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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4:30:48

국군정보사령부 특임대/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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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과거
2.1. 기원에 대한 논란
2.1.1. UDT/SEAL 파견요원설 2.1.2. 1946년 창설된 해군첩보부대의 후신설2.1.3. UDU 내부 역사전시관
2.2. 신분에 대한 논란2.3. 인천 상륙 작전 참전 여부2.4. 1973년 이후 역사
2.4.1. 502기지2.4.2. 활동
2.5. 과거 전역자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 문제
3. 현재4.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131209018701089_thumb_800.jpg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공원 내 위치한 해군 첩보부대 충혼탑
해군첩보부대 UDU 중앙동지회
즐겨라 고통을, 경험하라 인내를.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죽음을 택한다.
적의 살을 찢고 피를 마시자.
강한 파도가 강한 어부를 만든다.
침착, 냉정, 숙고
대한민국 국군의 첩보부대인 국군정보사령부 산하에서 특수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1][2] 통상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라고 불린다.

본 문서는 과거 "UDT 교육훈련대에서 교육을 받고 해군 첩보부대에서 복무하며 UDU라 불리던 수중파괴요원/UDT 직별의 군인"과 "1971년 창설된 UDU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은 수중파괴요원/UDU 직별의 군인" 그리고 "해군 첩보부대 호송부대 소속의 일명 비둘기요원(502기지)"의 역사를 다룬다. 현재의 관련 정보는 국군정보사령부 특임대 문서 참조.

과거 순수 대한민국 해군 소속으로 명령, 인사, 예산 등 모든 부분에서 대한민국 해군본부의 통제를 받았으나, 1990년, 대한민국 국군의 3군 첩보부대가 모두 국군정보사령부에 통합 되었기에 국방부 직할부대인 국군정보사령부 소속으로 부대원들만 해군일 뿐 명령, 인사, 예산부분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해군본부의 통제로부터 독립했다.[3] 현재 모병은 민간에서 비공개 모병을 하고 있다. 국군정보사령부 산하의 대부분의 부대가 그렇듯, 대외적으로는 보통 일반 회사명과 비슷한 위장명칭을 사용한다. 과거 공개모집 시절 '특수 정보 부사관'이라는 명칭으로 모집했으며 현재는 '해상 특수요원'이라는 명칭으로 모집 중이다.[4]

증언, 자료, 정보공개, 재판에 따른 판결문 등에 따르면 이 부대의 마지막 북파공작은 1971년이라고 한다.

2. 과거

자세한 것은 북파공작원 문서 참조.

북파공작원이란 6.25 전쟁 중인 1952년부터 휴전 후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때까지 북한 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한 무장첩보원이다. 정보사에 따르면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뒤 남북이 공동으로 공작원 파견을 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북파는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북파공작원들은 최초 6.25 전쟁 당시 남한에 있는 지리산 빨치산처럼 북한의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양성됐다. 적 생포 및 사살, 적군진지 주요 시설물 폭파, 적지에서 각종 테러를 통한 사회혼란 야기, 첩보수집, 첩보망 구축 등을 주임무였다.

이들은 조선인민군 복장을 위장 착용하고 육해공군의 보급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했고 미숫가루, 생식, 칡뿌리, 소나무껍질을 주식으로 했다. 임무수행 중 부상을 당했을 때는 자결이나 자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작전에 투입되어 살아 돌아온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2.1. 기원에 대한 논란

2.1.1. UDT/SEAL 파견요원설

1971년 5월까지 대한민국 해군의 특수부대원 교육훈련은 진해 해군기지 UDT 교육훈련만 존재했는데 이 교육훈련을 수료한 군인에게는 부가직별로 수중파괴요원/UDT가 부여되었고 이 군인들이 UDT에서 복무하면 UDT, 인천광역시의 해군 첩보부대(당시, NRU)에서 복무하면 UDU라 불렸다. UDU라 불린다해서 직별이 UDU로 바뀐다거나 다른 직별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고(당시 UDU라는 직별자체가 없었다.) 단지 NRU에서 구별되고자 UDU라고 불렸을 뿐이다. 지금의 UDU는 1971년 5월에서야 인천에 UDU자체 교육대가 창설되어 1971년 10월 UDU 1기가 배출되면서 탄생했다. 그러나 UDT 기수를 물려받아 UDU 1기가 아닌 UDU 17기라 불리는데 엄밀히 말하면 교육대가 생기고 그 교육대에서 시행된 교육훈련의 첫 기수이니 1기가 맞다. 1968년 김신조 1.21 사태 이후 UDT퇴교생, 단기과정 수료생 또한 해군 첩보부대에서 UDU로 불리며 복무하였으나 이들 또한 UDT 교육훈련대를 거친 인원들이었으며 북파공작은 UDT 정식수료 대원들만 수행했다고 해군 북파공작 최다수행자인 김영춘 UDT 8기생은 밝혔다.
해군의 북파공작은 1971년 여름 UDT교육대 UDT수료생들이 수행하였고 이를 마지막으로 없다고 한다.
UDU가 민간인이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UDU훈련소가 존재하지 않다가 1971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국회의원의 정보공개 요구로 최근에도 다시 한번 확인된 사실이다.
파일:FB_IMG_1572794959957.jpg
UDT, UDU 부대장의 진술서
"첩보부대에서 북파공작시 희생된 전사자들 모두 UDT출신들 입니다."

