligence Unit)이다. 그러다가 1972년, 육군 산하 정보부대를 통합해 육군 정보사령부 AIC(Army Inetlligence Command)를 탄생시켰다. AIC는 1990년, 육해공군의 정보부대를 모두 통합시킨 국군 정보사령부 DIC (Defence Intelligence Command)로 흡수된다.

공작원 포섭에서부터 훈련에 이르기까지 1950년대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북파공작원의 증언에 AIU물색조로 켈로부대 출신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켈로부대의 출신들을 AIU에 고용하여 신참 공작원 포섭과 양성에 켈로부대의 경험을 상당히 많이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AIU본부는 지금 하야트호텔이 있던 지역인 수원지 옆 보광동에 있었는데, 훈련은 강원도 OO군 OO리 첩보대훈련소, 일명 개발단에서 받았다. 정보사 물색조팀에 의해 포섭되어 1주일에 한 번씩 4회 면담한 후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면담은 한 사람씩 앉혀 놓고 하는 일대일 면담이었다.

계약서 쓰고 도장도 찍었다고 하는데, 북파공작원의 증언에 의하면, 계약서 주요 내용은 6개월 교육을 받은 후 이북에 올라가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서 돌아오면, 사회로 복귀시킨 후 제대증도 주고, 평생 다달이 연금도 주고, 성과에 따라 보상도 주고(개인택시 한 대 분), 사회에 적응할 직장, 북파 후 가족들의 생계도 책임져 준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남산야외음악당, 용산 노동회관 등지에 모여 동북산업사(AIU 가명)버스를 타고 양평동에 소재하고 있던 정보사대기소에 갔다. 거기서 머리 깎고 옷 갈아입고 밤새 강릉으로 향했다. 훈련소에서는 파고다, 백담배 등 담배는 3일에 3갑씩 지급되었고, 남산표 속옷, 북한제 계급장·옷·배낭 등이 배급되었다.

무기는 AK소총, 소련제 기관총, 탄알 90발, 세열수류탄 등이 지급되었다. 훈련은 30㎏ 배낭을 거의 매일 메고 훈련을 받았는데,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후 인천대·문산대·전곡대·양구대·속초대·운천대 등 예하부대에 배치 받았다. 인천대와 속초대는 지구대(해상침투)였고, 나머지는 지상대(육로침투)였다. 예하부대에서는 안가(안전가옥)에서 지냈는데, 그 안가에 보통 10여 명이 거주했다. 안가에서 통신·살인·폭파·독도법 등을 가르쳤고 일반적으로 작전은 1조(5인에서 6인)를 편성해 했다. 훈련에 있어서는 일명 키퍼(Keeper)가 있어 조교역할을 담당했다.

1970년대 초반 설악부대, 즉 설악개발단 출신들의 경우 제대할 때 상병과 병장 계급장을 받았다.[8] 이는 오항균 전 정보사령관이 밝혔듯 사실은 부대문화로 인하여 대원들에게 계급을 알려주지 않고 부대내에서 계급을 부르지 않았다 뿐이지, 군인이었기 때문에 재입대 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반대로 설악개발단 대원들과 다르게 민수공작원들은 공식적으로 군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복무 기록이 없어, 다시 군대에 입대하여 진짜 병역의 의무를 치러야만 했다.[9] 설악부대와 같은 무장유격대와는 별도로 AIU에서는 단독으로 활동하는 부대들도 양성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작원들 증언에 의하면 청계산(일명 악마산)에 OO부대가 단독활동 공작원을 양성하는 부대였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지금 삼팔교가 있는 경기도 OO군 OO리에 있는 부대도 그런 곳이었다고 한다. OO리에 있는 부대는 절취반·사진반·납치반으로 나누어져 절취반과 사진반은 단독 침투, 납치반은 3인 1조로 작전했다고 한다. 정보사에 따르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남북이 서로 공작원 파견을 자제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공작원 파견은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10]

2.3. 설악개발단

설악개발단은 김신조 일당의 침투 이후 이에 대응하고자 1968년, AIU(Army Intelligence Unit)산하 특수부대로 창설되었다.

