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 공의회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
첫 일곱 보편 공의회 | |||||||
가톨릭에서만 인정한다. | |||||||
정교회에서만 인정한다. | }}}}}}}}} |
1. 개요
제4차 라테란 공의회(라틴어: Concilium Lateranum Quartum)은 1213년 라테라노 궁전에서 열린 가톨릭 보편 공의회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주도로 개회되었다.처음으로 고해성사 의무가 명시되었다.
2. 배경
인노첸시오 3세는 완전히 실패해버린 제4차 십자군 원정을 만회하고 교회의 위상을 살리기 위해 제5차 십자군 원정을 준비했다. 또한 상업의 발달로 가톨릭 국가들에 거주하기 시작한 유대인과 무슬림들에 대한 처분도 논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십자군 전쟁으로 유대인과 무슬림에 대한 증오가 눈에 띄게 증가했기 때문이다.한편 교황권이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신장되었기 때문에 교권과 세속권 간 관계를 조정하고 성직자들에 대한 품행 규정을 고칠 필요가 있었다.
3. 진행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공의회가 수많은 축일이 있는 11월에 열리도록 의도적으로 선택했다 . 예비 회의는 11월 4일에 열렸고 공의회 개막식은 성 마르티노 축일에 열렸으며 아침 미사로 시작되었다. 그 후 라테라노 궁전에서 첫 번째 본회의가 시작될 때 교황은 두 가지 설교를 했는데 하나는 성지를 회복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단자들을 대하는 문제였다.71명의 추기경 및 대주교와 341명의 주교, 800명 이상의 아빠스 및 수도원장이 참석했고 동방 교회에서도 23명의 대표단이 방문했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였다.
이외에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오토 4세, 로마인의 왕 프리드리히 2세,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존, 헝가리 왕국의 국왕 언드라시 2세, 프랑스 왕국의 국왕 필리프 2세와 이들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한편 프랑스 주교들 사이에서 시몽 드 몽포르의 파벌과 툴루즈 백작의 파벌로 갈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툴루즈의 레몽 6세는 자신들의 영토 몰수 위협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공의회에 참석했는데 시몽 드 몽포르를 지지하는 참석자들은 몰수에 찬성하는 주장을 펼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갈등은 전체 공의회에서 사소한 부분에 그쳤다. 더 큰 내홍은 독일 주교들 사이에서 터졌는데 선제후들에 의해 로마인의 왕으로 추대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2세와 현직 황제인 잘리어 왕조의 오토 4세간 분쟁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인노첸시오 3세는 이번 공의회에 황위 분쟁을 매듶지을 생각이었으나 이처럼 주교단이 분열하면서 결국 해결에 실패한다.
공의회는 11월 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 끝났고, 이때 교황은 니케아 신경에 관한 강론을 하였는데 기벨린파인 마인츠 대주교는 연설을 중단시키려 했다. 이렇듯 교황권의 최전성기였던 이 시대에도 황제의 견재와 공격은 계속되었다.
4. 결과
- 요아킴 드 피오레[1]를 이단으로 정죄한다.
- 이단과 그들을 보호하려는 자들은 파문된다. 군주들은 교회가 이단으로 지정하는 모든 사람을 추방하겠다고 맹세해야 한다.
- 성직자는 술에 취하거나 사냥을 다닐 수 없으며 자수를 새긴 옷을 입거나 뾰족신을 신어선 안 된다. 또한 도박을 하거나 연극을 관람하는 행위 모두 금지된다.
- 모든 그리스도인은 분별력 있는 나이에 도달하면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 교회법과 세속법은 서로의 영역을 침해해선 안 된다. 성직자는 합법적인 이유 없이 평신도에게 충성 서약을 해서는 안 되며 평신도 군주들은 교회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 1217년 6월 1일부터 제5차 십자군을 출정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