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10-09 12:26:29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군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table width=100%><table bgcolor=#000><table bordercolor=#000><width=50%> 파일: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글자3.png||문서 ||
----
등장인물 · 개변된 역사(극동 전쟁) · 군사


1. 개요2. 군사개혁3. 육군
3.1. 보병3.2. 특수3.3. 포병3.4. 기병3.5. 기갑3.6. 군수3.7. 의무
4. 해군5. 항공대6. 헌병대(해체)7. 국경경비대8. 금군9. 보병장비
9.1. 피복류9.2. 소총9.3. 권총9.4. 기관단총9.5. 기관총9.6. 산탄총9.7. 대전차화기9.8. 폭발물
10. 중화기
10.1. 박격포10.2. 야포10.3. 대공포
11. 탑승물
11.1. 전차11.2. 장갑차11.3. 차량11.4. 군함11.5. 항공기11.6. 군마

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 묘사되는 전술, 무기체계를 서술한다.

2. 군사개혁

주인공 김시혁이 미래인인 덕에 당대 모든 군대들이 겪은 실책과 시행착오들을 겪지 않으며, 정답만을 선택해 개혁을 추진 중이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으로 기존 오군영 체제 및 신식군으로 육성되고 있던 별기군이 붕괴되고 청, 일본과 같은 외세의 간섭으로 군사 육성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군 조직과 전통, 문화가 사라져버린 상태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전술과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걸림돌이 없어지는 효과로 나타났다. 장교는 양반, 부사관은 중인이 대다수로 차지하고 있으며 교육 받은 양질의 인력들이 군대로 몰린 덕분에 고등 교리에 빨리 녹아들 수 있었다.

극동전쟁 기간의 한국군이 열악한 국력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해준 원천이었으며, 1부 시점의 외국에서는 그 전모가 제대로 인식되진 않았었지만 그것을 눈여겨본 사람들 치고 경시한 이들은 없었다.

독일의 팔켄하인은 극동전쟁 직전에 방한하여 한국군의 기동훈련을 참관했을 뿐이었지만, 최소한 김시혁이 대한제국 육군을 정예하게 키워낸 유능한 인물이라는 점을 1차대전 시점에서도 기억하고 있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한국군과 극동전쟁의 전훈을 부분적으로나마 배워 자군에 이식하는 것만으로도 실제 역사보다 훨씬 큰 성과를 내서 1916년 시점에서 협상국을 패배의 목전까지 밀어붙이는데 일조하였다.

2부에서 1차대전에 참전한 미군을 이끄는 퍼싱 원수 역시 극동전쟁때 한국군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된 경험을 토대로 미군 군사개혁에 매진하여 높은 성과를 이뤘고, 한국군에 대한 군사고문단 시절부터 한국군과 연이 깊은 포슈 원수 역시 현대전을 극동전쟁기의 한국군을 통해 처음 인식하고 학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군은 육군의 재건과 새로운 전술과 교리를 만드는 데 있어 한국군을 가상적으로 상정하고 적극적으로 참고하고 있다.
"집단군 사령부에서 저들을 두고 원숭이라느니 호랑이라느니 한참 이야기를 한다지만 그러한 표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차르가 휘두르는 가장 치명적인 병기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바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쟁기계들일지도 모르지. 적어도 본관은 그리 생각한다네.”
- 2부 161화, 독일 제26 예비군단장 오토 폰 휘겔 남작과 참모의 대화.
“…각료 여러분, 저도 6월 30일… 아니, 솜에서 영국군이 공세를 시작한 7월 1일까지는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끊은 뒤, 한 번 심호흡을 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현시점에서 가장 군사적으로 앞서 있다는 독일과 영국이 실패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이미 전쟁의 패러다임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환되고 있고, 기존의 방식과 괴리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한국군은 영국군을 박살 낸 독일군 20만 명과 오스트리아군 10만 명을 40일 만에 섬멸시켰습니다.”
… (중략) … “다들 기억하십시오. 독일의 야전군급 제대를 단 한 번의 대규모 전역에서 궤멸시킨 군대는, 나폴레옹 전쟁 이래로 한국군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참모부와 육군이 받은 충격은 아마 각료 여러분이 받은 것 이상이기도 할 겁니다."
- 2부 282화, 미국 전쟁장관 뉴턴 베이커.
“원수, 솔직히 이야기해서 나는 아시아 군대들을 전혀 신뢰하진 않았습니다. 현대의 전장에 적합하지 않으며, 용기도 끈기도 모자란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동부전선에서 귀하의 지휘 하에 엄청난 전과가 쏟아지는 것을 보며 생각을 바꿨습니다.”
- 2부 436화, 영국군 영국원정군 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원수.
“…보어 전쟁 치르고 충격을 받아서 개혁에 매진했던 1914년까지의 우리 육군과, 1903년 극동전쟁 때부터 같은 시기 한국군의 수준 차이를 한번 비교해 본 적은 있습니까? 우리도 그때 죽어라 개혁에 매달려서 그나마 지금 수준의 군대라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김 원수의 한국군은 이미 지금의 전쟁터에 던져놓아도 손색없을 현대 육군을 완성해놨는데 그런 식으로 깎아내리는 것은 부당한 처사입니다.”
- 2부 439화, 영국 제2군 사령관 허버트 플러머 대장.
“그리고 그 보고서의 내용은 실로 놀라웠네. 아니, 충격적이라고 해야 하려나. 어쨌거나 우리 문명인들이 수백만 명의 피 값을 치러 적응하고 있던 새로운 형태의 전쟁과 거기에 적합한 형태의 군대, 전술을 저 한국군은 13년 전에 이미 완성해서 선보이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보고서였지. 짐이 항상 이야기하던, 과소평가할 수 없는 아시아의 무시무시한 저력을 최악의 방식으로 경험한 후였지만 뒤늦게라도 그 전모와 실체를 이해할 수 있었지.”
… (중략) … “아시아의 불가리아 정도로만 여겼던 자들이, 20세기의 여명에 홀로 미래전을 내다보고 충실히 준비해온 놈들인 줄 누가 알았겠느냐마는… 베르됭 공세를 망가뜨리고, 동부전선의 생명선을 연장시켰던 그 한국군이 다시 튀어나오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이제 짐은 희생당한 신민들과, 선제들의 영령을 무슨 낯으로 봬야 할지 모르겠군.”
- 2부 527화,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

2부의 메인이벤트인 대한제국의 1차대전 참전과 한국 구주원정군이 거둔 전공을 통해 결국 전 세계에 그 진면모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뒤늦게야 극동전쟁과 1차대전의 한국군을 제대로 연구하고 직시하게 된 유럽 열강의 군부는 적으로 대치중이거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충돌할지언정 한국군의 실력에 대해서만큼은 동양인에 대한 폄하나 인종적 편견 없이 '20세기의 여명에 혼자 현대전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거기에 맞게 적응한 정예군'이라고 고평가하고 있다.

