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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1:18:08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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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한제국
2.1. 군부
2.1.1. 육군2.1.2. 해군2.1.3. 기록조사실
2.2. 황실2.3. 관료2.4. 친일파2.5. 독립협회2.6. 황국협회2.7. 기타
3. 러시아 제국4. 일본 제국
4.1. 황실4.2. 군부
4.2.1. 육군4.2.2. 해군
4.3. 내각4.4. 기타
5. 프랑스 제3공화국6. 독일 제국7. 미합중국8. 대영제국9.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10. 청나라-중화민국11. 폴란드12. 이탈리아 왕국13. 오스만 제국14. 불가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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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그 행적을 서술한다.

2. 대한제국

2.1. 군부

김민재가 김시혁에 빙의한 1894년 시점에는 한성구락부로 뭉친 근왕파, 허진을 중심으로 한 대원군파, 안경수, 우범선, 이두황 등을 포진한 친일파로 나뉘어져 알력 싸움이 치열했다. 경복궁 습격 때는 내부 친일파가 군령을 위조해 평양 기영병들이 사수하던 영추문 방어력을 약화시켰을 정도. 노쇠한 대원군이 사망하면서 대원군파는 자연스럽게 와해되고 근왕파와 친일파로 양분 되었다 을미사변과 1차 친위 쿠데타를 거쳐 근왕파가 주도권을 쥔다.

내각의 친일파는 1903년 2차 쿠데타와 1905년 극동전쟁 승리를 거쳐 비로소 척결되나 군부는 1895년을 기점으로 친일파를 대부분 털어내는데 성공해 2차 쿠데타 직전 친일파 고급 지휘관은 고종의 비호를 받은 이병무 1명 뿐이었다. 대원군 시절 군인 우대 정책과 2차례 쿠데타를 거쳐 자칫 군국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게 되었으며 수장인 김시혁이 문민통제를 철저히 강조해 제어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무대인 2부에선 게릴라전 경험만 있어 전쟁 무서운 줄 모르고 적극적 참전을 주장하는 남부 출신과 사람 목숨이 종잇장보다 가벼운 전면전을 겪어 보고 신중론을 주장하는 북부 출신 지휘관들의 성향이 갈리는 모습을 보인다.

충청도를 경계로 지휘관들의 위상이 확연히 갈리는데 영관급 이상 고급지휘관 절대 다수가 극동전쟁에 공을 세운 북부 출신이고 일부 예외도 기호 지방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1] 군부를 견제할 기회만 노리던 고종은 출세길에서 밀려난 영호남 출신 장교들을 근황파로 끌어들여 갈라치기를 시도한다. 김시혁이 확실한 구심점으로 존재할 때는 단순한 의견 다툼 선에서 정리될 수 있었으나 김시혁이 유럽으로 떠난 사이 고종이 근황파 키워주겠다며 일을 벌려 한바탕 홍역을 치른다.

2.1.1. 육군

귀환 시 최소한 1개 여단 이상은 남겨 달라는 러시아의 강권에 핏줄만 한인인 러시아군 소속 러시아인이라 부담이 적인 시베리아 여단이 남기로 결정되었고 자연히 여단장인 그도 남게 된다. 니콜라이 2세는 이들 한인부대에 근위 칭호를 내리고 파벨이 소모시킨 근위대를 대체하려 했는데 이로인해 러시아 혁명에 휘말리게 된다.
무장을 해제하고 길을 열어주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반란군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채 겨울궁전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거점삼아 교전, 12,0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근위대가 가세한 8만의 반란군을 120시간 동안 저지한 것도 모자라 역공까지 성공시키며 철저하게 두들겨 패버리는 기염을 토한다.
별명은 원수부의 늑대. 만주의 호랑이란 별명을 가진 형과 나란히 호랑이와 늑대라 불린다.
이후 의친왕에게 잠시 휴가를 받고 고국으로 돌아오자 이갑에게 딸을 소개받는다.

2.1.2. 해군

수장인 장기렴이 고종의 무리한 대청 선전포고에 부화뇌동해 사상자만 3천을 낸 이근택에게 직언하다 보직 해임된 인물인데다 뜸만 들이던 고종이 해군 창설을 적극 지원하게 된 계기가 의화단 진압 과정에서 노획한 마제은 백만냥 꿀꺽하려다 들켜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것이다 보니 태생부터 고종과 척을 졌다.