북파공작임무를 수행하지 않았으나 훈련을 인정받아 보상받은 인원들중에 임무수행자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김영춘 UDU경북지회장과 박부서 육군첩보부대 동지회 회장이 함께 한탄했다는 내용의 동영상이 있다.
파일:Point Blur_Nov062019_005123.jpg
초대 UDU 동지회 회장(UDT 4기 조OO)이며, 초대 UDU 동지회장은 UDT에서 복무 중 당시 UDU 부대장을 하고 있던 UDT 창설요원이자 UDT 부대장이었던 장OO이 직접 불러서 UDU로 갔다고 한다.

해군 측 최다 북파공작임무(15회)를 수행한 UDT 8기 김영춘 현 UDU경북지회장(61년~70년 군복무)에 따르면 북파공작을 수행하던 시기의 해군첩보부대 내, 특수대원, 일명 UDU는 전원 UDT출신이었으며 UDU를 UDT출신들이 창설했다고 밝혔다.

생각나는대로 밝힌 당시 해상정찰대의 인원은 다음과 같다. 채O석(문장군), 강O복, 조O철, 이O석(여두목), 김O남, 정O화, 김O태, 최O석, 권O근, 장O재, 권O길, 김O수 그리고 김영춘 본인등이다. 대략 기억나는 인원들은 이와 같고 16명이었다고 밝힌다. 비 UDT 출신 인원이 북파공작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는데 노OO, 허OO의 경우다. 두 인원은 작전요원은 아니었고 주계(취사)였으나 노OO, 허OO은 본인들도 작전에 참가하고 싶다고 지속적으로 밝힘에 따라 두 번 정도 데리고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당시 작전상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것은 아니고 그때 하달 된 임무 자체가 공작원 호송 임무였기 때문에 보트에 노OO, 허OO을 태우고 호송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또한 실제로 해군첩보부대에 작전요원으로 전입한 UDT 출신들처럼 실제로 북파공작을 했던 사람들만 보상받은 것이 아니라 보상법에 해당되는 시기, 해군첩보부대에 복무 했던 인원들 모두가 받았다고 밝힌다. 마지막 북파공작은 1968년 10월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고 이는 북한과 합의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북파공작활동을 하던 시절 작전요원은 UDT가 아니면 받아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임형신 (현)UDU동지회장의 주장이 나오기전 2021년 1월 29일 사나이김소장의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 되었던 이강현 특수임무유공자회 부산광역시 남부연합지회장(UDT 11기)[5]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영상 15:40초부터

사나이김소장 : 그럼 인천(해상정찰대, UDU)에 올라가신 계기는 지원해서 올라가신 겁니까?

이강현 특수임무유공자회 부산남부 연합지회장 : 지원이 아니라 차출, UDU는 전부다 차출이야. 지원해서 올라가는 거 아니야. 그 당시에는 중앙정보부 이런데서도 직접 차출해서 뽑아가고 또 UDU선배들이 딱, 보고 일 할만한 사람들 뽑아갔다고.[6]

사나이김소장 : 그때는 팀출신(UDT)들로 해가지고.....

이강현 특수임무유공자회 부산남부 연합지회장 : 그렇지. 전부 다 팀출신들로 해가지고... 그러니까 팀출신이 6기생부터, 이걸 알아야돼. 6기생부터 16기까지 팀출신(UDT)들이 UDU 왔다갔다 했다고. 왔다갔다 하다가 16기 이후에 17기 부터는 UDU 자체에서 교육을 시켜가지고....

