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 묘사되는 전술, 무기체계를 서술한다.2. 군사개혁
주인공 김시혁이 미래인인 덕에 당대 모든 군대들이 겪은 실책과 시행착오들을 겪지 않으며, 정답만을 선택해 개혁을 추진 중이다.당시 조선은 임오군란으로 기존 오군영 체제 및 신식군으로 육성되고 있던 별기군이 붕괴되고 청, 일본과 같은 외세의 간섭으로 군사 육성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군 조직과 전통, 문화가 사라져버린 상태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전술과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걸림돌이 없어지는 효과로 나타났다. 장교는 양반, 부사관은 중인이 대다수로 차지하고 있으며 교육 받은 양질의 인력들이 군대로 몰린 덕분에 고등 교리에 빨리 녹아들 수 있었다.
극동전쟁 기간의 한국군이 열악한 국력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해준 원천이었으며, 1부 시점의 외국에서는 그 전모가 제대로 인식되진 않았었지만 그것을 눈여겨본 사람들 치고 경시한 이들은 없었다.
독일의 팔켄하인은 극동전쟁 직전에 방한하여 한국군의 기동훈련을 참관했을 뿐이었지만, 최소한 김시혁이 대한제국 육군을 정예하게 키워낸 유능한 인물이라는 점을 1차대전 시점에서도 기억하고 있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한국군과 극동전쟁의 전훈을 부분적으로나마 배워 자군에 이식하는 것만으로도 실제 역사보다 훨씬 큰 성과를 내서 1916년 시점에서 협상국을 패배의 목전까지 밀어붙이는데 일조하였다.
2부에서 1차대전에 참전한 미군을 이끄는 퍼싱 원수 역시 극동전쟁때 한국군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된 경험을 토대로 미군 군사개혁에 매진하여 높은 성과를 이뤘고, 한국군에 대한 군사고문단 시절부터 한국군과 연이 깊은 포슈 원수 역시 현대전을 극동전쟁기의 한국군을 통해 처음 인식하고 학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군은 육군의 재건과 새로운 전술과 교리를 만드는 데 있어 한국군을 가상적으로 상정하고 적극적으로 참고하고 있다.
"집단군 사령부에서 저들을 두고 원숭이라느니 호랑이라느니 한참 이야기를 한다지만 그러한 표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차르가 휘두르는 가장 치명적인 병기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쟁기계들일지도 모르지. 적어도 본관은 그리 생각한다네.”
- 2부 161화, 독일 제26 예비군단장 오토 폰 휘겔 남작과 참모의 대화.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쟁기계들일지도 모르지. 적어도 본관은 그리 생각한다네.”
- 2부 161화, 독일 제26 예비군단장 오토 폰 휘겔 남작과 참모의 대화.
“…각료 여러분, 저도 6월 30일… 아니, 솜에서 영국군이 공세를 시작한 7월 1일까지는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끊은 뒤, 한 번 심호흡을 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현시점에서 가장 군사적으로 앞서 있다는 독일과 영국이 실패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이미 전쟁의 패러다임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환되고 있고, 기존의 방식과 괴리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한국군은 영국군을 박살 낸 독일군 20만 명과 오스트리아군 10만 명을 40일 만에 섬멸시켰습니다.”
… (중략) … “다들 기억하십시오. 독일의 야전군급 제대를 단 한 번의 대규모 전역에서 궤멸시킨 군대는, 나폴레옹 전쟁 이래로 한국군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참모부와 육군이 받은 충격은 아마 각료 여러분이 받은 것 이상이기도 할 겁니다."
- 2부 282화, 미국 전쟁장관 뉴턴 베이커.
“현시점에서 가장 군사적으로 앞서 있다는 독일과 영국이 실패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이미 전쟁의 패러다임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환되고 있고, 기존의 방식과 괴리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한국군은 영국군을 박살 낸 독일군 20만 명과 오스트리아군 10만 명을 40일 만에 섬멸시켰습니다.”
… (중략) … “다들 기억하십시오. 독일의 야전군급 제대를 단 한 번의 대규모 전역에서 궤멸시킨 군대는, 나폴레옹 전쟁 이래로 한국군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참모부와 육군이 받은 충격은 아마 각료 여러분이 받은 것 이상이기도 할 겁니다."
- 2부 282화, 미국 전쟁장관 뉴턴 베이커.
“원수, 솔직히 이야기해서 나는 아시아 군대들을 전혀 신뢰하진 않았습니다. 현대의 전장에 적합하지 않으며, 용기도 끈기도 모자란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동부전선에서 귀하의 지휘 하에 엄청난 전과가 쏟아지는 것을 보며 생각을 바꿨습니다.”
- 2부 436화, 영국군 영국원정군 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원수.
- 2부 436화, 영국군 영국원정군 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원수.
“…보어 전쟁 치르고 충격을 받아서 개혁에 매진했던 1914년까지의 우리 육군과, 1903년 극동전쟁 때부터 같은 시기 한국군의 수준 차이를 한번 비교해 본 적은 있습니까? 우리도 그때 죽어라 개혁에 매달려서 그나마 지금 수준의 군대라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김 원수의 한국군은 이미 지금의 전쟁터에 던져놓아도 손색없을 현대 육군을 완성해놨는데 그런 식으로 깎아내리는 것은 부당한 처사입니다.”
- 2부 439화, 영국 제2군 사령관 허버트 플러머 대장.
- 2부 439화, 영국 제2군 사령관 허버트 플러머 대장.
“그리고 그 보고서의 내용은 실로 놀라웠네. 아니, 충격적이라고 해야 하려나. 어쨌거나 우리 문명인들이 수백만 명의 피 값을 치러 적응하고 있던 새로운 형태의 전쟁과 거기에 적합한 형태의 군대, 전술을 저 한국군은 13년 전에 이미 완성해서 선보이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보고서였지. 짐이 항상 이야기하던, 과소평가할 수 없는 아시아의 무시무시한 저력을 최악의 방식으로 경험한 후였지만 뒤늦게라도 그 전모와 실체를 이해할 수 있었지.”
… (중략) … “아시아의 불가리아 정도로만 여겼던 자들이, 20세기의 여명에 홀로 미래전을 내다보고 충실히 준비해온 놈들인 줄 누가 알았겠느냐마는… 베르됭 공세를 망가뜨리고, 동부전선의 생명선을 연장시켰던 그 한국군이 다시 튀어나오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이제 짐은 희생당한 신민들과, 선제들의 영령을 무슨 낯으로 봬야 할지 모르겠군.”
- 2부 527화,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
… (중략) … “아시아의 불가리아 정도로만 여겼던 자들이, 20세기의 여명에 홀로 미래전을 내다보고 충실히 준비해온 놈들인 줄 누가 알았겠느냐마는… 베르됭 공세를 망가뜨리고, 동부전선의 생명선을 연장시켰던 그 한국군이 다시 튀어나오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이제 짐은 희생당한 신민들과, 선제들의 영령을 무슨 낯으로 봬야 할지 모르겠군.”
- 2부 527화,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
2부의 메인이벤트인 대한제국의 1차대전 참전과 한국 구주원정군이 거둔 전공을 통해 결국 전 세계에 그 진면모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뒤늦게야 극동전쟁과 1차대전의 한국군을 제대로 연구하고 직시하게 된 유럽 열강의 군부는 적으로 대치중이거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충돌할지언정 한국군의 실력에 대해서만큼은 동양인에 대한 폄하나 인종적 편견 없이 '20세기의 여명에 혼자 현대전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거기에 맞게 적응한 정예군'이라고 고평가하고 있다.
당장 그 한국군에게 직접 된통 깨지고 있는 독일군이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협상국의 구성군들 역시 독일군을 상대로 수년간 고전해오던 입장이라... 독립전쟁기부터 프로이센군과 독일군을 유럽의 우수한 모범사례로 추종해오던 '3류 군대' 미군의 보수적인 인사들 역시 1916년의 브루실로프 공세 간 한국 구주원정군의 부크강 집단군 섬멸에 경악하며 새로운 추종 사례로 주목하고 있는 중이다.
3. 육군
극동 전쟁 개전 시점에는 1개 근위사단과 8개 진위대 여단[1], 1개 강습보병연대가 존재했다. 장기적으로 10개 사단과 2개 강습보병여단으로 증강하는 청사진을 추진중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지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시점에는 8개 사단[2]과 2개 보병여단[3]과 2개 강습보병여단[4], 포병사령부 직할 포병단이 존재했다.1920년대 초반에는 2개 군단 10개 사단 체제로 가평의 제1근위기병사단, 개성의 제9보병사단, 수원의 수도보병사단이 합쳐져 수도군단. 합이빈의 제6보병사단, 장춘의 제3보병사단[5], 의주의 제7보병사단[6]이 합쳐서 제1군단을 구성한다. 제2보병사단과 제5보병사단은 지리적으로 심하게 이격된 관북과 관서 방어를 맞아 외따로 떨어져 있고 유럽에 잔류한 부대들이 복귀하는 데로 3번째 2군단 창설하기로 한다. 장기적으로 3개 군단 12개 사단, 3개 강습보병여단 체제를 구축할 예정이다.
각급 사령부와 교육시설도 대대적으로 정비된다. 포병사령부는 한성에서 양평으로 옮겨 대대적인 확대, 개편을 준비하고 3개 여단을 증강을 앞둔 강습보병대는 수원에 강습보병사령부를 차려 독립하고 원수부 직속으로 돌려줘 원수부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 신속한 투입이 가능한 체제를 구축한다.
육군 교육사령부는 예하 병과학교들을 광주로 이전하는 한편, 미국과 프랑스에 배치되어 교육훈련을 전담하고 귀국한 야전훈련사령부(FTC)를 교육사령부 예하에 두고 전반적인 신병 교육을 수행하게 된다. 장교 대상 교육기관인 한성의 육군 무관학교와 참모학교는 해당 위치에 존치하고 군의 허리인 부사관단 육성을 더욱 체계화하고 총력전 체제에 걸맞는 규모로 기르기 위해 장교 자원들과 함께 훈련받던 기존 방식을 탈피, 평양에 육군 교관학교를 신설한다.
현역병과 별개로 예비군 동원체제 역시 정비되고 있다. 동원사령부의 창설이 예정되어 있으며, 휘하에 전시 증편되는 예비군 3개 군단[7]이 예정되어 있다. [8] 다만 조선시대 경국대전에서도, 대원군 이후의 정립한 민보에 의거해서나 지역 민병대는 현지 지방관들이 소집, 통제하는 식이었던지라 군부가 통째로 권한을 넘기는데 대한 민간의 반발과 경계심이 상당했다. 이에 내각에서는 만주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는 원수부 동원사령부에서 통제하고 경기도부터는 내부 예하의 경무청 동원국이 맡아 수행하자는 절충안을 내놓아 통과시켰다.
3.1. 보병
의화단 사건 개입을 앞두고 강습보병대대라는 중앙군 직할대를 만들어 현대전에 적합한 새로운 보병전술과 편제를 등장시켰다.밀집하면 강력한 현대 무기의 살상력에 쉽게 표적이 되어 희생되기 쉽기에, 전술제대의 최소단위를 소대까지 낮추고, 분대급 이하에서 각개전투가 가능하게 만들어 적의 화력으로부터, 은엄폐/침투기동이 용이하게 개편하는 한편, 전술단위의 소형화로 인해 수반되는 화력의 약화는 경기관총, 수류탄, 척탄통 등 이전 같으면 포병 등의 타 병과에서나 운용했을 장비를 보병 소부대에 편제시켜 보완, 치명성을 극대화 하는 방향을 추구,[9] 강습보병대대에 현대식 보병전술을 먼저 습득시킨 뒤 점진적으로 전군에 확대하여[10] 대한제국을 세계에서 제일 진보된 보병 및 보병전술 보유국으로 탈바꿈시켰으며, 타국에 비해 20년 가까이 새로운 방향성을 조기에 완성한 것만으로 충분히 현대 군사사에 길이 회자될 업적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11]
1차대전 참전이 결정되고 협상국의 군비 지원이 가시화되자 이에 힘입어 꾸준히 현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보병대대와 중대에는 박격포가 공용화기로 편제되기 시작하였고, 1부에서는 강습부대나 기병연대, 근위사단같은 중앙군부대만이 중대에 6정을 간신히 편제시키던 경기관총이 원정군 보병분대에서는 분대당 1정, 원정군 강습분대에는 분대당 2정까지 보급량이 늘었으며, 보병분대의 구조 역시 현대화되었다.
