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의 등장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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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의 등장인물.원 역사의 의친왕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이다.
2. 작중 행적
1차 세계대전을 다룬 2부 본편 1화에서 관전무관단의 일원으로 등장. 유럽에서 유흥을 즐기다가 갈리치아에 있던 관전무관단에 합류하여 보좌하는 이응준 정위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극동 전쟁의 영웅 김시혁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며 답장 여부에 상관없이 팬레터에 가까운 편지를 잔뜩 보내오곤 했다.오랜 타국 생활에서 오는 공허함을 달래고자 각종 군사 서적을 탐독하고 총기에 관심을 쏟았는데, 덕분에 방구석 밀덕후 아버지나 금치산자 형과는 달리 군사적 안목이 제대로 잡혀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투 방식이 한국의 것을 벤치마킹했음을 즉시 알아보고 김인수 부장과 전황에 대해 막힘없는 대화를 나눈다. 바로 옆에서 포탄이 떨어져도 개의치 않는 대범함을 갖춰서 세간에선 고종보다 더 흥선대원군을 닮았다는 평을 받고 있고, 그 탓인지 고종은 의친왕의 거듭된 귀국 요청을 칼같이 차단하고 있다.
동부전선 참전을 위해 결정된 원정군 주요 지휘관으로 모두 김시혁의 측근으로 구성된 데[1] 불만을 품은 고종은 의친왕을 원정군 사령부 감찰관이자 한국군 대표로 내정한다. 당연히 선의는 아니고 패전하면 양쪽에 다 책임을 묻고, 승전하면 과실은 자신이 챙기며 의친왕과 원정군 수뇌부 사이에 연결점을 빌미삼아 공작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다만, 의친왕 본인은 김시혁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고 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그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41군단 궤멸 이후 둘이 마침내 만났을 때 주인 좋다고 달려드는 골든 리트리버가 생각날 정도로 친밀하게 굴었다. 황실 인사들과 가까이 지내서 좋을 게 없는 시혁이 떨떠름해하자 나 혼자 친한 줄 알았냐고 상처 받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활짝 웃으며 친밀한 포즈를 잡는다.
비단 의친왕 본인만 친숙하게 구는 게 아니라 사동궁 전체가 김시혁과 그 일가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려 하는데, 의친왕의 며느리는 로하에게 외국어 교습을 받으며 친구처럼 지내고, 의친왕비 김씨는 한성 폭동 때 직접 전화를 걸어 김시혁의 집이 안전하도록 보살폈다. 나중엔 1차 대전 중에 태어난 김시혁 아들의 이름을 의친왕이 지어주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까지 하고 분위기에 휩쓸린 로하가 어어하다 승낙하면서 직접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부크강 집단의 공세가 격화되는 와중 노보플린스크로 향하는 노무단을 격려하기 위해 동행했다 제1 시베리아 군단의 허술한 지경선을 파고든 독일 기병대의 기습에 휘말린다. 도피하라는 권고를 뿌리 치고 치중대에 합류해 친왕 신분에 권총을 들고 교전에 참여하게 된다.
수와 화력에서 너무 불리했던 치중대는 거듭된 기병 돌격에 전멸해버렸고 그 결과 시종무관 이응준과 단 둘이서 쫓아오는 울란들을 맞상대하며 도주하길 반복하다 엄복동 일행과 조우, 노보폴린스크까지 호송해 줄 것을 부탁한다. 급조한 총창방진과 이응준과 의친왕 호위부대가 보유한 강습소총 화력으로써 처음 돌격한 용기병대는 막아냈으나, 충격력에서 비교도 안 되는 울란의 공격은 수적·화력적 열세 탓에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사격 솜씨는 무척 좋아서 권총만으로 독일의 정예 기병들을 능숙하게 제압했고, 러시아, 미국, 독일 등 서방 각국 총기를 다채롭게 다뤄봐서 한국군 장교들에겐 생소한 독일산 기병총도 능숙하게 다룬다. 도중에 이응준과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했으나 엄복동 일행과 한국군 수색대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에 성공해 노보폴린스크에 합류한다.