(중략)

이강현 특수임무유공자회 부산남부 연합지회장 : 그 당시에는 UDT에서 훈련을 UDT, UDU 따로따로 시킨 게 아니라 교육을 받다가, 수업하고 난 다음에 한 팀 인천(해상정찰대, UDU)으로 보내고, 한 팀은 UDT로 보내고 그랬지.
UDU 근무 이력이 있는, 미군에서 정년퇴직을 한 UDT 1기 한학준의 진술
영상 4:17초부터

한학준 : 사실, UDT에서 UDU가 나간거지. UDU는 사실 될 수가 없어요. UDU는 원래 Unit거든.[7]Unit는 Team보다 몇배 커야 돼요. 몇개 팀 합해서, 3개 Team 합해서 UDU[8]가 되는데 우리가 교육받을 때(미국 해군 UDT)[9] 그렇게 받았거든. 근데, UDU가 그렇게 되지 않거든요. 몇백명 안 됩니다. 몇천명도 안 되고, 몇십명도 안 돼요.

사나이김소장 : 진해에서 UDT교육을 시키고 동해, 서해 해가지고 3개가 나오니까, 그게 합해지면 UDT팀이 3개 팀이 있으니까 UDU가 된다.

한학준 : 그럼, 팀이 3개란 말이야. 1팀(진해), 2팀(서해), 3팀(동해) 3개가 합해서 UDU가 되는거에요. 그렇게 UDU를 만드는 거에요. 그게 UDU에요.

사나이김소장 : 처음에 기획 할 때는 동,서해(UDT팀을) 만드는 걸로 기획을 했었습니다.

(중략)

한학준 : 이름 뭐 붙일까 그러다가 아, 우린 UDT출신 아니냐! UDU라고 한거야. 그래서 UDU가 된거야.

사나이김소장 : 근데 그 사람들(6.25때 첩보수집)은 UDU가 아니잖습니까? 정보부대지.

한학준 : 아니지. 정보부대지.

사나이김소장 : UDU라는건 UDT를 받은, 1960년 6기생부터 말을(UDU) 한건데.
2021년 10월 29일 사나이김소장이 김영춘 UDU경북지회장[10]과의 대화영상을 업로드 하였다.
영상 1분 32초부터

김영춘 UDU경북지회장: 원래 창설이 UDT출신들이 창설을 했고, UDU를 그후, 그훗날은 인원을 보충하게 되면 전사를 당하던지 제대를 하든지 하고 나면 인원이 모자르면 UDT에서 차출해 올리는 거야 전부 UDT에서. 그 필요한 사람을 거기서 차출을 해가지고,

(중략)

김영춘 UDU경북지회장: 그런데, 뭐? 저거는, 저거가 뭐 했다고?

사나이김소장: 그러니까, 실제 UDU라는 게 이제 우리 UDT선배들이 가서 UDU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대북작전을 다 했는데 그 사실을 부정하는 거지 말입니다.

김영춘 UDU경북지회장: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 내가 얘기할게 지금 회장(UDU)하는 사람이 UDT출신이가?

사나이김소장: UDU입니다. 71년도에 따로 만들어져서 UDT교육을 시킨 UDU인데 선배님 말씀처럼 우리 UDT선배님들이 대북작전한 그 덕으로 자기들은 대북작전 해본적도 없으면서 보상받고 있는데 UDT선배들이 작전한 것을 자기가 중앙회장이라는 사람이 부정하는 거지 말입니다. UDT선배들이 한 것이 아니고, 그건 일부 1~2명 섞여있던 거고 따로 자기들이 한 것처럼

김영춘 UDU경북지회장: XXX XX
2022년 4월 15일 사나이김소장이 최도경 원로[11]의 별세 이후, 생전에 찍어둔 최도경 원로와의 대화 영상을 업로드 하였다.
영상 58초부터

사나이김소장 : 선배님, UDT 6기 수료 하시고 인천[12]가셨을 때 선배님 위로 특수교육 받은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까? 6기생 밖에 없었습니까?[13]

최도경 원로 : 그렇지, 없었지.

2.1.2. 1946년 창설된 해군첩보부대의 후신설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htm_201309288305530103011.jpg
레오파드 패턴 전투복
그간 본 문서와 UDT 문서에도 서술된 해군 특수전전단의 파견 요원들이 직접적인 기원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UDU동지회 측의 공식적인 입장[14]이 나왔다. 주라벨TV에 출연한 UDU동지회 회장 임형신 초빙교수(UDU36기 90년대 군복무)의 반박 설명이 나온 것이다.

임형신 UDU동지회장에 따르면 해군 첩보부대는 1946년도에 출발했고 UDU라는 명칭은 1954년도에 생겼다고 밝히면서 UDT는 1955년에 창설되었기 때문에 UDU의 역사가 UDT보다 훨씬 길다고 밝혔다. 신규인원을 해군 정보특기 부사관, UDT, 해병대 부사관 등 해군 내에서 소수 선발으며 육군특수전사령부 출신의 지원자도 있었다고 진술했다. 선발된 인원들은 주둔지에서 훈련받지 않았다. 신규 인원 육성은 알려지지 않은 섬들에서 진행되었으며, 기존 NIU 요원들은 선발인원들을 필요한 과정별로 일대일 전수와 비밀훈련을 통해 양성했고 필요한 경우 위탁교육을 받았다. 양성이 끝난 대원들의 주둔지는 임무에 필요한 기반만 갖추어 두었다.

