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적 속어가 아닌 실제 당나라군에 대한 내용은 당나라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형편없는 군대를 중세 봉건제 군대에 빗대어 일컫는 말.2. 실제 역사 및 현실
당나라군도 사람인 만큼 완벽한 군대는 아니겠지만 당나라군을 오합지졸로 여기기에는 문제가 많다.당시 당나라는 고구려 침공 당시 수나라와 달리 요동성도 함락시키고 안시성 이전까지는 파죽지세로 몰아붙이기까지 했고, 비록 운이 좋게 고구려에서 내부분열이 일어난 영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라와 협동해서 기어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발해가 세워진 후에도 당나라는 한동안 발해를 침략하거나 위협했다. 비단 한국사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북쪽, 서쪽, 남쪽에서 당나라는 수없이 군사작전을 벌이고 여러 나라를 멸망시켰다.
초기 당나라는 동아시아의 세계적인 강대국이었고, 당시 당나라군은 중원에 있던 국가들의 군대 중 역대 최강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군대였다. 대기병 전술을 발전시켜서 소수의 보병으로 다수의 기병을 제압하는가 하면 북방 유목민들의 장점을 받아들여 기동력을 살린 경기병대를 출현시키고, 나아가 아예 사방에서 데려온 이민족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당시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병종의 장점을 모았다.
구체적으로는 선비족과 한족의 혈통이 일부 섞인 혼혈 관롱집단 출신이 건국한 당나라답게 능력만 있다면 출신을 가리지 않고 적절하게 등용해 투입, 활용한 것이 실제 당군이었다. 당나라 사회가 선비족들이 지배층, 한족이 피지배층인 농민으로 나뉜 상태에서 군사적으로는 거란, 발해, 말갈부터 심지어 고구려, 백제인 장수도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한마디로 동양 전역을 커버하는 범위에서 전력이 될만한 것들을 가능한 한 전부 다 긁어모아 활용하였기 때문에 이에 따라 출현한 거물급 장수들의 출신도 고구려, 백제, 위구르, 말갈, 돌궐 등등 아주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돌궐 출신인 아사나사이, 선비족 출신인 울지경덕, 거란족 출신인 이해고와 백제 출신인 흑치상지, 신라 출신인 설계두, 그리고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 등이 있다.
이러한 저력은 조그마한 태원 한 구석에서 시작해서 10년 남짓한 기간에 중국 대륙을 통일한 것도 모자라서 남쪽으로는 베트남, 동쪽으로는 신라와 연합해서 고구려 및 백제를 멸망시키고 일본까지 박살내는 등 수많은 전과들로 증명된다.[1]
그러나 당나라는 7세기 말쯤 되면서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을 거치고 나면 당나라 군대는 진짜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의미의 '당나라 군대'로 전락한다. 어느 나라나 말기가 되면 쇠약해지는 건 세계사 공통인데 안사의 난만 해도 거의 150년에 달하는 당나라의 전성기 끝에 일어난 일이고 중국 역대 통일왕조들의 평균수명조차 150년에 한참 못 미치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당나라 군대의 성적표는 중국사와 세계사를 통틀어 최상위에 위치한다고 봐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전성기가 지났다고 해도 안사의 난 당시의 당군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의미의 당나라 군대까지는 아니었다. 일단 초기에 당의 정부군을 압도한 안녹산의 15만 반란군부터가 칼끝을 정부 쪽으로 돌리기 직전까지는 당의 최정예군이었으며 당의 정부군도 결코 실력이 나쁜 것은 아니어서 처음에는 15만 반란군에게 얻어 맞았지만 곽자의, 이광필, 복고회은 등 하늘이 내린 명장들의 활약과 정부군 자체의 경험 축적으로 인해 상당한 강군이 되어 있었다.[2]
안사의 난이 진압된 후에 당이 위구르 제국과 토번에게 골골댄 것은 안사의 난으로 당의 재정과 국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며, 이 두 나라도 끝끝내 당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3] 당이 멸망한 건 주전충이 내부총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명을 멸망시켰던 이자성과 비슷하지만 이자성은 농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주전충은 당의 관료 출신이라는 차이가 있다.
비록 안록산의 난과 황소의 난을 거치면서 당나라가 많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라가 세워지면 언젠가 흥망성쇠는 저절로 겪기 마련이다. 당나라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 군대는 절대 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최소한 수나라 상위호환에,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던 송나라보다는 강했고 원나라에 비해 임팩트가 밀려서 그렇지 고선지 때는 서쪽으로 정복활동을 이어가서 이슬람 세력과 충돌했을 만큼 강한 나라였다.
게다가 고구려-당 전쟁 당시의 당나라는 더더욱 오합지졸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황제가 오늘날까지도 먼치킨으로 여겨지는 이세민이었고, 비록 여러 실책은 있었을지언정 이세민을 수양제 따위의 무능한 폭군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세민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 이세민은 위징을 등용해서 과감히 그의 충언도 받아들였고, 흉년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기기도 하는 등 최소한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는 황제였다.