노보폴린스크에 도착한 뒤 일련의 독일군 부대가 한국군 보급창을 노리고 접근한다는 보고를 받자 타군보다 대량으로 배치된 기관총과 강습소총 화력을 총동원해 아군 규모를 속이는 기만책을 제시한다. 정작 숙련된 독일군은 화력에 비해 병력의 밀도가 낮고 포격 지원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바로 기만책임을 눈치채나, 한국군이 기만책을 쓰는 이유가 독일군을 끌어들여 정비를 마친 러시아군과 함께 쓸어버리려는 속셈이라 오해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노보폴린스크를 사수하는 데는 성공한다.
동부전선에서의 활약으로 대중의 인기가 뿌쩍 높아졌고 이를 경계한 고종에 의해 서부전선까지 보내진다. 서부전선에서는 자신의 신분을 내세운 외교 업무에 주력했다. 헤이그의 방해로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채 아미앵에서 독일의 100만 대군을 상대해야 할때 영프 정치인들 상대로 높여가며 싸워서 일부 병력을 지원군으로 돌리는 활약을 한다. 조금 지나서는 해군육전대와 함께 공병용 장비들과 자재를 긴빠이해서(...) 몸소 아미앵으로 가 김시혁을 도와주었다. 이때 대사가 완전히 해병문학이라서 밈이 되었다.
전쟁이 승전으로 끝난 뒤 김시혁, 민영환과 함께 베르사유 종전 회담에 참여한다.
회담이 끝나고 오랜 외유를 끝내고 싶어 제1근위기병사단과 동행해 김시혁보다 먼저 귀국한다. 사동궁에 칩거하는 대신 경운궁 앞 시위 행렬에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다가 헌병대의 유혈 진압으로 그 자신도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시위대에 합류. 순검과 시민군을 지휘해 경운궁의 헌병사령부를 함락 직전까지 몰아간다. 그러나 훈련도와 무장의 한계로 뒷심이 부족했고 위협을 느낀 헌병대가 장갑부대와 연대급 대병력을 투입하면서 상당한 피해를 본뒤 패주한다.
간신히 버티는 상황에서 의친왕 본인은 시위에 참여한 순검 총순이 외부의 지원을 요청하라며 빠져나갈 명분을 만들어줘 시종무관인 이응준을 대동해 김시혁의 자택으로 향한다. 김시혁에게 시위대를 이끌어달라고 설득하던 도중 김시혁의 가족을 살해하라는 임무를 받고 파견된 헌병 분견대에게 포위되어 위기를 맞는다.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그들을 물러가게 하려고 했지만 이미 시위에 참여했던 것을 들켰고 체포령이 내려진 탓에 실패한다. 안쪽으로 피해있으라는 김시혁의 권고를 무시하고 함께 헌병대와 맞써 싸우려던 도중 엄청난 규모의 시민군이 와 역으로 헌병들을 포위해 항복시키면서 위기를 넘긴다. 내전을 막기 위해 용산 원수부로 향하는 시혁과 갈라져 경희궁으로가 시민군을 이끌기로 한다. 전선에서 병사들과 나란히 서서 적과 치열하게 싸운 경험으로 아드레날린 금단 증상이 생겨 시민군 덕분에 위험한 상황에 벗어났을때 내심 아쉬워하는, 참전 용사들이 보이는 것과 동일한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시민군과 헌병대가 공방전을 벌일 때 잠시 정동에 대사관으로 가서 대사들에게 부상자을 치료하고 보호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며 상황을 설명했고 경비 병력과 물자를 나누어 주었다.[2] 김시혁이 호위대를 뚫고 광화문으로 치닫고, 강습보병여단이 중랑천의 헌병 2여단을 쓸어내 1기병사단과 접선하는 동안 순검대와 시민군을 인솔해 한성부 서부 방어선의 핵심축인 경운궁에 주둔한 헌병대 병력을 밀어낸다. 한성부의 헌병대 거점은 북한산성만 남게 된다. 병사들에게는 대전쟁 때부터 동고동락한 '전우', 시민들에겐 '인민의 친왕'이란 찬사를 받으며 백마를 타고 광화문에서 김시혁과 해후한다. 김시혁은 예우를 갖추며 광화문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딜 자격을 양보한다.