전력 확충 과정에서 밀덕후 고종이 열심히 구상하던 함명을 가뿐히 까버리고 해군이 알아서 지으며 각을 세우다 고종이 어뢰정 8척 구매 계약을 엎어 버리고 다 낡아 빠진 이름만 순양함이고 실제로는 폐품인 양무호[8]를 강제로 떠안게 만든 것을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9] 그러나 자기 돈으로 발족한 해군을 사유재로 여긴 고종은 식단부터 전함 도입까지 끊임없이 간섭을 이어가는 한편 해군의 반항심이 왕 목 잘라 본 프랑스 교관들에게 배워서라고 생각해 신실한 신민들의 나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과 제휴를 추진하고 이것이 또 다른 나비 효과를 부른다.

초창기 해군 창설을 주도한 장기렴과 이동휘는 육군에서 넘어온 드라이 네이비였고 극동전쟁을 거치고 규모를 키워가면서 항해장교, 상선사관 출신들이 속속 등장하는데 둘 사이에 미묘한 알력이 있다.

2.1.3. 기록조사실

군제 개혁 과정에서 온 사방에 꽂혀있는 일본의 빨대들을 잘라낼 필요성을 실감해 창설된 첩보 조직. 원 역사의 정보대와 상무영을 대신한다.

초창기에는 김시혁과 조동윤 사이에 권한 문제로 살짝 알력이 있었으나 고종의 익문사 창설을 계기로 갈등을 봉합하고 교통정리가 이뤄진다. 친일파를 처단하고 고종의 권한을 제한한 황색 계획과 극동전쟁 제2 전선 형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중화민국을 활용한 북양 군벌 견제와 중국을 둘러싼 일본과의 대리전에서도 꾸준한 성과를 올렸다. 원세개 몰락 이후 일본은 첩보전에서 한국의 우위를 인정한 채 사실상 승부를 포기한 상태로 다이쇼 덴노가 어전 회의에서 콕 집어 지적할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이다.

내부적으론 황제가 관할하는 제국익문사, 황실경위원, 국가헌병대와 라이벌 관계이며 내각 관할하의 경무사 정보대와도 미묘한 견제와 협력이 오가는 사이.

이런 유능함은 단순히 소설적 허용이 아니라 원 역사 대한제국이 방첩 역량만큼은 우수했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전개다. 황제가 거느렸던 익문사[11], 경위원, 정보대는 비록 일본에 규모와 자금력에선 뒤쳐졌으나 질적인 면에선 호각으로 일본은 대한제국 곳곳에 협력자를 두고도 이들을 상대하는 데 애를 먹어 결국 무지막지한 물량 공세로 승부해야 했다.

2.2. 황실

2.3. 관료

의화단 진압과 남만주 점유를 거치며 지주가 주축이 된 남부와 실업가 중심의 북부로 파벌이 갈린다.

2.4. 친일파

1, 2차 쿠데타와 극동전쟁을 거치며 박제순, 권중현을 제외하면 거의 다 제거되거나 친일 노선을 버렸다.[21] 일본이 현지 협력자 포섭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아시아주의는 사실상 매국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2.5. 독립협회

중추원이 자리잡으며 황제와 황국협회에 대응되는 야당으로 자리잡는다. 뚜렷한 구심점 없이 언론사와 실업가의 후원을 받는 구파와 지주와 학생계를 중심으로한 신파로 파벌이 나뉘며 그 안에서도 인물과 성향에 따라 자잘한 파벌들이 존재한다.

2.6. 황국협회

중추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근황파 여당으로 정착한다. 고종을 구심점으로 확실하게 뭉쳐있어 결속력에 우위를 가진다.

2.7. 기타

이후 의친왕을 모시며 노보폴린스크에 도착한 뒤, 의친왕을 무사히 노보폴린스크에 호송한 것과 노보폴린스크 방면 전투에 향방을 가를 수 있도록 한 공로를 인정받아 다른 노무단 2명과 함께 훈장을 받는다. 동부전선에서 귀국할 때 지청천과 다시 만나며 귀국하면 의친왕에게 받은 은사금으로 가게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한편으론 동료들을 죽인 독일에 복수하고 싶다는 열망에 끓고 있었고 서부전선 파병이 결정되자 가게는 미뤄두고 전차병으로 자원한다.