원정군 보병분대는 소총수 위주의 소총조와 경기관총 위주의 지원조로 나뉜 전간기~현대 유럽식 체제고, 원정군 강습분대의 구조는 냉전기에 완전히 정착된 미국식의 사격조 체제다. 이에 관한 대체역사 갤러리의 분석/설명
2부의 1차대전 시기에서는 보병이 운용하는 다종의 박격포 체계와 소/분대급 공용화기인 척탄통이 동맹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의 병력 규모에 대한 부정확한 판단을 유도하는 효과를 보기도 했다.
구경 대비 화력은 박격포가 곡사포보다 우월하기 때문인 점도 있지만, 한국 구주원정군은 1916년 시점에서 이미 2차대전에 정착된 현대의 보병부대 박격포 편제나 운용수량을 미리 구현하고 있던게 제일 큰 원인이었다.
1918년의 독일군도 미넨베르퍼나 보병포의 편제는 보병대대선에서, 한국군 보병대대의 박격포 운용수량보다 훨씬 적은 양을 운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니, 1916년에 양군이 처음 격돌했을 무렵의 혼란은 두말할것도 없고,[12] 한국군과의 전투경험이 쌓인 뒤에도 야전에서 자잘한 혼란을 가하기엔 충분했다.
또한, 강습보병을 단순한 정예보병부대로 남겨두는 게 아니라 자전거 보병으로 개편, 트럭으로 움직이는 기동포병대 배속[13] 등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해가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미국에서 리버티 트럭이 도입되고 근위기병사단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예하 보병연대들을 차량화보병으로 개편, 분대당 차량 한 대씩을 돌려 연대 전체가 150대 이상의 차량을 운용하는 호화로운 편제를 구성한다.
한국군 보병을 상징하는 요소는 무전기, 돌격 나팔 용도로 쓰이는 태평소. 야간에 원활한 피아식별과 의사소통은 21세기에도 어려운데 조선군 시절부터 군영에서 연주했고 야외에서도 쩌렁쩌렁하게 크게 울리는 관악기는 직관적이고 훌륭한 피아 식별 수단이며 공세 타이밍, 방향을 동일하게 맞추는 효시 역할도 맡는다. 한밤중에 쩌렁쩌렁 크게 울리는 나팔 소리의 위압감이 엄청난 데다 이걸 가장 활발하게 사용하는 부대가 최정예 강습보병이라 극동 전쟁 후반 일본군은 멀리서 태평소 소리만 들려와도 경기를 일으켰고 동맹국 장병들은 예리코의 나팔이라 부르며 치를 떤다.
3.2. 특수
의화단 전쟁을 앞두고 정예 충격병인 강습보병대대와 프랑스식 경보병 중대를 창설한 것을 시작으로 극동전쟁 동안 유격전을 벌임으로써 정보작전과 직접타격, 비재래전 등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정석적인 특수부대 발전 단계를 밟고 있다.강습부대는 작중 구호나 역할을 보면 미군의 제75레인저연대를 모티브 삼은 게 확실한데, 레인저 연대처럼 특수부대와 정예 경보병대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새로운 장비나 전술을 도입할 시 최우선 적용해 보는 교도대 성격도 띠고 있다. 작중에서 레인저란 명칭을 부여해 준 사람은 미국인 고문관 제임스 하코트. 본국 레인저들과 임무와 성격이 겹치는 정예 보병들을 레인저라 불러주었는데, 그 뜻이나 유래는 잘 모르면서도 어감이 강렬하고 멋있어 적극 채용했다.
강습부대를 토대로 일반 보병부대에도 수색대를 편성함으로써 이들 부대가 정찰첩보나 정찰수색 등 전술 및 작전술 단계에서의 특수작전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고 강습부대에서부터 이식하기 시작한 현대화한 보병 전술들을 전파하고 있다. 특히 3진위여단 수색대는 경인가도 전투 이후 원수부 직할대로 합류하여 해군이나 강습보병과 합동으로 특수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전간기에는 원수부 직속 강습보병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신속대응군 및 전략예비대 성격을 띠게 되었다.[14]
3.3. 포병
군사개혁 과정에서 주퇴복좌기를 최초로 적용한 현대식 야포인 프랑스제 Mle1897을 대량으로 도입, 1부 완결 시점에서 육군은 교육부대 1개 포대와 10개 포병대대,[15] 해군은 러시아제 152밀리 해안포 8문과 프랑스제 야포 1개 대대를 운용하는 현대식 대규모 현대식 포병전력을 운용하고 있다.해당 야포가 원래 설계상 곡사포가 아닌 평사포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관측반, 야전 통신수단과 연계된 간접사격을 구사하고 있는데, 야전포병은 표적을 직접 조준하여 사격하던 것이 일반적이던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진보된 포병전술을 구사하는 셈이다.[16] 또한, 일본군의 야포들이 주퇴복좌기가 없어서 발사속도가 느린 점을 이용해, 높은 연사력과 수준 높은 전술로 부족한 수량을 만회, 대포병전에서 상당한 위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심지어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기초적인 TOT사격까지 가능한 수준에 올랐다. 대신 이런 연사력 높은 야포의 대량 운용에는 필연적으로 대량의 포탄 소모가 수반되며, 극동 전쟁과 1차 세계대전 내내 열악한 교통 인프라와 맞물려 전쟁수행에 장애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시기 강습보병대가 차량으로 견인하는 75mm 포대를 배속 받아 포병 자산의 기동화가 시작되었으며[17] 동부전선 귀환 후 155mm 중포와 미국제 트럭 대량 도입으로 화력과 기동성이 일신된다.
이후 브루실로프 공세가 끝나고 성급하게 시작된 러시아의 추가 공세가 실패하고 그동안 얻은 영토들을 잃고 코벨까지 다시 잃을 위기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첫 화학탄 포격을 하는데[18] 이때 현대적인 화학탄 교리를 보여준다. 당시에는 화학탄을 적 방어선에 직접 투발하는 방식이었는데, 방어선에 잔류한 작용제가 이후 진군하는 아군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어 진격을 늦추는 부작용이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군은 고농도의, 잔류시간이 긴 작용제를 적 부대의 후방에 투발하여 적이 퇴각하거나 증원이 오는 것을 차단하고, 방어선 전면에는 잔류시간이 짧은 작용제를 투하함과 동시에 전선 곳곳에 일반 포격을 섞어 포격함으로써 적에게 포탄에 맞아 죽을지, 가스에 질식해 죽을지, 아니면 큰 희생 끝에 빠져나와 만신창이가 된 채 한국군과 맞붙을지에 대한 죽음의 삼지선다를 강요하고 고착시키는 전술을 사용했다. 방어선 전면에 투하된 작용제는 지속시간이 짧아 아군이 진격할 때 피해도 적어지는 것도 장점. 이를 이용해 오스만군 19사단을 괴멸시키고 동맹군 군단의 진격을 멈춰세우며 코벨을 지켜내는데 큰 활약을 했다.
시간이 지나 서부전선에 참전할 때는 프랑스에서 GPF 155mm 야포 설계도를 받아[19] 라이선스 생산을 시작하며 제대로 된 중포 생산과 운용 경험을 쌓기 시작, 동부전선에서 습득한 75, 105mm 혼성 운용 노하우를 더해 경(輕) 포-중(中) 포-중(重) 포. 3단계 운용 교리를 정립한다.
가장 위력이 강하지만 아군의 기동로까지 망가뜨려 포격 이후 빠른 진격을 어렵게 만드는 155mm 중(重) 포는 깊숙한 후방 진격로나 진지를 타격하고, 보병이나 전차를 파괴하는 데는 충분하나 사거리가 짧고 방어 축성물을 타격하는 데 한계가 있는 75mm 경포는 아군이 진격해야 할 기동로 상에 있는 적의 병력만 쓸어내고, 둘 사이에 끼인 야전부대는 공중에서 폭발하도록 설정된 105mm로 두들겨 아군의 기동로는 보호하면서 적이 입은 피해는 극대화하는 교리. 중(中) 포 없이 경포와 중(重) 포로 이뤄진 2단계 구조에 허점이 많아 골치 아팠던 동시기 프랑스나 독일보다 한층 진보한 교리로서 치명성의 극대화되어있다.
3.4. 기병
2차 대전 시기까진 현역이고, 본격적인 전차와 차량화보병이 등장하기 전 유의미한 기동전력으로써 잘 써먹는다. 대한제국은 베이스도 거의 없다 보니 개선 작업이 오히려 쉽게 이루어졌고, 1차 친위 쿠데타 당시 들어온 러시아 카자크들에게 기병 훈련을 맡겼으며 이후 러시아에서도 군마를 수입하고 하코트를 기병 고문으로 기용하며 제대로 된 기병대를 갖추게 된다.1차 대전 시점에선 강습보병부대의 전술 행동을 벤치마킹해 고전적인 운용 법인 냉병기와 돌격은 물론 신속하게 하마해 분대 단위 소전투부터 자동화기와 유탄을 퍼붓는 척탄병 역할까지 해내는, 충격력과 화력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병종으로 거듭난다. 선두는 타이밍 잡아서 종심을 파고들고, 후발대는 보병 역할까지 해가며 돌파구 확대하는 게 철마 대신 말을 타고 있을 뿐 현대적 기갑부대와 완벽히 동일하다.
이런 선진적인 안목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기병장교들에 의해 전차 도입과 기갑부대로의 개편이 추진된다. 기병이 확고한 지위를 굳히고 깊은 전통을 갖고 있었던 유럽과 미국에선 기병대 장교들이 전차와 기계화에 완고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일찌감치 기병 전통이 소멸했다가 1900년대 초반에야 겨우 일정 규모로 성장한 한국은 기병대 창설 기수가 그대로 1차 대전에 참전할 정도로 젊었기에 군마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강철 군마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본래라면 남만주 지역의 도로망 확충과 산업 발전에 발맞춰 축소될 예정이었으나 도로도 없고, 인구밀도도 극히 낮은 아무르강 유역과 다싱안링 산맥을 포함한 광활한 북만주가 추가로 대한제국 영토에 편입되면서 만주 지역 순검대와 국경경비대가 기병대로 전환되고 군마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3.5. 기갑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서부전선 파견 가능성에 대비해 근위기병사단을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브루실로프 공세 간 장갑차의 활약을 지켜본 이후 적시에 지휘관이 원하는 곳으로 전개 가능한 장갑차량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이에 근위기병사단장 김석중을 시작으로 수요가 정식으로 제기되었지만 병과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았는데. 포병은 이동식 포대의 개념으로 접근하여 생샤몽을, 보병과 공병은 방어선 돌파를 위해 Mk 시리즈를, 기병은 단순히 참호 돌파라는 주제에 매몰되지 않고 전차를 기동 자산으로써 인식하여 기동성이 좋은 슈나이더 CA1을 원하다가 상위 호환인 르노 FT가 나오자 르노 FT를 원했다. 최종적으로는 기병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주인공의 지식이 합세하여 르노 FT를 도입하게 된다.
단순히 르노 전차를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리캔, 지휘 전차, 구난전차의 개발, 전차보다 더 많은 지원 차량 등 기갑의 역량을 100% 발휘하기 위한 각종 투자와 발전이 동시에 이뤄졌다.
