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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6 13:39:04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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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한제국
2.1. 군부
2.1.1. 육군2.1.2. 해군2.1.3. 기록조사실
2.2. 황실2.3. 관료2.4. 친일파2.5. 독립협회2.6. 황국협회2.7. 기타
3. 러시아 제국
3.1. 한국계 러시아인
4. 볼셰비키5. 일본 제국
5.1. 황실5.2. 군부
5.2.1. 육군5.2.2. 해군
5.3. 내각5.4. 기타
6. 프랑스 제3공화국7. 독일 제국8. 미합중국9. 대영제국1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1. 청나라중화민국12. 폴란드13. 이탈리아 왕국14. 오스만 제국15. 불가리아 왕국16.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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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본 문서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그 행적을 서술한다.

2. 대한제국

2.1. 군부

김민재가 김시혁에 빙의한 1894년 시점에는 한성구락부로 뭉친 근왕파, 허진을 중심으로 한 대원군파, 안경수, 우범선, 이두황 등을 포진한 친일파로 나뉘어져 알력 싸움이 치열했다. 경복궁 습격 때는 내부 친일파가 군령을 위조해 평양 기영병들이 사수하던 영추문 방어력을 약화시켰을 정도. 노쇠한 대원군이 사망하면서 대원군파는 자연스럽게 와해되고 근왕파와 친일파로 양분 되었다 을미사변과 1차 친위 쿠데타를 거쳐 근왕파가 주도권을 쥔다.

내각의 친일파는 1903년 2차 쿠데타와 1905년 극동 전쟁 승리를 거쳐 비로소 척결되나, 군부는 1895년을 기점으로 친일파를 대부분 털어내는 데에 성공하여, 2차 쿠데타 직전 친일파 고급 지휘관은 고종의 비호를 받은 이병무 1명 뿐이었다. 대원군 시절 군인 우대 정책과 2차례 쿠데타를 거친 탓에 자칫 군국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게 되었으며, 수장인 김시혁이 문민통제를 철저히 강조해 이를 제어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무대인 2부에서는 게릴라전 경험만 있어 전쟁 무서운 줄 모르고 적극적 참전을 주장하는 남부 출신과 사람 목숨이 종잇장보다 가벼운 전면전을 겪어 보고 신중론을 주장하는 북부 출신 지휘관들의 성향이 나뉘는 모습을 보인다.

충청도를 경계로 지휘관들의 위상이 확연히 갈리는데 영관급 이상 고급지휘관 절대 다수가 극동전쟁에 공을 세운 북부 출신이고 일부 예외도 기호 지방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1] 군부를 견제할 기회만 노리던 고종은 출세길에서 밀려난 영호남 출신 장교들을 근황파로 끌어들여 갈라치기를 시도한다. 김시혁이 확실한 구심점으로 존재할 때는 단순한 의견 다툼 선에서 정리될 수 있었으나 김시혁이 유럽으로 떠난 사이 고종이 근황파 키워주겠다며 일을 벌여 한바탕 홍역을 치른다.

2.1.1. 육군

2.1.2. 해군

수장인 장기렴이 고종의 무리한 대청 선전포고에 부화뇌동해 사상자만 3천을 낸 이근택에게 직언하다 보직 해임된 인물인데다, 뜸만 들이던 고종이 해군 창설을 적극 지원하게 된 계기가 의화단 진압 과정에서 노획한 마제은 백만 냥을 꿀꺽하려다 들켜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한 것이다 보니, 태생부터 고종과 척을 졌다.

전력 확충 과정에서 밀덕후 고종이 열심히 구상하던 함명을 가뿐히 까버리고 해군이 알아서 지으며 각을 세우다가 고종이 어뢰정 8척 구매 계약을 엎어 버리고 다 낡아 빠진 이름만 순양함이고 실제로는 폐품인 양무호[6] 강제로 떠안게 만든 것을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된다.[7] 그러나 자기 돈으로 발족한 해군을 사유재로 여긴 고종은 식단부터 전함 도입까지 끊임없이 간섭을 이어가는 한편 해군의 반항심이 왕 목 잘라 본 프랑스 교관들에게 배워서라고 생각해 신실한 신민들의 나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과 제휴를 추진하고 이것이 또 다른 나비 효과를 부른다.