3. 러시아 제국

모든 군사 교리는 해당 국가의 사회, 문화, 역사 전반이 아우러진 총체라는 설명과 함께 질을 뛰어넘어 양의 위엄을 선보이지만 동시에 동맹국을 파트너가 아니라 종속국 취급하는 러시아 외교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도 대한제국에 있어서는 1순위 우방이라 대한제국도 나름 러시아는 잘 돕고 있다. 1차 대전 발발 이후로 영국과 프랑스에 혐성 가득한 행보가 주목받으며 막무가내긴 해도 가식적이지 않은 러시아는 다시 보니 선녀같은 우방국이 되었다.

러일전쟁 패전과 1차 대전에서의 고전으로 무능력한 장군들이 많았을 거란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언제든 초개처럼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유능한 군인, 식견 있는 관료들이 많이 존재했으며 러시아 국민들도 전쟁 승리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했음에도 제일 위에 있는 멍청한 차르 부부와 그를 둘러싼 궁정귀족들 때문에 희생만 몇 배로 내고 쇠락하는 운명을 막지 못했다.

4. 일본 제국

작중 메인빌런 포지션 국가. 같은 대체역사 장르의 다른 작품에선 호구 취급받는 일본 제국이지만 여기서는 대공황과 관동대지진, 군부의 폭주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망가지기 이전이라는 점을 착실히 고증해서 말석으로나마 열강 자리에 앉은 것이 괜히 앉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김시혁의 등장으로 역사가 개변되며 피해를 보기도 하고, 이득을 보기도 했는데 한국을 식민지로 얻지 못하면서 대륙으로의 세력 확장이 완전히 막혀버렸고, 극동전쟁 패전으로 수십만의 인명 피해를 봤으나 자신들을 깨뜨린 한국군을 벤치마킹해 원래 역사보다 수십년 빠른 교리 발전을 이룩, 서방에 옮겨 놓아도 질적으로 독일군 빼곤 적수가 없는 강력한 육군을 양성해 낸다. 중일전쟁 가능성이 희박해져 빠지는 예산 없이 한국과의 결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메리트라면 메리트.

2부 시점서도 여전히 확장을 노리고 있으며 결국 대한제국이 러시아가 일제의 확장을 용인하지 않는걸 댓가로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4.1. 황실

4.2. 군부

4.2.1. 육군

4.2.2. 해군

4.3. 내각

4.4. 기타

5. 프랑스 제3공화국

러프동맹의 인연 덕에 대한제국과 맺어진 또 하나의 우방이며 열강이지만 아직 산업화 등이 늦어 도움의 요소가 적은 러시아와 달리 제대로 된 도움을 주는 사실상 진정한 우방.[33]실제로 프랑스도 대한제국을 나름 수평적 파트너로 생각한다는 묘사가 글 곳곳에서 보인다. 다만 이쪽도 2부 시점을 보면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혐성이라는 한계를 뚜렷이 보여주는 덕에 러시아가 선녀같다라는 의견도 독자들 사이에선 나오는 편.

6. 독일 제국

'전술적'인 면에서는 명실상부 유럽 최강이자 김시혁도 승패를 장담하지 못 하는 유일한 국가. 본작에서는 흔히 악의 제국 이미지 때문에 실제 역량보다 과대평가되는 나치 독일군보다 군축 후유증을 겪지 않았고, 처음부터 총력전으로 달려드는 열강들을 양면으로 맞상대한 제2제국 독일군이 전술적으로 훨씬 뛰어난 군대라는 점이 강조된다.

주도적으로 공세에 임하는 상황이건, 기습을 받아 밀리는 상황이건 가리지 않고 기존의 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런 독일군의 가장 큰 특징은 '전쟁은 과학'이라는 명제 아래 진행되는 지독할 정도의 통계, 자료 수집과 이에 기반한 분석. 야구에 비유하면 철저한 데이터 야구를 추구하는 팀이라고 표현된다.