당장 그 한국군에게 직접 된통 깨지고 있는 독일군이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협상국의 구성군들 역시 독일군을 상대로 수년간 고전해오던 입장이라... 독립전쟁기부터 프로이센군과 독일군을 유럽의 우수한 모범사례로 추종해오던 '3류 군대' 미군의 보수적인 인사들 역시 1916년의 브루실로프 공세 간 한국 구주원정군의 부크강 집단군 섬멸에 경악하며 새로운 추종 사례로 주목하고 있는 중이다.

3. 육군

극동 전쟁 개전 시점에는 1개 근위사단과 8개 진위대 여단[1], 1개 강습보병연대가 존재했다. 장기적으로 10개 사단과 2개 강습보병여단으로 증강하는 청사진을 추진중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지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시점에는 8개 사단[2]과 2개 보병여단[3]과 2개 강습보병여단[4], 포병사령부 직할 포병단이 존재했다.

1920년대 초반에는 2개 군단 10개 사단 체제로 가평의 제1근위기병사단, 개성의 제9보병사단, 수원의 수도보병사단이 합쳐져 수도군단. 합이빈의 제6보병사단, 장춘의 제3보병사단[5], 의주의 제7보병사단[6]이 합쳐서 제1군단을 구성한다. 제2보병사단과 제5보병사단은 지리적으로 심하게 이격된 관북과 관서 방어를 맞아 외따로 떨어져 있고 유럽에 잔류한 부대들이 복귀하는 데로 3번째 2군단 창설하기로 한다. 장기적으로 3개 군단 12개 사단, 3개 강습보병여단 체제를 구축할 예정이다.

각급 사령부와 교육시설도 대대적으로 정비된다. 포병사령부는 한성에서 양평으로 옮겨 대대적인 확대, 개편을 준비하고 3개 여단을 증강을 앞둔 강습보병대는 수원에 강습보병사령부를 차려 독립하고 원수부 직속으로 돌려줘 원수부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 신속한 투입이 가능한 체제를 구축한다.

육군 교육사령부는 예하 병과학교들을 광주로 이전하는 한편, 미국과 프랑스에 배치되어 교육훈련을 전담하고 귀국한 야전훈련사령부(FTC)를 교육사령부 예하에 두고 전반적인 신병 교육을 수행하게 된다. 장교 대상 교육기관인 한성의 육군 무관학교와 참모학교는 해당 위치에 존치하고 군의 허리인 부사관단 육성을 더욱 체계화하고 총력전 체제에 걸맞는 규모로 기르기 위해 장교 자원들과 함께 훈련받던 기존 방식을 탈피, 평양에 육군 교관학교를 신설한다.

현역병과 별개로 예비군 동원체제 역시 정비되고 있다. 동원사령부의 창설이 예정되어 있으며, 휘하에 전시 증편되는 예비군 3개 군단[7]이 예정되어 있다. [8] 다만 조선시대 경국대전에서도, 대원군 이후의 정립한 민보에 의거해서나 지역 민병대는 현지 지방관들이 소집, 통제하는 식이었던지라 군부가 통째로 권한을 넘기는데 대한 민간의 반발과 경계심이 상당했다. 이에 내각에서는 만주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는 원수부 동원사령부에서 통제하고 경기도부터는 내부 예하의 경무청 동원국이 맡아 수행하자는 절충안을 내놓아 통과시켰다.

3.1. 보병

의화단 사건 개입을 앞두고 강습보병대대라는 중앙군 직할대를 만들어 현대전에 적합한 새로운 보병전술과 편제를 등장시켰다.

밀집하면 강력한 현대 무기의 살상력에 쉽게 표적이 되어 희생되기 쉽기에, 전술제대의 최소단위를 소대까지 낮추고, 분대급 이하에서 각개전투가 가능하게 만들어 적의 화력으로부터, 은엄폐/침투기동이 용이하게 개편하는 한편, 전술단위의 소형화로 인해 수반되는 화력의 약화는 경기관총, 수류탄, 척탄통 등 이전 같으면 포병 등의 타 병과에서나 운용했을 장비를 보병 소부대에 편제시켜 보완, 치명성을 극대화 하는 방향을 추구,[9] 강습보병대대에 현대식 보병전술을 먼저 습득시킨 뒤 점진적으로 전군에 확대하여[10] 대한제국을 세계에서 제일 진보된 보병 및 보병전술 보유국으로 탈바꿈시켰으며, 타국에 비해 20년 가까이 새로운 방향성을 조기에 완성한 것만으로 충분히 현대 군사사에 길이 회자될 업적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11]

1차대전 참전이 결정되고 협상국의 군비 지원이 가시화되자 이에 힘입어 꾸준히 현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를테면 보병대대와 중대에는 박격포공용화기로 편제되기 시작하였고, 1부에서는 강습부대나 기병연대, 근위사단같은 중앙군부대만이 중대에 6정을 간신히 편제시키던 경기관총이 원정군 보병분대에서는 분대당 1정, 원정군 강습분대에는 분대당 2정까지 보급량이 늘었으며, 보병분대의 구조 역시 현대화되었다.

원정군 보병분대는 소총수 위주의 소총조와 경기관총 위주의 지원조로 나뉜 전간기~현대 유럽식 체제고, 원정군 강습분대의 구조는 냉전기에 완전히 정착된 미국식의 사격조 체제다. 이에 관한 대체역사 갤러리의 분석/설명

2부의 1차대전 시기에서는 보병이 운용하는 다종의 박격포 체계와 소/분대급 공용화기인 척탄통이 동맹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의 병력 규모에 대한 부정확한 판단을 유도하는 효과를 보기도 했다.

구경 대비 화력은 박격포가 곡사포보다 우월하기 때문인 점도 있지만, 한국 구주원정군은 1916년 시점에서 이미 2차대전에 정착된 현대의 보병부대 박격포 편제나 운용수량을 미리 구현하고 있던게 제일 큰 원인이었다.

1918년의 독일군도 미넨베르퍼나 보병포의 편제는 보병대대선에서, 한국군 보병대대의 박격포 운용수량보다 훨씬 적은 양을 운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니, 1916년에 양군이 처음 격돌했을 무렵의 혼란은 두말할것도 없고,[12] 한국군과의 전투경험이 쌓인 뒤에도 야전에서 자잘한 혼란을 가하기엔 충분했다.

또한, 강습보병을 단순한 정예보병부대로 남겨두는 게 아니라 자전거 보병으로 개편, 트럭으로 움직이는 기동포병대 배속[13] 등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해가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미국에서 리버티 트럭이 도입되고 근위기병사단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예하 보병연대들을 차량화보병으로 개편, 분대당 차량 한 대씩을 돌려 연대 전체가 150대 이상의 차량을 운용하는 호화로운 편제를 구성한다.

