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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개변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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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변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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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 묘사되는 개변된 역사를 서술한다.

2. 개변된 역사

2.1. 제1차 세계대전

원래 역사에서도 1910년대 초반에 버차니를 중심으로 군사 개혁을 추진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대한제국을 방문해 김시혁에게 보다 상세한 노하우를 전수받는 한편 회첸도르프와 그를 지지하는 보수파와도 타협에 성공한다. 개혁에 탄력을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본래라면 정예들을 모두 잃어야 했을 프셰미실 전투에서 정예 병력을 보전하는 데 성공하고[9] 갈라치아까지 일방적으로 패퇴한 러시아는 극동의 대한제국에게서 돌파구를 찾으나 일본의 위협과 내부 갈등으로 쉬쉬하는 모습을 보이자 관동주(뤼순, 다롄) 매각을 조건으로 일본과 접촉할 만큼 급하게 움직였다. 관동주 매각은 곧 안보적 사형선고이기에 참전할 수 밖에 없게 된 대한제국은 프랑스에 중재를 요청해 관동주 매각을 뒤로 미루고 본격적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이 러시아군을 압도해버린 탓에 부전선을 맡은 영국과 프랑스. 특히 프랑스의 손실이 막심해져 식민지 병사들까지 끌어와 처절한 방어전을 벌였으며 이탈리아는 이대로는 북부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에 도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원래 역사처럼 협상국으로 참전. 이손초에서 오스트리아군과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벌인다.


[1] 시기상으로는 춘생문 사건과 겹치며 러시아에게 지원을 받는다는 세부 사항은 아관파천과 겹친다. 실제 아관파천도 춘생문 사건에서의 교훈을 검토해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2] 이와중에 일본은 정신을 못차렸는지 한반도를 이익 지대로 설정하려고 바득바득 애를 썼지만 비테 선에서 컷됐다.[3] 이때 일본의 목적은 일본군의 만주 주둔이었다. 일본은 한국에 동양척식회사 합자를 제안하고, 그 과정에서 만주에 적잖은 일본 개척민들을 보냈는데, 그들이 큰 피해를 입으면 자국민 보호를 명분삼아서 일본군을 만주에 주둔시킬 명분을 얻으려는 계획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본 개척민들이 이미 엄청난 피해를 본다는 사실은 신경쓰지 않았다. 애시당초 개척민의 대부분이 불순분자들로 어차피 일본 내에서도 범죄자 취급받는 이들이라 거리낌이 덜했던 것으로 보인다.[4] 이건 달리 말하면 한반도와 남만주 내부에 그렇다할 정보망이 없다는 이야기다. 즉, 정보전에서 한국에게 사실상 패하고 있는 것.[5] 정황상 이를 밀어준 위안스카이의 북양 정부가 신문을 검열해 진실을 감춘 것으로 보인다.[6] 이때 비공식적 유언으로 조선놈들이 감히!!!라고 대한제국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사실 위안스카이가 성장하게 된 계기가 조선 수탈이었던 만큼 조선 덕에 성장했다 조선 때문에 몰락했으니 완벽한 수미상관을 이룬 셈이다.[7] 진압 과정에서 총을 쏘진 않았다. 군을 배제한 채 경력만 투입하고 화기 없이 물대포와 둔기만으로 진압하는 그 시대 기준 무척 선진적인 시위 진압이 이뤄졌으나 워낙 소요가 컸고, 갑작스러웠다.[8]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동부전선을 정리하기 위해 공세에 나선 동맹국을 저지할 군대 편성에 차르와 황실이 협력하고, 공세를 막아낸 후에는 오직 종전에 힘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한동안 황실을 존속시키기로 한다.[9] 흔히 오헝군의 약점으로 언급되는 출신지별로 다른 언어 문제는 프셰미실 이전까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전투에서 숙련병과 정예 장교들을 대거 손실하며 불거진 문제였는데 원래보다 정예 병력을 더 많이 육성하고, 성공적으로 보전하면서 이 약점이 사라졌다.[10] 오데르-나이세 선에 익숙한 지금 시각에선 그냥 폴란드 땅이지만 동프로이센 코앞이다.[11] 동맹국에서 가장 체급이 작은 불가리아는 원 역사대로 성인 남성의 90%를 징집하는 바람에 루마니아를 상대할 여력이 없다고 설명된다.[12] 하얼빈이 만주 유일의 환승역이라 이곳이 한국에 넘어가면 남만주 전체가 넘어가고, 남만주가 넘어가면 인구 밀도가 낮고 하얼빈 외 대도시가 없는 북만주도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와 사실상 만주 전체가 한국 영향하에 놓이게 된다.[13] 드로즈돕스키를 통해 그들이 투입된다는 건 이 전장이 그만큼 뭣같다는 뜻이라는 언급까지 한 걸 보면 스페이스 마린 묘사에서 따왔음이 유력하다.[14] 대한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는 당시 왕국의 지위였기 때문에 여섯 제국이 아닌 다섯 제국이다. 불가리아의 지도자 호칭이 흔히 황제 칭호 하면 하나로 보는 차르이긴 하지만 1차 대전 시기에 차르라는 호칭은 황제에서 왕을 의미하는 호칭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에 불가리아는 제국을 칭할 수 없다. 그래서 당시 러시아 제국 황제의 칭호는 공식적으론 임페라토르였다.(물론 실질적으로 많이 쓰인 호칭은 차르이긴 하다.)[15] 갈리폴리에서 영국군을 격파한 19사단은 편제가 삭제되고, 20사단도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16] 원 역사에선 러시아가 참패하며 두 차례에 걸친 혁명으로 무너져버린 덕에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핀란드, 발트 3국, 캅카스까지 죄다 뱉어내야 했고 동맹국은 이 방대한 땅을 관리하느라 1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묶어둬야 했으나 역사가 바뀌어 온건한 협상을 맺고, 관리할 영토도 크지 않아 아무리 높여 잡아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수십만 정도만 남겨 두고 나머진 서부전선으로 투입할 수 있게 됐다. 영프도 영프지만 60만 이탈리아군이 90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저지하고 있는 이손초 전선은 동부전선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 120만이 귀환하면 절대로 버틸 수 없는 구조이고 이손초 전선이 돌파당해 북이탈리아가 무너지면 남프랑스까지 고속도로가 뚫린다.[17] 장교 사망자만 3만 5천. 사상자가 아니라 사망자만. 오야마 원수, 노기 대장 등 간신히 살아남은 인원들마저 특유의 책임 문화 탓에 할복, 퇴역했고 부상, 실종 처리된 인원까지 합치면 메이지 유신 이래 길러온 육군의 인재풀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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