특히 삼국시대~통일 신라를 거쳐 발해 건국시기로 이어지는 역사를 보면 알다시피, 이 당시 당은 삼국은 물론 바다 건너 왜까지 긴장하게 만들 정도의 강국이었다.
남북국시대 후기의 주요 인물로 다뤄지는 최치원이 황소의 난과 관련 있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의 당나라 군대의 형편없는 모습이 한국사와 아예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당나라 군대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오합지졸 군대의 이미지는 실제 역사 속 당나라군의 모습이 아니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당나라는 군사력이 약해서 멸망한 나라가 아니라 너무 강하여 문민통제에 실패하는 바람에 쇠퇴하고 멸망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국방력 강화를 위해 절도사에게 막강한 권력을 쥐어주었는데 그 절도사들이 다른 마음을 먹기 시작하자 중앙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한 일종의 자가면역질환 같은 상태였던 것이다.
2.1. '당나라 군대'라는 오명에 더 걸맞은 나라는 따로 있다
2.1.1. 수나라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당나라 군대의 이미지에 좀 더 부합되는 비슷한 시기의 군대는 고구려 원정 당시의 수나라 군대다. 수나라 군대는 보급능력의 한계를 무시한 수양제의 뻘짓으로 인해 억지로 긁어모은 오합지졸에 사기는 처음부터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당시 '요동에 가지 마라' 라는 내용의 노래가 수나라에 널리 퍼졌을 정도였는데 요동에 가면 죽는다는 의미의 가사다. 지휘체계도 중구난방인 등 문제 투성이였다.심지어 보급품을 실어나를 말과 수레가 부족해서 우중문, 우문술 부대는 병사들에게 무장한채로 무거운 쌀가마니를[4] 직접 업고 운반하라고 명령하는 미친 짓을 했고, 지친 병사들이 견디다못해 중간에 쌀을 몰래 버리면서 진지에 도달해서는 쌀이 바닥나 버렸고, 병사들은 병사대로 지쳐서 그대로 무너져 버려 고구려군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거나 도망간 병력이 상당했다. 그러나 수나라 군대 역시 수양제의 삽질과 살수대첩의 이미지 때문에 개판으로 유명해진 거지 원래부터 개막장은 아니었다. 사실 당나라도 군제의 기틀은 수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니...
2.1.2. 북송
비슷한 시기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에서 생각하는 당나라 군대, 개막장 군대의 이미지와 가장 일치하는 중국 군대를 찾자면 송나라, 정확히는 북송의 군대일 것이다. 사료에 따르면 북송의 군대는 한국에서 아는 그 개판으로 전락했던 후기 당나라 군대를 아득히 초월한 개판이었다. 당나라 멸망 이후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분열된 5대 10국을 통일했을 때를 제외하면 지독한 문치주의와 무신 차별 대우 때문에 군대 자체가 허약했다. 전연의 맹 이후로는 송보다 국력에서 열세인 서하에게 패했으며 나중에는 아예 대외원정은커녕 정강의 변 직전까지 제대로 된 전쟁 한 번 치르지 않아서 문관인 사령관들은 물론이고 휘하 장수들도 야전에 대해서 일자무식인 경우가 태반이었다.거기에 일단 장수들부터가 황제와 문신들에게 심하게 차별당했다. 전통적으로 문치국가라는 중국의 특성상 무신 차별은 송나라가 아닌 다른 시대에도 있어 온 일이지만 송나라는 전대 왕조인 당나라에서 발발한 절도사의 난 때문에 군부를 정말 노이로제급으로 경계하여 군인의 지위를 크게 낮춰 버렸다. 같은 시기 고려가 송나라의 행태를 그대로 따라했다가 무신정변이 일어난다.
특히 송나라의 군제는 정예병력을 모두 황궁과 도성을 지키도록 배치하고 적과의 국지전이 자주 일어나는 최전방에는 오합지졸들만 배치해놓은 매우 기형적인 형태였다. 송나라 시대를 다룬 작품인 수호전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80만 금군이 이 시기의 이야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도와 군주를 지키는 호위병, 금군은 정예병인 게 당연하지만 교통 수단도, 도로망도, 통신 수단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에 주력 병력을 전선에서 한참 떨어진 수도에 깔아뒀으니 국경 지방의 긴급 상황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반란을 두려워하여 사령관도 무관이 아닌 문관을 임명했는데 문제는 이 문관들이 전투 경험이 전무하고 군대를 모르는 비전문가였다는 것이다. 덕분에 안 그래도 지나친 문치주의로 약해진 군대가 더욱 허약해진 데다 병사 개개인의 질적 저하 역시 심각했으며 군기가 빠져 전투력 이전에 정신력부터가 개판이었다.