한국군 보병을 상징하는 요소는 무전기, 돌격 나팔 용도로 쓰이는 태평소. 야간에 원활한 피아식별과 의사소통은 21세기에도 어려운데 조선군 시절부터 군영에서 연주했고 야외에서도 쩌렁쩌렁하게 크게 울리는 관악기는 직관적이고 훌륭한 피아 식별 수단이며 공세 타이밍, 방향을 동일하게 맞추는 효시 역할도 맡는다. 한밤중에 쩌렁쩌렁 크게 울리는 나팔 소리의 위압감이 엄청난 데다 이걸 가장 활발하게 사용하는 부대가 최정예 강습보병이라 극동 전쟁 후반 일본군은 멀리서 태평소 소리만 들려와도 경기를 일으켰고 동맹국 장병들은 예리코의 나팔이라 부르며 치를 떤다.

3.2. 특수

의화단 전쟁을 앞두고 정예 충격병인 강습보병대대와 프랑스식 경보병 중대를 창설한 것을 시작으로 극동전쟁 동안 유격전을 벌임으로써 정보작전과 직접타격, 비재래전 등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정석적인 특수부대 발전 단계를 밟고 있다.

강습부대는 작중 구호나 역할을 보면 미군의 제75레인저연대를 모티브 삼은 게 확실한데, 레인저 연대처럼 특수부대와 정예 경보병대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새로운 장비나 전술을 도입할 시 최우선 적용해 보는 교도대 성격도 띠고 있다. 작중에서 레인저란 명칭을 부여해 준 사람은 미국인 고문관 제임스 하코트. 본국 레인저들과 임무와 성격이 겹치는 정예 보병들을 레인저라 불러주었는데, 그 뜻이나 유래는 잘 모르면서도 어감이 강렬하고 멋있어 적극 채용했다.

강습부대를 토대로 일반 보병부대에도 수색대를 편성함으로써 이들 부대가 정찰첩보나 정찰수색 등 전술 및 작전술 단계에서의 특수작전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고 강습부대에서부터 이식하기 시작한 현대화한 보병 전술들을 전파하고 있다. 특히 3진위여단 수색대는 경인가도 전투 이후 원수부 직할대로 합류하여 해군이나 강습보병과 합동으로 특수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전간기에는 원수부 직속 강습보병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신속대응군 및 전략예비대 성격을 띠게 되었다.[14]

3.3. 포병

군사개혁 과정에서 주퇴복좌기를 최초로 적용한 현대식 야포인 프랑스제 Mle1897을 대량으로 도입, 1부 완결 시점에서 육군은 교육부대 1개 포대와 10개 포병대대,[15] 해군은 러시아제 152밀리 해안포 8문과 프랑스제 야포 1개 대대를 운용하는 현대식 대규모 현대식 포병전력을 운용하고 있다.

해당 야포가 원래 설계상 곡사포가 아닌 평사포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형지물을 최대한 활용하여 관측반, 야전 통신수단과 연계된 간접사격을 구사하고 있는데, 야전포병은 표적을 직접 조준하여 사격하던 것이 일반적이던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히 진보된 포병전술을 구사하는 셈이다.[16] 또한, 일본군의 야포들이 주퇴복좌기가 없어서 발사속도가 느린 점을 이용해, 높은 연사력과 수준 높은 전술로 부족한 수량을 만회, 대포병전에서 상당한 위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심지어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기초적인 TOT사격까지 가능한 수준에 올랐다. 대신 이런 연사력 높은 야포의 대량 운용에는 필연적으로 대량의 포탄 소모가 수반되며, 극동 전쟁과 1차 세계대전 내내 열악한 교통 인프라와 맞물려 전쟁수행에 장애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시기 강습보병대가 차량으로 견인하는 75mm 포대를 배속 받아 포병 자산의 기동화가 시작되었으며[17] 동부전선 귀환 후 155mm 중포와 미국제 트럭 대량 도입으로 화력과 기동성이 일신된다.

이후 브루실로프 공세가 끝나고 성급하게 시작된 러시아의 추가 공세가 실패하고 그동안 얻은 영토들을 잃고 코벨까지 다시 잃을 위기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첫 화학탄 포격을 하는데[18] 이때 현대적인 화학탄 교리를 보여준다. 당시에는 화학탄을 적 방어선에 직접 투발하는 방식이었는데, 방어선에 잔류한 작용제가 이후 진군하는 아군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어 진격을 늦추는 부작용이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군은 고농도의, 잔류시간이 긴 작용제를 적 부대의 후방에 투발하여 적이 퇴각하거나 증원이 오는 것을 차단하고, 방어선 전면에는 잔류시간이 짧은 작용제를 투하함과 동시에 전선 곳곳에 일반 포격을 섞어 포격함으로써 적에게 포탄에 맞아 죽을지, 가스에 질식해 죽을지, 아니면 큰 희생 끝에 빠져나와 만신창이가 된 채 한국군과 맞붙을지에 대한 죽음의 삼지선다를 강요하고 고착시키는 전술을 사용했다. 방어선 전면에 투하된 작용제는 지속시간이 짧아 아군이 진격할 때 피해도 적어지는 것도 장점. 이를 이용해 오스만군 19사단을 괴멸시키고 동맹군 군단의 진격을 멈춰세우며 코벨을 지켜내는데 큰 활약을 했다.

시간이 지나 서부전선에 참전할 때는 프랑스에서 GPF 155mm 야포 설계도를 받아[19] 라이선스 생산을 시작하며 제대로 된 중포 생산과 운용 경험을 쌓기 시작, 동부전선에서 습득한 75, 105mm 혼성 운용 노하우를 더해 경(輕) 포-중(中) 포-중(重) 포. 3단계 운용 교리를 정립한다.

가장 위력이 강하지만 아군의 기동로까지 망가뜨려 포격 이후 빠른 진격을 어렵게 만드는 155mm 중(重) 포는 깊숙한 후방 진격로나 진지를 타격하고, 보병이나 전차를 파괴하는 데는 충분하나 사거리가 짧고 방어 축성물을 타격하는 데 한계가 있는 75mm 경포는 아군이 진격해야 할 기동로 상에 있는 적의 병력만 쓸어내고, 둘 사이에 끼인 야전부대는 공중에서 폭발하도록 설정된 105mm로 두들겨 아군의 기동로는 보호하면서 적이 입은 피해는 극대화하는 교리. 중(中) 포 없이 경포와 중(重) 포로 이뤄진 2단계 구조에 허점이 많아 골치 아팠던 동시기 프랑스나 독일보다 한층 진보한 교리로서 치명성의 극대화되어있다.

3.4. 기병

2차 대전 시기까진 현역이고, 본격적인 전차차량화보병이 등장하기 전 유의미한 기동전력으로써 잘 써먹는다. 대한제국은 베이스도 거의 없다 보니 개선 작업이 오히려 쉽게 이루어졌고, 1차 친위 쿠데타 당시 들어온 러시아 카자크들에게 기병 훈련을 맡겼으며 이후 러시아에서도 군마를 수입하고 하코트를 기병 고문으로 기용하며 제대로 된 기병대를 갖추게 된다.