전차를 단순히 "참호선을 돌파하기 위한 이동식 토치카"로 인식한 지휘관, 개발자가 적지 않은 유럽과 달리 주인공에 의해 현대전의 편린을 계속 교육받은 대한제국군은 전차를 기동전력으로 인식하고 그에 맞는 교리를 연구하는 등 주인공에게만 기대지 않고 현대전을 준비하며 성장하는 군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1차 대전 때는 전차나 장갑차를 군단급 제대에서 틀어쥐고 중요한 전선에 소방수처럼 투입하는 식의 운용이 일반적이었고 연대급 교전은 되어야 10여 대 투입될까 말까 하는 식으로 집중 운용과는 거리가 있었던지라 1개 사단에 전차 200여 대를 몰아주는 한국군의 방식을 이해 못 해 한국군의 규모를 착각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3.6. 군수
군대는 보급 없이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고, 김시혁 역시 미래에서 군수를 소홀히 하다 일어난 참사들을 목격했으며 남만주 영향권을 확보한 이후 확장을 해나가며 지속적인 무력충돌을 겪어야 했던 만큼 발언권이 강해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작품 속 대한제국군에서 군수의 발언권은 매우 강력한 편으로, 장작림과의 전쟁에서도 탄약 보급이 충분히 이루어지겠냐는 질문에 대해 군수참모가 가능하다고 답하고 나서야 작전을 시작하였고. 1차대전 동부전선 원정군을 편성할 때, 김시혁이 물자들을 모스크바에 두자고 하자 군수국장인 민영찬이 아예 정색까지 하면서[20] 지적했는데, 극동전쟁의 영웅이자 원정군 최고사령관인 그에게 대놓고 반대가 가능할 정도로 발언권이 강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3.7. 의무
의무는 군수와 마찬가지로 남만주 영향권을 확보한 이후 확장을 해나가며 지속적인 무력충돌을 겪는 과정에서 발언권이 강해졌다. 원정군 편성 중에도 러시아의 질 낮은 수질, 풍토병에 대해 여러 해결책을 내놓는 것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김시혁의 미래지식을 이용해 머큐로크롬[21]의 조기 발견, 현대식 지혈대의 도입 등으로 사상자를 극적으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해당 의료품들은 협상국도 사용하며 큰 효과를 발하고 있다.용산에는 대규모 전상자 발생에 대비하고, 더 나아가 전염병 등 각종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최고 의료시설이 있어야 한다는 구주에서의 대전쟁 경험에 따라 육군과 해군이 공동으로 설립한, 일명 한성병원[22]이 세워졌다. 규모는 최대 4,000여 명의 부상자를 수용할 수 있다.
4. 해군
원역사에서는 대충 구색만 갖췄던 해군이 여기서는 프랑스로부터 구축함 6척을 도입하고 관련 교육도 제대로 받은 나름 싸울 수 있는 해군이 되었다. 본래는 추가로 어뢰정 8척도 갖춰질 예정이었으나 해군 양성을 견제하려는 일본의 순양함 판매라는 미끼에 넘어가 무산되었고 결국 그 자리는 자칭(?) 순양함인 양무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결과 양무호를 뺀 나머지 배들은 극동전쟁에서도 제대로 싸우며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양무호는 전쟁 막바지까지 후방에 틀어박혀있다가 의외로 원산 상륙작전에서 활약해서 독자들 사이에선 군밤의 혜안(...)이라 불리기도 하며 일본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도 칭해지기도 했다. 전후에는 보로디노급 전함과 스베틀라나급 방호순양함까지 운용하며 성장 중.[23]1차 세계대전 시점에 거제, 옥포, 부산 등에 조선소를 두고 있으며 소형 함정인 포함과 구축함을 자체 건조할 역량을 갖고 있다. 보로디노급 도입으로 기존 창설 계획이 어그러졌으나 육군의 도입에 한 발 걸쳐 어렵사리 해군항공대를 창설했고, 기지방호와 상륙작전, 육해군 통합작전을 수행할 해군육전대 창설도 확정되어 지휘부 구성을 마쳤고 첫 번째 기수가 강화도와 제주도에 배치되었다.
종전 직전 배상함으로써 미완성된 바이에른급 전함 2척[24]와 마켄젠급 순양전함 4척[25]을 받기로 프랑스와 협의가 되었다. 주력함 6척, 순양함 14척, 구축함 60척, 잠수함 40척을 목표로 건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27 계엄이 선포되자 각 해역함대 사령부 총원이 원수부와 해군대신에 따를 것을 맹세했고 28일. 한산급 구축함 8번함 함흥함과 긁어모은 육전대 2개 중대 변역을 한강을 통해 용산에 급파해 함락 직전이던 원수부를 구하는 결정적 활약을 했다. 육전대는 2.27 계엄을 주도해 박살난 황실경위원과 호위대를 대신해 황제 이강의 호위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규모에 비해 한족, 만주족 비율이 대단히 높은 편으로 1921년 기준 총원 4만 6천명 중 8천이 한족, 만주족 장병들이었다.
5. 항공대
육군항공대와 소수의 해군항공대로 더부살이하며 시작했지만 1차 대전 참전을 기회로 신형 항공기를 연달아 도입하며 규모와 전술을 배양해 나간다. 1913년 장작림 토벌 때만 해도 구식 복엽기가 전부였으나 서부전선 참전 시점에는 200여 명의 조종사와 100여 대의 항공기, 4천여 명의 인원을 유럽 현지에 파견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다. 동부전선에서 피로 실력을 쌓은 우수한 조종사들이 많아 항공 전술에 있어선 막 걸음마를 뗀 미 육군항공대를 교육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다.동부전선에서 러시아 공군의 일리야 무로메츠와 팀을 이뤄 초기적인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선보였으며,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다 피해가 커졌던 것을 교훈 삼아 요격기, 폭격기, 정찰기 등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은 기체들을 통합해 원활한 항공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전구 단위의 지휘부의 필요성을 제기, 항공사단 편성이 시작된다.
루덴도르프 공세를 맞이한 김시혁이 본격적으로 공지합동 전술을 선보여 이 방면의 선구자가 될 전망이다. 육군 부대에 파견된 공군 전술항공 통제관이 근접항공지원을 지휘 통제하는 방식(FAC)이 1918년에 일찌감치 뿌리내렸다. 그렇게 1차 대전 기간 동안 적기 221기 격추, 지상 폭격 임무 765회, 사살 전과 2,000여 명으로 규모 대비 발군의 전과를 세워 아시아 제1 항공세력으로 위상을 공고히 했다.
전간기 일본 항공대의 신장에 맞서 1922년부터 11계획의 전력증강 목표 및 중점사업이 시작된다. 기존의 뉴포르와 스패드를 대체할 신형기 도입되고 1923년 기준 7개소 뿐이었던[26] 항공기지를 남녁에서 북단까지 12개 추가 건설하고[27] 보조기지 20개 건설과 기지 요새화 작업이 추가된다. 여기에 방공경보망의 확충 및 충실화, 자체 전술기 제작 능력의 배양, 항공구락부 창설에 따른 예비 조종사 인력 충원 등 장기적인 생존과 전력 증강에 필수적인 계획들이 뒤따른다.
6. 헌병대(해체)
영미식 Military Police가 아닌 프랑스식 Gendarmerie. 군내 한 병과가 아니라 육해군과 별개의 독립 군종으로서 군내 치안 유지뿐 아니라 민간 치안에도 적극 관여한다. 1916년 한성폭동 때도 경무청, 금화군과 함께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다.독립 군종으로 출범한 배경에는 유력한 후원자이자 참고서 역할인 프랑스의 영향도 있지만 현실적인 필요성도 컸다. 대원군 집권 이래 군의 위상은 꾸준히 상승했는데 꼭 필요한 감시와 견제 수단은 없어서 임오군란부터 을미사변까지 군대가 주동 내지 협력한 정변이 고종 재위 기간 내내 발생했다. 여기에 조선군 시절 군영 운영비를 자체 충당하는 과정에서 만성화된 횡령, 군수품 유용을 방지, 적발할 수단도 없었다. 단기간에 이러한 역할을 해내기 위해선 육해군에 속한 일개 병과가 아닌 대등한 군종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었다.
1차 친위 쿠데타로 적극적인 군사 개혁이 가능해지고 러시아와 프랑스 교관단이 입국한 것에 맞춰 군내 비위행위 척결과 군 통수권을 강화를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대한제국 해군이 통제영과 각도 수영이 전부 해산된 뒤 창설되어 조선 수군과 사실상 별개 조직임을 감안하면 육군에 이어 두 번째로 신설된 군종이다. 초대 사령관은 민영환으로 민씨 척족인 그에게 군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겨 군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였으나 고종의 행적에 학을 뗀 민영환은 2차 쿠데타 때 김시혁 편을 들었다.
민영환이 육군대신으로 영전하고 이용익이 겸직하게 된 다음부터는 근황적 성격이 확연히 강해져 황실경위원, 익문사와 함께 고종의 수족이 되어 급격한 조직 확장이 이뤄졌다. 1914년에 불과 3천명이었던 조직이 1916년에는 1만, 1919년에는 3만으로 불어났으며 군부 주력이 모두 유럽으로 떠난 사이 한성부 통제를 전담하다시피 한다. 75mm 야포, 오스틴 장갑차 등 치안 유지 조직이라기엔 너무 과한 화력을 보유한 것도 유사시 군부와 부딪칠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
용산의 원수부와 미묘한 관계이며 특히 창설 동기인 기록조사실과는 앙숙지간. 음지에서 수시로 충돌한다. 내각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경무청과도 업무 영역 충돌로 사이가 나쁘다.[28] 공화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노란 개라 불리며 검은 개라 불리는 경무청 정보과 순검들과 함께 공포의 대상이다.
이용익이 병으로 쓰러진 뒤 박제순이 총관직을 겸직하게 되었는데 실상 그는 얼굴마담이고 고종이 직접 뽑아 올린 삼남 출신들이 조직을 이끌게 된다. 이용익이 중용한 1여단의 서북, 동북 출신들은 한성 폭동을 총기 사용 없이 성공적으로 진압했을 정도로 숙련된 정예병이고 극동전쟁 참가자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새로 들어온 삼남 출신들은 철저한 출세지향자들로 문민통제나 국민의 안녕 수호 같은 국민국가 군대에 필요한 관념이 극도로 떨어지는, 과거의 황국협회 이상의 정치깡패, 이명복 개인에게 충성하는 슈츠슈타펠이나 다름없다.
극동전쟁때 피해를 이유로 징집에서 대거 혜택을 본 삼남 출신들이 서북, 서울 출신들이 유럽으로 싸우러 간 사이 완장차고 탄압하는 꼴이라 김시혁에게 거병을 권했던 민정식과 민형식은 이대로면 삼남이 나머지 지역에 의해 공적으로 찍힐 것이라 우려했다.
이후 한성부의 시위 진압에서 한성부민들에게 총을 발포하는 것은 물론 포까지 발포하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며 이로 인해 결성된 시민군들에게 밀리자 손쉽게 전공을 세우려는 심산으로 병원을 습격하고, 육군 앰뷸런스에게 실탄을 갈기고, 저격수 거리를 조성해 지나는 시민들을 무차별 발포하는 등 온갖 전쟁범죄를 자행한다.
3월 혁명이 끝나고 열린 재판에서 수장 박두영을 비롯해 범죄가 입증된 자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다. 남은 병력은 헌병제대 중 유일하게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원수부 편에 합류한 제1헌병여단 독립대대장 황준성을 중심으로 추슬러 해체 수순을 밟는다. 1921년 시점에선 해체가 완료되었다. 황준성의 제1 독립대대가 내부 산하 국경경비대로 전환되어 만주 지역 국경 안정화에 투입되어다는 언급을 보아 국경경비대, 철도경비대, 순검대 등으로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7. 국경경비대
엄밀히 내부 산하 준군사조직으로 군부와 협력은 해도 수직적 상하관계에 있지는 않다.의화단의 난 이전까지는 국경 치안은 순검대와 현지 포군들이 유지했고 사태가 격화되면 군이 지원하는 형태였다. 극동 전쟁으로 남만주 영토를 일부 획득했으나 우호국인 러시아 제국령 남만주에 둘러 싸인 형태였기에 별도 조직을 신설하진 않았다. 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 제국이 몰락하고 제국이 관할하던 남만주 영토를 넘겨받아 영토가 갑자기 넓어지고 홍후즈 같은 마적떼, 봉천 군벌의 위협이 가시화된다. 처음엔 육군 사단들을 주둔시켜 해결했으나 많지도 않은 육군 전력을 계속 국경 경계에 투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국경 경비를 전담할 조직이 출범하게 된다.
시작은 1917년 발족한 철도경비대. 동부전선이 마무리 된후 학부대신 민종묵과 평북관찰사 민종렬이 동부전선에 노무자로 참여한 한족, 만주족 청년들 중 지원자를 받아 러시아가 밑에 부리던 호로군을 대체할 철도경비대 창설 계획을 세워 원수부에 협조를 구했고 국경 안정화와 만주의 동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리는 의중에 공감한 김시혁이 협조한다.
1919년 3월 혁명과 한소 국경 정상화로 합이빈 이북 북만주가 대한제국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국경경비대 조직의 필요성이 더욱 올라간다. 러시아 제국 영토일 때부터 도로와 철도를 깔고 도시들이 개발된 남만주와 달리, 험준한 다싱안링 산맥과 아무르강을 끼고 있고 인구 밀도가 낮은 야생의 땅에서 국경을 수호 임무를 맡을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 해체된 헌병대 독립대대 병력을 기병대화해 마적떼 토벌, 소비에트 적군의 국경침범 퇴거 등의 임무를 맡게 했고 1년간의 시험적 운용에 만족한 내부와 원수부는 조직 확대를 결정한다.