이러한 막장 운영과 폐급 병사들이 뭉친 결과, 북송의 군대는 온갖 흑역사를 쓰게 된다. 송나라군 2천명이 금나라 사신을 습격했다가 금나라 호위병 17명에게 가볍게 털리는가 하면[5] 요나라 패잔병 토벌을 위해 10만 대군을 동원해 놓고도 패잔병 수천명에게 몇 달을 질질 끌리다가 금나라의 도움으로 겨우 승리하는 등 어이가 없다 못해 실소가 나오는 수준까지 전락해 버린다.
송나라는 오히려 정강의 변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난 남송 시기에 군제 개혁을 하여 군사력을 보강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금의 침공에서 버티어내며 몽골의 대대적인 침공에서도 무려 40년 동안 버틸 수 있었다. 덕분에 훗날 금나라가 몽골에 의해 수도가 털리고 애종이 자살하는 동안 남송은 몽골의 가장 큰 골칫덩어리로 남았다. 결국 이에 질린 몽골은 남송 정벌 후 남송인을 최하층 계급으로 분류하였다.
사실 저런 송나라의 허약해 보이는 군대 체제가 형성된 이유로는 근대 이전까지 거의 모든 거대 제국들이 부딪혀왔던 중앙군과 지방군간의 균형 문제도 있다. 교통, 통신, 행정기술의 한계상 중앙 정부가 직접 지방군을 유지하고 통제하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강력한 대규모의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의 번진과 절도사, 동로마의 테마 제도와 스트라테고스 처럼 반독립적/봉건적 성격을 가진 군관구를 설치하여 병력을 직접 편성-유지하고 지휘하도록 하는 제도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반독립적인 지방의 군관구들이 정국이 혼란해지면 손쉽게 군벌로 변모하여 중앙정부를 위협하고 혼란한 정국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렇다고 지방 군사력의 반란을 막기 위해 군사력의 주축을 중앙군에 두게 되면 변경의 방어력이 약해지고, 군사력의 총 규모 역시 심하게 축소되는 것이 불가피했기에 거의 대부분의 전근대 제국들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점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송나라가 찾아낸 균형점은 '중앙군 중심, 정국 안정 중시'에 아주 가까운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전 왕조인 당나라 자체가 그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절도사들의 이탈과 반란을 통제하지 못하여 망해버렸고, 그 후 오대십국시대의 혼란기를 거친 끝에 건국된 것이 송나라이니 군사력의 강화보다는 정국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대가로 송나라는 역대 중국 통일왕조중에서 군사력 최약체라거나 요, 금, 원에게 막대한 세폐를 내며 평화를 구걸했다는 이미지로 기억되지만 당대 송나라의 문화적 번영과 경제적 성세를 생각하면 이 또한 나름 "평화? 그까짓거 돈으로 사면 될거 아냐! 얼마야! 얼마면 살 수 있냐고!" 식의 선택으로 볼 여지도 있다. 물론 이런 평화유지책 역시 한계는 있었기에 결국 송나라는 북방 유목민들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그렇다 한들 송나라의 왕조 유지기간도 다른 역대 중국 통일 왕조에 비해도 그다지 짧은 것은 아니다.
3. 어원
시초에 관한 설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어느 쪽이든 근거랄 것이 마땅치 않다. '오합지졸'을 비판하는 용례로서 신문 지면에서 '당나라 군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례는 1996년에야 겨우 등장하는데(#), 물론 이 사례에서도 신조어라는 단서가 없이 설명 없이 독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로 사용하는 것을 보아 이 때 이미 용법 자체는 보편화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말이 그 이전의 단서를 찾기 힘든 어구임은 분명하다. 이는 어원학 차원에서 '현대에 발생한 민간어원'이라는 전가의 보도와 다름없는 가설조차 반박할 마땅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느 가설에 대해서나 굉장한 결점을 부여한다. 아래의 설명 모두가 결국 '당나라 군대'를 당시에 비하 용어로 쓴 직접적인 사례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황적인 방증을 들고 있는 정도이기 때문이다.조선왕조실록이 전산화된 이후에는 정조가 경연에서 당나라 군대의 연패에 대해 논한 사례가 언급되기도 하는데(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2월 1일 정유 4번째기사), 이 기사의 내용은 사실 살펴보면 '여러 명장들이 있었는데도 당나라가 줄이어 대패한 이유'를 말한 것이며 신료들은 그 이유를 '임금의 의심이 심해 환관과 같은 소인배들이 감시 역으로 끼어들어 군주와 군대의 의사 결정에 개입했으며 절도사들의 지휘 계통이 복잡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어 그 이유를 당나라 군대 자체가 약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기서 말하는 당 장수들은 곽자의, 이광필과 같은 인물까지 포함되었다. 일단 이들이 시기상으로 흔히 이를 짜맞추는 고구려나 통일신라와 당나라의 교전과는 상관도 없을 뿐더러, 이 두 인물이 조선시대에 어떤 인물로 인식되었는지 생각하면 이 사료를 조선에서 당나라 군대를 오합지졸로 본 사례로 드는 것은 사료의 오용으로 볼 여지가 강하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고구려 원정에서 참패한 것으로 지식인들조차 놀리듯 언급하던 당태종은 객관적으로는 오히려 조선인들 스스로도 인정하는 명군이자 정복 군주의 대표적인 사례였고, 다만 조선인들은 '그렇게 강한 당나라 군대를 고구려가 무참히 깨부쉈다'는 데 자긍심을 느꼈을 따름이었다. 이처럼 '당나라 군대'가 허약하다는 인상은 조선인들의 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오히려 중국사에 대한 교양이 필수가 아니게 된 현대에 사극 등을 통해서 당에 대한 고구려와 신라의 항쟁을 통해 당을 격퇴한 사례 등 한국사와의 교집합에 속하는 사례만을 접한 현대의 심성에 가깝다. 즉 현대에 쓰이는 '당나라 군대'의 용법은 사실 그 자체로 전근대에서 용례를 찾기는 굉장히 힘든 것이다.
