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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주읍성 |
일제강점기 제주읍성 북수구문과 장대인 공신정의 모습 |
1. 개요
개화기의 제주읍성과 산지천의 모습 | 1910년의 산지천 북수구문과 간성의 모습[1] |
제주성지(濟州城址)는 탐라국이 세워지고 처음으로 축성된 무근성을 개축하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제주목을 보호한 성곽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에 약 170m 정도 되는 성벽이 남아있다. 제주성지는 1971년 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2. 상세 및 역사
옛 오현고등학교와 간성의 모습 |
제주읍성은 고려 시대~조선 시대 제주도의 중심이자 제주목을 방어하였던 성곽으로, 고려 숙종 10년(1105)에 제주도에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새롭게 개축된 것이 오늘날 제주읍성으로 이어진다. 고려 숙종이 재위할 당시 세웠던 제주읍성은 이미 존재하던 탐라국 시대의 도성 무근성의 일부 성곽을 활용하여 새롭게 축성했다고 추정한다. 당시 성 내부에는 성주청과 탐라총관부 관아, 칠성단이 위치하였다. 초창기 제주읍성의 규모는 지금보다 서쪽으로 더욱 치우쳤기에, 당시에는 무근성 마을회관과 삼도 119 센터 인근까지 모두 제주읍성 안이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탐라국 시절 무근성의 서북쪽 성벽과 서쪽지역은 이후 고려시대 제주읍성을 다시 쌓으면서 고성으로 남았다. 제주읍성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동쪽의 산지천과 서쪽의 병문천 사이에 성을 쌓아서 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성 내부에 우물이나 연못이 없어 전쟁과 전투시에 식수를 성 외부에서 구해야 한다는 위혐이 있었고, 성 내부에 살던 백성들이 식수를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당시 제주읍성은 식수확보가 매우 불편했던 모양이다.
한편 조선 명종 20년(1565) 제주에 부임한 제주목사 곽흘이 성을 산지천과 가락천 밖으로까지 확장하였는데, 이때 산지천과 가락천이 제주읍성 안으로 들어왔다. 또한 수문 두 곳과 장대인 운주당을 지어서 제주읍성의 방어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을 계기로 7년 뒤에는 성윤문 제주목사가 초루와 제주읍성의 가장 지역들에 남수각을 비록한 북수각과 제이각 등의 포루와 건물들을 건설하였다. 그 뒤로 큰 문제 없이 운영되던 제주읍성은 효종대에 또다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당시 8월에 폭우로 산지천이 크게 범람하였다. 그래서 남수구와 북수구가 모두 무너지자, 이원진 제주목사가 이곳을 중수하면서 위에 정자를 세워 공진루(拱辰樓)라고 이름을 붙였다.
한편 제주읍성을 동쪽으로 더 늘려 쌓은 이후, 매번 폭우 때마다 산지천이 지속적으로 범람하여 민가가 침수되는 피해가 계속 발생하자 정조 4년(1780)에 김영수 제주목사의 지시로 옛 성터(무근성)에 길이 551보, 높이 9척으로 간성을 쌓았다. 간성 남쪽과 북쪽에 통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문 2개를 개설하여 성곽의 남문을 소민문(蘇民門), 북문을 수복문(受福門)이라 이름 붙였으며, 앞에는 적교를 설치하였다. 그 후로 이의식 제주목사가 북수구 인근의 성곽을 북쪽으로 퇴축하여 방어에 유리하게 하였으며, 성벽 위에는 천일정(天一亭)을 세웠다. 또한 수복문을 중인문(重仁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탐라국 시대의 무근성부터 내려져 오던 제주읍성은 구한말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다가 한일합병 직후 전국에 읍성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점점 훼철되었다. 1913년에 일제가 북성문을 헐었고 1914년에 동성문과 서성문, 간성문 등 대부분의 건물들과 성문, 문루 등도 철거하였다. 1915년에는 소민문과 북성지역의 성곽이 모두 헐리었고, 1918년에 제주읍성 남문이 훼철되었다. 1923년에는 동성 위에 측후소가 개설되며 성곽의 대부분이 사라졌다. 결정적으로 제주읍성이 헐리게 된 시기는 1920년대 후반으로, 당시 일제는 대대적인 산지항 축항 공사를 하면서 바다 간척과 매립을 위한 용도로 제주읍성의 돌들이 쓰이면서 제주읍성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연고로 현재 제주읍성은 시민회관 인근 남문사거리에 일부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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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호
제주성은 언제 쌓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탐라국 수도 부근의 성곽으로 오래 전에 쌓은 것이라 전해진다.
이 성은 제주의 많은 화산암을 이용해서 고려 숙종 때 둘레 4700척, 높이 11척으로 확장하여 새롭게 정비하였다. 그후 조선 중종 7년(1512)에 둘레를 5486척으로 확장하고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성안에 샘이 없어서 겪었던 급수의 어려움을 해결하기도 했다.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 때는 왜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이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성벽을 5척 높여 쌓고 방어시설을 갖추기도 하였다.
현재는 성벽이나 건물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의 축성방식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성은 제주의 많은 화산암을 이용해서 고려 숙종 때 둘레 4700척, 높이 11척으로 확장하여 새롭게 정비하였다. 그후 조선 중종 7년(1512)에 둘레를 5486척으로 확장하고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성안에 샘이 없어서 겪었던 급수의 어려움을 해결하기도 했다.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 때는 왜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이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성벽을 5척 높여 쌓고 방어시설을 갖추기도 하였다.
현재는 성벽이나 건물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의 축성방식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1] 수문 사이로 간성의 체성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