군과 유사하나 군이 아닌 조직 특성상 군을 동원하기엔 민감한 임무에도 투입된다. 치치하얼에서 한소 대표단이 국교 정상화와 국경 확정을 위한 회담을 가질 때 막 헌병대에서 넘어온 국경경비대원들이 순검대, 소비에트 측 공안들과 나란히 회장 경계를 섰다.
8. 금군
1차 친위 쿠데타와 칭제건원을 거쳐 황실경위원과 호위대가 맡아 수행했으나 이들이 2.27 계엄이 주역이 되어 각종 범죄에 가담했다 숙청된 후 새 황제가 된 이강을 호위할 조직이 붕 떠버렸다. 1년 가량은 해군육전대가 근접 경호, 수도사단 병력이 외곽 경호를 맡았으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학살에 동참했다 사라진 조직들을 복설할 수도 없어 고심 끝에 경위원과 호위대보다 훨씬 앞서 운영된 조직, 1894년 친군영과 함께 해체된 무예청과 금군청을 부활시킨다.원래 환도 하나만 패용한 채 임금을 지근거리서 호위하던 무예청은 시종무관들과 함께 황제, 황족들을 경호를 맡아 시종무관부의 통제를 받으며, 금군청은 한성의 5대 궁궐과 평양의 풍경궁까지 6개 궁궐의 경비를 책임지는 조직으로 재탄생한다.
군경의 무술유단자들을 대거 채용했고 타 민족에도 문을 열어 한족과 만주족, 망명한 로마노프 황족들을 따라온 백계 러시아인과 카자크들까지 받아들여 외인부대에 가까운 구성을 띈다. 덕분에 나이 지긋한 노인들에게는 외금군(外禁軍)이라 불리기도.
9. 보병장비
9.1. 피복류
- 전투복
군사 개혁 시기 위장성을 위해 카키색 군복이 도입되었다. 이후 1913년에는 새로운 쑥색 군복이 채택되는데, 워커부츠, 야전상의 등 냉전기 시대의 군복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혼자 40년은 앞선 군복을 입고 있는 셈.[29] 예복과 정복의 경우 원역사의 대한제국 군복에서 프랑스풍이 가미된 형식으로 변화했다.[30] 여담으로 모장이 이화문에서 태극으로 바뀌었다.[31] 별도로 전차병들은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검은색 가죽 재킷과 황토색 목도리를 착용한다.
- 아드리안 철모
1차 대전 참전을 앞둔 시점에 박격포와 함께 도입된 프랑스제 철모. 고종은 조선 초에 쓰던 첨주형 투구와 닮았고 보다 저렴하단 이유로 영국제 브로디 철모를 밀었으나 방호 성능, 중량, 착용감, 편의성 등 모든 부분에서 아드리안이 우월했기에 김시혁은 이쪽으로 강행한다. 전차 도입 이후에는 좁은 내부에서의 원활한 움직임을 위해 전면부 챙을 제거한 전차병 전용 헬멧과 파편 방호를 위한 면갑이 개발된다.
- 장구류
베트남전 미군 장구류, 혹은 한국군 구형군장(엑스반도)이 생각나는 디자인으로, 전투복과 함께 미래인 지식의 혜택을 크게 받았다. 금속 클립이나 고리를 이용해 필요한 장비들을 원하는 대로 결합할 수 있다. 그림자료1 그림자료2
9.2. 소총
- 게베어 1871
일명 마우저 소총. 청나라에 요청해 1000정을 받아온 것이 동학농민운동에서 친위영의 무장으로 사용된다. 극동전쟁 이후 그라 소총과 함께 치장되어 있다 1차 대전 때 일부 부대가 냉병기로 무장해야 할 정도로 열악해진 러시아군에 공여된다.
- 그라 소총
1880년대 소량 도입되었던 프랑스제 단발 소총. 1차 쿠데타 이후 군사 개혁을 위해 프랑스에 고문단 파견을 요청하며 당근으로 5만 정을 구매했다. 정규군은 물론 민병대까지 소총을 들려줘야 할 인원은 많은데 이제 막 생산 설비를 깐 모신나강만으론 러일전쟁 이전까지 충분한 물량을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 남부 지방에 뿌려진 30년식 소총과 반대로 북부 지방 민병대들에게 제공되었다. 극동전쟁 종전 이후 마우저 소총과 함께 예비 물자로 치장되어 있다가 1차 대전으로 2선 부대에게 들릴 소총이 부족해진 러시아에 공여되었다.
- 모신나강
러시아 제국제 볼트 액션 소총. 생산량의 일부를 러시아에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조병창을 건설하여 생산하기 시작해 러일전쟁기에는 대한제국군의 제식소총이 되었다. 러시아의 한자식 표기 중 하나인 아라사에서 따와 아식 보총이라 불리는데, 현실 한국에서 모신나강에 붙인 별명과 같다. 한국군 체형에는 너무 길고, 무겁다는 단점과 소총수의 실제 교전 거리는 길어도 200미터 내외라는 극동전쟁에서 얻어진 전훈, 산이 많은 한반도 지형, 기동전을 선호하는 한국군 교리 등을 고려해 1910년부터 2.5인치(6.4cm)짧고 1파운드(0.4kg)가벼운 개량형이 M91/10이란 제식명을 받고 개발되어 교체에 들어간다. 단발 속사가 가능한 베테랑들은 총알을 분무기처럼 뿌리는 강습소총의 특징을 못 미더워하고 오히려 단축형 모신나강을 더 선호하기도 한다.
- 30년식 소총
일본군의 제식 소총. 군제 개혁 와중에 고종이 미쓰이의 로비에 넘어가는 바람에 계획에 없던 3만 정이 도입되었다.[32] 극동전쟁을 앞두고 방어가 불가능한 남부 지역의 향교, 서원, 사찰 등지에 은닉해 두었다 현지 유격대에 보급되었다. 별도로 극동전쟁 중에 노획, 무장해제 과정에서 20만 정에 육박하는 수량을 확보해 종전 후 한동안 1.5선 장비로 쓰이다 민간에 불하된다.
이후 1차대전기에도 뜬금없이 대한제국 내에서 생산 중이라며 등장하는데, 극동전쟁 당시 한국 해군의 통상파괴전에 시달린 일본이 소총과 소총탄을 현지에서 제작, 보급할 요량으로 용산에 30년식 소총, 6.5mm 탄 제작 설비와 숙련공을 들여와 조병창을 구축했지만 대한제국군의 반격으로 패주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한국 손에 넘겨주게 된다. 뜻하지 않게 생산설비를 획득한 한국은 일본 다음으로 일본제 소총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가 된다. 군에서는 모신나강에게 밀려났으나 여전히 치안이 불안한 남만주 정착촌 등 민간에서는 인기가 좋아 미쓰이 사와 협력해 인력과 기계 설비를 보충하고 매월 10만 발 가량의 6.5mm 탄환을 생산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 M16 강습소총/강습기병총[33]
다가오는 1차대전과 그 이후를 걱정하던 김시혁이 기관단총과 돌격소총을 보급하고자 했으나 서로의 문제로[34] 인해 고민한 끝에 민간 기업인 홍익 정밀과개연성 그 자체존 브라우닝과 조나단 브라우닝 형제, 현지 협조를 위한 외국 총기 기업 윈체스터 사 섭외를 통해 제품화에 성공했으며, 사용하는 탄환도 보틀넥 구조, 스피쳐 탄두를 적용하는 등 개선되었다.[35]
1914년 장작림 토벌에서 강습보병여단이 시험운용하면서 실전성을 인정받았고, 본래는 1916년부터 양산 및 도입될 예정이었기에 군 제식명은 M16으로 명명되었다.[36] 그러나 1915년에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예정보다 빨리 양산되어 파병부대 위주로 보급이 진행되었다.
미군과 프랑스군도 1차대전을 계기로 도입하였으며[37] 프랑스군 운용분을 노획한 독일군도 이 총의 존재와 성능에 자극을 받아 기관단총을 1년 일찍 양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차 대전 후기부터는 미국과 프랑스에 대량으로 도입되어 SMG와 자동화기 시장을 양분한다.[38]
전간기 만주에선 중국식으로 강습보창이라 불린다. 군벌과 마적들이 중국에 풀린 수많은 총중에서 가장 높이 치는 물건으로 미국에서 소량이라도 매물이 풀리면 운남과 광서에서까지 올라와 어떻게든 구하려 애쓴다. 흘러드는 매물이 수요에 비해 많이 적다보니 꿩 대신 닭으로 독일산 기관단총이나 그것의 복제품이 다량 유통되고 있다.
- 아브토마트
강습소총이 러시아군에 소개되고 좋은 평가를 받아 개발과 양산이 탄력을 받게 되었고 쇼샤의 활약으로 더욱 필요성은 늘었으나 열악한 러시아 제국의 공업 능력으로 한국에서 양산해 줄 수 있을지 요청했다. 그러나 한국에 위치한 조병창들은 강습소총 및 러시아 지원용 소총 양산도 밀려서 불가능했고 이에 수소문하던 중 김시혁의 장인이 소유한 공장에 제작에 필요한 설비도 있겠다, 사용탄인 6.5mm까지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이쪽에 부탁해 양산을 시작한다.
- BAR
강습소총을 설계한 후 자동화기에 대한 관심이 커진 브라우닝이 원 역사보다 몇 년 빠르게 내놓아 1차 대전 참전 이전에 미군에 M1917이라는 제식명으로 채용된다.
- 게베어 1898
1차 대전기 독일제국군 제식소총. 병사 한명당 예비소총 2~3정을 확보한다는 계획아래 공식적으로 양산된 수량만 천만정이 넘고 이 막대한 물량이 종전 이후 국제 무기시장에 풀려 전세계 무기상이 달려들게 된다. 대한제국 역시 적성 세력에게 무기나 공작기계가 흘러가는 것을 막기위해 경쟁에 뛰어들었고 1921~22년에 이미 최소 80만 정의 독일제 소총이 '고철' 명목으로 수입된다. 대한제국 해군의 철저한 임검에도 중국으로 밀수되는 수량도 많아서 10만 명 이상을 무장시킬 장비가 상해를 통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일본산 탄약 규격(6.5mm)으로 맞춰가는 중화민국과 기존 탄약 규격을 유지중인 소련(7.62x54mmR) 군대에 총기가 노획되어 재사용되는 사태를 최대한 방지하고 막대한 독일제 총기를 활용할 겸 해서 7.62×54mmR 생산라인을 축소하고 7.92mm로 생산설비를 대대적으로 확충, 주력 탄알을 교체하는 사업이 시작된다.
9.3. 권총
- S&W M3
김시혁이 소유한 리볼버. 1부 초반 김시혁이 훈련대 3대대장 시절 최씨 어르신이 선물해 주었다. 이후 김시혁은 1차 친위 쿠데타를 할 때도 2부에서 헌병대와 맞설 때도 이 리볼버를 사용했다.
- 콜트 뉴 서비스
대한제국군의 제식 권총. 작중 물주 포지션인 최씨 어르신의 회사 "홍익정밀"에서 라이센스 생산을 맡는다. 의화단 사건을 대비하여 강습보병대대 전원에게 지급한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지급되고 있다.
- C96
작중 홍범도가 가진 이질적으로 생긴 권총이라며 흘러가듯 묘사된다.
9.4. 기관단총
- MP17
프랑스군이 운용하던 강습소총을 노획한 독일군은 보병이 혼자 쉽게 다룰 수 있는 경량 자동화기라는 점을 크게 주목했다. 이후 이것을 그대로 카피해서 만들 것이냐, 자국 기술력으로 새로 만들 것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으나 이미 한계점에 다다른 군수 역량에 또 다른 부담을 안기기 힘든 현실을 직시하면서 제식 권총탄인 9×19mm 파라벨룸을 사용하는 근접전용 자동화기 선에서 타협, 원 역사에서 MP18이라 명명된 기관단총이 MP17이란 제식명을 달고 1년 이른 니벨 공세 때 데뷔 전을 치르게 된다.
전후 성능을 인정받아 널리 퍼졌는데 중국과 만주에서는 무수한 데드카피판이 나돌 정도로 인기가 좋다.[39] 중국산 카피판 중에서는 산서성제가 제일이라고. 다만, 강습소총을 쓰는 대한제국에선 무게는 더 무거운 주제에 사거리는 짧고, 위력은 약하다고 선호되지 않는다. 국적을 드러내면 안 되는 기록국 요원들이나 울며 겨자 먹기로 애용하는 정도.