1차 대전 시점에선 강습보병부대의 전술 행동을 벤치마킹해 고전적인 운용 법인 냉병기돌격은 물론 신속하게 하마해 분대 단위 소전투부터 자동화기유탄을 퍼붓는 척탄병 역할까지 해내는, 충격력과 화력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병종으로 거듭난다. 선두는 타이밍 잡아서 종심을 파고들고, 후발대는 보병 역할까지 해가며 돌파구 확대하는 게 철마 대신 말을 타고 있을 뿐 현대적 기갑부대와 완벽히 동일하다.

이런 선진적인 안목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기병장교들에 의해 전차 도입과 기갑부대로의 개편이 추진된다. 기병이 확고한 지위를 굳히고 깊은 전통을 갖고 있었던 유럽과 미국에선 기병대 장교들이 전차와 기계화에 완고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일찌감치 기병 전통이 소멸했다가 1900년대 초반에야 겨우 일정 규모로 성장한 한국은 기병대 창설 기수가 그대로 1차 대전에 참전할 정도로 젊었기에 군마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강철 군마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본래라면 남만주 지역의 도로망 확충과 산업 발전에 발맞춰 축소될 예정이었으나 도로도 없고, 인구밀도도 극히 낮은 아무르강 유역과 다싱안링 산맥을 포함한 광활한 북만주가 추가로 대한제국 영토에 편입되면서 만주 지역 순검대와 국경경비대가 기병대로 전환되고 군마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3.5. 기갑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서부전선 파견 가능성에 대비해 근위기병사단을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브루실로프 공세 간 장갑차의 활약을 지켜본 이후 적시에 지휘관이 원하는 곳으로 전개 가능한 장갑차량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

이에 근위기병사단장 김석중을 시작으로 수요가 정식으로 제기되었지만 병과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았는데. 포병은 이동식 포대의 개념으로 접근하여 생샤몽을, 보병과 공병은 방어선 돌파를 위해 Mk 시리즈를, 기병은 단순히 참호 돌파라는 주제에 매몰되지 않고 전차를 기동 자산으로써 인식하여 기동성이 좋은 슈나이더 CA1을 원하다가 상위 호환인 르노 FT가 나오자 르노 FT를 원했다. 최종적으로는 기병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주인공의 지식이 합세하여 르노 FT를 도입하게 된다.

단순히 르노 전차를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리캔, 지휘 전차, 구난전차의 개발, 전차보다 더 많은 지원 차량 등 기갑의 역량을 100% 발휘하기 위한 각종 투자와 발전이 동시에 이뤄졌다.

전차를 단순히 "참호선을 돌파하기 위한 이동식 토치카"로 인식한 지휘관, 개발자가 적지 않은 유럽과 달리 주인공에 의해 현대전의 편린을 계속 교육받은 대한제국군은 전차를 기동전력으로 인식하고 그에 맞는 교리를 연구하는 등 주인공에게만 기대지 않고 현대전을 준비하며 성장하는 군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1차 대전 때는 전차나 장갑차를 군단급 제대에서 틀어쥐고 중요한 전선에 소방수처럼 투입하는 식의 운용이 일반적이었고 연대급 교전은 되어야 10여 대 투입될까 말까 하는 식으로 집중 운용과는 거리가 있었던지라 1개 사단에 전차 200여 대를 몰아주는 한국군의 방식을 이해 못 해 한국군의 규모를 착각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3.6. 군수

군대는 보급 없이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고, 김시혁 역시 미래에서 군수를 소홀히 하다 일어난 참사들을 목격했으며 남만주 영향권을 확보한 이후 확장을 해나가며 지속적인 무력충돌을 겪어야 했던 만큼 발언권이 강해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작품 속 대한제국군에서 군수의 발언권은 매우 강력한 편으로, 장작림과의 전쟁에서도 탄약 보급이 충분히 이루어지겠냐는 질문에 대해 군수참모가 가능하다고 답하고 나서야 작전을 시작하였고. 1차대전 동부전선 원정군을 편성할 때, 김시혁이 물자들을 모스크바에 두자고 하자 군수국장인 민영찬이 아예 정색까지 하면서[20] 지적했는데, 극동전쟁의 영웅이자 원정군 최고사령관인 그에게 대놓고 반대가 가능할 정도로 발언권이 강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3.7. 의무

의무는 군수와 마찬가지로 남만주 영향권을 확보한 이후 확장을 해나가며 지속적인 무력충돌을 겪는 과정에서 발언권이 강해졌다. 원정군 편성 중에도 러시아의 질 낮은 수질, 풍토병에 대해 여러 해결책을 내놓는 것으로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김시혁의 미래지식을 이용해 머큐로크롬[21]의 조기 발견, 현대식 지혈대의 도입 등으로 사상자를 극적으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해당 의료품들은 협상국도 사용하며 큰 효과를 발하고 있다.

용산에는 대규모 전상자 발생에 대비하고, 더 나아가 전염병 등 각종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최고 의료시설이 있어야 한다는 구주에서의 대전쟁 경험에 따라 육군과 해군이 공동으로 설립한, 일명 한성병원[22]이 세워졌다. 규모는 최대 4,000여 명의 부상자를 수용할 수 있다.

4. 해군

원역사에서는 대충 구색만 갖췄던 해군이 여기서는 프랑스로부터 구축함 6척을 도입하고 관련 교육도 제대로 받은 나름 싸울 수 있는 해군이 되었다. 본래는 추가로 어뢰정 8척도 갖춰질 예정이었으나 해군 양성을 견제하려는 일본의 순양함 판매라는 미끼에 넘어가 무산되었고 결국 그 자리는 자칭(?) 순양함인 양무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결과 양무호를 뺀 나머지 배들은 극동전쟁에서도 제대로 싸우며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양무호는 전쟁 막바지까지 후방에 틀어박혀있다가 의외로 원산 상륙작전에서 활약해서 독자들 사이에선 군밤의 혜안(...)이라 불리기도 하며 일본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도 칭해지기도 했다. 전후에는 보로디노급 전함스베틀라나급 방호순양함까지 운용하며 성장 중.[23]

1차 세계대전 시점에 거제, 옥포, 부산 등에 조선소를 두고 있으며 소형 함정인 포함과 구축함을 자체 건조할 역량을 갖고 있다. 보로디노급 도입으로 기존 창설 계획이 어그러졌으나 육군의 도입에 한 발 걸쳐 어렵사리 해군항공대를 창설했고, 기지방호와 상륙작전, 육해군 통합작전을 수행할 해군육전대 창설도 확정되어 지휘부 구성을 마쳤고 첫 번째 기수가 강화도와 제주도에 배치되었다.

종전 직전 배상함으로써 미완성된 바이에른급 전함 2척[24]마켄젠급 순양전함 4척[25]을 받기로 프랑스와 협의가 되었다. 주력함 6척, 순양함 14척, 구축함 60척, 잠수함 40척을 목표로 건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27 계엄이 선포되자 각 해역함대 사령부 총원이 원수부와 해군대신에 따를 것을 맹세했고 28일. 한산급 구축함 8번함 함흥함과 긁어모은 육전대 2개 중대 변역을 한강을 통해 용산에 급파해 함락 직전이던 원수부를 구하는 결정적 활약을 했다. 육전대는 2.27 계엄을 주도해 박살난 황실경위원과 호위대를 대신해 황제 이강의 호위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규모에 비해 한족, 만주족 비율이 대단히 높은 편으로 1921년 기준 총원 4만 6천명 중 8천이 한족, 만주족 장병들이었다.