극동전쟁 때 한국군을 상대한 일본군이 교환비 6:1로 열세였고, 렘베르크 방면에서 교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10:1로 밀린데 반해 마녀의 숲 전투까지 2.5:1에서 많이 잡으면 4:1 가량으로 한 세대 앞선 선진군대인 한국군 상대로 가장 준수한 교환비를 내며 선전했었다. 브루실로프 공세가 종료된 시점에 최종 교환비는 대략 7:1.

독자들이 보급도 간당간당한데 이놈들을 대체 어떻게 이기냐고 질려했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전쟁기계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나 결국 통계와 자료 수집에 의존하는 방식의 맹점을 극복하지 못 해 허를 찔린다.[36]

작품이 진행되면 될수록 '전투만 잘 할 뿐 전쟁은 못 하는' 독일의 고질적인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2차대전까지 독일군을 비판할 때 흔히 거론되는 '킬딸충' 성향은 물론 북독일 프로이센의 남독일(바이에른, 바덴뷔르템베르크)을 향한 은근하고 치졸한 차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죄다 징고이스트 소굴에 내각과는 아예 다른 나라에 가까운 군부 등등

1910년대 독일답게 한국군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언사에서 인종적인 편견이 굉장히 심하게 드러나는 데 그것과 별개로 지휘는 굉장히 신중하고 정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도 특징. 전자는 시대상 고증이며 동서양 군대의 대결을 그린 대역물에서 일반적인 전개이나 후자쪽, 그럼에도 허술하게 대응하지 않고 최대한 한국군의 의중을 따라가고, 위협적인 상황도 연출하는 것은 기존 대역물에서 보이지 않았던 전개 방식이다.
전투가 종료된 후 항복한 오스만 군인이 기관총이 더 있었다면 더 잘 싸울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탄하는 모습도 나왔고 기자 인터뷰에서 김시혁이 오스만 군에게 중화기가 더 많았다면 더 고전했을 것이라고 인증까지 해버려서 책임론이 안나올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7. 미합중국

1부에서는 큰 비중이 없었고 2부에서부터 비중이 증가한다. 잠재력과 머릿수는 어마어마하지만 오합지졸 당나라 군대였던 1차 대전기 미군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8. 대영제국