전근대 문집 자료나 근대 신문 자료가 다량 전산화되었으며 구글이라는 검색 효율이 높은 엔진이 보편화된 2010년대 이후에는, 현대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이 현대 문화와 연결지어 전통을 발굴해 다양하게 재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치맥만 하더라도 600년 전 닭튀김과 '맥주'를 함께 먹은 사례(#)와 별개로 20세기 말에 따로 생겨났고, 해당 기록이 조명받은 것은 빨라야 2017년의 일이며 구글 검색 결과도 관련 있는 결과는 그때부터 나온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조차 '당나라 군대'의 어원을 따져볼 만한 사례가 전혀 발굴되지 않았다는 점은 이 단어가 현대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을 크게 낮춘다.
하필 이 단어와 관련된 주제가 '군대'라는 점에서 이 단어의 어원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찾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군대의 특성상 (특히 '당나라 군대'의 어형이 처음 보이는 1990년대에는 사이버지식정보방이나 스마트폰 도입과 같은, 문건으로 남을 수 있는 외부 소통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더더욱) 언어 습관이 폐쇄적이고 언어 사용 집단이 겨우 몇 년마다 수시로 대거 교체되는 데다가 문어체와 구어체의 괴리가 크기 때문에, 어원이 보전되고 기록되거나 이 어원이 외부로 알려지기에 굉장히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단어의 용례 자체가 이미 자신의 삶에서 지나쳐 간 '군대'에 대한 비하라는, 과거에 대한 미화와 과장이 끼어들기 딱 좋은 사례라는 점에서 지금 이후 새로운 관련 진술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이 객관적이고 역사성을 잘 갖춘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요원하기까지 하다.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북한의 언어 자료가 제대로 수집된다면 대부분의 가설이 걸러질 가능성이 높다. 만일 북한의 언어 자료에서 '당나라 군대'와 같은 표현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이 단어는 분단 이후에 생겨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분단 이전에 생겨난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 일단 현재로서는 북한의 제도권 문건에서 '당나라 군대'와 같은 표현이 확인된 사례는 없어 전자의 가능성이 높기는 하나, 속어의 성격상 그것이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이런 요소들 때문에 어느 가설이나 학계 수준에서 논의되지 못하고 있으나, 자주 언급되는 가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3.1. 고구려 유래설
비록 고구려가 668년에 나당 연합군에 멸망당하긴 했지만 그 전까지 고구려는 당나라를 맞아 큰 승리를 거두었으니 고구려 입장에서 당나라 군대 이미지는 오합지졸로 보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사서를 보면 고구려-당 전쟁 때 당나라가 거의 매 전투기록이 승리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당나라 입장의 기록만 적혀있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즉, 양쪽 나라에서 교차 검증이 되어야 확실하다. 하다못해 현대의 물리적 충돌만 해도 양측 주장이 판이한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당태종은 역사 왜곡을 시도한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인물이다.김부식도 삼국사기에서 "유공권의 소설에 당나라 군대가 심각한 위기에 빠진 상황이 묘사되어 있는데 중국 사서에는 없으니 지들이 부끄러워 숨긴 게 아니냐?"고 깠다. 중국에서조차 당나라 교환비가 40배에 승률이 압도적이라는 부분은 내세우거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대부터 고구려에 발린 것만 기억했을 정도다.