5. 항공대

육군항공대와 소수의 해군항공대로 더부살이하며 시작했지만 1차 대전 참전을 기회로 신형 항공기를 연달아 도입하며 규모와 전술을 배양해 나간다. 1913년 장작림 토벌 때만 해도 구식 복엽기가 전부였으나 서부전선 참전 시점에는 200여 명의 조종사와 100여 대의 항공기, 4천여 명의 인원을 유럽 현지에 파견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다. 동부전선에서 피로 실력을 쌓은 우수한 조종사들이 많아 항공 전술에 있어선 막 걸음마를 뗀 미 육군항공대를 교육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다.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공군의 일리야 무로메츠와 팀을 이뤄 초기적인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선보였으며,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다 피해가 커졌던 것을 교훈 삼아 요격기, 폭격기, 정찰기 등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은 기체들을 통합해 원활한 항공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전구 단위의 지휘부의 필요성을 제기, 항공사단 편성이 시작된다.

루덴도르프 공세를 맞이한 김시혁이 본격적으로 공지합동 전술을 선보여 이 방면의 선구자가 될 전망이다. 육군 부대에 파견된 공군 전술항공 통제관이 근접항공지원을 지휘 통제하는 방식(FAC)이 1918년에 일찌감치 뿌리내렸다. 그렇게 1차 대전 기간 동안 적기 221기 격추, 지상 폭격 임무 765회, 사살 전과 2,000여 명으로 규모 대비 발군의 전과를 세워 아시아 제1 항공세력으로 위상을 공고히 했다.

전간기 일본 항공대의 신장에 맞서 1922년부터 11계획의 전력증강 목표 및 중점사업이 시작된다. 기존의 뉴포르와 스패드를 대체할 신형기 도입되고 1923년 기준 7개소 뿐이었던[26] 항공기지를 남녁에서 북단까지 12개 추가 건설하고[27] 보조기지 20개 건설과 기지 요새화 작업이 추가된다. 여기에 방공경보망의 확충 및 충실화, 자체 전술기 제작 능력의 배양, 항공구락부 창설에 따른 예비 조종사 인력 충원 등 장기적인 생존과 전력 증강에 필수적인 계획들이 뒤따른다.

6. 헌병대(해체)

영미식 Military Police가 아닌 프랑스식 Gendarmerie. 군내 한 병과가 아니라 육해군과 별개의 독립 군종으로서 군내 치안 유지뿐 아니라 민간 치안에도 적극 관여한다. 1916년 한성폭동 때도 경무청, 금화군과 함께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다.

독립 군종으로 출범한 배경에는 유력한 후원자이자 참고서 역할인 프랑스의 영향도 있지만 현실적인 필요성도 컸다. 대원군 집권 이래 군의 위상은 꾸준히 상승했는데 꼭 필요한 감시와 견제 수단은 없어서 임오군란부터 을미사변까지 군대가 주동 내지 협력한 정변이 고종 재위 기간 내내 발생했다. 여기에 조선군 시절 군영 운영비를 자체 충당하는 과정에서 만성화된 횡령, 군수품 유용을 방지, 적발할 수단도 없었다. 단기간에 이러한 역할을 해내기 위해선 육해군에 속한 일개 병과가 아닌 대등한 군종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었다.

1차 친위 쿠데타로 적극적인 군사 개혁이 가능해지고 러시아와 프랑스 교관단이 입국한 것에 맞춰 군내 비위행위 척결과 군 통수권을 강화를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대한제국 해군이 통제영과 각도 수영이 전부 해산된 뒤 창설되어 조선 수군과 사실상 별개 조직임을 감안하면 육군에 이어 두 번째로 신설된 군종이다. 초대 사령관은 민영환으로 민씨 척족인 그에게 군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겨 군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였으나 고종의 행적에 학을 뗀 민영환은 2차 쿠데타 때 김시혁 편을 들었다.

민영환이 육군대신으로 영전하고 이용익이 겸직하게 된 다음부터는 근황적 성격이 확연히 강해져 황실경위원, 익문사와 함께 고종의 수족이 되어 급격한 조직 확장이 이뤄졌다. 1914년에 불과 3천명이었던 조직이 1916년에는 1만, 1919년에는 3만으로 불어났으며 군부 주력이 모두 유럽으로 떠난 사이 한성부 통제를 전담하다시피 한다. 75mm 야포, 오스틴 장갑차 등 치안 유지 조직이라기엔 너무 과한 화력을 보유한 것도 유사시 군부와 부딪칠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

용산의 원수부와 미묘한 관계이며 특히 창설 동기인 기록조사실과는 앙숙지간. 음지에서 수시로 충돌한다. 내각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경무청과도 업무 영역 충돌로 사이가 나쁘다.[28] 공화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노란 개라 불리며 검은 개라 불리는 경무청 정보과 순검들과 함께 공포의 대상이다.

이용익이 병으로 쓰러진 뒤 박제순이 총관직을 겸직하게 되었는데 실상 그는 얼굴마담이고 고종이 직접 뽑아 올린 삼남 출신들이 조직을 이끌게 된다. 이용익이 중용한 1여단의 서북, 동북 출신들은 한성 폭동을 총기 사용 없이 성공적으로 진압했을 정도로 숙련된 정예병이고 극동전쟁 참가자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새로 들어온 삼남 출신들은 철저한 출세지향자들로 문민통제나 국민의 안녕 수호 같은 국민국가 군대에 필요한 관념이 극도로 떨어지는, 과거의 황국협회 이상의 정치깡패, 이명복 개인에게 충성하는 슈츠슈타펠이나 다름없다.

극동전쟁때 피해를 이유로 징집에서 대거 혜택을 본 삼남 출신들이 서북, 서울 출신들이 유럽으로 싸우러 간 사이 완장차고 탄압하는 꼴이라 김시혁에게 거병을 권했던 민정식과 민형식은 이대로면 삼남이 나머지 지역에 의해 공적으로 찍힐 것이라 우려했다.

이후 한성부의 시위 진압에서 한성부민들에게 총을 발포하는 것은 물론 포까지 발포하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며 이로 인해 결성된 시민군들에게 밀리자 손쉽게 전공을 세우려는 심산으로 병원을 습격하고, 육군 앰뷸런스에게 실탄을 갈기고, 저격수 거리를 조성해 지나는 시민들을 무차별 발포하는 등 온갖 전쟁범죄를 자행한다.

