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8년(순조 8) ~ 1858년(철종 9)
1. 개요
조선 후기의 시인, 역관. 본관은 동래(東萊)[1], 자는 경안(景顔), 호는 하원(夏園).보통 정수동(鄭壽銅)으로 알려진 인물이다.[2] 관직은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종5품)에 이르렀다.
2. 일생
1808년(순조 8) 아버지 정문도(鄭文度, 1787 ~ ?)와 어머니 경주 최씨 최국정(崔國禎, 1755 ~ ?)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정동윤(鄭東潤)이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사역원 관원으로 일했다.아버지 정문도는 1809년(순조 9) 증광시 역과에 3등 8위로 입격하고 사역원 봉사(司譯院奉事:종8품)를 지냈으며, 조부 정섬(鄭暹, 1772 ~ ?)은 1790년(정조 14) 증광시 의과에 3등 3위로 입격하고 내의원 정(內醫院正:정3품)을 지냈다. 증조부 정사옥(鄭思鈺, 1744 ~ ?)은 1774년(영조 50) 식년시 역과에 3등 8위로 입격하고 사역원 첨정(僉正:종4품)을 역임했다. 외조부 최국정은 1777년(정조 1) 식년시 역과에 3등 8위로 입격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문·무관의 품계) 왜학 교회(敎誨), 왜학 총민(聰敏)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태어날 때 손바닥에 목숨 수(壽)자가 쓰여져 있었고, 한서에 있는 지생동지(芝生銅池 - 영지버섯은 구리로 만든 물받이에서 자란다.)에서 銅자를 따와 호를 '수동(壽銅)'이라고 했다.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글을 한 번 보면 그 이치를 모두 깨달았으며, 재치가 있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세도정치 하에서 주요한 벼슬을 얻을 길이 없자 그저 당대의 부패한 관리들을 비꼬고 조롱하며, 풍자와 해학으로 일생을 보낸 인물이다. 사실 세도가들이 많이 밀어주었는데 벼슬을 사양한 탓도 있다. 그러나 아래 일화들로 보아 세도가들과는 개인적으론 친밀한 관계였지 싶다. 그래서 다른 해학가들과 달리 정수동 설화의 특징이라면 유난히 권세가들이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시류에 영합하진 않았지만 세도가들 집에 자주 기웃거리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식객 정도의 위치로 추정된다. 지금으로 치면 레크리에이션, 기업체 유머 강사같은 포지션으로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서 썰 한번 풀고 두둑한 강연료로 먹고 살았다고 보면 된다.
조두순이 참봉 자리를 주어 9개월간 벼슬살이를 했다가 그 자리를 팽개치고 달아나 버린 후 진고개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래도 세도가들이 이것저것 물품 지원도 해주어서 딱히 배곯고 살진 않았다.
오성과 한음만큼이나 재미있는 일화가 많으며 사실 오성과 한음 이야기 중에는 그에게서 넘어온 이야기가 많고 일부 유머는 그의 이야기를 각색한 게 많다.
- 어린 시절 훈장이 수업시간에 조는 자신을 혼내자 "훈장님도 주무시잖습니까?"라고 받아쳤다. 훈장은 자신은 존 게 아니라 공자님을 뵈러 간 것이라고 둘러대었는데 다시 조는 척을 한 그는 훈장이 자신을 또 혼내자 "저도 공자님을 뵈었는데 훈장님은 모르신다고 하던데요"라고 말해 훈장을 데꿀멍시켰다.