그나마도 나당 연합군이 굉장히 고전 끝에 멸망시킨 것이다. 열흘도 안되서 예식진의 도움으로 힘들이지 않고 멸망시킨 백제하고는 양상이 달랐던 것이다. 나당 연합군은 두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첫 번째 전쟁에서는 치욕적인 참패를 당했으니 바로 당나라 군대가 절반이나 몰살당하는 사수 대첩이 벌어졌다. 두 번째 전쟁에서도 나름 고전을 하기도 했는데 한 예로 당나라 군은 667년 2월에 신성을 공략했는데 그 성 하나 깨는데 무려 7개월이나 허비했고 그나마도 사부구라는 역적의 도움으로 겨우 함락시킨 것이다. 수도인 평양성도 1년 가까이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역시 매국노 땡중 신성을 회유해 성문을 열게 해서 겨우 함락시킨 것이다. 이때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동원한 총병력만 무려 50만 명에 달했다. 수나라 100만 대군보다는 적지만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50만 명은 굉장히 많은 병력이다.[6]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국력의 심한 소모도 있었지만 내부분열이 더 큰 원인이었다.
박근형 저 <중국 읽어주는 남자>에서도 당나라 군대라는 속어의 유래를 고구려에서 찾고 있다. 게다가 아동을 위한 위인전이나 사극에서도 고구려 인물의 뛰어남을 부각시키기 위해 당나라 군대는 무능하고 늘 패배하는 등 이미지가 영 좋지 않다.
3.2. 남북국시대 신라 유래설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후 당나라군을 형편없는 약군으로 인식한 것에 유래했다는 설. 전술한 고구려의 사례는 과정은 좋았을 때도 있었지만 결국 고구려의 멸망으로 마무리지어졌기 때문에 당나라를 나당전쟁에서 막아내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지어진 신라에서 이런 인식이 생겨났다는 설이다.지금이야 각국의 군사력을 객관적으로 파악이 가능할 정도로 정보가 충분하기 때문에 당시의 당군이 질적으로 크게 떨어지는 군대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정보의 양과 질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상적으로 대국인 당나라가 신라에게 패했으니 신라 입장에서는 당나라의 군대 이미지는 실제와 관련없이 형편없는 오합지졸로 인식했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게다가 실제와는 무관하게 적을 조롱하는 문화는 그리 드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신라 신문왕 시기인 692년에 당나라의 요구를 공공연히 거절한 것은 전쟁 직후 신라 측의 여유를 나타낸다.
세월이 지나며 나당전쟁을 겪지 못한 후세의 신라인들이 안사의 난, 황소의 난 등에서 당나라 정부군이 무력하게 패배하고 이민족이나 의용병의 힘으로 겨우 안정을 찾은 것을 황해 바다를 건너오는 소문과 자치통감 등 중국 사서를 통해 접하면서 당나라 군대에 대한 이미지는 더 악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819년 이사도의 난 때는 당헌종의 요청으로 신라 헌덕왕이 당나라에 바다 건너 지원군을 파병할 정도였다. 현대에 비유하면 미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한국이 태평양을 건너 지원군을 보내는 셈이었으니
신라군도 몇백년이 지나 후삼국시대 직전까지 가면 약군이 되기는 하지만 당나라가 안사의 난으로 골골거리기 시작할 8세기에 신라는 여전히 전성기였고 9세기 초반까지도 김헌창의 난을 정부군으로 신속하게 진압하는 등 신라보다는 당나라가 더 일찍부터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3. 언어유희설
군기가 빠진 군대에서는 총을 쏴도 탕소리가 아니라 허전하게 당소리가 난다고 당나라 군대라고 부른다는 용어라는 설이다. 군기가 빠져 싸우지는 않고 매일 꾸벅꾸벅 졸기만 하는 모습에서 닭나라 군대 → 당나라 군대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발음이 같아 당나라를 닭나라로 잘못 이해하는 유머는 예전에도 있었다.[7]때문에 이 설이 의외로 사실일 가능성을 완벽하게 부정할 순 없다. 이런 사실들은 아예 잊혀 있다가 닭나라 군대 → 당나라 군대 드립이 뜨고 난 후에 사료 연구로 뒤늦게 밝혀졌다고 가정해도 정황상으론 말이 된다. 그 반대로 가정해도 정황은 모두 들어맞는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3.4. 당(唐) = 중국 통칭설
중세 중국의 당나라 왕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를 막론하고 중국 자체를 당나라로 통칭해 생긴 용어라는 설이다. 현대에도 영어 표기를 통해 중국을 진(China)나라라고 부르고 민족은 한나라에서 딴 한족으로 부르듯 통칭과 공식 국호는 원래 항상 일치하지 않으며 당나라 역시 중국사를 대표할 만 한 전성기 중 하나로서 당 왕조 이후에도 중국을 당으로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국 또한 역사적으로 해당 왕조의 시기가 아니었음에도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로부터 계림(신라의 이칭), 고려, 조선 등으로 계속 불리기도 했고, 일본 또한 701년에 이미 국호를 일본으로 개정했음에도 비하적인 의미든 중립적인 의미든 1000년이 넘도록 왜국이라고도 불렸다.원래 일본에서 중국의 군대를 일컬어 당나라 군대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는 일본 유래설로 알려져 있으나 이 당나라 군대라는 표현이 현재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안 쓰이고 한국에서만 쓰이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일본이나 일본인에 의해 유래한 표현이라면 이런 표현이 지금도 일본어에 퍼져 나갔을 확률이 높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근거가 약한 설이다.