초창기 해군 창설을 주도한 장기렴과 이동휘는 육군에서 넘어온 드라이 네이비였고, 극동전쟁을 거치고 규모를 키워가면서 항해장교, 상선사관 출신들이 속속 등장하는데, 둘 사이에 미묘한 알력이 있다.

2.1.3. 기록조사실

군제 개혁 과정에서 온 사방에 꽂혀 있는 일본의 빨대들을 잘라낼 필요성을 실감하여 창설된 첩보 조직. 작중에서는 원 역사의 정보대상무영을 대신한다.

초창기에는 김시혁과 조동윤 사이에 권한 문제로 살짝 알력이 있었으나, 고종의 익문사 창설을 계기로 갈등을 봉합하고 교통정리가 이뤄진다. 친일파를 처단하고 고종의 권한을 제한하는 황색 계획과 극동전쟁 제2 전선 형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중화민국을 활용한 북양군벌 견제와 중국을 둘러싼 일본과의 대리전에서도 꾸준한 성과를 올렸다. 원세개 몰락 이후 일본은 첩보전에서 한국의 우위를 인정한 채 사실상 승부를 포기한 상태로 다이쇼 덴노가 어전 회의에서 콕 집어 지적할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이다.

내부적으론 황제가 관할하는 제국익문사, 황실경위원, 국가헌병대와 라이벌 관계이며 내각 관할하의 경무사 정보대와도 미묘한 견제와 협력을 오가는 사이. 하지만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파들을 사냥하는 일 만큼은 제대로 협력한다.

이런 유능함은 단순히 소설적 허용이 아니라 원 역사 대한제국이 방첩 역량만큼은 우수했기에 자연스럽게 나온 전개다. 황제가 거느렸던 익문사,[9] 경위원, 정보대는 비록 일본에 규모와 자금력에선 뒤쳐졌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호각이었으며, 일본은 대한제국 곳곳에 협력자를 두고도 이들을 상대하는 데 애를 먹어 결국 무지막지한 물량 공세로 승부해야 했다.

2.2. 황실

2.3. 관료

의화단 진압과 남만주 점유를 거치며 지주가 주축이 된 남부와 실업가 중심의 북부로 파벌이 갈린다.

2.4. 친일파

1, 2차 쿠데타와 극동전쟁을 거치며 다 제거되거나 망명하거나 친일 노선을 버렸다. 일본이 현지 협력자 포섭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아시아주의는 사실상 매국의 다른 이름이 되어 대한제국 내에선 뿌리가 뽑혔다.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극동전쟁에서 패배하고, 한국이 1차 대전에서 유럽 열강 군대를 격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변하게 되는데, 일본이 아닌 한국을 중심에 두거나 최소한 한국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는 형태로 변화했고, 일본을 유일무이한 중심에 두는 기존 아시아주의는 일부 강경파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 한국인 친일파들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후자에 완전히 매몰된 채 극단적인 자기정당화에 치중한다.

2.5. 독립협회

중추원이 자리잡으며 황제와 황국협회에 대응되는 야당으로 자리잡는다. 뚜렷한 구심점 없이 언론사와 실업가의 후원을 받는 구파와 지주와 학생계를 중심으로 한 신파[13]로 파벌이 나뉘며 그 안에서도 인물과 성향에 따라 자잘한 파벌들이 존재한다.

2.6. 황국협회

중추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근황파 여당으로 정착한다. 고종을 구심점으로 확실하게 뭉쳐있어 결속력에 우위를 가진다.

2.7. 기타

3. 러시아 제국

모든 군사 교리는 해당 국가의 사회, 문화, 역사 전반이 아우러진 총체라는 설명과 함께 질을 뛰어넘어 양의 위엄을 선보이지만, 동시에 동맹국을 파트너가 아니라 종속국 취급하는 러시아 외교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도 대한제국에 있어서는 1순위 우방이라 대한제국도 나름 러시아는 잘 돕고 있다. 1차 대전 발발 이후로 영국과 프랑스에 혐성 가득한 행보가 주목받으며 막무가내긴 해도 가식적이지 않은 러시아는 다시 보니 선녀 같은 우방국이 되었다.