- 당대 영의정 김홍근의 집에 들어섰는데 계집종의 아들이 엽전 한 닢을 삼켰다고 난리였다. 그러자 수동은 "남의 돈 7만냥을 꿀꺽하고도 별 탈이 없는데 자기 돈 한 닢 먹은 게 무슨 탈이겠느냐"라고 말했다. 당시 김흥근이 뇌물 7만냥을 받아 먹은 것을 비꼰 것인데, 이 말을 들은 김홍근은 부끄러운 나머지 뇌물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 정수동의 아내가 해산을 앞두고 있을 때 정수동은 불수산(佛手散: 해산 전후에 쓰는 산후조리 탕약[3])을 지으러 약방으로 가다가 금강산 유람을 가는 친구 둘을 만나 1년 가까이 금강산 유람을 하다가 천수관음상을 보다가 불수산이 생각난 정수동은 즉시 한양으로 돌아와 불수산을 지어 집으로 들어섰는데 그 날은 아이의 첫 돌잔치 날이었다. 부인 김씨는 마루로 나와 정수동을 맞으며, "서방님께서 원체 성미가 급하시어 아이 돌잔치가 되어서야 불수산을 지어오십니다."라고 하자 그가 "부인 성미도 무척 급하오. 내가 불수산을 지어오기도 전에 아이 돌잔치부터 준비하고 계시는구려"라고 맞받아치자 이 말을 들은 아내와 일가친척이 모두 포복절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판에 따라 "당신 기다리다 애간장이 다 녹았다오."라 아내가 말하니, 정수동은 "그럴 만 해요. 여자 간은 작아서 잘 녹으니까."라고 맞받아친다. 하지만 이 아이는 가난하게 살다[4] 10살에 요절하며, 시인으로도 꽤 이름을 날렸던 정수동은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남겼다.[5] 이 시로 볼 때에 자신의 한심한 꼴에 대한 인식은 확실히 하고 있었지만, 신분과 세태 때문에 뭘 할 수 없는 현실 탓에 자포자기하여 기행의 길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 김흥근 대감 댁에서 대감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하룻밤을 묵었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망건이 없어졌다. 정수동은 가장 좋은 망건을 골라 차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대감의 망건이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다.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되어 구석구석 들쑤시다가 이불 밑에서 다 낡아빠진 망건 하나를 간신히 찾아냈는데 그것이 정수동의 망건이었다. 정수동은 차고 있던 망건을 돌려주고 자신의 망건을 받았다. 하인들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고, 노발대발하는 대감에게 정수동 曰 "제 망건이 없어지면 이렇게 호들갑을 떨며 찾아 주겠습니까?"
- 한 대감 댁에서 술을 잔뜩 얻어먹고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통금시각에 딱 걸렸다. 어떻게든 숨으려는데 길거리 저쪽에서 순라꾼들이 보였다. 정수동은 서둘러 남의 집 담에 기어올라가 팔다리를 축 늘어트리고 매달렸다. 순라꾼들이 거리를 지나가다 정수동을 보고 놀라서 한마디 했다.
"이크. 이게 무시기? 도깨빈가 사람인가?"
"저 말입니까? 빨래올시다."
"거 신기하네? 무슨 놈의 빨래가 말을 하누?"
"하도 급해서 사람까지 통째로 빨아 널었습죠."
- 역시 통금시간에 걸렸을 때의 일화다. 한 다리 밑의 냇물에서 무언가를 뒤지는 척하는데 순라꾼들이 잡아 가려고 하자 "평생 먹을 것을 잃어버렸다"고 하여 순라꾼들도 눈에 불을 켜고 냇물 속을 뒤졌다. 그러다 통금 해제를 알리는 파루 소리가 들리자 정수동은 품 속에서 곰방대를 꺼내며 찾았다고 크게 외쳤다. 어이없어 하는 순라꾼들에게 이것 하나면 평생 담배를 먹을 수 있다고 하며 유유히 집으로 돌아갔다.
- 한 대감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해 정수동을 가까이에 두고 재담을 들으며 지내었다. 그 대감에게 연을 대려는 친구 한 명이 정수동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청하였다. 정수동은 친구에게 자신이 밖에서 귓속말로 재담을 말할 터이니 그대로 이야기하라며 친구를 안심시켰다. 마침내 친구가 대감에게 이야기를 할 기회가 닿아 방 안에서 친구는 정수동이 해주는 말을 그대로 받아 읊었다. 두어마디 한 정수동은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고 친구는 한참 동안 꿀먹은 벙어리로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대감이 이야기를 채근하자 친구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갔습니다. 갔어요!"
"무엇이 갔단 말인가? 이야깃거리가 날개를 달고 날아가기라고 했단 말인가?"
"정수동이가 갔사와요."