설악개발단 창설기획자 이춘국 예비역 대령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Q: 창설 시기는 역시 對北 특수공작단인 「설악개발단」과 비슷하겠네요?
A: "그렇죠. 1968년에 창설됐어요. 창설 준비를 기획하고 있을 때 저는 월남에 파견 나가 있었는데, 부대장이 귀국하라고 해서 돌아왔어요. 부대장한테 귀국 신고한 직후부터 특수공작부대 창설을 제가 실무적으로 지휘했어요. 전략목표·전술목표·훈련계획 등을 정하고 현장 지도도 했죠. 선갑도 부대가 803대, 중앙물색조를 훈련시키는 809대, 설악개발단 909대가 그때 창설됐죠"
민간공작원 출신 김소웅씨 발언[11] 정보사 육상 출신 유튜버가 업로드한 동영상 1분46초 정보부대 내 특수임무공작부대 창설기획자 이춘국 예비역 대령 발언

북파공작이 수행되던 71년 이전 당시 육군 산하에는 수많은 북파공작 부대들이 있었으며 개중에는 민간인으로 이루어진 부대들도 있었으나 설악개발단, 설악단이라 불리는 부대는 현역군인으로 구성되었었다. 현역군인으로 이루어진 만큼 장기복무 또한 가능했다. 설악부대가 현역군인이 아니었던 적은 없다. 북파공작 관련 부대들은 해체와 창설 등으로 부대의 계보가 복잡하고 육해공 정보부대의 통합체인 현재의 정보사령부에서 구체적으로 부대계보를 명확히 공개한 적이 없어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90년대까지 복무기간은 3년이었으며 휴가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존치되어 현 국군정보사령부 특임대 육상으로 육군 첩보부대 산하 북파공작부대의 맥을 잇고 있다.

즉, 북파활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민간인으로 구성되었던 수많은 부대들이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민간인구성 부대는 모두 폐쇄되었고 현역 군인으로만 구성되어 설악개발단이라 불렸던 지금은 육상이라 불리는 현역 군인 부대만 존재한다는 것.

이와 같은 사실은 진중권 교수의 '북파공작 수행자회의 개그쇼'라는 칼럼과 그 칼럼을 둘러싼 특수임무수행자회 회원들 간의 소송에서 그 전제가 된 사실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 위법으로 볼 수 없다. 라고 판결되어 본의 아니게 공식적으로 인정 되었다. 이에 따르면 북파공작 희생자 7천여 명의 99.8%가 민간인 부대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지금은 모두 HID라 지칭되지만 사실은 민간인구성 부대들과 설악개발단이라는 현역군인 부대는 별도의 부대였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 이 문서의 주인공이자 현재까지 존재하는 부대가 바로 과거 설악개발단이라 불렸던 부대이다. 현재 모병은 민간 모병만 하고 있으며 육상 특수요원으로 비공개 모병을 하고 있다.

2.4. 과거 출신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요구

2002년 9월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정부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며 목숨 걸고 무력시위를 하겠다고 선언한 북파공작원 설악동지회(회장 정순호)가 29일 오전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 양측 모두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설악동지회는 이날 오전 10시 40분경 영등포역 앞 롯데백화점 삼거리를 점거하고 시위에 들어갔으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진압에 나서자 가스통과 쇠파이프, 깨진 보도블럭 등을 이용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때 진압했던 부대가 그 유명한 단셋 (1001, 1002, 1003 중대) 밑은 해당 시위 영상.
6:56부터 한소절 빠진 켈로가를 들을 수 있다.[12]
켈로[13]

김일성 마빡에다 대검을 꽂고
유유히 돌아오라 켈로의 용사
적진 속을 마음대로 누비는 우리
남포동의 밤거리는 모두 나의 것
장하다 그 이름 켈로의 용사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에 의해 보상 받고 있는 인원들은 크게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다.
1.북파공작을 수행한 인원(민간인, 현역)
2.북파공작을 수행한 인원을 지원한 인원(호송업무 등)
3.북파공작이 중단된 72년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첩보부대 소속의 특수부대원들.
법률제정 당시 북파공작 수행 희생자의 99.8%를 차지하는 민간인신분의 공작원들의 경우 크게 시시비비 가릴 것 없이 보상하기로 의견이 모아졌으나 현역군인들의 경우 법률 제정 당시 보상대상자에 포함 시킬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민간인들과 다르게 '현역 군인' 신분으로 복무했기 때문이다. 현역신분이라 함은 군번이 있는 신분이 보장된 군인이었고 복무에 대한 대가(봉급)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결국 현역들도 공작을 수행하였으니 보상 해주자는 대승적 차원으로 보상 받게 되었고 7.4남북 공동성명 이후의 북파공작을 수행하지 않은 첩보부대 현역군인들 또한 모병 당시 기망과 복무 당시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이유로 추후 법률 개정으로 보상 받게 되었다.[14] 그것이 알고싶다 886화 "빵빠레[15]와 빠삐용- 나는 무엇이었나" 편을 통해서 보면 당시 복무 생활상을 가늠 할 수 있다