1.21 사태 이후 첩보부대 증강으로 기존에 첩보부대가 없던 공군, 해병대는 신규창설을 했고 이미 존재했던 육군과 해군은 나름의 증강이 있었다. 이때 신규 주둔지에 훈련시설을 갖춘 훈련대 증강이 1973년이었다는 것이 설명의 요지다. UDT/SEAL 측은 이 과정을 자신들의 파견 인원에서 자체양성으로 전환한 것으로 왜곡했다는 것.

민간인 대상 선발이던 HID와는 달리 전통적으로 NIU시기부터 다음 기수를해군 내 자원자들을 대상으로 모집하고 6개월간 훈련을 거쳐 통과한 인원들을 첩보부대 소속으로 변경하는 방식이었다. 보상이 행해졌을 때, 대상자들이 모두 현역이었기에 이수하지 못한 인원들에게도 보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선 임형신 UDU동지회장의 주장과는 상반된 내용의 자료를 이미 UDT측에서 국방부에 정보공개를 통해 확보하였고 이를 페이스북 페이지에 2020년 10월 11일부터 게시하고 있었다. 해당 자료에는 70년까지 별도의 UDU 교육이 없었고 UDT 부대원 중 일부를 UDU 요원으로 선발하였다고 기재 되어있다. 고령의 예비역 원로들의 진술인 UDT교육 수료 후, 일부는 진해(UDT)로 가고 일부는 인천(해군 첩보부대)으로 갔다거나 UDT부대에서 생활하고 있다보면 선배들이 진해에 내려와 인천으로 뽑아 갔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파일:훈련소 부존재 사진.jpg
특수팀에서 차출했다는 교관들이 누구인지는 UDT문서에 UDU자체 교육 1기(UDU 17기)의 진술서 사진이 이미 업로드 되어있다.
파일:정보공개.jpg
1971년 이전에는 UDU교육대가 없었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 되었다. 사나이김소장이라는 유튜버가 2023.7.29.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관련 자료를 공개하였다. 이 자료는 국민의힘 성일종의원이 국방부에 자료를 요구하여 국방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단에서 회신한 것으로 보이는데 UDU교육대는 1971년에 창설되었음을 이 자료에서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사나이김소장은 다른 동영상에서 해군 직별, 수중파괴요원/UDU는 1971년에 창설된 UDU교육대에서 수료자를 1971년 10월 처음 배출하면서 탄생되었다고 밝혔다. 다양한 자료와 진술(주장)들을 종합하여 교차검증해보면 1971년 UDU교육대 창설 이전까지, 해군에서 북파공작을 수행하던 UDU라 불리던 북파공작원은 UDT에서 교육 받고 부가직별 수중파괴요원/UDT를 부여받은 군인이었음은 명백해 보인다.

2.1.3. UDU 내부 역사전시관

2021년 6월 1일에서 2일로 넘어가는 시각 UDT/SEAL 대위 출신이면서 전역 후, 군사컨설턴트 및 유튜버로 활동중인 이근의[15] 인스타그램 계정에 UDU내부 역사전시관으로 보이는 곳에 설치되어 있는 부대연도표를 배경으로 이근과 UDU군복을 입은 현역대원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 잠시 게재되었었다.[16] UDU 역사전시관에는 1955.07.01. 해상첩보 공작대(U.D.U.)발족. 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이는 UDT측은 고사하고 임형신 UDU동지회장의 주장인 1954년과도 차이가 있다. 임형신 UDU동지회장은 유튜브채널 주라벨TV에서 UDU라는 명칭은 1954년에 생겼고 UDT는 1955년에 창설되어 UDU가 UDT보다 역사가 더 깊다고 주장했으므로 창설년도가 헷갈렸을 확률은 사실상 없어보인다. 발족이라는 뜻은 어떤 조직체가 새로 만들어져서 일이 시작된다는 뜻이기에 현재 UDU부대 내 역사전시관에서는 UDU부대 창설일을 1955년 7월 1일로 명시하고 있다.