러일전쟁 패전과 1차 대전에서의 고전만 보고 무능력한 장군들이 많았을 거란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언제든 초개처럼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유능한 군인과 식견 있는 관료들이 많이 존재했으며 러시아 국민들도 전쟁 승리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했으나, 제일 위에 있는 멍청한 차르 부부와 그를 둘러싼 궁정 귀족들 탓에 희생만 몇 배로 내고 쇠락하는 운명을 막지 못했다.

3.1. 한국계 러시아인

4. 볼셰비키

5. 일본 제국

작중 메인 빌런 포지션 국가. 같은 대체역사 장르의 다른 작품에선 호구 취급받는 일본 제국이지만 여기서는 대공황관동대지진, 군부의 폭주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망가지기 이전이라는 점을 착실히 고증해서 말석으로나마 열강 자리에 앉은 것이 괜히 앉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2부 시점에서도 여전히 확장을 노리고 있으며 결국 대한제국이 러시아가 일제의 확장을 용인하지 않는 걸 대가로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5.1. 황실

5.2. 군부

5.2.1. 육군

5.2.2. 해군

5.3. 내각

5.4. 기타

6. 프랑스 제3공화국

러프동맹의 인연 덕에 대한제국과 맺어진 또 하나의 우방이며, 열강이지만 아직 산업화 등이 늦어 도움의 요소가 적은 러시아와 달리 제대로 된 도움을 주는 사실상 진정한 우방.[23] 실제로 프랑스도 대한제국을 나름 수평적 파트너로 생각한다는 묘사가 글 곳곳에서 보인다. 다만 이쪽도 2부 시점을 보면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혐성이라는 한계를 뚜렷이 보여주는 까닭에 러시아가 선녀같다는 의견도 독자들 사이에선 나오는 편. 그러나 영국의 서부전선 개입이 확정된 후 혐성과 협잡질이 가히 배후중상 수준에 달하면서 상대적 천사가 되었다. 사실 원 역사의 프랑스가 의외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호의적이었음을 고려하면 고증이다.

7. 독일 제국

'전술적'인 면에서는 명실상부 유럽 최강이자 김시혁도 승패를 장담하지 못 하는 유일한 국가. 본작에서는 흔히 악의 제국 이미지 때문에 실제 역량보다 과대평가되는 나치 독일군보다 군축 후유증을 겪지 않았고, 처음부터 총력전으로 달려드는 열강들을 양면으로 맞상대한 제2제국 독일군이 전술적으로 훨씬 뛰어난 군대라는 점이 강조된다.

주도적으로 공세에 임하는 상황이건, 기습을 받아 밀리는 상황이건 가리지 않고 기존의 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런 독일군의 가장 큰 특징은 '전쟁은 과학'이라는 명제 아래 진행되는 지독할 정도의 통계, 자료 수집과 이에 기반한 분석. 야구에 비유하면 철저한 데이터 야구를 추구하는 팀이라고 표현된다.

극동전쟁 때 한국군을 상대한 일본군이 교환비 6:1로 열세였고, 렘베르크 방면에서 교전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10:1로 밀린데 반해 마녀의 숲 전투까지 2.5:1에서 많이 잡으면 4:1 가량으로 한 세대 앞선 선진군대인 한국군 상대로 가장 준수한 교환비를 내며 선전했었다. 브루실로프 공세가 종료된 시점에 최종 교환비는 대략 7:1. 독자들이 보급도 간당간당한데 이놈들을 대체 어떻게 이기냐고 질려했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전쟁기계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나 결국 통계와 자료 수집에 의존하는 방식의 맹점을 극복하지 못해 허를 찔린다.

예를 들어 장갑차를 따로 운용해본 적이 없는 상태로, 러시아군의 장갑차 대대를 넘겨받은 한국군이 당연히 러시아의 장갑차 운용 독트린에 따라 대단위 부대를 딸릴 것이라 여겼으나 정작 김시혁은 1개 장갑차 중대에 강습보병 1개 중대만 붙이는 바람에 한국군 예비대 계산이 완전히 틀려버렸고 프랑스 교관들에게 배우고, 프랑스제 야포를 사용하는 한국군 포병대가 프랑스식 평사포, 곡사포 혼성 운용을 할 것이라 여겼으나 한국군 포병대는 곡사포로 통일된 상태라 일방적으로 밀린 끝에 곡사포를 대거 망실하고 만다.