3. 슬로건 · 다짐

잔인한 훈련, 무자비한 응징[16]
우리 설악단 전사는 공명심을 위하여 일하지 아니하며 색깔 있는 행동을 피하고 소리 없는 가운데 조직의 대의를 위하여 헌신한다.
한번 물면 끝장을 보자
멋있게 싸우고 값있게 죽자.[17]
1.나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맘을 다 바친다.
2.나는 배신없이 의리 지켜 진실하게 살아간다.
3.나는 음지에서 싸워 이기고 양지에서 영광 누린다. [18]

4. 과거 육군 첩보부대 산하 북파공작부대


자세한 것은 유용원 군사세계 참고.

5. 현재

5.1. 정보사령부 특수임무대

현재는 정보사령부특수임무대로 존재하며 각각 육상해상으로 모집한다.

현재도 훈련이나 교육이 무척 고되고 길며 힘든건 여전하지만, 그 외 복지는 옛날과는 달리 엄청난 대우를 자랑한다. 특히 외출이나 외박, 휴가가 없다는건 과거에 해당되던 이야기. 자세한 것은 정보사령부 특임대 문서 참조.

최근 기존에 사용하던 소음권총과 저격소총을 대대로 교체할 예정이다.https://m.dcinside.com/board/war/4087144

6.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가담

12월 9일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이 제보를 밝혔는데 계엄 선포 당일인 지난 3일 정보사령부 특임대/육상의 각 부대별로 5명씩 선발한 최정예 요원 20여명을 서울 모처에 대기 시켜놨었다는 것이다. 지난 10월 30일부터 최정예 요원 선발 지시 및 착수했다고 한다. 11월 7~14일에는 체포조 휴가제한 및 부대대기가 이루어졌으며, 12월 3일에는 정보사 모 대령이 체포조가 4~5일 동안 숙박할 수 있는 짐을 챙겨 21시까지 수도권 모 부대로 집결을 지시했다. 3일 21시에서 4일 05시에 체포조가 집결한 가운데 출동 대기하다 해산했다고 한다. 이들의 임무는 만약 국회의원들이 국회를 빠져나가거나 숨어있을 경우 정보사 특임대가 투입돼서 체포해오는 역할을 맡은 체포조였다고 한다. 계엄이 해제되면서 임무가 부여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정보사 특수임무대는 요인 암살, 체포가 주임무이기 때문에 육군특수전사령부 투입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12월 11일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이 특임대 역할이 당초 알려진 '국회의원 체포조'가 아니라, 북한군을 위장하는 등 사회 혼란을 초래해 비상계엄의 대의명분을 사후 만들어내는 것이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청사에도 진입했다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임무는 파악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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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수임무수행자 유족동지회 특수임무수행자 유족동지회 측과 정보사 육상, 해상 및 공군, 해병 북파 목적 부대들로 이루어진 특수임무유공자회(구 특수임무수행자회)는 출신 부대도 다르고 다른 단체다. 개요 문단에 링크되어 있는 진중권 교수의 칼럼에 관한 송사사건을 통해 명백히 밝혀진 내용이다. 특수임무유공자회가 현역군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들로써 2002년까지 해당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북파여부와 상관없이 보상을 받아 젊은 사람들이 많은 단체라면 유족회 측은 북파가 횡행하던 70년대 이전의 군번없는 민간인들로 구성되었었고 지금은 사라진 부대들의 부대원 유족들이 주축인 단체다.[2] 과거엔 존재 여부가 기밀이었으나 현재는 부대의 존재 여부는 기밀이 아니고 다른 군부대와 마찬가지로 부대의 세부사항이 기밀이다. 정보부대 특성상 다른 부대들 보다 소속 부대원들을 대상으로 보안검열, 보안교육 등이 철저하다. 때문에 이쪽 분야 종사자였거나 가까운 지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귀동냥조차 듣기 어렵다. 국방부 내부 분류상 특수전 부대로 육군 특전사, 해군 UDT/SEAL이 있고 다른 특수부대들을 '특수임무부대' 라고 지칭한다.