사실 중국을 통칭으로 당(唐)이라고 일컫는 것은 고려-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대목들이 나온다.
賜唐人戴延卿、鄭自良等十三人各米一石。
당인(중국인) 대연경과 정자량 등 13명에게 쌀 한 섬씩을 하사하였다.
―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2월 2일 무진 2번째 기사
"… 所率軍馬甚衆, 糧餉浩繁, 未審有司恒費外, 所餘米、豆, 足支唐軍幾名、幾朔乎? …"
"… 거느리고 온 군마(軍馬)가 매우 많아 군량이 엄청나게 많이 들 것이다. 모르겠다만 유사(有司)는 늘상 쓰는 분량 이외에 남은 쌀과 콩으로 당군(명군) 몇 명에게 몇 달간이나 지공할 수 있겠는가? …"
― 선조실록 62권, 선조 28년 4월 19일 신유 1번째 기사
당인(중국인) 대연경과 정자량 등 13명에게 쌀 한 섬씩을 하사하였다.
―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2월 2일 무진 2번째 기사
"… 所率軍馬甚衆, 糧餉浩繁, 未審有司恒費外, 所餘米、豆, 足支唐軍幾名、幾朔乎? …"
"… 거느리고 온 군마(軍馬)가 매우 많아 군량이 엄청나게 많이 들 것이다. 모르겠다만 유사(有司)는 늘상 쓰는 분량 이외에 남은 쌀과 콩으로 당군(명군) 몇 명에게 몇 달간이나 지공할 수 있겠는가? …"
― 선조실록 62권, 선조 28년 4월 19일 신유 1번째 기사
3.4.1. 임진왜란 명나라 군대 유래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군도 이처럼 일반 대화에서는 임금(선조)까지 당군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이외에도 실록에 중국인을 가리켜 명인(明人)이라는 표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반면 당인이라는 표현은 조선의 초중말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가 여전히(?)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나라 군대라는 비하는 특정 시대만이 아니라 중국 군대 전체를 가리켰을 가능성도 있다. 이여송 문서로.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 조정은 명나라 군대를 천병(天兵)이라고 불렀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당병(唐兵)이라고 불렀고, 이들 명나라 군대를 비하하며 '당병'이라고 부르던 것이 '당나라 군대'로 변모했을 가능성이 있다.이처럼 조선에서도 '중국=당'의 의미로 통상 쓰던 말이었다. 이는 현대에도 당면(唐麵)이라는 단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8] 따라서 굳이 일본에서 연원을 찾아야 할 이유는 없다. 여튼 일본에서도 당의 율령제를 받아들인 후 당이 망하고 천년이 다 돼 가는 에도 시대 말까지도 중국을 당나라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그 흔적은 많이 남아있다. 일본어에는 가라테(당수)라는 단어가 있고 중국풍을 당풍이라고 한다. 특히 일본은 청일전쟁과 중일전쟁으로 개판 5분전인 청나라 군대와 국민당군을 여러차례 상대했으니 이들에게 중국의 군대는 오합지졸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특히 청나라가 중원을 정복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던 팔기군은 청나라가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하던 강희제 때부터 군기가 빠졌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아 강희제가 준가르 정벌 당시엔 팔기군을 배제하고 토벌대를 따로 편성했을 정도였고 건륭제 이후에는 "팔기군은 군대도 아니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나사가 빠져있었다.[9]
따라서 동북아에서 당나라 군대는 중국 군대를 의미했다. 북송, 원/명 말기, 청 말기 군대 등 당시 군기 빠질 정도로 문란했던 수준을 겪은 시기들을 감안하면 당나라 군대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비하적인 표현이 되기 쉬웠을 것이다. 상술했다시피 북송의 군대는 상상을 초월한 개막장 폐급이었고 가정제 이후의 명나라 군대와 근대의 청나라 군대는 방산비리와 뇌물수수가 패시브로 딸려 있는 개판 오분전이었다.[10]
엉망인 기강과는 별개로 중국(원, 명, 청) 군대는 북로남왜 등 외세의 침입을 잘 막아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마치 예비군처럼 군기는 빠졌을지 몰라도 막상 전쟁 시에는 아니었던 셈이다.
3.5. 국민당군 유래설
중국의 국민당군을 당군,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절을 당나라로 비하하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신해혁명 이후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국국민당의 군대는 병력의 수에서 뿐 아니라 미국 등의 지원으로 확보한 막강한 화력과 보급물자에서 알 수 있듯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 군대(홍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분명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음에도 매관매직에 따른 군기 문란으로 결국 연전연패하다가 대륙을 내주고 작은 타이완섬으로 완전히 쫓겨나고 말았다.