작품이 진행되면 될수록 '전투만 잘할 뿐 전쟁은 못 하는' 독일의 고질적인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2차대전까지 독일군을 비판할 때 흔히 거론되는 '킬딸충' 성향은 물론 북독일 프로이센의 남독일(바이에른, 바덴뷔르템베르크)을 향한 은근하고 치졸한 차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죄다 징고이스트 소굴에 내각과는 아예 다른 나라에 가까운 군부 등등.

1910년대 독일답게 한국군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언사에서 인종적인 편견이 굉장히 심하게 드러나는데,[26] 그것과 별개로 지휘는 굉장히 신중하고 정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을 강구하는 것도 특징이다. 전자는 시대상 고증이며 동서양 군대의 대결을 그린 대역물에서 일반적인 전개이나 후자쪽, 그럼에도 허술하게 대응하지 않고 최대한 한국군의 의중을 따라가고, 위협적인 상황도 연출하는 것은 기존 대역물에서 보이지 않았던 전개 방식이다.[27]

8. 미합중국

1부에서는 큰 비중이 없었고 2부에서부터 비중이 증가한다. 잠재력과 머릿수는 어마어마하지만 오합지졸 당나라 군대였던 1차 대전기 미군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36]

9. 대영제국

2부들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독자들의 감상은 1부의 일본을 뛰어넘은 2부 메인 빌런이자 혐성국 그자체. 한국을 얕보고 일본과 동맹하고 있지만 막상 일본도 그냥 사냥개 정도로 대우하면서 혐성을 보이는 것은 물론 한창 전쟁 중에 승기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패배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판국에 정치질에만 몰두하며 전선을 어렵게 만들고, 자기들이 요청해 한국군을 출병시켜 놓고 일본을 충동질해 한국의 등을 찌르게 만드는 등 온갖 협잡질과 고구마 제조를 책임지고 있다. 독자들은 후대에 배후중상 음모론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다며 치를 떨고 있다. 물론 이미 현실에서 혐성국, 현대사의 원흉 중에 대영제국 찍으면 반은 맞는다 밈이 있을 정도로 신나게 까이는 중이지만.