3월 혁명이 끝나고 열린 재판에서 수장 박두영을 비롯해 범죄가 입증된 자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다. 남은 병력은 헌병제대 중 유일하게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원수부 편에 합류한 제1헌병여단 독립대대장 황준성을 중심으로 추슬러 해체 수순을 밟는다. 1921년 시점에선 해체가 완료되었다. 황준성의 제1 독립대대가 내부 산하 국경경비대로 전환되어 만주 지역 국경 안정화에 투입되어다는 언급을 보아 국경경비대, 철도경비대, 순검대 등으로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7. 국경경비대

엄밀히 내부 산하 준군사조직으로 군부와 협력은 해도 수직적 상하관계에 있지는 않다.

의화단의 난 이전까지는 국경 치안은 순검대와 현지 포군들이 유지했고 사태가 격화되면 군이 지원하는 형태였다. 극동 전쟁으로 남만주 영토를 일부 획득했으나 우호국인 러시아 제국령 남만주에 둘러 싸인 형태였기에 별도 조직을 신설하진 않았다. 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 제국이 몰락하고 제국이 관할하던 남만주 영토를 넘겨받아 영토가 갑자기 넓어지고 홍후즈 같은 마적떼, 봉천 군벌의 위협이 가시화된다. 처음엔 육군 사단들을 주둔시켜 해결했으나 많지도 않은 육군 전력을 계속 국경 경계에 투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국경 경비를 전담할 조직이 출범하게 된다.

시작은 1917년 발족한 철도경비대. 동부전선이 마무리 된후 학부대신 민종묵과 평북관찰사 민종렬이 동부전선에 노무자로 참여한 한족, 만주족 청년들 중 지원자를 받아 러시아가 밑에 부리던 호로군을 대체할 철도경비대 창설 계획을 세워 원수부에 협조를 구했고 국경 안정화와 만주의 동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리는 의중에 공감한 김시혁이 협조한다.

1919년 3월 혁명과 한소 국경 정상화로 합이빈 이북 북만주가 대한제국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국경경비대 조직의 필요성이 더욱 올라간다. 러시아 제국 영토일 때부터 도로와 철도를 깔고 도시들이 개발된 남만주와 달리, 험준한 다싱안링 산맥과 아무르강을 끼고 있고 인구 밀도가 낮은 야생의 땅에서 국경을 수호 임무를 맡을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 해체된 헌병대 독립대대 병력을 기병대화해 마적떼 토벌, 소비에트 적군의 국경침범 퇴거 등의 임무를 맡게 했고 1년간의 시험적 운용에 만족한 내부와 원수부는 조직 확대를 결정한다.

군과 유사하나 군이 아닌 조직 특성상 군을 동원하기엔 민감한 임무에도 투입된다. 치치하얼에서 한소 대표단이 국교 정상화와 국경 확정을 위한 회담을 가질 때 막 헌병대에서 넘어온 국경경비대원들이 순검대, 소비에트 측 공안들과 나란히 회장 경계를 섰다.

8. 금군

1차 친위 쿠데타와 칭제건원을 거쳐 황실경위원과 호위대가 맡아 수행했으나 이들이 2.27 계엄이 주역이 되어 각종 범죄에 가담했다 숙청된 후 새 황제가 된 이강을 호위할 조직이 붕 떠버렸다. 1년 가량은 해군육전대가 근접 경호, 수도사단 병력이 외곽 경호를 맡았으나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학살에 동참했다 사라진 조직들을 복설할 수도 없어 고심 끝에 경위원과 호위대보다 훨씬 앞서 운영된 조직, 1894년 친군영과 함께 해체된 무예청과 금군청을 부활시킨다.

원래 환도 하나만 패용한 채 임금을 지근거리서 호위하던 무예청은 시종무관들과 함께 황제, 황족들을 경호를 맡아 시종무관부의 통제를 받으며, 금군청은 한성의 5대 궁궐과 평양의 풍경궁까지 6개 궁궐의 경비를 책임지는 조직으로 재탄생한다.

군경의 무술유단자들을 대거 채용했고 타 민족에도 문을 열어 한족과 만주족, 망명한 로마노프 황족들을 따라온 백계 러시아인과 카자크들까지 받아들여 외인부대에 가까운 구성을 띈다. 덕분에 나이 지긋한 노인들에게는 외금군(外禁軍)이라 불리기도.

9. 보병장비

9.1. 피복류

9.2. 소총

9.3. 권총

9.4. 기관단총

9.5. 기관총

9.6. 산탄총

9.7. 대전차화기

9.8. 폭발물

10. 중화기

10.1. 박격포

2부 프롤로그에서 박격포의 시안이 등장했으나, 대량 생산은 아직이라며 잠깐 언급된다. 1차 대전 참전을 목전에 두고 철모, 방독면 등과 함께 대량 생산에 착수한다. 구경은 60mm와 80mm이며 각각 보병 중대와 대대급 화기로 배치된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기동부대에 신속하고 강력한 화력을 제공하기에는 기존 박격포로 부족하다는 전훈이 받아들여져 포공국에서 개발한 신형 120mm 중박격포를 전차대대 당 9문, 보병연대 당 12문씩 배치하는 양산 계획이 수립된다. 제식명은 불명.

현실에서도 그렇듯, 80mm 박격포는 악명이 자자한데. 60mm 박격포는 가벼워서 분해 후 도수 운반하는데 부담이 덜하고, 120mm 박격포는 도수 운반이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1문당 트럭 하나를 배치해 줬기에, 방열을 제외하면 운용 인원들이 걸어 다닐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80mm 박격포는 귀한 차량으로 옮기기엔 너무 가볍고, 도수 운반하기엔 무겁지만 불가능하지 않다는 결론 하에, 포반원들이 직접 들고 다녀야 하기 때문.

10.2. 야포

10.3. 대공포

11. 탑승물

11.1. 전차

11.2. 장갑차

11.3. 차량

11.4. 군함

11.5. 항공기

11.6. 군마

작중 조선-대한제국군이 최초로 사용한 탑승물로 동학 농민 혁명 당시 김시혁이 김석중을 시켜 말 잘 타는 병사들을 모아 만든 임시 기병대는 당시 있던 말을 되는 데로 끌어모아 만든 터라 제대로 된 군마를 타진 못했다. 제대로 된 군마는 1차 친위쿠데타 이후 러시아와 협력 체계를 구축해 러시아에서 들여왔으며 1차 대전 시점에서는 하코트나 얀코프스키 같은 민간 업자들에게서도 구매하고 포로가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알 토르자 장군에게 군마 양산에 관한 노하우를 전수받기도 한다.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후 제1근위기병사단이 기계화 사단으로 개편되며 조금씩 자리를 물려줄 준비를 하고 있지만 드넒은 만주를 기계화 사단 하나로 커버하는 건 불가능한데다 헌병대와 경무청, 철도경비대의 군마 수요도 있어 완전히 물러나기까진 한참 더 걸릴 전망이다.[56]

황실종마장에선 아라비안종 육종이 이뤄지고 있으며 극동 전쟁과 1차 대전. 두 번에 걸쳐 김시혁과 함께 싸운 러시아의 쿠로파트킨 장군이 우정의 증표로 투르크메니스탄을 복속시키고 얻은 아할 테케 25마리를 선물해 줘 함흥과 만주의 목장에서 번식이 이뤄진다.