2.2. 신분에 대한 논란

자신들이 군인이었음을 부정하고 군번과 계급도 없던 민간인이었다고 주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언론사 취재에 밝힌 내용이거나 UDU예비역단체 사무총장을 지낸 인물이 그런 주장을 했다. 현재는 해군첩보부대와 UDU의 인적구성이 현역 해군 군인이었다는 사실은 명확히 밝혀졌다.
2002년 10월 25일자 오마이뉴스 해군 북파공작원 시위취재 기사
2010년 11월 17일 작성된 2002~2005년 UDU예비역단체 사무총장을 지낸 인물이 쓴 글
이 글에는 정식요원이 되면 그 사람은 계급과 군번이 없는 비군인 신분으로 구분된다, 비군인 신분의 특수임무요원들을 특수임무수행자로 통칭한다, UDU요원이 되면 계급과 군번이 없는 비군인 신분으로 바뀐다는 등 반복해서 군인이 아니었음을 주장한다. 이뿐만 아니라 1950년 전사한 군인들을[17] UDU특수공작팀장, UDU특수임무요원이라 지칭하는데 앞서 서술되었듯 1950년에 UDU라는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런 종류의 주장들은 사실이 아니다. 현재는 UDU동지회에서도 UDU가 민간인이라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두번째 링크된 글의 내용을 보면 앞에선 비군인, 즉 민간인이라고 반복적으로 서술했으면서 뒷부분에서는 1950년 전사한 임병래 중위[18] 등 8명을 UDU특수공작팀장, UDU특수임무요원[19]이라고 하는 등 앞뒤가 전혀 맞지 않은 주장을 하였다.

2.3. 인천 상륙 작전 참전 여부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을 위해 함명수 소령(해군참모총장 역임)이 지휘하는 대한민국 해군 첩보부대(총원 17명)가 8월 17일부터 9월 14일까지 영흥도덕적도를 근거지로 하여 X-ray 작전을 수행하여 # 북한군의 장비들과 병력들의 배치, 해로에 부설된 기뢰들의 위치 등 첩보수집 작전을 펼쳤다.

즉 해군의 첩보부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것은 맞는 표현이나 UDU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 관계자들의 진술과 자료를 수합하여 볼 때 UDU는 해군 첩보부대 산하의 한 조직체로 시작하여 한참 후에 해군 첩보부대를 통칭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UDU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거나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실시된 상륙작전으로 UDU창설 이전에 시행된 작전이다. 앞서 서술되었듯이 김영춘 UDU경북지회장, 이강현 특수임무유공자회 부산남부 연합지회장, 한학준 원로, 故최도경 원로에 따르면 UDU창설년도는 1960년이고 임형신 UDU동지회장에 따르면 1954년,UDU명칭 사용이 1954년이기때문에 1955년 창설된 UDT보다 역사가 더 깊다고 진술했다. UDU부대 내부 역사전시관에는 1955년 7월 1일로 명기하고 있다. 이견이 있는 주장들 속에서 어느 주장도 UDU창설일이 1950년 9월 15일 보다 빠르지는 않다. 그러나 UDU사무총장을 지낸 인물이 1950년에 전사한 임병래 중위 등 8명을 UDU특수공작팀장, UDU특수임무요원이라고 글을 쓰거나 언론이 오해? 하게끔 보도하고 있다.

경인방송 2022년 9월 15일 기사
연합뉴스 2022년 9월 15일 기사
SBS 2022년 9월 15일 기사
문화일보 2022년 9월 15일 기사

인천상륙작전 관련 기사에서 자세한 설명 없이 참전용사, 참전노병 이라 서술하며 채OO 원로를 소개하고 있는데 채OO 원로는 과거 UDU예비역단체 회장[20] 역임한 인물로 연합뉴스 2001년 7월 19일 기사에서 본인을 6기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UDU 6기는 UDT 6기 수료자 전원이 UDT훈련 수료와 동시에 UDU로 배치된 기수로, 故최도경 원로 또한 UDU(UDT) 6기이고 UDU(UDT) 6기는 1960년 수료했다. 인천상륙작전과는 10년 세월의 차이가 있으므로 채OO 원로는 인천상륙작전의 참전용사가 될 수 없다. 다만 채OO 원로는 1968년 6월 23일 북파공작 임무를 수행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작전은 김영춘 원로가 밝힌 다수의 사상자가 나온 작전과 동일한 작전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기사는 채OO 원로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것으로 오해 할 수 있게끔 서술되어 있으나 채OO 원로는 정전 이후 북파공작수행자이지 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는 아닌 것이다.