9.5. 기관총
- 맥심 기관총
러시아가 맥심 기관총을 대량 구매하던 시기를 잘 타고 들어가 1890년대 말경부터 도입하였다. 극동전쟁기의 대한제국군은 맥심을 지방군 진위여단에 6정씩, 중앙군(근위사단, 강습보병연대, 기병연대)에는 대대당 6정씩 배치하였다. 1900년대 초 당시 타국 군은 여단, 사단에나 1~2정이 배치되는 게 평균임을 감안하면 매우 많이 편제된 것이며, 이를 통해 침략한 일본군을 갈아버린다. 사용 탄환은 모신나강과 동일한 7.62x54mmR.
- 마드센 경기관총
세계 최초로 실용화된 경기관총. 러시아와 공동으로 구매하여 극동전쟁기에는 강습보병연대와 기병연대에서 중대에 6정씩 보급했으며 1차대전기엔 권총 손잡이가 붙고 소염기도 장착하는 등 개선된 버전을 동부전선 원정군을 기준으로 일반 보병 분대마다 1정, 강습보병에겐 분대당 2정을 지급했다.
9.6. 산탄총
- 윈체스터 M1897
의화단 사건 때 김가진을 경호하던 기록조사실 요원들이 사용. 시가지에서 강력한 근접화력으로 의화단과 폭도들을 막아내거나 길을 뚫는데 쓰였다. 깨알 같은 슬램파이어 묘사가 백미.
- Auto-5
반자동 산탄총. 제식 화기는 아니지만 징발한 총포상에서 가져온 오토-5들이 백병전, 시가전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김시혁이 M16 개발을 위해 장인을 찾았을 때 언급된 바에 의하면 포수와 순검들에게 인기 만점으로 민간 총포 시장에선 가장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9.7. 대전차화기
- 대전차 소총
포공국 주도로 개발된 대한제 대전차 소총. 김시혁은 독일이 전차를 생산할 여력이 부족해졌다 여겨 회의적이었으나[41] '극동의 소국인 우리도 전차를 가졌는데, 독일이 전차를 가지지 않을 리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아군 보병에게 최후의 발악이라도 할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포공국장 엄주익의 주장으로 개발에 착수, 군수국의 열띤 협조에 힘입어 서부전선 출발 직전 초도 분을 쥐여주는 데 성공한다. 강심철갑탄을 이용하는 독일식 대전차 전술과 조선에서 사용한 천보총, 청의 태창을 두루 참고했으며 개중에서도 의화단이 사용한 볼트액션 태창을 많이 참조했다.
13x90mm 탄약을 사용하는 대구경 볼트 액션 단발 소총으로 원자재 절감을 위해 목재 부품 사용을 최소화해 PTRD-41을 닮았으나 탄의 위력이 약해 그보다 살짝 짧은 형상이라고 설명된다. 2인 1조 구성으로 중대당 3정이 배치된다.
9.8. 폭발물
- 다이너마이트
의화단 토벌 때 수류탄처럼 사용했다.
의화단 토벌 당시 용감한 이들은 다이너마이트의 심지를 짧게 잘라 공중에서 폭파시켜 적들에게 다량의 피해를 주기도 했다.
- 수류탄
보병 싸움의 핵심이 되는 폭발물. 마찰점화식 신관을 이용한다. 의화단 토벌 때 사용한 다이너마이트가 불편함이 많다는 지적 아래 개발되었다. 고종이 즉위 40주년 기념 열병식에 쓸 공포탄을 제작한다며 포공국 예산을 모조리 끌어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엎어질 뻔했던 걸 김시혁이 국내외 인맥을 총동원해 민간 기업에서 개발에 성공했다. 극동전쟁에서 이를 노획한 일본군도 손쉽게 복제해서 사용한다.
- 척탄통
유탄발사기와 수형 박격포 사이에 걸쳐있는 지원화기. 위의 수류탄을 탄약으로 하며[42] 수류탄이 개발될 때 함께 개발된다. 원 역사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것을 김시혁이 훨씬 빠르게 도입한 것으로 수류탄과 함께 보병의 화력 강화와 능동적인 전술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일반 보병과 강습 보병을 가리지 않고 운용한다.[43] 2부에서 언급된 최대 사거리는 600m, 유효 살상반경은 5~10m. 극동전쟁에서 이를 노획한 일본군도 똑같이 복제해서 도입한다.
- 돌폭뢰
극동전쟁 당시 한국군이 사용한 푸가스. 아직 개발되지 않은 클레이모어의 역할을 대신해 원산 상륙작전 때 6백의 병력으로 2만의 일본군을 저지하는 데 공헌했다. 포로로 잡힌 한 일본인 장교가 이런 무기를 쓰는 건 반칙이라는 사용자 입장에선 극찬을 남기기도. 1차 대전 때는 독일군 불발탄까지 가져다 훨씬 큰 스케일로 써먹는다.
- 깡통 수류탄
이런 형태라고 보면 된다. 왼쪽의 것이 급조 수류탄으로 일명 "잼 깡통 수류탄"(Jam Tin Grenade), 오른쪽의 것이 이를 규격 및 제식화해서 제조한 "이중 실린더 수류탄"(Double Cylinder Hand Grenade).
다 먹은 통조림 깡통에 화약과 쇳조각을 가득 채우고 시한신관이나 수류탄 신관을 박아 제작한 급조 수류탄으로 잼 깡통 수류탄(Jam Tin Grenade)이란 명칭으로 협상군, 동맹군 가리지 않고 실제로 애용했던 무기. 엄폐호에 깊숙이 숨은 적이나 요새화된 진지 공략 시 일반적인 파쇄 수류탄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제작한 장비로 일반 수류탄 3발로 해치울 목표를 깡통 수류탄 1발로 해치울 수 있을 만큼 위력은 강력하나 그만큼 피해 범위가 넓고, 급조된 물건인 만큼 자칫 사용자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 의화단 토벌 때 공업용 다이너마이트의 신관을 잘라서 집어던졌던 선배들을 기억하는 강습보병대는 위험성엔 크게 개의치 않고 참호선을 빠르게 돌파할 수 있다는 전술적 이점에 주목해 절찬리에 사용했다.
- 관형폭약
1차대전에서 철조망 지대를 돌파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첫 출현.
- 도약지뢰
위력은 덜해도 제조 자체는 1차 대전 기술 수준으로 충분히 가능해 본래 역사보다 훨씬 일찍 등장한다. 1935년은 되어야 나올 물건을 양산해서 하필이면 독일군에게 사용하고 있다.
10. 중화기
10.1. 박격포
2부 프롤로그에서 박격포의 시안이 등장했으나, 대량 생산은 아직이라며 잠깐 언급된다. 1차 대전 참전을 목전에 두고 철모, 방독면 등과 함께 대량 생산에 착수한다. 구경은 60mm와 80mm이며 각각 보병 중대와 대대급 화기로 배치된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기동부대에 신속하고 강력한 화력을 제공하기에는 기존 박격포로 부족하다는 전훈이 받아들여져 포공국에서 개발한 신형 120mm 중박격포를 전차대대 당 9문, 보병연대 당 12문씩 배치하는 양산 계획이 수립된다. 제식명은 불명.현실에서도 그렇듯, 80mm 박격포는 악명이 자자한데. 60mm 박격포는 가벼워서 분해 후 도수 운반하는데 부담이 덜하고, 120mm 박격포는 도수 운반이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1문당 트럭 하나를 배치해 줬기에, 방열을 제외하면 운용 인원들이 걸어 다닐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80mm 박격포는 귀한 차량으로 옮기기엔 너무 가볍고, 도수 운반하기엔 무겁지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결론 하에, 포반원들이 직접 들고 다녀야 하기 때문.
10.2. 야포
- 1897년식 75mm 야포
프랑스제 75mm 야포. 세계 최초로 주퇴복좌기를 장착한 야포로 극동전쟁에서 대한제국군의 주력 야포로 활약한다. 극동전쟁 이후 개량을 거쳐 18도에 불과했던 포각이 45도까지 늘어나며 부족했던 사거리와 전술 유연성을 챙겼다. 극동전쟁 승리에 빼놓을 수 없는 무기지만 평사포라 살상력이 떨어지는 단점은 어쩔 수가 없었고 전후에 모든 물량을 곡사포로 개량했다. 1차 세계대전 참전이 확정되고 도입된 외국산 트럭에 이 야포를 견인하여 움직이는 기동포병대를 신설, 제2강습보병여단 예하로 배속시킨다. 서부전선 참전을 앞두고 기존 4연장 맥심포로는 대응이 불가능한 고타 폭격기나 체펠린 비행선에 대응하기 위해 대공포 개수형이 도입된다.
- 1913년식 105mm 야포
프랑스의 슈나이더 사가 제작한 105mm 야포. 슈나이더 사는 원래 프랑스군 도입을 노렸으나 프랑스군이 이를 도입하지 않자 새로운 고객으로 대한제국을 골랐으며,[44] 마침 화력보국[45]이라는 이름하에 건실한 포병을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와 맞물려 도입은 물론 아예 공장을 차려 라이선스 생산까지 하게 되었다. 다만 원역사의 105mm와 큰 차이가 있는데, 원역사에선 평사포로 개발된 105mm 야포지만 작중의 1913년식 105mm 야포는 곡사포로 개발되었다는 점이다. 곡사포의 지형 극복 능력을 고평가하는 한국군 포병의 입김이 제작 간에 반영되어 생긴 차이점인 듯하다.
특이하게도 김시혁 본인이 초도 도입량을 2분의 1로 줄이는데 찬성하였는 데 대한제국군이 이를 제대로 운용할 교리, 기반[46]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 이후 이 야포도 결국 프랑스군에 도입되긴 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독일군의 대공격으로 포병 자원이 슬슬 딸리던 프랑스가 마침 대한제국에 포장도 안 뜯은 105mm 야포들이 있는 것을 보고 급하게 비밀리에[47] 도입해 온 것.
- GPF 155mm 야포
프랑스가 개발한 155mm 장포신 평사포. 사거리 19km. 군수산업 역량이 한계에 달한 프랑스는 미국에 설계도를 제공해 이 포를 양산하려 했으나 그놈의 야드-파운드를 SI 단위계로 어떻게 치환하는지를 몰라서 미국이 오히려 프랑스에 공장 좀 세워달라고 청하는 지경에 이르는데 마침 대한제국은 상술한 슈나이더제 105mm 야포를 생산하며 노하우를 쌓았으며, 비슷한 시기에 협상국의 지원하에 제철소가 완공되는 등 생산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협상국의 병기창을 자처하고 나선 한국이 끼어들어 미국과 프랑스에 각각 생산량의 3분의 1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설계도와 기술을 넘겨 받는다. 이후 105mm/155mm로 구성된 포병사령부 중포여단을 신설하고 장기적으론 105mm 대대 2개와 155mm 대대 1개로 구성된 현대적 포병연대를 결성하고자 한다.
- 31년식 75mm 야포
일본군의 주력 야포. 주퇴복좌기가 없는 구식 화포로 분당 2발이라는 느린 발사속도를 가졌으며, 포방패의 부재로 운용병이 파편이나 적의 소총 사격에 그대로 노출되는 약점이 있다. 극동전쟁 기간 내내 일본군 포병이 한국군 포병에 밀린 원인. 전쟁 후반기에는 한국군 포병을 흉내 내 급조 포방패와 간이 간접 관측 장비를 부착한 현지 개량형이 등장한다.
10.3. 대공포
- 폼폼 포
동부전선에서 일리야 무로메츠 폭격기의 맷집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한국군 내에선 비슷한 위치에 있는 독일의 고타 폭격기와 체펠린 비행선을 상대할 대공화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받는다. 기존에는 대공용 4연장 맥심포를 방공 화기로 택할 예정이었으나 상대적으로 구형 항공기가 많은 동부전선과 달리 서부전선에서 활개치는 독일의 대형 폭격기들에 맞서기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 항공사령관 서왈보까지 나서 항공 전력만으로 넓은 서유럽 공역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의견에 힘을 실어주자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영국제 2파운더 폼폼 포와 프랑스제 75mm 대공포가 도입된다. 아미앵에서 협상국 항공대의 방심과 빈틈을 노려 기습해 들어온 독일 항공기들에 맞서 대공 화망을 구성한다.