소련과의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면적과 극히 희박한 인구밀도, 열악한 도로 사정이 중첩된 북만주를 넘겨받으면서 기계화된 육군을 신속하게 집결시켜 침공해온 영격하는 기존 작계를 적용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축소될줄 알았던 기병대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문제는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공급. 1921~22년 기준 전국에 사용중인 마필이 3만두, 목장에 육성중인 마필이 4만두에 불과하며 그나마 절반은 토종 조랑말이라 군용으로는 부작합했다. 이에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넘어온 종마 목장들이 산재한 함경도를 중심으로 10주년 산마 계획을 추진, 1931년까지 군마만 5만필을 확보하고 2차 계획으로 넘어가 10만필의 군마를 획득해 장기적인 소모에 대비하기로 한다. 말 못지 않게 중요한 기수와 자금을 충당하고 인민들이 승마를 친숙하게 여기게 만들기 위해 황실 후원 아래 경마 산업이 급격히 성장한다.
[1] 경기에 제3진위여단, 관서에 제4, 5, 7진위여단, 관북에 제6, 8진위여단, 호남에 제9진위여단, 영남에 제10진위여단.[2] 수도보병사단, 제1근위기병사단, 제1보병사단, 제2보병사단, 제3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제9보병사단.[3] 제7보병여단, 제8보병여단.[4] 제1강습보병여단, 제2강습보병여단.[5] 2.27 계엄 가담 부대. 극동 전쟁때 주안산에서 용전분투한 전통 덕분인지 부대 해체는 피했으나 수도에 가까운 제물포를 떠나 머나먼 장춘으로 옮겨가야 했다.[6] 2.27 계엄에 가담한 청주의 제8보병여단이 해체되고 의주의 제7보병여단으로 흡수되어 탄생한 사단. 8여단이 남기고 간 청주의 본부는 신설된 동원사령부 몫으로 돌려졌다.[7] 4군단, 5군단, 6군단. 숫자 '3'이 공란이다. 3보병사단이 여전히 존재하는걸 생각하면 반란 가담부대 숫자번호에 대한 배척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어보인다.[8] 장기적으로는 소련을 가상적으로 상정한 45개 사단 100만명의 동원이 가능한 체제를 구축하려 한다는 이야기도 언급중이나, 당장의 상비군이나 예비군 규모를 감안했을때 이는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로 예상된다.[9] 1차 세계대전 중후기에 들어 동맹국/협상국 양 진영에서 수렴진화하듯 등장하여 현대에까지 큰 틀이 이어지고 있는 현대 보병전술의 기본 전제이다.[10] 강습부대→ 중앙군 근위사단→ 지방군 여단.[11] 1차 대전 기준으로 서방에서 가장 전술적으로 뛰어난 군대인 독일 제국군이 전술 단위를 중대까지 내리는 교리를 정착시켜 가는 상태였는데, 동시기 한국군은 강습 보병과 일반 보병을 가리지 않고 분대 단위로 원활한 전술 행동이 가능하다.[12] 한-독간 최초의 교전이었던 볼로디미르 전투 직후에는 포병대대가 하나씩 붙어있는 것 같다는 감상도 있었다. 원정군 보병대대 직할의 박격포소대가 80mm박격포 12문을 편제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런 감상이 그들 기준에서 아주 틀린건 아닌 셈이다.[13] 다만 기존 1개 포대 6문에서 4문 체제로 감편되었다.[14] 시작부터 특수병과 성격이 강했던 병과이다 보니, 독자들 중에서는 이것이 일종의 특수전사령부가 되어 장차전에서 더 상위 차원에서의 전략적 특수작전 수행을 맡게 될 것이라고 추측도 나온다.[15] 포병학교 교도대대 1개 포대, 중앙군 4개 대대, 지방군 6개 대대.[16] 실제 역사에서는 러일전쟁 중후반 경에야 러일 양국 포병에서부터 지형지물을 끼고 엄폐한 간접사격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며, 이러한 전훈은 독일군 같은 일부 열강 육군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1차대전 개전 시점에 이르러서는 이미 상당히 보편화된다.[17] 다만 강습보병 포병대는 1개 포대가 4문 체제로 감편되었다.[18] 이상저온 현상으로 기온이 낮아 작용제가 쉽게 퍼지지 못하는데다가 기껏 퍼지더라도 평야가 많은 동부전선 특성상 바람에 빠르게 흩어져 살상력이 빠르게 사라지는 등 실용적인 문제는 물론, 주인공이 비인도적인 화학무기 자체에 거부감이 있어 "역사에 죄를 짓지는 말자."라는 말까지 하며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화학탄을 투발하자 이에 보복하기 위해 화학탄 사용을 허락한다.[19] 받은 이유가 참 골 때리는데, 미국이 참전을 준비하며 이 야포를 라이선스 생산을 하려 했으나 야드-파운드와 미터법 변환을 잘못하는 바람에 못 써먹을 물건이 나와버리자 이를 한국이 생산하여 프랑스와 미국에 납품하는 조건하에 설계도를 얻었다. 마침 대한제국은 1차대전 직전 프랑스제 슈나이더 105mm 곡사포를 라이선스 생산하며 화포 제작에 대한 노하우를 쌓았고, 협상국의 지원하에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고 가공할 수 있는 제철소가 생겨난 시점이었다.[20] 대학원생의 논문을 읽고서 "이게 맞냐고 생각하나?"라 묻는 교수의 눈빛이였다고.[21] 머큐로크롬의 발견 자체는 1900년대 초였으나 미국의 휴 H. 영 박사에 의해 살균효과가 있음을 발견된 것이 1918년이다.[22] 이 시절 으레 군 시설들이 다 그렇듯 굉장히 폐쇄적이고 진입로가 제한되어 있으며 외벽은 75㎜ 야포 직사도 2~3번 정도 견딜 정도로 굉장히 단단하게 설치되어 있다.[23] 다만 보로디노급 전함의 경우 해군에겐 영 좋지 않은 루트로 도입하였다. 이에 대해선 하술.[24] 3번 함 작센→3월 혁명, 4번 함 뷔르템베르크→아미앵[25] 1번함 마켄젠→오트란토, 2번 함 그라프 슈페→베네치아, 3번 함 프린츠 아이텔 프리드리히→코벨, 4번 함 퓌르스트 비스마르크→갈리치아.[26] 여의도, 수원, 청주, 부산, 평양, 함흥, 장춘[27] 의주, 강릉, 원산, 전주, 대구, 제주, 하얼빈, 봉천 등[28] 이승만이 총리 첫 임기에 적극적으로 추진한 경무청의 경부로의 확장을 좌초시키고 대신 커진 조직이 헌병대라 대놓고 밥그릇이 겹친다.[29] 그림자료[30] 프랑스 군사고문단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원역사의 대한제국 군복도 프랑스 군복을 모방한 일본군의 군복을 모방한 것이니 원점회귀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자료[31] 사소한 것 같지만, 군의 상징이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에서 태극기의 태극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한국군이 더 이상 황제만의 군대가 아닌 국민의 군대로 거듭났다는 걸 나타내는 장치로 볼 수 있다.