9.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10. 청나라-중화민국

11. 폴란드

12. 이탈리아 왕국

13. 오스만 제국

14. 불가리아 왕국



[1] 조선 왕조 시절부터 한양에 뿌리내리고 있던 무반 명가들은 대원군의 군사 개혁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수차례의 정변 끝에 신헌(신팔균의 조부)의 가문을 제외하면 소멸했다. 본래 억세고 상무적 기풍이 강했던 북부 출신들은 조선 왕조 내내 차별 받다보니 보수적인 유림층이 없어서 빠르게 근대화의 흐름을 탔고 극동전쟁이란 전면전에서 공을 세워 날아올랐다. 상무적 전통이 희미했던 영호남은 극동전쟁에서도 제2전선으로 돌려진 탓에 실력이건, 실적이건 경쟁이 되지 못 했는데 한편으로 유림 본산에 농업 중심으로 근대화 흐름이 늦어(=군주를 보위하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더 익숙해서) 고종이 포섭하기에는 아주 좋았다.[2] 이때 인연으로 독실하지는 않아도 러시아 정교 신자다.[3] 경기도의 진위대 3여단을 제외하면 정규군 부대가 없어서 관서, 관북은 물론 서간도와 북간도 병마까지 전부 통솔하는 양서순무사 김시혁의 권위가 훨씬 높았다.[4] 유럽에서는 아직 전차를 단순한 참호 돌파용으로 취급하는 지휘관이 많은 반면 김석중과 한국군 장교들은 군마에겐 없는 방어력, 험지돌파력, 화력을 갖춘 차량을 적시에 지휘관이 원하는 장소에 기동시킴으로 얻을 전술적, 작전적 이점에 주목했다는 점이 돋보인다.[5] 원역사에서도 이응준은 이갑의 사위였다.[6] 사실 김좌진과 함께 오헝군을 급습한것도 낙오당해서 어차피 늦었다고 벌받을테니 어차피 벌 받을거 일이나 하나 저질러보자!라는 마인드로 지른거다... 물론 결과는 대성공이었으나 곧바로 단독행동 했다고 대대장에게 까였다.[7] 특히 항복 설득 성공으로 졸로치에 보관된 적의 군수물자들도 고스란히 원정군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여운형의 언변이 큰 공을 세웠음을 입증했다. 만일 설득이 실패했다면 오헝군이 항전 과정에서 군수물자들이 멀쩡하게 러시아군 손에 들어가도록 놔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8] 작중 양무호는 성능은 보잘것 없는 주제에 연료인 석탄 소모량은 매우 커서 전력 부족에 시달리던 대한제국에서도 운용을 포기하고 그냥 항구에서 놀고 있었다. 오죽하면 원산 상륙작전에서 1회용 병력 수송선으로 활약한걸 두고 '군밤의 혜안(...)'이라고 할 정도다...[9] 작은 어뢰정 8척이 뭐 그리 대단한가 싶지만 R/D 없이 오직 견시에 의존하던 시기에 섬많고 꼬불꼬불한 한국 남해안에 매복시켜 치고 빠지면 일본 입장에선 무척 골치 아픈 적수가 될 수 있었다.[10] 현지 게릴라들과 교전 및 콜레라 발생으로 3천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게릴라 진압한다고 혼춘 일대에서 학살 행위를 벌이고 열악한 보급을 보충한답시고 북청, 성진, 경흥, 함흥 등지에서 과도한 징발을 해 함경도 사정까지 악화시킨다.[11] 익문사는 인지도는 가장 높으나 경운궁 화재로 인한 문서 소실 때문에 오늘날 구체적인 학술 연구가 불가능하다. 실체를 두고 이런저런 추측만 나도는 상황.[12] 원역사에서는 을사늑약 이후 자결하려다 실패해서 시력을 잃었다.[13] 엄밀히 따지면 제2차 쿠데타 이후 정권을 장악한 테크노라시가 전후에도 비상 대권을 놓지 않은 탓이 크다. 황제의 신임에 기반한 내각임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배제한 채 국정을 주도하는, 집권 정당성 및 명분이 현저히 부족한 내각이기에 실권을 상실했던 고종이 여론을 업고 공작을 지속하는 것만으로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14] 민권 확대에 적극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도시가 아닌 지방에서는 고종 지지세가 압도적이니까. 하루 아침에 대통령제 공화국으로 바뀌어도 황국협회 소속 후보로 출마해 압도적으로 당선 가능한 지지세라 민권이 확대되면 될수록 근황파가 커진다.[15] 심지어는 현실의 21세기 선진국을 기준점으로 잡더라도 작중 고종만큼 친대중적인 정치인은 드물다.[16] 제1근위기병사단장 김석중, 수도보병사단장 박승환, 제9보병사단장 노백린, 제2강습보병여단장 홍범도, 독립 시베리아 여단장 김시진.[17] 41군단 궤멸 이후 둘이 마침내 만났을 때 주인 좋다고 달려드는 골든 리트리버가 생각날 정도로 친밀하게 굴었다. 황실 인사들과 가까이 지내서 좋을 게 없는 시혁이 떨뜨름해 하자 나혼자 친한 줄 알았냐고 상처 받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활짝 웃으며 친밀한 포즈를 잡는다.