2.4. 1973년 이후 역사

2.4.1. 502기지

해군 첩보부대 502기지는 침투 잠수정을 운용하기 위한 부대로 1973년 창설되었고 1974년 비둘기로 명명되는 코스모스급 잠수정[21] 이탈리아의 COS.MO.S사[22]에서 도입되었다. 도입할 당시 이탈리아 잠수정 기술자와 교관들도 한국에 같이 왔다. 비둘기요원들에게 폭탄조작, 수중운반, 폭파 등 잠수정 운영법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다. 당시 비둘기요원들이 받았던 훈련은 'U1'이라고 불렸으며 28주과정이었다. 훈련내용은 잠수훈련, 항해기법, 기술정비, 폭약설치 등 다양했다. 또 정기적으로 무귀환 훈련, 유사지역침투훈련, 탈출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은 1985년이후 'S-1'이라고 명칭이 바뀐다. 이후 공작원(UDU)들이 운용하는 사자편대 또한 502부대로 배치 되었으며 502기지는 1990년 11월에 국군정보사령부 제912부대로 개편된다.기사참조

비둘기 편대의 역할은 북파특수임무 보상을 신청한 이들이 보상이 거부되자 이에 불복하여 제기한 소송의 판결문과 언론사의 취재로 밝혀졌는데 다음과 같다.
고구마[23]라는 모선에 중계선 잠수정인 비둘기, 그리고 최종 상륙용 소형 잠수정인 SDV(사자)를 싣고 고구마가 출항하여 NLL 이남에 다다르면 사자를 탑재한 중계선 잠수정 비둘기가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북한 육지 바로 코 앞, 수심10M 지점에서 특수공작원(UDU)을 태운 사자를 분리하고 이 분리된 사자를 타고 공작원들이 육지까지 침투하는 형식이다.

작전상 분명 NLL을 넘는 이들의 역할은 '호송임무'였다는 이유로 보상신청이 거절되었으며 재판에서 또한 같은 이유로 패소하였다. 분명 1972년 7월 4일 7.4 남북 공동 성명 이전 북파공작이 실행되던 시기엔 직접 상륙하여 공작을 실행하는 UDU[24]가 아닌 해군 첩보부대(NIU)의 지원요원들도 보상을 받았는데 왜 이들은 못 받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 마련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72.7.4.남북 공동성명 이후 북파공작은 실행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이들은 훈련만 받은 것이다.

재판부가 판결문에 명시 했다. '특수임무'는 아군의 군사적 보호와 통제가 되지 않는 지역에 침투해 위험에 노출되는 군사적 활동을 하는 것"이라며 실제 호송업무를 수행했다면 특수임무 수행으로 볼 여지가 있지만 훈련만으로는 특수임무수행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판결문을 근거로 도출된 결론은 UDU를 호송하는 이들이 실제 호송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훈련만 받았으며 당연히 이들이 호송하게 되어 있는 공작원(UDU)도 7.4남북 공동성명 이후엔 북파공작임무를 수행 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원요원들은 실제 북파공작임무에서 지원을 해야 보상 받지만 공작요원들은 실제 북파공작임무를 수행 하지 않았더라도 법률이 명시한 기간동안(1948.8.15.~2002.12.31.) 첩보부대소속으로 훈련만 받았어도 보상해준다.

첫 기사에 임무를 수행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판결문이 직접 언급된 다른 기사에서 실제 호송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고 명시되어있고 최종적으로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만큼 첫 기사의 임무수행은 실제 북파호송임무 수행이 아니라 그러한 작전에 대비한 훈련임무수행으로 보는 것에 논란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군필자들은 잘 알겠지만 군에서는 훈련을 해도 임무수행이고 부대에서 근무를 해도 비상대기태세 임무수행, 대북도발억제 임무수행이라 표현한다.
2016년에 노후한 갈매기급 잠수정(이름이 비둘기에서 갈매기로 바뀌었다) 폭발사고가 있었다.
노후되어 정상 운용이 불가함에도 국가정보원의 정보비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형식적인 운용만 해온 것이라는 기사.
90년대 이후 정보사의 침투방식은 기술발전 상황에 맞지 않았으나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노후침투 자산들을 억지로 운용해 왔고 차기 잠수정 사업 또한 조직유지 목적의 사업 아니냐는 의혹 제기 기사.
노후한 갈매기(비둘기)급을 대체하기 위한 차기 잠수정 사업이 진행 중인데 문제가 많아 보인다.
결국 모두 해체 된 것으로 보인다. 잠수정에 따개비가 심각하게 많이 붙은 것으로 보아 정상운용을 못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2.4.2. 활동

해군 첩보부대원(NIU), UDU[25]는 북파 및 국내 첩보공작활동을 전개했다. 대북 첩보공작활동으로 1948년부터 1971년까지 약 200회의 특수공작 임무를 수행하였다. 첩보공작활동은 공작원 파견 침투와 접수 귀환, 잔류 공작원 보급 및 지원 수송, 공작원 교육훈련, 북한군 해군 경비병 납치 및 기습공격, 북한군 통신망 도청, 북한군 군사시설 기습 파괴 및 후방교란, 정찰, 폭파, 요인 납치, 암살 등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 해군 첩보부대원(NIU)들은 인천 상륙 작전에서도 앞서 파견되어 지대한 공을 세웠다.

