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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25 12:57:34

허버트 후버(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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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존 조지프 퍼싱 · 우드로 윌슨· 허버트 후버 }}}}}}}}}}}}

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허버트 후버에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이다.

2. 작중 행적

본래 호주쪽 광업 회사에 취업하려고 했으나, 대한제국에서 내세운 조건이 워낙 좋았고, 미지의 세계에서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는 이른바 "프론티어 정신"에 이끌려 고민 끝에 대한제국 국영 광업 회사에 취업을 결정했다. 이후 대한제국의 금광 및 기타 광산들을 기반으로 한 거대한 자본가가 되었으며 극동 전쟁기에도 그 막대한 자본으로 대한제국을 서포트한다. 자본을 기반으로 미국 정계에 로비를 하며 친한파 정치인 세력 구성에 한몫을 했다. 일본 역시 한국 광산업을 꽉 쥐고 있는 그를 포섭하려 했으나 지금 나보다 돈 많은 건 한청일 삼국의 지도자들뿐인데 겨우 그 돈으로 나를 포섭하려고 하냐며 쿨하게 무시했다. 2부 시점에서도 사업 규모가 엄청난 것으로 보이는 데 대한제국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금 생산국으로 각광받으며 독일 제국의 분석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금 덕분에 파운드화, 루블화, 프랑화의 붕괴가 유예되고 있다 할 정도니 그 사업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1911년 금의환향하여 원역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상원의원이 되었다. 팬덤에서는 후버가 원 역사보다 훨씬 빨리 상원의원이 되었다는 점을 들어 1920년 공화당 경선 때 워런 G. 하딩 대신 선출되어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드는 시점에는 공화당 중진이자 식량청(United States Food Administration)장으로서 미국의 식품 생산, 유통, 소비를 관리하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요청을 수락한 딘스모어 주한 미대사에게 유럽의 한국군을 본국으로 이송할 선박 지원을 요청받고 이를 수락. 일반 상선보다 훨씬 빠르면서 한 번에 1만명 이상을 실어나를 수 있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대형 여객선들을 차출해 김시혁과 구주 원정군이 신속히 귀국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윌슨이 영국과 손잡고 강종과 근황파를 지원해 대한제국의 내전을 장기화 시키려들자 '입으로는 각국의 자유와 주권을 이야기하면서, 개인의 욕심으로 폭군을 지원하는 자기부정'임을 통렬하게 지적해 윌슨의 계획을 좌절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소련과 국경을 확정짓고 정식 외교관계를 맺은 대한제국으로부터 만주 내 미국 기업들의 이권을 보장하겠다는 밀약을 전달받았다. 미국 정계 제일의 아시아통에 극동 전쟁 때 전쟁터가 된 한국에서 버티며 성공한 부분이 자유와 독립을 지지하는 동시에 충만한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성공한 사업가라는, 미국인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상을 부여해 시민들의 지지도도 높으며 자기가 운영한 광산 회사에 극동 진출을 노리는 기업체들과 연결 고리까지 탄탄해(정치자금이 풍족해)[1][2]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상하원 의원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 윌슨조차 무시할 수 없는 거물로 부상한다. 여세를 몰아 한국에서 근무해 본 외교관, 기업가 출신 의원들과 한국 클럽을 결성해 친한파 정치인임을 공공연히 하고 미-한 우호 여론을 결집하는 자금을 뿌리고 다닌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1920년 대선에서 러닝 메이트가 되었고 부통령으로 당선된다.[3]

20세기 초반 미국에선 상당히 낯선 실세 부통령으로 워싱턴 군축 회의의 전반적인 조율, 한국과의 막후 회담을 당연하다는듯 도맡아 처리한다. 한국에서 10년 가까이 거주하며 한국어에 능통해서 귀국 10년이 지난 워싱턴 군축 회의 시점에서도 제법 능숙하게 구사하며 길영수, 이승만과의 배후 회담을 진행한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통해 한프 - 영일 동맹의 대치 국면을 이용, 미국을 (경제적으로는 한프동맹에 가까운)중간자 위치에 두고 양쪽 모두에 우위를 점하는 세계전략을 확립했다. 하딩이 원역사처럼 급사하자 대통령직을 승계받는다.