1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1. 청나라중화민국

12. 폴란드

13. 이탈리아 왕국

14. 오스만 제국

15. 불가리아 왕국

16.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1] 조선 왕조 시절부터 한양에 뿌리내리고 있던 무반 명가들은 대원군의 군사 개혁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수 차례의 정변 끝에 신헌(신팔균의 조부)의 가문을 제외하면 소멸했다. 본래 억세고 상무적 기풍이 강했던 북부 출신들은 조선 왕조 내내 차별 받다보니 보수적인 유림층이 없어서 빠르게 근대화의 흐름을 탔고 극동전쟁이란 전면전에서 공을 세워 날아올랐다. 상무적 전통이 희미했던 영호남은 극동전쟁에서도 제2전선으로 돌려진 탓에 실력이건 실적이건 경쟁이 되지 못 했는데, 한편으로 유림 본산이자 농업 중심으로서 근대화 흐름이 늦어서 군주를 보위하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더 익숙하다보니 고종이 포섭하기에는 아주 좋았다.[2] 경기도의 진위대 3여단을 제외하면 정규군 부대가 없어서 관서, 관북은 물론 서간도와 북간도 병마까지 전부 통솔하는 양서순무사 김시혁의 권위가 훨씬 높았다.[3] 나무위키에 문서가 개설된 사창리 전투6.25 전쟁 당시 동명의 강원도 화천군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작중 등장하는 함경도 사창리는 실제 역사에서는 북한에 의해 신창리로 통합되었다. #[4] 원역사에서도 이응준은 이갑의 사위였다.[5] 사실 김좌진과 함께 오헝군을 급습한 것도 어차피 낙오당해서 늦었다고 벌받을 테니 기왕에 벌 받을 거 일이나 하나 저질러보자는 마인드로 지른 거다... 물론 비록 결과는 대성공이었으나 곧바로 단독행동 했다고 대대장에게 까였다.[6] 작중 양무호는 성능은 보잘것 없는 주제에 연료인 석탄 소모량은 매우 커서 전력 부족에 시달리던 대한제국에서도 운용을 포기하고 그냥 항구에서 놀고 있었다. 오죽하면 원산 상륙작전에서 1회용 병력 수송선으로 활약한 걸 두고 '군밤의 혜안(...)'이라고 할 정도다...[7] 작은 어뢰정 8척이 뭐 그리 대단한가 싶겠지만, R/D 없이 오직 견시에 의존하던 시기에는 섬 많고 꼬불꼬불한 한국 남해안에 매복시켜 치고 빠지면 일본 입장에서는 무척 골치 아픈 적수가 될 수 있었다.[8] 현지 게릴라들과 교전 및 콜레라 발생으로 3천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게릴라 진압한다고 혼춘 일대에서 학살 행위를 벌이고 열악한 보급을 보충한답시고 북청, 성진, 경흥, 함흥 등지에서 과도한 징발을 해 함경도 사정까지 악화시킨다.[9] 익문사는 당시의 정보기관 중 인지도는 가장 높으나 경운궁 화재로 인한 문서 소실 탓에 오늘날 구체적인 학술 연구가 불가능하다. 실체를 두고 이런저런 추측만 나도는 상황.[10] 원역사에서는 을사늑약 이후 자결하려다 실패해서 시력을 잃었다.[11] 원 역사에서는 요절한 이복 남동생들이 있었다.[12] 증강된 헌병대는 원정군이 복귀하는 즉시 한성을 떠나 남만주로 재배치, 수집한 정보는 원수부, 내각과 공유, 수사권 문제는 경무청에 양보.[13] 일반적으로는 지주 세력이 가장 보수적인 세력으로서 진보적이기 마련인 학생 세력과 대립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작중에서는 극동전쟁 때 벌어진 일본군의 잔혹행위로 말미암아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추정 100만에 가까운 학살이 벌어진 삼남에서 전통적인 지주 세력은 소멸했고 내장원이 주인 잃은 빈땅을 난민들에게 불하하는 방식으로 전후복구가 이뤄져 이전 지주세력과는 접점이 없는 새로운 지주세력이 나타났다. 이들이 자녀들에게 고등교육을 이수케 함으로서 자연스럽게 지주와 학생이 하나의 파벌로 뭉치게 되었다.[14] 김시혁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3가지 있다고 하는데 2부 도입부까지 공개된 건 군인이 되겠다는 딸의 말을 흘려들은 것, 오스트리아-헝가리 무관단에게 대한군 교리를 전수해준 것 2가지.[15] 주둥이가 좁은 병 안에 든 사탕을 꺼내 먹으려 한웅큼 쥐었는데 주먹 때문에 손이 빠지지 않자 손을 놓는 정석 대신 유리병을 깨는 발상의 전환으로 기어이 사탕을 가졌다. 인형 대신 장난감 병정 가지고 놀기 좋아하고 피지컬도 남다른데 소학교 입학 앞둔 시점에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여자아이인데도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고. 성에 갖힌 공주를 구출하는 기사들의 동화를 읽고서는 미리 나가서 공격하면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데 왜 성안에 가만있냐고 반문했다고.