그제야 뒷사정을 파악한 대감과 손님들은 박장대소하였으며 친구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자리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훗날 친구와 마주친 정수동은 친구가 "자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망신만 크게 당했어!"라고 화를 내자 "이봐. 그런 일 없이 자네가 어찌 대감을 웃기겠나!"라며 껄껄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 역시 대감에게 청탁하여 벼슬을 얻으려는 식객 무리가 찾아오자 대감은 정수동에게 그들을 쫓아내달라고 요청한다. 식객 셋의 이름은 '이문덕', '정언형', '어필수'였는데 정수동은 "옷을 벗고 이를 잡는 아내의 살덩이에 혹해 하룻밤을 지냈다. 덕분에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이가 문 덕에 태어났다 하여 '이문덕'이라 지었다.", "정언(아무나 얻을 수 있는 싸구려 벼슬)의 형의 아들이라 하여 이름을 '정언형'이라 지었다."라고 하여 앞의 두 명을 잔뜩 약올려 나가게 했다. 마지막으로 어필수는 "방에 있으면 방어(房魚), 문에 있으면 문어(門魚), 상에 올라가면 상어(床魚), 화가 나서 빨개졌으니 홍어(紅魚), 웃으니 소어(笑魚)[6], 나를 미워하니 오증어(吾憎魚), 밭으로 나가면 전어(田魚), 친구가 되면 붕어(朋魚)"라며 놀리다가 "아이를 낳으니 이제 누군가 업힐 수가 생겨서 이름을 '어필수'라 지었다"라고 하자 어필수도 골이 잔뜩 나 결국 나갔다.
-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동행하던 젊은 선비가 늙은 사공에게 "논어를 아는가? 천자문도 배우지 않았는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로구만!" 이라며 잘난 척을 하자, 재수가 없다고 여긴 정수동이 "선비는 수영을 할 줄 아는가?"라고 물었고, 선비가 고개를 가로젓자 "살아도 산 것이 아니로구만! 지금이라도 당장 배가 뒤집히면 죽을 게 아닌가!" 라며 면박을 주었다.
- 한번은 모 대감 집에 선비들이 모여서 친목질을 하는데, 대감의 먼 친척이라는 사람이 친척과 조상 자랑을 하자, 정수동이 "귀공은 사람이 아니시로군요."...라고 했다. 화가 난 대감의 친척이 무슨 망발이냐며 길길이 날뛰자 정수동은 태연하게, "양반은 태어나면 도련님, 장가가면 서방님, 출세하면 나으리, 그러다가 대감이라고 불리다가 죽으니 언제 사람이라고 불려본답디까?"...라며 대꾸했다. 이 말에 자칭 먼 친척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 어느 지방에 곱추 부자가 매우 인색하다고 하자, 등을 고쳐준다면서 한달 동안 소를 잡아 잘 먹으라고 하고, 자신과 동네 사람들도 어울려서 삶아먹고 지져먹고 구워먹고 고기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한달 후에 떡매를 들고 나타나서 다짜고짜 누우라고 하니 기겁한 곱추가 "그걸로 등을 치면 죽잖소?"...라고 하니 정수동이 태연하게 "아따, 내가 언제 꼭 살려서 고쳐준다고 했던가?"...라고 했다.
- 장가 들 때의 일화도 비범하다. 정수동의 부인은 결혼 전부터 동네에서 이름난 집의 딸이고 미색이 고와서 동네의 청년들이 모두 이 처녀에게 구혼하려 하고 있었다. 이에 처녀는 날을 정하고 동네 청년들을 한 명씩 불러서 자신의 남편감으로 적당한가 알아보겠다고 한 뒤 각 청년의 장점을 물어보았으나 돈이 많은 청년은 돈은 언젠가 없어진다, 무예가 뛰어난 청년은 언젠가 전쟁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며 몽땅 퇴짜를 놓아 돌아가게 만들었다. 정수동은 그 처녀에게 관심이 없어서 보러 갈 생각이 없었는데 저녁무렵이 돼서야 처녀의 집에서 종을 보내 오지 않은 사람은 수동뿐이라며 처녀와 대화할 것을 권했다. 처녀는 자존심도 상한데다가 얼마나 잘난 인물이기에 자신을 무시하나 싶어서 정수동에게 장점을 말해보라 하였다. 정수동은 "내가 가진 건 몸뚱아리 하나뿐이오."라고 대꾸하였고 처녀는 활짝 웃으며 "바로 그거예요! 제가 원한 건 그 몸뚱아리 하나 뿐이에요!"라고 몸뚱아리 하나면 충분하다면서 정수동에게 시집왔다고 한다.