30여 회의 국내 공작은 주로 북한 간첩선과 간첩 체포 공작이었다. 1960년부터 1966년까지 아산만, 군자만, 계화도, 변산반도, 무안해안 등 서해도서 벽지와 해안가에서 공작이 이뤄졌다. 한편 해상정찰대는 타 기관과의 합동 공작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30여 회의 한미 합동 공작과 10여 회의 중앙정보부 공작 등 당시 자유중국 대사관 위탁 공작으로 중국 본토 공작 등 10여 회의 합동 공작을 수행하였다.[26]

현재 외국기관과의 위탁 공작의 기록은 전무하며 당시 공작에 참여한 생존자의 증언으로 계속해 내려오고 있다(동지회 자료수집). 또한 중앙정보부 등 타 기관과의 합동으로 벌인 공작 기록도 찾기가 쉽지 않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는 7국에서 각 군 첩보부대를 관리했지만 보고 채널을 하급기관에서 알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합동으로 수행한 공식 기록은 미국 정보당국과 중앙정보부의 문서기록에 보관하고 있겠지만 문제는 그들이 보안을 이유로 공개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27]

이처럼 많은 공작활동을 수행한 해상정찰대는 전공에 따른 승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비밀 특수공작을 묵묵히 수행해 국가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또한 그 임무수행 과정 중에 많은 순직자가 발생했다.

2.5. 과거 전역자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 문제

현재는 실제 북파공작을 수행한 UDT교육대에서 교육을 받고 해군 첩보부대에서 복무하며 UDU라 불리던 수중파괴요원/UDT 그리고 71년부터 UDU에서 자체교육을 받고 수중파괴요원/UDU를 부여 받은 군인들 또한 실제 북파공작을 수행 여부 불문하고 첩보부대 소속이었다면 모두 보상 받았다. 반면 UDT/SEAL의 경우는 내부에서 윗선들의 눈치를 보느라 보상시위 당시 스스로 빠졌다. 때문에 UDT가 해군 정보부대로 인원을 보내어 임무를 수행하던 1960년대 이전의 시기에 UDT소속으로 북파임무를 수행한 인원들은 보상대상에서 제외됐다.[28] 너무 오래전 일이고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었기에 1950년대에는 UDT소속으로 북파공작을 수행했다는 사실도 잘몰랐거니와 1960년대에 같이 훈련 받은 동기들이 해상정찰대 소속으로 북한을 다녀왔지 UDT에 계속 남아 있던 자신들은 훈련만 받았기에 당연히 공작실행 여부가 보상의 기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UDT라는 부대의 당시 역할과 출신들의 전공을 내세우지 못한 것도 한몫한다. 이 때문에 당시 실제로 해상북파공작에 중추적이었던 UDT라는 부대는 보상의 기준에서 제외되었고, UDT는 요원을 양성하고 해상정찰대라는 부대에 인원을 공급하므로써 자신들이 세운 것이나 다름 없는 전공과 명성을, 해상정찰대라는 부대의 계보만 이을 뿐 북파 경험도 없으며 다른 부대인 현재의 정보사령부 해상특임대에게 몰아주는 결과를 더욱 심화시키게 되었다.

북파공작을 수행한 부대들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해체되고 자료가 소각된 부대들은 북파공작을 수행하였음에도 어렵게 보상받거나 못받았다. 특히 진짜 군번없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부대일 수록 보상을 받기 힘든 게 현실이다. 반면 보안이 잘 된, 해당부대 일부 예비역들이 비정규군이라 주장하지만 객관적으로 비정규군이 아닌 해체안된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정규군 부대들과[29] 해체되거나 흡수된 부대들도 보상시위에 참가 했을 경우 북파공작 수행 여부와 상관 없이 그 부대에 소속되어 훈련이라도 받은 기록만 있다면 모두 보상을 받았다.