11. 탑승물
11.1. 전차
- 마크 전차
세계 최초로 실전에 등장한 전차이자 육상 전함(Land ship)이라는 멋들어진 별명을 가진 전차. 솜 전투에 첫 등장한 이후 언론을 통해서도 대한제국에 알음알음 알려져 있던 모양새로, 전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자연스레 후보 중 하나가 되었으나 너무 비싼 가격, 느린 기동성, 영국 스스로 쓰기도 모자라 발주한 물량이 언제 도착할지 모른다는 점으로 인해 탈락한다. 엔진이 가운데에 있어 별도의 공간 분리 없이 열기를 등으로 받는 구조라 장시간 교전 시 승무원들이 탈진해 버리는 문제점이 있다.
- 생샤몽
프랑스제 전차. 75mm라는 고 화력 주포를 탑재하여 포병의 관심을 끌었지만 후보 선정 과정 중 탈락했다.
- 슈나이더 CA1
기갑을 기동 자산으로써 인식한 기병이 후보로 선정했지만 후술할 르노 FT의 등장으로 후보에서 탈락한다.
- 르노 FT
상술한 병과들 간 설전과 후보를 선정하는 과정을 지켜본 주인공이 내놓은 해답. 기가 막힌 타이밍[48] 덕에 싼값에 도입하게 되었고. 따따블 커미션[49]과 균형 잡힌 성능, 영국제에 비해 월등한 편의성, 밀덕후의 미학을 만족시키는 디자인, 무엇보다 당해 년에 초도 물량 공급, 2년 안에 250대 공급이란 막강한 생산성으로 칭제건원 20주년 열병식에 내보일 장난감이 필요했던 고종의 마음도 사로잡는다.
김시혁은 모든 차량을 주포가 달린 수컷형으로 통일하며 일부 차량을 내부 무장을 탈거하고 무전장비와 무전병이 들어가는 지휘전차, 차체를 베이스로 한 구난전차로 전용해 발주, 최종적으로 전차대대당 수컷형 르노 45대, 구난전차와 지휘전차 각 5대 배치가 결정된다. 이 쇳덩어리들에 빠르게 유류를 보급할 방안을 고심하며 머리 싸매는 군수책임자들에게 김시혁이 아이디어를 제공해 수십 년 빨리 제리캔이 개발된다. 현지에 도착한 후 보병용 척탄통을 응용한 연막탄 발사기를 부착하고[50] 단색 대신 흰 지렁이 도색을 칠해 생존성을 끌어올렸다.
- A7V
한국군의 조직적인 역습으로 아미앵 구경도 못하게 생긴 루덴도르프가 내놓은 히든카드. 독일 전차답게 겉으로 드러나는 공방 능력만은 우수하다. 독일의 철강 사정이 무척 열악해져 김시혁은 서부 전선 참전 이전에 등장 가능성에 부정적이었으나 없는 밑천을 다 털어서 기어이 찍어냈다. 라 빌레 숲에서 한국군 기보전투단과 조우해 원 역사에 없던 르노와 A7V의 전차전이 벌어진다. 라 발레 숲으로 자신들을 유도하는 듯한 움직임에 무언가 있다는 건 짐작했으나 그게 전차라는 예상은 못 한 한국군 전투단은 해군용 철갑탄으로도 격파가 불가능한 장갑에 충격을 받는다. 이후 두꺼운 장갑과 주포를 내세우며 한국군 근위기병사단의 전차들을 몰아내며 방어선을 무너뜨리려 하지만 보병들의 육탄공격과 대전차소총의 공격에 잠시 진격이 정체되고, 그 사이 전열을 가다듬은 전차들이 우회기동으로 반격하며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장갑이 두꺼운 것은 좋았지만, 경도가 높은 장갑판이 계속되는 피격을 견디지 못하고 안쪽부터 깨지면서 파편이 이리저리 튕겨 승무원들이 피해를 입기 시작하고, 한국군 전차들이 움츠러들기는커녕 기세를 올려 반격하며 사방에서 타격하자 후퇴를 결정하면서 등장을 마친다. 결과적으론 패배했지만, 잠시나마 한국군을 몰아세웠으며, 김시혁도 A7V의 등장에 진짜냐며 속으로 당황했을 정도로 막강한 적임은 사실이었다. 해당 에피소드에서 등장한 지크프리트, 메피스토, 닉스는 모두 실존 차량의 이름이며, 이중 메피스토는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A7V로도 유명하다.
전후 노획 A7V들은 승전국들에게 전리품으로 각기 분배되었는데 3대를 넘겨받은 한국은 1대는 포슈에게 선물해 앵발리드에 전시하게 하고 다른 2대 중 한대는 전국으로 순회 공연을 돌리다 스페인 독감으로 전국이 뒤숭숭해지자 용산역에 처박아 두었다. 한동안 잊혀진 상태로 있다가 우연히 헌병대에 맞서 항거할 방안을 찾던 공업사 사장 김상옥의 눈에 들어 엔진을 수리받고 호위대와 교전 중이던 원수부로 합류한다. 주포는 사용할 수 없었으나 노획해 치장중이던 독일제 기관총을 다시 얹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 FCM-1A
프랑스의 중전차. 105mm 단 포신과 75mm 장포신 탑재형으로 나뉘어 개발되었다. 엔진과 기어 박스 생산을 담당한 르노사가 경전차 양산으로도 바빠 공급이 지연되고 경전차 생산에 지장을 줄 바엔 기술 실증기로 남기고 개량형 연구로 넘어가는 게 낫다 여긴 윗선의 의중으로 양산이 이뤄지지 못할 운명이었으나 한국군과 독일군 A7V의 교전으로 전환점을 맞는다. 한국군의 전투 기록과 포로로 잡힌 A7V 승무원들의 증언을 종합하고 노획 A7V로 실험한 결과 협상국이 가진 보병 화력으로 A7V를 격파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중전차 양산 여론에 힘이 실린 것.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독일의 전차와 스당의 견고한 콘크리트 요새 장벽을 부술 철퇴로서 대공세 2파에 맞추어 양산이 이뤄진다.
11.2. 장갑차
- 오스틴 장갑차
공세를 앞둔 브루실로프가 러시아군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주목한 병기 중 하나. 가포드-푸틸로프 장갑차와 함께 장갑대대를 구성한다. 독일에 전적으로 의존한 대가로 차량도, 정비 물자도 극히 부족했던 러시아군에서 귀하디 귀한 병기로 본래 43개 소대로 쪼개져 운용했으나 소규모 제대로는 성과를 낼 수 없다는 판단하에 12개 대대로 재편되어 브루실로프 손에 쥐어 쥔다. 브루실로프가 직접 한국군 지휘부를 방문해 코벨 방면 공세를 부탁할 때 2개 대대가 넘겨져 대한군의 예비대로 편성된다. 러시아 제국이 패망하면서 미처 수출되지 못하고 영국에 묶여있던 차량 20여대가 대한제국 국가헌병대에 도입되어 기동 자산으로 쓰인다.[51]
- 가포드-푸틸로프 장갑차
오스틴 장갑차와 함께 장갑대대를 구성하는 차량. 대한제국군의 코벨 공세 때 오스틴 장갑차와 함께 2개 대대가 넘어왔으며 오스틴 장갑차가 기동성을 활용한다면 푸틸로프는 화력 지원을 담당한다. 장갑차는 대단위 부대를 딸려 공세의 창끝으로 활용하는 게 1차 대전시기 군대의 일반적인 운용법이나 미래인 김시혁은 정예 강습보병과 묶어 기동예비대로 사용했다.
- 롬펠 장갑차
오스틴, 가포드 장갑차에 대응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장갑차량. 루츠크 방어선 전면에 배치되어 러시아 근위대의 공세를 저지한다. 투박한 러시아 장갑차와 달리 메르세데스 차대를 기반으로 한 우아한 디자인이 특징.
11.3. 차량
- 리버티 트럭
표준화 개념을 정착시켜 어느 공장에서 생산되든 완벽히 동일한 규격을 자랑하는 미군의 군용 트럭. 24km의 준수한 속도, 빼어난 험지 주파 능력과 내구성을 갖춘 준수한 차량으로 한국군의 영향을 받은 프랑켄슈타인 마피아의 등장으로 미군의 군사 개혁이 탄력을 받으면서 원 역사보다 빨리 대량 배치된다. 한국은 1차 대전 참전을 준비하는 미군을 거들고 병기창 역할을 해주는 대가로 1,500대를 공짜로 배분 받아 한창 기갑 장비 도입을 추진하던 기병대에 우선적으로 배치한다. 이 과정에서 포병 자산의 기동화를 추진하던 포병대가 기병대와 마찰을 빚기도.
11.4. 군함
- 아퀘부스급 구축함
프랑스제 구축함. 배수량 323톤의, 현대 기준으로는 대형 고속정 수준의 체급이지만 이 시대엔 어엿한 정식 군함. 주포는 러시아 해군과 규격을 통일해 75밀리로 강화했으며 외에도 47밀리 속사포 6문과 15인치 어뢰발사관 2문으로 무장하고 있다. 1900년대 초반 시점에서는 상당한 고속인 최대 시속 28노트로 항해가 가능하다. 극동전쟁 직전까지 6척이 도입되어 전쟁 기간 내내 활약했다. 2부 시점에서는 구형함으로 분류되어 신생 중화민국 해군에 제공할 계획이었으나 소형함 건조 역량이 무너져 고생하던 프랑스 측에서 전후 새 구축함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아퀘부스급 6척을 모두 넘겨 달라는 제안을 해온다. 중화민국과의 외교 문제를 우려한 대한은 아퀘부스급 대신 아퀘부스급 기반으로 자체 건조한 구축함을 판매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 양무호
대포 한 방 안 쏘고 한국 해군 전력에 구멍을 내고 프랑스와의 밀월 관계를 흔들어 놓으려는 일제의 음흉한 속내에 고종이 넘어가 떠맞게 된 폐급 함정. 원 역사에서는 해군 육성을 위한 훈련함으로 도입되어 낡았어도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었다지만 역사가 바뀌어 그럴 필요가 없어졌는데 그저 큰 배가 가지고 싶은 고종의 욕망을 일제가 부채질하면서 억지로 도입하게 된다. 엔진부터 시작해 모든 설비가 구닥다리에 폐선 직전 함정이라 내파성과 대미지 컨트롤이 취약하고 조함도 어려워 인수 요원이었던 부제독 이동휘는 마지막까지 도입에 반대했으나 친일파이자 고종의 총신인 이근택은 무시하고 인수를 진행시킨다.
양무호의 무리한 도입으로 해군은 본래 도입하려 했던 프랑스제 어뢰정 도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막대한 유지 비용과 인력 소모까지 떠맡게 되면서 창설 당시부터 위태위태했던 고종과 해군의 관계도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붕괴되고 만다. 워낙 성능이 쓰레기다 보니 극동전쟁 발발 이후에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방치되어 있었으나 원산 상륙작전을 앞두고 뜻밖의 중임을 맞게 된다. 한국 해군이 보유한 함정 중에 대대급 병력과 중화기를 한 번에 수송할 수 있는 유일한 함정이었기 때문.
낡아빠진 배로 한 겨울 악기상을 뚫고 일본군 감시망에 들키지 않으며 원산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지만 해안선을 따라 일본 측 해안 초소들을 걷어내며 남하한 원수부 직할 병력과의 합동으로 기어이 성공시킨다. 한국 해군을 약화시키기 위해 떠넘긴 이 배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던 일본군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고 전후 군부가 외무성에 패전 책임을 떠넘기는 명분 중 하나로 써먹는다. 군부는 최선을 다했으나 무능한 관료들이 적의 비수가 될 순양함을 팔아먹어 패하고 말았다는 논리.
석탄 먹는 애물단지이자 해군 전력 구성에도 피해를 준 놈이지만 동시에 원산 상륙작전을 이끌어 극동전쟁 승리를 확정 지은 이 애증의 함선을 잊을 수 없었던 해군은 전함에 딸린 소형 보트에 양무라는 애칭을 붙여 기념하고 있다.