[32] 이 때문에 하마터면 모신나강 도입을 말아먹을뻔하였고, 30년식 값을 군 예산이 아닌 내장원 자금으로 지불하여 고종의 독단적인 지름으로 마무리하였다.[33] 기병총버전은 M1A1카빈처럼 접철식 개머리판을 장착했다.강습소총 제원 삽화[34] 기관단총의 문제로, 당시 대한제국군의 제식 권총탄은 림드탄이여서 자동화기인 기관단총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권총탄을 채택하자니 해당 권총탄을 사용할 권총도 새로 보급해야 하는 등 문제가 있다. 거기가 작중 대한제국군은 보병간 교전 거리를 200m 내외로 보는데 기관단총의 교전 거리는 길어봐야 100~150m라는 문제도 있다. 그렇다고 돌격 소총을 만들자니 기술 부족으로 인해 지나치게 무거워질 것을 우려해야 했다. [57] 이에 고민하던 중 꼭 둘 중 하나만을 고를 이유가 없으며, 그 중간이라 부를 수 있는 M1 카빈을 제작하여 지급하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만 자동사격이 기본으로 지원되는 것을 보면 M2 카빈에 가깝다.[35] 탄을 이렇게 만들 경우 정확한 위력은 화약의 양이나 탄두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치수 상 가장 비슷한 탄은 StG44에 사용된 7.92×33mm이다. 설정화에서는 탄 규격을 7.62×33mm로 명시하고 있다.[36] 홍익정밀에서 붙인 상품명은 최초 독자모델 총기라는 의미에서 M1.[37] 양 군 모두 본격적인 도입은 1차대전 후기였으나, 1910년대 중순에 판초비야 토벌전이나 15년도 서부전선에서 소량을 시험운용한 바 있다.[38] 그리스건, 스텐같은 염가형 기관단총은 휴대성과 저렴함으로 어필이 가능하겠으나 톰슨은 설자리가 없어졌다.[39] 실제로도 중국 곳곳에서 MP18나 그것의 계열모델이 복제생산 되었다.[40] 당시에는 기관총을 포병이 운용했기 때문에 총이 아닌, 포라고 불렀다.[41] 1917년까지 협상국은 독일이 전차를 개발하고 있다는 첩보를 알지 못했고 1918년 루덴도르프 공세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전쟁 막바지에 나왔고, 그마저도 생산성 문제로 '21대' 양산에 그쳤으니 독일의 철강 사정이 원 역사보다 더욱 악회된 상황에 나올 일 없다 여겨도 이상할 게 없었다.[42] 척탄통에 쓸 때는 신관을 충격 신관으로 교체하고 밑바닥에 추진 장약을 부착한다.[43] 극동전쟁기에는 중대 직할, 1차대전 시기에는 소대 직할, 구주원정군은 분대당 1문 편제[44] 프랑스도, 독일도 세계 대전 이전에는 105mm 같은 중(中) 포의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했다. 야전에는 75mm처럼 군마로 간편히 운송할 수 있는 경포를 쓰고, 155mm같이 이동이 제한되는 중(重) 포는 요새 포로 거치해 쓰면 된다 여겼다. 군마로 운송하기엔 너무 무거운 105mm가 굳이 필요할 거란 생각을 전쟁 전에는 못 했고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경포와 중(重) 포 생산도 버거워 기존에 없던 신규 라인을 깔 여유가 없었다.[45] 강력한 화력이 부족한 인력을 메꿔주고, 인명 손실을 줄여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막대한 비용이 들겠지만 이를 도입하지 않을 때 전쟁에서 일어날 피해에 비하면 적을 것이라는 논리에 의해 생겨났다.[46] 한국전을 예시로, 105mm 야포 대대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선 차량이 최소 50대 이상이 필요하며, 자동차 기술이 아직 미비한 시대이기에 이보다 더 많은 차량이 필요할 텐데 대한제국이 이를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 군마로 수송하는 방안도 있지만 중포를 무리하게 견인하다 폐사해버린 것을 예시로 들며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47] 당시 대한제국은 남만주 문제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대놓고 가져오는 건 무리였다.[48] 당시 프랑스군은 이 전차를 400대를 계약했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기는데 어림도 없어서 해외에서 판로를 찾던 중이었다. 며칠만 늦었어도 마음을 바꾼 프랑스군이 1000대의 계약을 맺게 되면서 싸게 팔 이유가 없어졌겠지만, 그걸 알고 있는 건 미래인인 김시혁 뿐이였다.[49] 오사카 주식시장에 몰래 투자했다 물려서(...) 벌충할 돈이 필요했다.[50] 1차 대전까진 포병이나 항공기가 연막탄을 뿌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무사히 굴러가는 전차를 양산하기도 벅찬 시대다 보니 간단한 기술임에도 생각이 닿지 못했다.[51] 이놈들은 따로 추가장갑을 단 특주품이라 집중사격에 뚫리기도 했던 러시아군 사양과는 달리 헌병대의 무차별적인 사격을 전부 막아내며 한성에서 용산의 원수부까지 김시혁을 무사히 데려다줬다.[52] 당시 드레드노트급 함선이 등장하며 러시아 역시 드레드노트 도입을 위해 준비 중인 상황에서 남아있던 보로디노급 전함들이 애물단지가 되어가고 있던지라 빠르게 처분하길 원했고 마침 태평양에서 활동할 제2중대의 개념으로 우방인 한국 해군을 강화시킬 명분도 있었다. 거기다 나머지 열강들도 전함 1척 가지곤 균형이 깨지진 않을 거라 판단했다. 그나마 반발할 여지가 있던 일본 같은 경우에도 당장 전 드레드노트급 4척을 얻은 데다 어차피 대세는 드레드노트급이 될 테니 한국이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 1~2척 갖는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고 본인들 입으로 직접 말하기도 했다.[53] 하필 이 음식들이 발효음식이다 보니 이를 알게 된 이탈리아 해군 장교들이 얘들 이상한 거 먹어요!라고 난리를 쳐서 한국 해군 지휘부가 진땀을 빼기도 했다.[54] 기구나 비행선 공격용으로 애용되던 르 프리어 로켓(Le Prieur rocket) 기준으로 뉴포르는 8발, 스패드는 6발을 달 수 있다.[55] 처음에는 동맹국 프랑스 업체들을 물색해봤으나 뉴포르 사는 기술 이전에 굉장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면허 생산 정도만 허락하려 했고 스패드 사는 적극적으로 나와 성사직전까지 갔으나 회사의 재정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블레리오 사에 인수가 유력해졌고 해당 업체가 기술 이전에 부정적이라 엎어졌다.[56] 애당초 기병이란 병과가 전장에서 완전히 퇴장하는 건 한국 전쟁 시기는 되어야 하며 심지어 현대에 와서도 중국이나 몽골은 차량이 다니지 못하는 험지 지역용으로 여전히 기병을 유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