[16] 처음 군인이 된다는 떡밥이 나왔을 땐 완력을 덜 요구하는 공군 파일럿이 되지 않을까하는 예상이 많았으나 점점 떡밥이 풀리며 공군설은 들어가고 여자 패튼(...)이 될 거란 예상이 많아지고 있다.[17] 사실 다이쇼의 판단이 틀린 것도 아닌 게, 역사적으로 일본의 권력자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덴노로 갈아치우며 강제 퇴위당하거나 심지어 폐위당한 덴노들은 꽤 많다. 다이쇼에게 있어 막부나 군부나 거기서 거기이니 당연하다.[18] 다른 지휘관들의 군도는 일반적인 노획물자 처리 규정에 따라 한데 모아서 처리했지만 히데노리의 검은 그가 개인 자격으로 건네준 것이라 김시혁이 그대로 소장했다. 히데키를 만난 김시혁은 혹여 검을 돌려받고 싶다면 돌려줄 생각이었으나 히데키는 그 검은 부친이 장군께 직접 건네주신 것이고 김시혁 장군의 전술을 배울 수 있다면 그깟 검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며 돌려받을 생각이 없다고 전했다.[19] 물론 김시혁은 러시아의 모신나강을 들이기 위해 딱히 도입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경쟁자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어 일단 프로모션은 들어봤다. 이후 고종의 독단으로 인해 선계약이 체결되면서 곤혹을 치르나 30년식 소총 계약금은 고종의 사비로 낸다는 조건으로 계약이 대충 성사되며 이렇게 도입된 30년식 소총은 의병 게릴라 부대가 나름 잘 써먹게 된다.[20] 원래 역사에선 1915년에 육군대학 졸업한 뒤 대위로 진급한 상태였고 스위스 주재무관을 거쳐 1920년에 소좌로 진급한다.[21] 젊은 시절의 무타구치는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당시 캄차카반도페트로파블롭스크에 잠입하여 목숨 걸고 정탐 활동을 벌일 담력은 있었지만, 이건 야전부대 지휘관에게 필요한 전투 경험은 아니었다. 현지 파르티잔과 싸워 본 경험도 없고, 1917년 육대 졸업 후 육군성 운수부 선박반에 배치되어 중국으로 좌천되는 1936년까지 대략 18년간 배 부르고 등 따뜻한 육군성과 참모본부만 돌며 야전에서 지휘 경험을 쌓지도, 1차 대전 관전장교로 파견되지도 않았다. 군임임에도 전쟁이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지 전혀 모른채 팬대만 잡다 나이 먹고 계급만 올라간 무타구치는 노구교에서, 임팔에서 연달아 무책임한 행각을 벌인다.[22] 별로 고증오류도 아닌 게 근대 일본에서 일본인에게 암살당한 총리는 꽤 많다. 이후 21세기에 아베 신조 피살 사건으로 신기록을 세웠다.[23] 물론 러시아도 극동전쟁 때 같이 싸워준 혈맹이니만큼 프랑스에 비하면 적을 뿐이지 도움 자체는 잘해준 편이다.[24] 흔히 생각나는 무작정 닥돌이나 열화된 일본식 버전이 아닌, 포슈가 주창하던 대로 재대로 된 교리로 이식된다.[25]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전략 및 작전을 제안하고 조언할 수 있을 뿐인 자리였다.[26] 애초에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인종차별 성향이 심한 민족들 중 하나가 독일인이었다. 괜히 나치즘이 창궐해서 홀로코스트같은 대형사고를 친 것이 아니다. 그 외에는 반쯤 유럽과 따로 노는 러시아가 자강두천(...)을 이루고 있다.[27]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미군 소속 황인 사단장과 흑인 장병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적 방심을 하다가 아미앵 전투에서 이틀만에 사단 하나가 갈려버려 루덴도르프 공세까지 돈좌되는 대형 참사가 난 것과 비교하면 명확한 차이다. 물론 이때 호되게 당한 이후에는 다시는 방심하지 않았다. 깜둥이 주제에 제국의 고급 전술을 따라 쓴다고 욕하는 등 레이시즘은 여전했지만...[28] 다만 이때는 독일의 외교 장관이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사실상 종속국이라 우리보다 그들과 더 친밀했을 것이라는 팩트를 들려준 덕에 머지않아 진정되긴 했다.[29] 동부전선도 신경 써달라는 힌덴부르크의 요청을 무시하고 독일 전력의 6할 이상을 서부 전선에 배치한 게 팔켄하인이라 자업자득이다.[30]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독일군이 털리던 당시 서부전선의 베르됭 공세는 두오몽 요새를 함락시키며 독일 입장에서 승산이 보이던 상황이었으니 이쪽 세계에선 베르됭 전투가 아닌 한국군의 참전이 1차 대전의 결정적 분기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일부 전쟁사 연구자들은 한국군이 참전하지 않았어도 독일군은 베르됭에서 돈좌되고 주도권을 내줬을 거라 주장하겠지만 일찌감치 역사가 바뀌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러시아군에게 너무 큰 패배를 안겨주고 그게 서부전선에도 영향이 간지라 다수설이 되긴 힘들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군 미참전시 베르됭에서 독일이 이겼을 것이라 if를 돌릴 가능성이 크다.