- 보로디노급 전함
러시아제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 본디 대한제국 해군은 33함대라는 함대구축 계획을 세워 방호순양함을 우선 도입해 거함 운용법을 익히며 서서히 전함을 도입하려 했으나 생각보다 빠르게 도입이 되었다. 그 과정이 기가 막힌데 일본이 극동 전쟁 중 자신들이 격침시킨 제1태평양함대의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 4척을 건져서 수리해 쓰자 러시아에서 전함 반환을 요구하며 충돌이 있었는데 이때 고종이 끼어들어 저 전함 4척의 일본행을 묵인하는 대신 러시아가 보로디노급 전함 1척을 대한제국에 팔아달라고 요청한 것. 당연히 원래 같다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거지만 주변 상황이 기가 막히게 돌아가며[52] 실제 전함 도입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보로디노급 전함 중 3번 함인 오룔이 대한제국으로 들어와 충무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도입과정에서 잡음이 정말 많았고 해군과 고종은 다시 한번 틀어지지만, 전함이 곧 국력의 현시이던 시절에 북양 군벌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유용하게 쓰였으며 거대한 전함을 본 민간의 마음도 사로잡아 해군 지원자가 폭증하는 등 해군도 나름 득을 본다.
1차 세계대전 때 대한제국 원정 함대의 기함이 되어 지중해에 투입되었다. 전 드레드노트급이라 해도 어엿한 전함이 들어오는 것이다 보니 오헝 제국 해군과 지중해 파견 독일 제국 유보트들이 상당히 긴장하고 있다고 언급되며 이탈리아 해군도 이를 탐내서 대한제국 해군의 지휘권을 빼앗으려 했을 정도다. 3월 혁명 막바지에 딱 결정적인 순간에 인천항으로 귀환해 3사단장 이희두의 발악을 무산시켰다. 워싱턴 군축회의 이후 아직 진수중인 전함들이 취역하는 타이밍에 맞춰 퇴역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 스베틀라나급 방호순양함
대한제국 해군이 보로디노급 전함과 함께 들여온 순양함으로 급작스레 들여온 보로디노급 전함과 달리 처음부터 계획해서 증여받은 함선이며 한국에 와서 오룔이 충무함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받았듯 스베틀라나급 방호순양함도 경기도에서 따온 "경기"라는 한국식 이름을 받게 된다. 증여받은 뒤 1차대전 시점까지도 운영 중에 있는데 대한 해군에서도 낡아빠진 구닥다리 함장이란 평가를 듣는다. 하지만 자체 건조 가능한 함정이 소형 구축함과 포함 밖에 없는 한국 해군 현실상 몇 안 되는 대형함이라 구주원정함대에도 당당히 포함되어 지중해로 향하게 되고 작전 중 유보트의 공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는다. 한국 해군이 유일한 순양함을 살려보려 모진 애를 썼으나 강판에 파공이 생기며 침수가 걷잡을 수 없어졌고 자신이 태어난 르 아브르의 조선소에서 밤중에 조용한 최후를 맞았다.
- 경기급 구축함
극동전쟁 때 운용한 아퀘부스급의 영향을 받아 설계한 400톤 급 소형 구축함. 최초의 전력 강화 구상에선 주력 구축함으로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유럽에서 구축함들이 대형화되는 추세가 자리 잡고 일본이 배수량 1천 톤이 넘는 우미카제급 구축함을 개발하자 급선회. 한산급 구축함에 자리를 내준다.
- 한산급 구축함
유럽의 구축함 대형화 흐름과 일본의 우미카제급 개발에 자극받아 탄생한 한국 해군 주력 구축함. 30노트 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는 800톤 이상 대형 구축함을 목표로 마침 부클리에급의 결함으로 울상을 짓던 프랑스와 합작으로 설계에 들어간다. 만재 1,050톤에 최대속력 32노트, 무장으로 프랑스제 100mm 주포와 러시아제 75mm 부포 4문, 450mm 어뢰발사관을 갖췄다. 초도함에 으레 따르는 결함을 감내하기 싫어 한국에 양보한 프랑스도 성능에 만족해 곧장 양산에 착수, 앙세뉴 루급이란 제식명을 붙였다. 앙세뉴 루급은 언니인 한산급과 달리 자국산 65mm 4문을 부포로 사용하는 차이점이 있다. 설계에 프랑스가 참여했기에 함수에 와인 저장고가 존재하는데 한국 해군은 여기다 김치나 장류를 보관하고 있다.[53] 서해 함대사령부 예하 한산급 8번함 함흥함은 2.27 계엄이 발생하자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근황파의 가장 치명적인 일격을 부수고 용산의 원수부를 구원하는 활약을 했다.
- 3월 혁명급 전함
종전까지 미완성 상태였던 바이에른급 전함의 3번함 작센과 4번함 뷔르템부르크를 인수해서 완공한다. 함명을 둘러싼 수많은 설왕설래 끝에 작센은 3월 혁명, 뷔르템부르크는 아미앵이란 이름을 얻는다. 3월 혁명함이 부산으로 입항하던 날, 마지막 판옥선과 거북선을 몰아봤던 조선 수군 출신 노병들을 초청해 뜻깊은 행사를 가졌다.
- 오트란토급 전함
바이에른급 2척과 마찬가지로 미완성 상태였던 마켄젠급 순양전함 4척이 배상함으로 대한제국에 넘어간다. 대한제국 육해군이 승전을 거둔 전장에서 함명을 따와 1번함부터 오트란토, 베네치아, 코벨, 갈리치아로 명명되었다.
- 경기급 순양함
침몰한 스베틀라나급 경기함의 보상으로 받아온 경순양함. 한참 낡은 구형이었던 경기함의 빈자리를 땜질하는 역할인 만큼 오래 쓸만한 성능은 아니다. 유럽에 남아있던 한국 해군 구축함 3척과 함께 3월 혁명함 완성을 기다렸다 함께 전단을 이뤄 입항했다. 2척중 한 척은 침몰한 경기함의 이름을 계승하고, 다른 한척은 황제 이강이 직접 전국 시도급 행정구역의 이름을 써놓은 용지를 뽑는 추첨행사를 거쳐 '평양'이라 명명된다.
- 유보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이 운용한 잠수함. 배상함으로 몇 척을 들여와 본격적인 잠수함 연구를 시작한다.
11.5. 항공기
- 파먼 III
한국군이 최초로 도입한 항공기. 기초적인 복엽기라 정찰 용도로만 활용했다. 본래는 육군만 사용하고 해군은 따로 도입할 예정이었으나 고종의 욕심으로 도입된 보르디노급 전함 탓에 해군이 세워둔 건함 계획이 다 꼬이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육군에 협조를 구해 나눠 사용했다. 한국군이 신형 장비를 도입하면 일단 따라 하고 보는 일본도 뒤따라 도입. 이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뉴포르로 교체된다.
- 뉴포르
동부전선 참전이 확정되어 항공 전력 강화가 절실한 시점에 브루실로프의 주도로 공군력 강화에 열을 올리던 러시아군이 도입할 때 함께 도입한다. 탁지부에선 예산 문제로 난색을 표했으나 화려한 신형 장비라면 사족을 못쓰는 고종이 내탕금까지 꺼내며 열렬히 지지한 덕분에 도입에 성공. 정찰기인 뉴포르 10과 전투기인 뉴포르 11이 도입되어 항공정찰, 폭격기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서부전선 참전을 계기로 스패드로 교체. 퇴역하진 않았고 정찰, 지상 공격 임무를 수행한다.[54] 전간기에는 훈련용 기체로 전환되었다.
- 일리야 무로메츠
러시아군이 자랑하는 폭격기. 뉴포르10, 11과 묶어 초기형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구성한다. 수적 우위를 앞세워 달려드는 포커 전투기의 맹공을 특유의 단단함으로 버텨내며 공중 포병 역할을 수행해낸다.
- 스패드
1917년 배치되기 시작한 프랑스의 신형 전투기. 한국군의 서부전선 참전에 대한 대가로 먼저 접촉한 일본과의 계약을 엎어버리고 우선 공급을 약속, 스패드 7과 12가 지급되어 뉴포르를 대체한다. 신형 뉴포르-들라주 NiD 29 도입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 훈련용 기체로 전환된다.
- 포커
뉴포르와 스패드에 대응하는 독일의 주력 전투기. 포커 Dr.1, 포커 D.VII는 협상국 신형 전투기들에 전혀 밀리지 않는 우수한 성능이나 포커 Dr.1는 1917년부터 불거진 피마자유 공급 부족으로 인한 안전성 문제와 적은 양산 수량, 포커 D.VII는 1918년 3월부터 생산을 시작해 종전 직전인 6월에야 본격적으로 투입이 된 탓에 한참 전에 구형이 된 포커 아인데커가 1917년 동부전선에선 주력기로 쓰이고, 1918년 미카엘 공세 때도 가용 기체 수를 채우는 역할로 투입되었다. 김시혁은 프랑스측과 협조를 구해 네덜란드에 있는 포커사의 공장 설비와 기술진을 한국으로 가져오려 한다.[55] 대신 최신형 포커 D.VIII를 비롯해 포커사가 생산해놓고 패전 직전의 독일이 인수하지 못 해 창고에 박혀있던 400여대의 미인도 전투기는 프랑스로 넘어가 폴란드 재무장에 투입된다.
- 뉴포르-들라주 NiD 29
수석 엔지니어이자 CEO인 들라주의 이름으로 사명을 바꾼 뉴포르 사에서 20년대 생산한 전투기. 대한제국 육군 항공대가 기존의 뉴포르와 스패드를 대체할 주력기로 선정하고 1922년부터 150대를 도입했다. 일본 육군항공대에서도 100대를 도입해 대한제국 항공대와 경쟁 국면을 심화시킨다.
- 드와이틴 D.1
프랑스제 단좌 전투기. 대한제국 해군항공대에서 주력 전투기로 선정해 1922년부터 80대를 도입한다.
- 브레게 14
1차 대전 기간에 제작된 복엽 경폭경기 겸 정찰기. 전후 대한제국 육해군항공대에서 60대를 도입해 정찰 및 해상 초계 임무를 맡긴다.
- 글로스터 스패로호크
영국 글로스터사에서 생산한 단좌전투기. 원역사에서처럼 20년대 일본 해군항공대에 도입되어 대한제국 해군항공대의 드와이틴과 맞서는 포지션이 된다.
11.6. 군마
작중 조선-대한제국군이 최초로 사용한 탑승물로 동학 농민 혁명 당시 김시혁이 김석중을 시켜 말 잘 타는 병사들을 모아 만든 임시 기병대는 당시 있던 말을 되는 데로 끌어모아 만든 터라 제대로 된 군마를 타진 못했다. 제대로 된 군마는 1차 친위쿠데타 이후 러시아와 협력 체계를 구축해 러시아에서 들여왔으며 1차 대전 시점에서는 하코트나 얀코프스키 같은 민간 업자들에게서도 구매하고 포로가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알 토르자 장군에게 군마 양산에 관한 노하우를 전수받기도 한다.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제1근위기병사단이 기계화 사단으로 개편되며 조금씩 자리를 물려줄 준비를 하고 있지만 드넒은 만주를 기계화 사단 하나로 커버하는 건 불가능한데다 헌병대와 경무청, 철도경비대의 군마 수요도 있어 완전히 물러나기까진 한참 더 걸릴 전망이다.[56]
황실종마장에선 아라비안종 육종이 이뤄지고 있으며 극동 전쟁과 1차 대전. 두 번에 걸쳐 김시혁과 함께 싸운 러시아의 쿠로파트킨 장군이 우정의 증표로 투르크메니스탄을 복속시키고 얻은 아할 테케 25마리를 선물해 줘 함흥과 만주의 목장에서 번식이 이뤄진다.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면적과 극히 희박한 인구밀도, 열악한 도로 사정이 중첩된 북만주를 넘겨받으면서 기계화된 육군을 신속하게 집결시켜 침공해온 영격하는 기존 작계를 적용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축소될줄 알았던 기병대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문제는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공급. 1921~22년 기준 전국에 사용중인 마필이 3만두, 목장에 육성중인 마필이 4만두에 불과하며 그나마 절반은 토종 조랑말이라 군용으로는 부작합했다. 이에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넘어온 종마 목장들이 산재한 함경도를 중심으로 10주년 산마 계획을 추진, 1931년까지 군마만 5만필을 확보하고 2차 계획으로 넘어가 10만필의 군마를 획득해 장기적인 소모에 대비하기로 한다. 말 못지 않게 중요한 기수와 자금을 충당하고 인민들이 승마를 친숙하게 여기게 만들기 위해 황실 후원 아래 경마 산업이 급격히 성장한다.