[18] 급조한 총창방진과 이응준과 의친왕 호위부대가 보유한 강습소총 화력으로 처음 돌격한 용기병대는 막아냈으나 충격력에서 비교도 안 되는 울란의 공격은 수적, 화력 열세로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19] 의친왕이 순종과 달리 남성으로서 능력에 아무 문제가 없었고 젊어서부터 여성 편력이 화려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건은 첫 자식이라기보단 처음으로 공인받은 자식일 가능성이 높다. 이건 역시 생모 수관당 정씨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고 의친왕의 이유 없는 냉대까지 더해 실은 일본인 소생이라는 소문이 돌았다.[20] 증강된 헌병대는 원정군이 복귀하는 즉시 한성을 떠나 남만주로 재배치, 수집한 정보는 원수부, 내각과 공유, 수사권 문제는 경무청에 양보[21] 박제순은 원래 역사에서 친청파였다가 을사조약 이후로 친일파로 갈아탔고, 적극적 친일파로 돌아선 건 경술국치쯤이라 을미사변 이후로 역사가 바뀐 이쪽 세계에서도 친일 성향이 강한지는 알 수 없다.[22] 김시혁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3가지 있다고 하는데 2부 도입부까지 공개된 건 군인이 되겠다는 딸의 말을 흘려들은 것, 오스트리아-헝가리 무관단에게 대한군 교리를 전수해준 것 2가지.[23] 주둥이가 좁은 병 안에 든 사탕을 꺼내 먹으려 한웅큼 쥐었는데 주먹 때문에 손이 빠지지 않자 손을 놓는 정석 대신 유리병을 깨는 발상의 전환으로 기어이 사탕을 가졌다. 피지컬도 남다른데 소학교 입학 앞둔 시점에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여자아이인데도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고.[24] 그냥 쌀집 자전거도 지금의 승용차에 해당하는 고가품인데 지청천의 자전거는 강습보병대가 군마를 대신할 기동수단으로 도입한 거라 타이어 하나부터 수입산 특주품인, 정말 비싼 물건이다.[25] 오흐라나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방첩 역량은 결코 독일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이 짓을 할때마다 밑에선 제발 자중하라며 경고했으나 니콜라이는 방첩부서에서 알아서 잘 막으면 될 것 아니냐며 무시했다. 물론 중립국 외교관은 물론 기자들까지 대거 참석하는 기도회에서 주절주절 떠들어댄 말을 틀어 막을 능력은 오흐라나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최종결정권자인 차르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독일이 시긴트와 휴민트로 수집한 잡다한 정보들의 거름망으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니콜라이 2세의 머저리스러움을 대표하는 일화.[26] 다만 볼로디미르 함락 당시 니콜라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저 초대장을 보낸건 알렉산드라 황후였다.(물론 공로에 대한 포상이라는 좋은 의도긴 했으나 전시상황이 끝나지 않은 만큼 차라리 현장으로 훈장을 보내는 게 더 나았다.)오히려 당시 니콜라이는 독일군이 온다는 소리에 빨리 군대를 보내라고 성화였다.[27] 그냥 주둔만 시켰으면 모르겠는데 대대적으로 증강시키고 근위 칭호까지 내리려 하니 원조 근위대인 우리는 버림받았다는 박탈감 + 이 사태를 초래한 멍청한 황족 지휘관(파벨)과 그를 임명한 황제에 대한 분노가 더해졌다.[28] 참호선 돌파에 유용한 표도로프 자동소총과 척탄통, 한국에서 수입한 60, 80mm 박격포와 공병연대에 배정된 화염방사기, 방탄 방패를 농노들이나 쓰는 저급만 무기라 거부하고 소총에 총검, 기관총, 평사포만 인수했다. 고착된 적 진지를 빠르게 돌파할 수단 자체가 없었다.[29] 파벨이 대포밥으로 던져버린 2개 군단 11만은 러시아가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소모시키기 않고 완편 상태로 보전했던 몇 안 되는 부대이자 차르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강한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근위대다. 구중궁궐속 차르가 군내에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게 해주는 손발이었고 정권 보위의 핵심이었다. 이들이 한 번 전투로 소멸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제정에 회의를 품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는 군내에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30] 정확히 말하면 브루실로프 공세 자체는 원역보다 훨씬 크게 성공해서 차르에게 회의적이던 자들 조차도 "일단 한 번만 더 지켜보자."