이때 중국국민당 군대의 무능함을 비웃는 단어로 국민당군이라고 비하하다가 이것이 나중에 국민당군→당군→당나라 군대로 변화되었다는 설이다.[11]
신문 자료를 통해 현재까지 '당나라 군대'가 확인되는 최초 시점인 1996년과 그다지 멀지 않은 시점인 1992년에 '장개석 군대'라는 표현이 '당나라 군대'가 쓰이는 용법과 정확히 같은 용법으로 쓰인 사례가 확인된다는 점은 다른 어떤 가설도 갖고 있지 못한 가설의 장점. 이 시점에 해당 표현이 관용어화되었다면 그 이전까지 언론 등에서 '당나라 군대'라는 표현을 일절 언급하지 않은 이유 또한 깔끔하게 설명되며, 신조어로서 1992년 무렵 '장개석 군대'라는 표현이 등장했다고 보면 그 배경 또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1987년 이후 대만의 민주화와 때를 같이 하여 민주화가 진행되었고, 장제스의 구 정권을 비판하는 자료를 공유하며 '부패한 장제스 정권'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심화되었다(예시 1, 예시 2). 또한 1989년에도, 심지어 천안문 6.4 항쟁을 비판하는 논조의 기사에서조차 '부패한 장개석 군대가 윤리적인(...) 마오쩌둥군에게 패배했다'는 다소 과도하게 편향적인[12] 역사관을 동원하며 '장개석 군대'의 이미지를 비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으며, 군인들은 '부패한 군대는 승리할 수 없다'며 '장개석 군대'를 그 대표적인 반례로 인용했다. 이런 비판은 사실 민주화 이전에는 '군대'라는 한정된 집단 내에서만 유통될 수 있었을 뿐 상대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치켜세우는 것으로서 제1세계의 독재 정권 아래에서는 언론에서 공론화시키기 힘들었으나, 민주화 이후 자유 진영의 치부에 대한 비판도 자유로워지면서 유통 사례가 늘어난 결과 언론에도 실리기 시작했다고 보면 이 단어가 하필 이 무렵 등장한 이유 또한 무리 없이 설명된다.
물론 다른 용어가 중간 단계의 단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가설 또한 '장개석 군대' → '국민당 군대' → '당나라 군대'로 변화하는 과정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약점이다. 그렇지만 다른 가설에 비해서는 시간적 폭이 좁기 때문에, 정말 대책 없이 1000년 넘는 시간 동안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암암리에 유통되고 있었다고 설명하는 다른 가설에 비해서는 이 약점의 무게도 비교적 덜한 편이다.
4. 사례
한국에서는 주로 군기가 타군에 비해 약하다며 왜곡된 군을 비하할 때 사용해 왔고 근래에는 논픽션 매체에 등장하는 막장 군대들이나 다른 나라 군대의 막장 행각을 깔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는 자유로운 군기를 가진 것처럼 묘사되는 해외의 군대 드라마 등을 깔 때 많이 사용된다. 국군이 현대화, 개방화되는 추세에 대해 꼰대들이 요즘 군인들 군기가 엉망이라고 까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웹툰 마린블루스에서 예비역인 성게군이 소대 최고 맞선임이 된 쭈꾸미군에게 요즘 신병들을 "자기 땐 그러지 않았는데~"라는 특유의 군대허세를 섞어 당나라 군대라고 말한다.[13]
다만 당나라 군대에 대해 서로들 자기 때는 고생하고 무조건 후배들이 빠졌다라고 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한국의 속담 가운데 이와 얼추 비슷하면서도 뜻은 조금 다른 "죽어나는 건 조조 군사"라는 말이 있는데 적벽가에서 조조군이 엄청나게 깨지는 모습을 보인 것에서 유래했다.