[1] 경기에 제3진위여단, 관서에 제4, 5, 7진위여단, 관북에 제6, 8진위여단, 호남에 제9진위여단, 영남에 제10진위여단.[2] 수도보병사단, 제1근위기병사단, 제1보병사단, 제2보병사단, 제3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제9보병사단.[3] 제7보병여단, 제8보병여단.[4] 제1강습보병여단, 제2강습보병여단.[5] 2.27 계엄 가담 부대. 극동 전쟁때 주안산에서 용전분투한 전통 덕분인지 부대 해체는 피했으나 수도에 가까운 제물포를 떠나 머나먼 장춘으로 옮겨가야 했다.[6] 2.27 계엄에 가담한 청주의 제8보병여단이 해체되고 의주의 제7보병여단으로 흡수되어 탄생한 사단. 8여단이 남기고 간 청주의 본부는 신설된 동원사령부 몫으로 돌려졌다.[7] 4군단, 5군단, 6군단. 숫자 '3'이 공란이다. 3보병사단이 여전히 존재하는걸 생각하면 반란 가담부대 숫자번호에 대한 배척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어보인다.[8] 장기적으로는 소련을 가상적으로 상정한 45개 사단 100만명의 동원이 가능한 체제를 구축하려 한다는 이야기도 언급중이나, 당장의 상비군이나 예비군 규모를 감안했을때 이는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로 예상된다.[9] 1차 세계대전 중후기에 들어 동맹국/협상국 양 진영에서 수렴진화하듯 등장하여 현대에까지 큰 틀이 이어지고 있는 현대 보병전술의 기본 전제이다.[10] 강습부대→ 중앙군 근위사단→ 지방군 여단.[11] 1차 대전 기준으로 서방에서 가장 전술적으로 뛰어난 군대인 독일 제국군이 전술 단위를 중대까지 내리는 교리를 정착시켜 가는 상태였는데, 동시기 한국군은 강습 보병과 일반 보병을 가리지 않고 분대 단위로 원활한 전술 행동이 가능하다.[12] 한-독간 최초의 교전이었던 볼로디미르 전투 직후에는 포병대대가 하나씩 붙어있는 것 같다는 감상도 있었다. 원정군 보병대대 직할의 박격포소대가 80mm박격포 12문을 편제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런 감상이 그들 기준에서 아주 틀린건 아닌 셈이다.[13] 다만 기존 1개 포대 6문에서 4문 체제로 감편되었다.[14] 시작부터 특수병과 성격이 강했던 병과이다 보니, 독자들 중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특수전사령부가 되어 장차전에서 더 상위 차원에서의 전략적 특수작전 수행을 맡게 될 것이라고 추측도 나온다.[15] 포병학교 교도대대 1개 포대, 중앙군 4개 대대, 지방군 6개 대대.[16] 실제 역사에서는 러일전쟁 중후반 경에야 러일 양국 포병에서부터 지형지물을 끼고 엄폐한 간접사격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며, 이러한 전훈은 독일군 같은 일부 열강 육군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1차대전 개전 시점에 이르러서는 이미 상당히 보편화된다.[17] 다만 강습보병 포병대는 1개 포대가 4문 체제로 감편되었다.[18] 이상저온 현상으로 기온이 낮아 작용제가 쉽게 퍼지지 못하는데다가 기껏 퍼지더라도 평야가 많은 동부전선 특성상 바람에 빠르게 흩어져 살상력이 빠르게 사라지는 등 실용적인 문제는 물론, 주인공이 비인도적인 화학무기 자체에 거부감이 있어 "역사에 죄를 짓지는 말자."라는 말까지 하며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화학탄을 투발하자 이에 보복하기 위해 화학탄 사용을 허락한다.[19] 받은 이유가 참 골 때리는데, 미국이 참전을 준비하며 이 야포를 라이선스 생산을 하려 했으나 야드-파운드와 미터법 변환을 잘못하는 바람에 못 써먹을 물건이 나와버리자 이를 한국이 생산하여 프랑스와 미국에 납품하는 조건하에 설계도를 얻었다. 마침 대한제국은 1차대전 직전 프랑스제 슈나이더 105mm 곡사포를 라이선스 생산하며 화포 제작에 대한 노하우를 쌓았고, 협상국의 지원하에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고 가공할 수 있는 제철소가 생겨난 시점이었다.[20] 대학원생의 논문을 읽고서 "이게 맞냐고 생각하나?"라 묻는 교수의 눈빛이였다고.[21] 머큐로크롬의 발견 자체는 1900년대 초였으나 미국의 휴 H. 영 박사에 의해 살균효과가 있음을 발견된 것이 1918년이다.[22] 이 시절 으레 군 시설들이 다 그렇듯 굉장히 폐쇄적이고 진입로가 제한되어 있으며 외벽은 75㎜ 야포 직사도 2~3번 정도 견딜 정도로 굉장히 단단하게 설치되어 있다.[23] 다만 보로디노급 전함의 경우 해군에겐 영 좋지 않은 루트로 도입하였다. 이에 대해선 하술.[24] 3번 함 작센→3월 혁명, 4번 함 뷔르템베르크→아미앵[25] 1번함 마켄젠→오트란토, 2번 함 그라프 슈페→베네치아, 3번 함 프린츠 아이텔 프리드리히→코벨, 4번 함 퓌르스트 비스마르크→갈리치아.[26] 여의도, 수원, 청주, 부산, 평양, 함흥, 장춘[27] 의주, 강릉, 원산, 전주, 대구, 제주, 하얼빈, 봉천 등[28] 이승만이 총리 첫 임기에 적극적으로 추진한 경무청의 경부로의 확장을 좌초시키고 대신 커진 조직이 헌병대라 대놓고 밥그릇이 겹친다.[29] 그림자료[30] 프랑스 군사고문단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원역사의 대한제국 군복도 프랑스 군복을 모방한 일본군의 군복을 모방한 것이니 원점회귀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자료[31] 사소한 것 같지만, 군의 상징이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에서 태극기의 태극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한국군이 더 이상 황제만의 군대가 아닌 국민의 군대로 거듭났다는 걸 나타내는 장치로 볼 수 있다.[32] 이 때문에 하마터면 모신나강 도입을 말아먹을뻔하였고, 30년식 값을 군 예산이 아닌 내장원 자금으로 지불하여 고종의 독단적인 지름으로 마무리하였다.[33] 기병총버전은 M1A1카빈처럼 접철식 개머리판을 장착했다.강습소총 제원 삽화[34] 기관단총의 문제로, 당시 대한제국군의 제식 권총탄은 림드탄이여서 자동화기인 기관단총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권총탄을 채택하자니 해당 권총탄을 사용할 권총도 새로 보급해야 하는 등 문제가 있다. 거기가 작중 대한제국군은 보병간 교전 거리를 200m 내외로 보는데 기관단총의 교전 거리는 길어봐야 100~150m라는 문제도 있다. 그렇다고 돌격 소총을 만들자니 기술 부족으로 인해 지나치게 무거워질 것을 우려해야 했다. [57] 이에 고민하던 중 꼭 둘 중 하나만을 고를 이유가 없으며, 그 중간이라 부를 수 있는 M1 카빈을 제작하여 지급하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만 자동사격이 기본으로 지원되는 것을 보면 M2 카빈에 가깝다.[35] 탄을 이렇게 만들 경우 정확한 위력은 화약의 양이나 탄두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치수 상 가장 비슷한 탄은 StG44에 사용된 7.92×33mm이다. 설정화에서는 탄 규격을 7.62×33mm로 명시하고 있다.[36] 홍익정밀에서 붙인 상품명은 최초 독자모델 총기라는 의미에서 M1.[37] 양 군 모두 본격적인 도입은 1차대전 후기였으나, 1910년대 중순에 판초비야 토벌전이나 15년도 서부전선에서 소량을 시험운용한 바 있다.[38] 그리스건, 스텐같은 염가형 기관단총은 휴대성과 저렴함으로 어필이 가능하겠으나 톰슨은 설자리가 없어졌다.[39] 실제로도 중국 곳곳에서 MP18나 그것의 계열모델이 복제생산 되었다.[40] 당시에는 기관총을 포병이 운용했기 때문에 총이 아닌, 포라고 불렀다.[41] 1917년까지 협상국은 독일이 전차를 개발하고 있다는 첩보를 알지 못했고 1918년 루덴도르프 공세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전쟁 막바지에 나왔고, 그마저도 생산성 문제로 '21대' 양산에 그쳤으니 독일의 철강 사정이 원 역사보다 더욱 악회된 상황에 나올 일 없다 여겨도 이상할 게 없었다.[42] 척탄통에 쓸 때는 신관을 충격 신관으로 교체하고 밑바닥에 추진 장약을 부착한다.[43] 극동전쟁기에는 중대 직할, 1차대전 시기에는 소대 직할, 구주원정군은 분대당 1문 편제[44] 프랑스도, 독일도 세계 대전 이전에는 105mm 같은 중(中) 포의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했다. 야전에는 75mm처럼 군마로 간편히 운송할 수 있는 경포를 쓰고, 155mm같이 이동이 제한되는 중(重) 포는 요새 포로 거치해 쓰면 된다 여겼다. 군마로 운송하기엔 너무 무거운 105mm가 굳이 필요할 거란 생각을 전쟁 전에는 못 했고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경포와 중(重) 포 생산도 버거워 기존에 없던 신규 라인을 깔 여유가 없었다.[45] 강력한 화력이 부족한 인력을 메꿔주고, 인명 손실을 줄여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막대한 비용이 들겠지만 이를 도입하지 않을 때 전쟁에서 일어날 피해에 비하면 적을 것이라는 논리에 의해 생겨났다.[46] 한국전을 예시로, 105mm 야포 대대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선 차량이 최소 50대 이상이 필요하며, 자동차 기술이 아직 미비한 시대이기에 이보다 더 많은 차량이 필요할 텐데 대한제국이 이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 군마로 수송하는 방안도 있지만 중포를 무리하게 견인하다 폐사해버린 것을 예시로 들며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47] 당시 대한제국은 남만주 문제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대놓고 가져오는 건 무리였다.[48] 당시 프랑스군은 이 전차를 400대를 계약했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기는데 어림도 없어서 해외에서 판로를 찾던 중이었다. 며칠만 늦었어도 마음을 바꾼 프랑스군이 1000대의 계약을 맺게 되면서 싸게 팔 이유가 없어졌겠지만, 그걸 알고 있는 건 미래인인 김시혁 뿐이였다.[49] 오사카 주식시장에 몰래 투자했다 물려서(...) 벌충할 돈이 필요했다.[50] 1차 대전까진 포병이나 항공기가 연막탄을 뿌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무사히 굴러가는 전차를 양산하기도 벅찬 시대다 보니 간단한 기술임에도 생각이 닿지 못했다.[51] 이놈들은 따로 추가장갑을 단 특주품이라 집중사격에 뚫리기도 했던 러시아군 사양과는 달리 헌병대의 무차별적인 사격을 전부 막아내며 한성에서 용산의 원수부까지 김시혁을 무사히 데려다줬다.[52] 당시 드레드노트급 함선이 등장하며 러시아 역시 드레드노트 도입을 위해 준비 중인 상황에서 남아있던 보로디노급 전함들이 애물단지가 되어가고 있던지라 빠르게 처분하길 원했고 마침 태평양에서 활동할 제2중대의 개념으로 우방인 한국 해군을 강화시킬 명분도 있었다. 거기다 나머지 열강들도 전함 1척 가지곤 균형이 깨지진 않을 거라 판단했다. 그나마 반발할 여지가 있던 일본 같은 경우에도 당장 전 드레드노트급 4척을 얻은 데다 어차피 대세는 드레드노트급이 될 테니 한국이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 1~2척 갖는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고 본인들 입으로 직접 말하기도 했다.[53] 하필 이 음식들이 발효음식이다 보니 이를 알게 된 이탈리아 해군 장교들이 얘들 이상한 거 먹어요!라고 난리를 쳐서 한국 해군 지휘부가 진땀을 빼기도 했다.[54] 기구나 비행선 공격용으로 애용되던 르 프리어 로켓(Le Prieur rocket) 기준으로 뉴포르는 8발, 스패드는 6발을 달 수 있다.[55] 처음에는 동맹국 프랑스 업체들을 물색해봤으나 뉴포르 사는 기술 이전에 굉장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면허 생산 정도만 허락하려 했고 스패드 사는 적극적으로 나와 성사직전까지 갔으나 회사의 재정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블레리오 사에 인수가 유력해졌고 해당 업체가 기술 이전에 부정적이라 엎어졌다.[56] 애당초 기병이란 병과가 전장에서 완전히 퇴장하는 건 한국 전쟁 시기는 되어야 하며 심지어 현대에 와서도 중국이나 몽골은 차량이 다니지 못하는 험지 지역용으로 여전히 기병을 유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