- 하루는 정수동이 친구의 집에서 주안상을 받는데, 술잔이 너무 작자 정수동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광경을 본 친구가 묻자 정수동은 '예전에 이 집에서 형님이 술잔으로 술을 마시다가 술잔이 너무 작아 목에 걸려 돌아가신 게 생각나서 우는 걸세'라고 말하자 친구가 눈치를 채고 사발 그릇을 갖고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때는 친구에 집에 놀러갔을 때 구두쇠인 친구가 변변찮은 안주를 내 놓았다. 그때 닭이 뛰놀고 있던 걸 보고 '이보게. 상이 부족하면 내가 탄 말을 잡아서 대접하게'라고 말하자 친구가 '말을 잡으면 자네는 뭘 타고 가나'라고 했더니 '그러면 자네 닭을 빌려서 타면 되지'라고 말하니까 친구가 웃으면서 닭을 잡아 대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초기의 문인인 서거정이 지은 태평한화골계전에서는 김 선생의 이야기라고 나온다.
"죽는 기분 말인가? 처음 죽어보는 거라 잘 모르겠군. 내 죽은 다음에 다시 말해주지."
그가 유언으로 남긴 말이다.2.1. 관련 문서
3. 대중 매체에서
- 임현식 -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
귀양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김정희(신귀식 분)를 찾아온 자리에서 만난 젊은 시절의 흥선군(임동진 분)에게 여러 어그로성 드립을 많이 쳐서 흥선군을 열받게 한다. 그리고 도리어 정수동 본인이 먼저 나가버리고 이에 흥선군이 뒤따라 간다. 같이 있던 기생 초월(김영란 분)이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까 걱정하지만 두 사람의 성품을 잘 아는 김정희는 별 일 없을 것이라 안심시킨다. 알고보니 정수동은 흥선군의 자질을 알아보고 일부러 도발한 것이었고, “똑똑하면 죽소, 잘난 척 마시오”라고 넌지시 충고한다. 이에 깨달음을 얻은 흥선군은 철종(최수종 분) 사망 때까지 그 유명한 파락호 폐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1] #[2] 조선 후기 경상도 경주부(현 경상북도 경주시)에 살았던 정만서(鄭萬瑞, 본명 정용서鄭容瑞, 1836 ~ ?)와는 서로 다른 인물인데, 두 사람 모두 동래 정씨이고 골계(해학, 풍자)에 능했으며 전국을 방랑한 개화기 때 사람이란 공통점으로 자주 혼동된다. # 정만서 설화 또한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봉이 김선달 설화에도 많이 차용되곤 한다.[3] 출산 전후의 여러 질환을 다스리며, 태반을 줄어들게 하여 아기를 쉽게 낳도록 한다. 천궁(川芎), 당귀(當歸)를 쓴다.[4] 말 그대로 가난이라기 보다는 상대적 가난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수동의 직업 특성상 생활비라는 것이 고관대작들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 당장의 생활비는 부족하지 않아도 큰 돈 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5] 아이의 죽음을 곡하며 哭兒 언제나 집안 살림 계책 끝도 없어 無限他時門戶計 하루아침 떠나니 험한 언덕에 묻네 一朝携去付荒厓 네 아비 평생 술이나 마시고 다녔더니 爾爺荷鍤平生事 그래도 사람으로 시신 묻는 건 못 봤네 尙得人間未見埋 비단 한 조각 없이 네 몸을 감싸니 寸錦曾無裹汝肌 아플 때 약에 얼룩진 옷에 눈물이 주루룩 淚痕藥跡病時衣 열 살 급살에 가난한 집 자식이라 十年慟煞貧家子 저승서 남루하다 돌려 보내진 않을까 復使壤泉藍縷歸 총명하진 못해도 모자라진 않았는데 未必聰明勝闒茸 어찌 우둔한 내게 보내 기쁘게 했을까 何嘗喜汝就冬烘 어렵사리 글자 깨쳐 무슨 소용 있는가 辛勤識字將何用 벽 위 삐뚤삐뚤 부질없이 남아 있네 空有塗鴉壁上蹤[6] 밴댕이나 반지를 소어(蘇魚)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