[1] 다만 당나라와 일본이 싸운 백촌강 전투 당시 일본은 지금처럼 군사대국이 아니라 아직 개발도 덜 된 호족들의 집합체에 불과한 오합지졸 개판 그 자체였다. 일본이 멸망의 위기에 놓인 백제를 구하기 위해 온 국력을 기울여서 보낸 병력이 고작 2만 7천 명이었는데 그 전투에서 그 병력들을 전부 말아먹어 버렸다. 이는 섬이라는 일본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한 한계였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육로로 걸어오기만 하면 되는 당나라나 신라에 비하면 바다 건너오는 일본의 동원력은 설령 국력이 엇비슷했다고 하더라도 한 수 접어두고 시작하는 수 밖에 없다. 거기다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한반도의 동남 지역은 적국 신라의 영토였으므로 일본군은 대한해협을 통과해서 남해를 거쳐 황해까지 가는 고대 수준의 항해기술로는 모험에 가까운 원정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2만 7천이나 보낸 것은 그래도 최선을 다한 것이다.[2] 사실 당나라가 안사의 난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한 것은 군대가 개막장이라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라고 보는 게 맞다. 거기에 지방 군권을 쥐고 있던 절도사 중에 안록산 편에 붙은 절도사들이 상당수라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도 한계가 있었다.[3] 안사의 난보다 1세기 앞선 무측천 시대에 토번에게 대비천 전투나 소라한산 전투에서 연전연패한 건 마찬가지로 토번에도 하늘이 내린 명장인 가르친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고, 심지어 그 가르친링조차 근본적인 국가의 체급 차이를 어쩌지 못하고 전투는 모조리 이겼지만 전쟁은 당에게 판정패했다.[4] 그것도 3개월치 식량이다.[5] 당시 금나라 호위병들은 2천명을 앞에 놓고 방어진까지 구축했다고 한다. 애초에 2000 : 17이면 송나라군이 맨주먹으로 달려가서 밟고만 지나가도 그냥 이기는 싸움인데 문제는 군기가 빠진 송나라 병사들이 호위병들의 기세에 눌려 너도나도 도망갔다는 것이다. 맨탈이 무너지면 피지컬은 종이쪼가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을 1000년 전에 몸소 입증한 셈이다.[6] 병력 동원규모가 비교할 수 없이 커진 현대전에서도 50만이면 웬만한 국가의 상비군급 규모를 훨씬 상회하는 숫자다.[7] 양주동의 '질화로'라는 수필에는 천자문 문구인 "有虞陶唐(유우도당)"의 "陶唐(도당)"을 '질그릇 도, 당국(당나라) 당'이 아니라 '꼬끼오 도, 당국(당나라) 당'으로 오독하는 아이가 언급된다. 뒤 글자의 훈인 '당나라'를 발음만 듣고 '닭나라'로 오해한 결과 닭의 울음소리인 '꼬끼오'를 앞 글자의 훈에 대응시켰으리라고 볼 수 있다.[8] 한국에서는 별로 안 쓰이지만 차이나타운의 명칭 중 하나도 바로 당인가(唐人街)이다.[9] 더 심각한 건 이 인간들이 무능한 주제에 특권의식은 어마무시해서 도시 안에 성채를 쌓고 자기들끼리 따로 사는가하면 탈세와 부정축재를 당연시해서 건륭제 시기를 거치고 나면 이들이 부정축재한 재산이 청나라의 몇년치 세수와 맞먹을 정도로 불어나게 된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이들은 신해혁명과 국공내전,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암살과 인민재판의 타겟이 되어 모조리 죽어나갔다.[10] 특히 도광제 이후의 청나라 군대는 중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식민지화 이전의 베트남, 버마, 조선 등에서 대놓고 약탈을 벌여서 현지인들에게 원성을 샀다고 한다. 특히 베트남에서는 식민통치를 했던 프랑스 군대보다 청나라 군대를 더 싫어했을 정도라고.[11] 중국 국민당은 소련의 영향과 지원을 받아 국민혁명군은 공산군처럼 국가의 군대가 아닌 당의 군대였으며, 나라도 정당이 국가 위에 있는 정당국가를 지향했다.[12] 모택동이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제창하긴 했으나 중공군이 절대적으로 따른 지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13] 나름대로 저 시절 다른 군대의 꼰대질에 비해서 이유는 있는 것들이다. 세면대에서 걸레를 빨지 말라는 것은 당연히 애초에 걸레를 따로 빨 수 있는 별도의 개수대(소제싱크)가 있어야 가능한 말이므로 위생상으로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며, 식당에서 왼팔을 식탁에 올리지 말라는 것은 열악한 일반 병 식당의 여건으로 인해 식당의 공간이 좁은 경우, 걸레질 순서는 평소 청소가 꾸준히 되었다는 전제 하에 깨끗한 곳에서 더러운 곳으로 나가는 순서로 반대로 하면 깨끗한 곳이 오히려 더러워지므로, 담배를 오른손으로 피지 말라는 것은 경례가 우수경례이기 때문. 다만 어느 쪽이든 강요할 만한 것은 아닌 데 비해 당시 군대 문화는 상당히 경직성이 높았으므로 필요에 비해 훨씬 과잉으로 요구되는 경향이 강했으며, 그 행위 자체보다 '군필자라면 당연히 상상할 수 있는, 저 뒤에 뒤따르는 갈굼'이 블랙 유머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게다가 저 중에서도 젓가락 사용 금지는 전쟁 상황 핑계나 겨우 댈 수 있는 짤없는 꼰대질을 위한 꼰대질이며, 식당에서의 왼팔 사용 금지의 원인이 된 공간 제약도 따져보면 국방부의 책임을 병에게 전가하는 것이므로 굉장히 질이 나쁜 문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