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의 여론 반전을 이뤄냈다. 추가로 헛짓거리만 하지 않았어도 '미래를 팔아 현재를 샀다'치고 어찌어찌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으나 멍청한 니콜라이와 궁정귀족들은 기어이 추가 공세를 벌임으로서 전부 말아먹는다.[31] 다만 도조 히데키도 최종 결정권자로서 한계를 보였을 뿐 의외로 사단장 같은 직위에 있을때는 오히려 참군인이라 불려도 될 정도로 유능한 모습을 보였다. 즉, 도조 히데키는 능력이 아예 없는 무능아라기 보단 사람이 자기 능력보다 더한 위치에 올라가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로 볼 수 있다.[32] 물론 김시혁은 러시아의 모신나강을 들이기 위해 딱히 도입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경쟁자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어 일단 프로모션은 들어봤다. 이후 고종의 독단으로 인해 선계약이 체결되면서 곤혹을 치르나 30년식 소총 계약금은 고종의 사비로 낸다는 조건으로 계약이 대충 성사되며 이렇게 도입된 30년식 소총은 의병 게릴라 부대가 나름 잘 써먹게 된다.[33] 물론 러시아도 극동전쟁 때 같이 싸워준 혈맹이니 만큼 프랑스에 비하면 적을 뿐이지 도움 자체는 잘해준 편이다.[34] 흔히 생각나는 무작정 닥돌이나 열화된 일본식 버전이 아닌, 포슈가 주창하던 대로 재대로 된 교리로 이식된다.[35]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전략 및 작전을 제안하고 조언할 수 있을 뿐인 자리였다.[36] 장갑차를 따로 운용해 본 적이 없는 상태로, 러시아군의 장갑차 대대를 넘겨받은 한국군이 당연히 러시아의 장갑차 운용 독트린에 따라 대단위 부대를 딸릴 것이라 여겼으나 정작 김시혁은 1개 장갑차 중대에 강습보병 1개 중대만 붙이는 바람에 한국군 예비대 계산이 완전히 틀려버렸고 프랑스 교관들에게 배우고, 프랑스제 야포를 사용하는 한국군 포병대가 프랑스식 평사포, 곡사포 혼성 운용을 할 것이라 여겼으나 한국군 포병대는 곡사포로 통일된 상태라 일방적으로 밀린 끝에 곡사포를 대거 망실하고 만다.[37] 다만 이때는 독일의 외교 장관이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사실상 종속국이라 우리보다 그들과 더 친밀했을 것이라는 팩트를 들려준 덕에 머지 않아 진정되긴 했다.[38] 사실 이것도 말이 안되는 게 우선 중국은 호국전쟁 중이라 여력도 없는데다 우세를 보이고 있는 호법군의 수뇌부는 대한에게 지원을 받은지라 굳이 독일의 말에 휘둘릴 이유도 없다. 칭다오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이시기 칭다오는 이미 일본에게 장악되었으니 독일이 직접 외압을 넣을 방법도 없다.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적개심은 확실하지만 이미 러시아의 관동주 매각 떡밥에 혹해서 자국군용 소총까지 탈탈 털어 지원한 지라 여력도 없고 무엇보다 독일의 적국인 영국과 동맹이다. 즉, 대한제국 공격은 커녕 이 전보를 고스란히 영국에게 넘기지만 않아도 다행일 지경이다.[39] 동부전선도 신경 써달라는 힌덴부르크의 요청을 무시하고 독일 전력의 6할 이상을 서부 전선에 배치한 게 팔켄하인이라 자업자득이다.[40]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독일군이 털리던 당시 서부전선의 베르됭 공세는 두오몽 요새를 함락시키며 독일 입장에서 승산이 보이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쪽 세계에선 베르됭 전투가 아닌 한국군의 참전이 1차 대전의 결정적 분기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일부 전쟁사 연구자들은 한국군이 참전하지 않았어도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돈좌되고 주도권을 내줬을거라 주장하겠지만 일찌감치 역사가 바뀌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러시아군에게 너무 큰 패배를 안겨주고 그게 서부전선에도 영향이 간지라 다수설이 되긴 힘들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군 미참전시 베르됭에서 독일이 이겼을 것이라 if를 돌릴 가능성이 크다.[41] 정확히 말하면 팔켄하인이 소령 시절 적은 보고서가 있긴 했지만 그것도 10년이 넘게 지나 현 1차대전 시점에서 쓰기에는 지나치게 낡은 정보였다.