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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 전한 제15대 황제 유영 | 劉嬰 | |
출생 | 5년 |
전한 (現 중화인민공화국) | |
사망 | 25년 (향년 20세) |
현한 안릉 (現 감숙성 진원현) | |
재위 | 전한 황태자 |
6년 4월 15일[G] ~ 8년 | |
전한의 황제 | |
6년 4월 15일[G] ~ 9년 1월 8일[3] (999일) | |
성 | 유(劉) |
휘 | 영(嬰) |
부모 | 부친 광척후 유현(劉顯)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작호 | 정안공(定安公) |
연호 | 거섭(居攝, 6년 ~ 8년) 초시(初始,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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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나라의 제15대 황제이자 전한의 마지막 황제.2세의 갓난 아기때 외척 출신의 권신 왕망의 추대로 즉위했다.
2. 생애
제10대 선제의 현손자였다. 좀 더 살펴보면 선제의 3남 초효왕 유오의 증손, 유오의 차남 광척후 유훈의 손자, 유훈의 아들 광척후 유현(劉顯)의 아들이었다. 제12대 성제, 제13대 애제, 제14대 평제가 모두 후계자없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 제11대 원제의 후대는 끊겼기 때문에, 선제의 후손을 후계자로 세웠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왕망이 그를 평제의 황태자로 옹립했고, 평제 독살 이후 제위를 계승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어리다는 이유로 왕망이 즉위식을 거행시켜 주지 않았으므로 황제라고 할 수는 없다.왕망은 아기 유영을 추대하고 자신은 섭정, 가황제, 섭황제라 칭했다가, 2년 만인 초시 원년(8년) 11월 무진일,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찬탈하고 신나라를 세웠다. 왕망은 사촌 왕순을 시켜 태황태후이자 자신의 고모였던 왕정군으로부터 전국옥새를 받아오게 했는데 태황태후 왕씨는 화가 난 나머지 옥새를 던지는 바람에 전국옥새의 모퉁이가 깨졌다. 어쨌든 왕순으로부터 전국옥새를 받은 왕망은 희색이 만면하여 즉위식을 준비했다. 제위를 양도받는 의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왕망은 어린 유자영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라고 탄식하는 체했다.
유영은 이때 나이가 4세였는데 안한공에 봉작됐다가 다시 정안공(定安公)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왕망은 유영을 유폐시켜 버렸다. 유영은 이처럼 어릴 때부터 항상 어두운 독방에서 감시당한 채 생활했는데, 이때 유모와도 대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라서도 여섯 가지 동물(六畜)[4]을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15년 후였던 서기 23년, 한나라의 부활을 명분으로 거병한 먼 친족 경시제 유현(劉玄)이 상안(장안)을 쳐서 왕망을 죽이고 신나라를 멸망시켰다. 유영은 이때 나이가 19세였는데, 장안 현지에 있었던 지사들에 의해 유폐 생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전한의 방계 자손인 유현이 장안을 점령한 이후, 꼭두각시긴 했어도 한때 황제였고, 자기보다 정통성이 더 높았던 유영의 존재는 경시제 유현 정권의 불안요소였다. 결국 유현의 실정에 실망한 방망(方望) 등이 유영 복위운동을 벌였고, 유영은 방망 등과 함께 경시제 유현이 보낸 승상 이송에게 살해되었다.[5] 유영은 전한 제10대 선제의 현손자였지만 경시제 유현은 제6대 경제의 후손이었므로 사실상 남남이었다.
유영의 황후는 왕망의 손녀이자 왕망의 장남 왕우의 차녀였던 왕씨였는데, 그녀도 유영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유영을 마지막으로 전한 선제의 자손도 끊어졌고, 전한 제7대 무제의 다른 자손들도 이 때 대부분 살육되어 이후로는 역사에 거의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