3. 현재

3.1. 국군정보사령부 특수임무대

현재는 국군정보사령부 내 특수임무대로 존재하며 각각 육상(HID)과 해상(UDU)으로 인원을 모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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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1] 과거엔 존재 여부가 기밀이었으나 현재는 부대의 존재 여부는 기밀이 아니고 다른 군 부대와 마찬가지로 부대의 세부사항이 기밀이다. 정보부대 특성상 다른 부대들 보다 소속 부대원들을 대상으로 보안검열, 보안교육 등이 철저하다. 때문에 이쪽 분야 종사자였거나 가까운 지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귀동냥 조차 듣기 어렵다.[2] 대한민국 국방부 내부 분류상 특수전 부대로는 육군특수전사령부해군 특수전전단이 공식적으로 존재한다. HID와 UDU는 이들과 별개의 부대이다.[3] 굳이 꼭 나누자면 국방정보본부의 통제를 받는 해군 부대라고 볼 수 있다.[4] 이들의 해군 부사관 직별의 명칭이 특정이다. '특수정보' 의 약자이다. 그와 반대로 육상의 경우 이 특수정보가 인간정보병과 산하에 있는 여러 개의 세부특기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냥 인간정보이다.[5] 1964년 해군 입대, 1965년 UDT 11기 수료. UDT 몇 년 복무 후, 인천 UDU 1년 근무. UDT 복귀하여 월남전 참전. 1971년 전역.[6] UDT 4기 조OO UDU 초대 동지회장의 진술과 일치한다.[7] 당시 미국 해군 편제상 UDT 3개를 UDU라는 이름으로 묶었고 UDU 3개를 Squadron으로 묶었다.[8] Underwater Demolition Unit[9] 한학준은 미국 해군 UDT 교육도 받았다.[10] UDT 8기[11] UDT 6기[12] 해군 해상정찰대[13] UDT 6기는 수료생 전원이 수료 즉시 해군 해상정찰대로 발령이 났는데 이 부분에 관해선 UDT, UDU 양측 모두 이견이 없다.[14] 정면으로 대치되는 진술이 UDU내부 권위적인 인물들에서 많이 나온 관계로, 임형신 (현)UDU동지회장의 진술이 공식적인 UDU동지회측의 입장인지 개인의 주장인지 확인이 필요하다.[15] 유튜브 활동명 ROKSEAL 이근대위[16] 현재는 계정에서 삭제된 상태.[17] 임병래 해군 중위 등 8명[18] 군인계급[19] 1950년은 UDU 창설 전[20] 오마이뉴스 2002년 10월 25일 기사.[21] 공작원(UDU)들이 직접 운용하는 사자를 싣고 다니는 호송임무가 주목적인 소형 잠수정이다.[22] 잠수정, 잠수함을 전문으로 생산했고 2003년에 폐업했다.[23] 다도해함(ASL-50)과 유사하지만 다도해함보다 먼저 건조, 진수, 취역했고 먼저 퇴역했으며 크기도 다도해함보다 작다.[24] UDT 교육훈련대에서 교육을 수료하고 수중파괴요원/UDT 부가직별을 부여 받은 해군[25] UDT 교육훈련대에서 교육을 수료하고 해군 첩보부대에서 복무하며 UDU라 불리던 수중파괴요원/UDT 부가직별을 부여받은 해군[26] 해외공작 수행 주장은 공식적으로 공인 되었거나 재판, 보상심의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인정된 적도 없으며 언론매체를 통해 주장한 내용으로 객관적 입증자료 또한 공개, 검증된 바 없다. 또한 북파공작과 달리 수행했다는 인물이 전면에 나서서 언론에 밝힌 내용이 아니라 동지회 측에서 그러한 사례가 있다더라 정도만 밝혔던 부분이다.[27] 실제로 수행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순 없으나 진중권 교수와 특수임무수행자회 간의 소송사례, 북파보상 사기사례에서 볼 수 있듯 객관적 증거가 없는 어느 집단의 일방적 주장은 그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 재고해 보아야 한다.[28] 물론 당시엔 당연히 북파공작을 실행했던 인원들만 보상이 되고 71년부터 양성되어 북파공작을 하지 않은 UDU들 까지 보상 받을 줄 몰랐기에 스스로 시위에 불참하였다고 한다. 북파공작을 하지 않고 훈련만 받은 UDU들이 보상 받은 근거는 군 생활 중 인권침해와 모병활동시의 기망이 보상의 이유다. 이런 부분들은 국방위 회의록을 보면 가늠하여 볼 수 있다. 정부에서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1.보상수급자의 증가로 인한 예산문제, 2.현재 UDT와 같이 인정이 안되고 있는 공군소속의 공정부대들 및 몇몇부대들까지 연쇄적으로 인정 하게 되어 당시 한국군이 정전협정을 위반한 행위가 극소수의 특정부대, 인원들만이 아니라 한국군 내에서 횡행하였다는 사실을 인정 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실제로 부대가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는 무시하고 법안에 나오는 첩보부대 소속으로라는 조문을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한다.[29] 현재의 정보사령부 소속 특수임무부대.[30] 전에 웬 해변에서 처음 보는 위장복 차림의 인원들이 한밤 중에 모닥불 피워놓고 회식하는 사진이 올라왔다가 바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