[42] 물론 당시 러시아 제국을 제외한 유럽에서 김시혁과 한국군의 진상을 정확히 아는 인물은 페르디낭 포슈와 팔켄하인 정도 뿐이라 힌덴부르크만 뭐라 할 순 없다.(미국까지 포함한다면 퍼싱도 존재한다.) 그 시점에서 한국이 당대 유럽 국가들보다 전술 측면에서 앞선다는 걸 당대 유럽인 중 누가 쉽게 믿겠는가?[43] 한국군이 장비만 1차 대전~전간기 수준인 현대군이라 기관총 넘겨줬어도 쉽진 않았겠지만 부르실로프 공세 때처럼 아군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했지만 적의 수준이 그보다 더 높아 패한 것이 아닌, 이쪽에서 모셔온 동맹국 군대를 고의적으로 지원하지 않은 상황을 연출해버렸고 이건 패배의 책임을 린징겐 개인에게 돌려버릴 수도 있는 사안이다.[44] 보급선에 가해질 위협 때문에 수적 열세에도 방어 전면을 줄일 수 없는 한국군은 남겨둔 예비대를 전부 끌어올 수 밖에 없고, 넓은 방어선을 지탱하느라 과부하가 걸렸을 때 남겨둔 군단으로 크게 우회해 한국군의 후방을 타격, 보급선을 완전히 차단하고 앞뒤로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45] 장병들 처우도 좋아서 군악대원들은 오페라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초청을 받고, 제빵병들은 독일식 베이커리를 황제 식탁까지 올리며 돈을 버는 데 원 역사 일본이 그랬듯 전간기에 일부가 정착하거나, 독일계 문화가 이식될 가능성이 높다.[46] 퍼싱과 프랑켄슈타인 마피아는 12,000~18,000명 규모의 현대식 사단 편제를 선호하고 있으나, 올드 해빗은 적들보다 훨씬 많은 예비대를 구사해 진정한 공포를 가져다준다는 주장으로 25,000~28,000명 규모의 대규모 사단을 편성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무시하고 가자니 1차 대전기 미군 훈련 상태가 워낙 부실해서 이게 꼭 틀린 말도 아니라는 게 문제.[47] 자본을 기반으로 미국 정계에 로비를 하며 친한파 정치인 세력 구성에 한 몫을 했다. 일본 역시 한국 광산업을 꽉 쥐고 있는 그를 포섭하려 했으나 지금 나보다 돈 많은 건 한청일 삼국의 지도자들 뿐인데 겨우 그 돈으로 나를 포섭하려고 하냐며 쿨하게 무시했다.[48] 김시혁과의 첫 대면에서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나와서 살짝 지적하자 오히려 뭐가 문제였냐면서 되묻는가 하면, 도중에 부친이 목화밭에서 흑인들을 채찍질하던 것을 회상하는 묘사도 나와 독자들이 기겁했다.[49] 의화단 운동 당시 남부연합 국기를 걸어두었다가 미군과 시비가 트여 김시혁이 중재하는데 고생했고 하코트에게 일침을 먹이기도 한다.[50] 특히 남포에서 흉갑기병대를 이끌고 일본군 근위기병연대를 궤멸시키면서 연대기를 탈취하기도 했다.[51] 이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겨서 여비를 확보했는데 그의 이름을 본 김시혁이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 웃으며 합격시켜주는 동시에 전당포에 맡겨진 카메라도 다시 찾아와 줬다.[52] 이게 놀라운 이유는 윌슨 대통령은 민주당 소속이기 때문. 즉, 군대가 너무 심각하게 보인 나머지 반대당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53] 정확히 말한다면 캐나다 국적이지만 1부의 배경인 동학 농민 혁명~러일전쟁 시기 캐나다는 자치령이 되어서 내정 자치권은 있었지만 외교권과 군사권은 영국이 가지고 있어서 완전한 독립국이 아니었다. 그리고 매켄지가 죽을 때도 캐나다는 독립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매켄지의 국적은 영국 국적이라 할 수 있다.[54] 이때 주한 영국영사가 멋대로 종군 기자단 이탈해 한국 취재하면 바로 체포한다고 엄포를 놓자(영국은 일본의 동맹이었기 때문.) 잡을테면 잡아보라는 패기를 선보인다.[55] 이때 홧병의 계기는 대한제국 덕이었는데 우선 대한제국이 만주에서 움직임을 보이며 주력군이 묶인 탓에 호법군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 1차 원인이요.(이때 눈에 보인 집기류는 다 부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해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해군이 쑨원 지지를 선언하며 위안스카이에게 사임하라고 종용한 것이 2차 원인이고 자신이 이렇게 망한 배후에 조선과 프랑스가 있음을 안 것이 결정타로 작용했다.[56] 정확히 말하면 직접 지원해주는 건 일본의 기업인 미쓰이 물산으로 한국은 직접 지원할 수단을 미쓰이 물산에 지급해 세탁 과정을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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