[31] 정확히 말하면 팔켄하인이 소령 시절 적은 보고서가 있긴 했지만 그것도 10년이 넘게 지나 현 1차대전 시점에서 쓰기에는 지나치게 낡은 정보였다.[32] 물론 당시 러시아 제국을 제외한 유럽에서 김시혁과 한국군의 진상을 정확히 아는 인물은 페르디낭 포슈와 팔켄하인 정도 뿐이라 힌덴부르크만 뭐라 할 순 없다.(미국까지 포함한다면 퍼싱도 존재한다.) 그 시점에서 한국이 당대 유럽 국가들보다 전술 측면에서 앞선다는 걸 당대 유럽인 중 누가 쉽게 믿겠는가?[33] 한국군이 장비만 1차 대전~전간기 수준인 현대군이라 기관총 넘겨줬어도 쉽진 않았겠지만 부르실로프 공세 때처럼 아군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했지만 적의 수준이 그보다 더 높아 패한 것이 아닌, 이쪽에서 모셔온 동맹국 군대를 고의적으로 지원하지 않은 상황을 연출해버렸고 이건 패배의 책임을 린징겐 개인에게 돌려버릴 수도 있는 사안이다.[34] 보급선에 가해질 위협 탓에 수적 열세에도 방어 전면을 줄일 수 없는 한국군은 남겨둔 예비대를 전부 끌어올 수 밖에 없고, 넓은 방어선을 지탱하느라 과부하가 걸렸을 때 남겨둔 군단으로 크게 우회해 한국군의 후방을 타격, 보급선을 완전히 차단하고 앞뒤로 포위 섬멸한다는 계획.[35] 장병들 처우도 좋아서 군악대원들은 오페라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초청을 받고, 제빵병들은 독일식 베이커리를 황제 식탁까지 올리며 돈을 버는 데 원 역사에서의 일본이 그랬듯 전간기에 일부가 정착하거나, 독일계 문화가 이식될 가능성이 높다.[36] 1차대전 당시 미 육군의 참담한 상태는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 시절에도 잘 묘사되었지만, 1차대전 파트가 초반부에만 있는 데다 주인공 팀의 혼신의 캐리 덕분에 1차대전 후반부에는 특유의 물량으로 단점을 상쇄시키는데 성공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37] 김시혁과의 첫 대면에서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나와서 살짝 지적하자 오히려 뭐가 문제였냐면서 되묻는가 하면, 도중에 부친이 목화밭에서 흑인들을 채찍질하던 것을 회상하는 묘사도 나와 독자들이 기겁했다.[38] 의화단 운동 당시 남부연합 국기를 걸어두었다가 미군과 시비가 트여 김시혁이 중재하는데 고생했고 하코트에게 일침을 먹이기도 한다.[39] 특히 남포에서 흉갑기병대를 이끌고 일본군 근위기병연대를 궤멸시키면서 연대기를 탈취하기도 했다.[40] 이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전당포에 맡겨서 여비를 확보했는데 그의 이름을 본 김시혁이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 웃으며 합격시켜주는 동시에 전당포에 맡겨진 카메라도 다시 찾아와 줬다.[41] 존 브라우닝이 설계한 반자동화기인 Auto-5레밍턴 모델 8는 롱 리코일 작동방식이며, 그가 설계한 각종 권총이나 기관총들 대다수가 블로우백, 쇼트 리코일로 작동한다. M1895 콜트-브라우닝 기관총과 M1918 브라우닝 자동소총이 가스 작동식이지만 둘 다 큼지막한 소총탄을 쓰는 물건이기에, 원역에서 그가 제작한 총기 중 중간탄과 가스작동식이 조합된 화기는 없다.[42] 콜트 M1929. 원역에서 미군 반자동소총 사업에 참여했다 탈락했으며 이 소총의 설계를 기반으로 제작한 게 M1 카빈이다.[43] 정확히 말한다면 캐나다 국적이지만, 1부의 배경인 동학 농민 혁명~러일전쟁 시기 캐나다는 완전한 독립국이 아니라 자치령이었으므로 내정 자치권은 있었어도 외교권과 군사권은 영국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매켄지가 죽을 때도 캐나다는 여전히 독립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매켄지의 국적은 영국 국적이라 할 수 있다.[44] 이때 주한 영국영사가 멋대로 종군 기자단 이탈해 한국 취재하면 바로 체포한다고 엄포를 놓자(영국은 일본의 동맹이었기 때문.) 잡을테면 잡아보라는 패기를 선보인다.[45] 애초에 헤이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보어 전쟁에서 추태를 보였던 영국군의 개혁 당시 실무를 총괄했던 인물이다. 다만, 아내를 통해 얻은 왕실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질로 자신의 역량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은게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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