1924년 재선에서도 무난하게 당선되어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대공황이 원 역사보다 2년 이상 빨리 밀어닥치며 공황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벗지는 못하게 되었다. 억울할 건 없는게 경제관료들이 일본의 상황과 주식 시작 하락세를 보고 계속 경고를 보냈음에도 늘상 있는 일이고 시간이 해결해줄거라며 무시했다. 세의 법칙이 당연하고 케인즈는 별종 취급이던 시기라 후버가 어리석었다고 볼 순 없으나 경제관료들이 누차 심상찮다는 신호를 보냈음에도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대책을 아예 안 세운건 아니었고 폭락의 원인이 주식시장 과열이라 판단하고 은행과 기업가들이 주식투기자금을 과잉소모하지 않도록 금리를 인상하고, 사회안전망을 망가뜨리는 실업율을 잡고자 기업에서 숙련공 임금을 삭감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으나 전자는 세계최대 채권국인 미국이 긴축재정을 하는 모양을 만들어 이율 상승과 외자 유입, 외채 감소를 불러왔다. 이로 인해 채무국들, 특히 유럽에서 한창 무역 전쟁 중이던 폴란드 제2공화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이 치명타를 입었다. 그나마 폴란드는 프랑스, 소련과 외교 관계가 나쁘진 않아서 활로를 뚫었지만 둘 다 사이 나쁜 바이마르 공화국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추진한 옛 협상국들을 향한 금융 대부 요청, 오스트리아와의 관세동맹까지 죄다 좌초하며 주저앉아 버린다. 후자는 기업들이 숙련공들을 일시 해고, 파트타임 고용하는 꼼수로 우회해버리면서 실효를 거두지 못한채 노동 수요 감소로 시장이 더욱 경색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28년 대선을 앞두고 완전히 레임덕에 빠져 3선 출마는 꿈도 못꾸게 되었고 후임 쿨리지에게 자리 비워줄 준비나 하게 된다. 그나마 공황 최절정기인 29년 이전에 백악관을 떠나 보너스 아미 사건을 겪지 않게 되었고 식량청장 시절부터 대통령 재임 초기까지 업적이 뚜렷해서 후대 평가가 아예 바닥에 처박힌 원 역사보단 나아질 게 위안.

3. 기타

한국에 체류하며 맛들인 증류식 소주를 '한국산 곡물 음료'라며 백악관에 가서도 즐겨 마셨는데 이 시기 미국은 수정헌법 18조로 금주법 박아놓은 상태였고 후버는 정치적으로 금주법 지지의사를 밝혔던지라 증류식 소주에 '후버 물'(Hoover water)란 비아냥 가득한 별명이 붙게 되었다.


[1] 본인이 운영하는 광산 회사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 때문에 정치자금을 받는 게 아니라 공화당,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주는 쪽이라고 한다. 물론 미국 정치의 특성상 본인도 여러 기업인들에게 정치자금을 받고 있겠지만 말이다.[2] 이때 본인의 광산 회사가 한국뿐만 아니라 본래 바라던 호주에도 사업체가 진출해서 돈 크게 벌고 있다고 언급되는데, 호주가 일본의 야욕을 일찌감치 간파해 반일 정서가 매우 심해서 아시아 패권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을 지원하는 영국 본토의 의사를 씹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한국, 프랑스와 몰래 연줄을 댈 거라는 떡밥이 있었는데 그것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3] 원역사에선 부통령은 캘빈 쿨리지고 후버는 하딩 정권의 상무장관으로 근무했다. 후버가 부통령이 되면서 캘빈 쿨리지는 자연스럽게 상무장관직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