[3] HID라는 명칭은 육군 첩보부대가 1950년~1961년의 기간동안 사용한 명칭이므로 1968년 창설된 설악개발단과는 시기가 겹치지 않으나 대중들에게 북파공작원=HID라는 인식이 강해 HID로 통칭되고 있다.[4] 공군 684, 육군 선갑도, 해병 MIU 등[5] 군사정권 북파 실행 시기엔 중앙정보부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국가정보원은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정점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6] 육상 소속 부사관 요원들의 병과명은 '인간정보'이다. 해상과는 달리 육상은 육군의 특성상 더욱 크고 세세한 정보 특기와 직렬을 가지고 있고, 이들의 전문 특기인 '특수정보'도 정보병과 인간정보 특기 산하에 있는 세부직렬이기 때문.[7] 육사 8기, 예비역 대령으로 맥아더가 "This man" 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임한 사람이다. 이렇게 부른 이유는 맥아더에게 올라오는 북한군에 대한 고급정보가 오면 맥아더는 자신의 책상에 둔 김동석의 사진을 가르키며 This man이 보낸 거냐고 물어보고 그렇다면 전적으로 그 정보를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군에서는 6.25 4대 영웅 중에 한 명이라고 평가한다. 참고로 가수 진미령 씨의 아버지 되신다.[8] 구 주민등록증 앞면 병역란에 첩보대로 표기되어 있었다고 한다.[9] 군필자가 민수공작원이 되었던 경우는 다시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미필자가 민수공작원이 된 경우은 다시 군대에 가야만 했다.[10] 하지만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다.[11] 포섭하는 대로 데려가서 키퍼로 불리는 교관이 1대 1로 훈련을 시켰다. 따라서 군대처럼 집단훈련을 받는 특수임무수행자들과 달리 동기나 기수가 없다. 점조직으로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기에 같은 훈련을 받고 있어도 서로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특수임무수행자들은 훈련 중에 찍은 단체사진이라도 있지만 민간공작원은 훈련받을 때 사진이 없다. 특수임무수행자가 무장공비처럼 적지에 침투해 파괴, 살상을 함으로써 혼란을 유도하는 게 주 임무라면 민간공작원은 정보수집, 요인 암살과 납치 같은 간첩 역할이 주 임무였다. 김소웅씨가 말하는 특수임무수행자들이 군인공작원인 설악개발단부대원들이고 민간공작원이 속칭 민수라 불리는 사람들이다.[12] 회원들이 잘라 부른 것이 아니라 편집으로 짤린 듯하다. 아무래도 마빡에 대검을 꽂는다는 구절을 방송으로 내보내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13] 사실 KLO의 적장자 부대는 특전사라고 볼 수있다. 특전사는 부대가 해체되어 흩어져 있던 KLO부대원들과 다른 유격부대원들을 주축으로 제1전투단이라는 명칭으로 1958년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HID는 KLO와 동시대에 다른 부대로 존재하다가 KLO가 해체된 이후 몇몇 KLO부대원들을 끌어온 것이고 현재 정보사 육상으로 존재하는 설악부대는 HID의 적장자이기 때문이다. 계보적으로 KLO의 적통은 특전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14] 북파공작을 수행하지 않은 현역군인들까지 보상하게 된 것에 대한 논란은 물론 있다. 당시 인권침해는 국군 어느 부대나 만연해 있었고 실제로 북파공작을 수행했지만 복무기록이 모두 소각되고 해체된 일부 민간인, 공군 쪽 부대들은 보상을 아직도 못 받고 있기 때문이다. 육군의 설악부대, 해군의 해상정찰대, 해병의 마니산부대, 공군의 공정부대 등이 현역군인들이다.[15] 가혹행위 중 하나. 겨울철엔 얼음물에 2, 3시간을 버티게 하는 가혹행위이다.[16] '잔인한 응징 무자비한 보복' 이라는 설도 있음[17] 참여정부 시기에 '멋있게 싸우고 값있게 살자' 로 바뀌었으나 이후에 다시 해당 문구로 회귀했다는 증언이 있음.[18] 강철부대3에서 정보사를 나타내는 대사로 사용되었으며, "우리는 음지에서 싸우고 양지에서 영광을 누린다."로 살짝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