김시혁은 군정을 이끌자는 여운형, 윤치호 등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의친왕을 황제에 즉위시켜 입헌군주제로 체제를 전환할 것을 주장한다. 연금에서 풀려난 원로대신 김가진 역시 이승만 같은 대중주의 정치꾼들의 폐단을 제지하고 여전히 제정을 지지하는 삼남과 만주가 들고 일어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제정 유지에 힘을 실어준다. 최종적으로 김시혁이 자신의 원수봉을 의친왕에게 바침으로서 입헌군주제 국가로 다시 태어날 대한제국의 황제로 추대된다.
황금새장에 갇히고 싶지 않은 자유분방한 천성에, 오랫동안 외국을 떠돌아 혁명과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만큼 인민들이 스스로 주도한 혁명이 자신이 끼어들어 왕관 쓰는 건 옳지 않다 여겨 여러 번 거절했으나 분열된 나라를 하나로 묶기 위해선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김시혁의 간곡한 요청에 받아들인다. 제위를 수락하며 김시혁에게 자신이 승하하거나 멋진 신세계를 만들때까지 쭉 옆에서 보좌하라는 단서를 달았다.[3]
스스로 황태자에서 물러나기로 한 이척, 이강을 지지할 것을 선언한 영친왕 등 신병이 확보된 종친들과 함께 경복궁으로 압송되어 온 고종을 맞이했고 발악하는 고종이 도움을 요청하자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 결국 고종이 황태자 교체와 양위를 수락하는 조문에 수결하면서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며, 스스로 대한 인민의 대표자로 자리매김하고 1919년 추석 이전까지 3.1 혁명 정신을 담은 새 헌법을 제정하고 황제의 권력을 중추원과 내각에 이양하여 입헌군주제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할 것을 온 국민 앞에 약속하고, 박두영 등 학살 책임자 재판에 황제도 법 아래에 있다고 직접 증인으로 나오는 등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
재판이 끝나고선 혁명 정국에 대한 주변국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낸다. 자신이 먼저 나서 황족의 범위를 기존보다 줄이는 안을 관철시켜 황족 수를 이전의 절반으로 줄였고 내장원 혁파에 동의했으며[4] 전러시아 임시정부, 보다 정확히 말하면 호르바트 측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해 안심시키고 돌려보내고, 다이쇼 덴노가 제안한 한일국혼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
전우와 남접 잔당의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온 김시혁을 직접 역에 나가 맞이하며 소련과의 외교협상에 대해 일러주고 의견을 교환한다.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김시혁의 견해에 수긍하는 동시에 김시혁을 협상단에 포함시켜 북으로 파견한다. 김시혁에 향한 무한한 신뢰와 팬심과 별개로 착실하게 부려먹고 있다.
대한제국이 소련을 유일한 공식 정부로 인정하고 협정을 맺자 놀라서 한성까지 달려온 올가 여대공에게 로마노프를 이용할 생각만 가득할 뿐 충성하지 않는 백군의 참담한 현실을 지적한 뒤 로마노프 남매가 한성에 남기로 한다면 외국 군주로 대우받으며 일생을 평온하게 살도록 확실히 보장해 줄것이며 제3국으로 떠나겠다면 제한없이 보내주겠다고 장담한다. 진정성 있는 태도에 올가도 수긍하고 즉위식 참석할 것과 망명 의사를 밝히며 합이빈으로 돌아간다.
몇달이 지나 아미앵 독감도 엔데믹화되어 안정되고, 소련과의 수교가 이뤄지며 영토 획득 및 경제 회복으로 민심도 새 황제 덕분에 나라가 바로 섰다고 칭송을 받는다. 1919년 8월 첫째주 새 헌법 반포식, 정식 즉위식, 열병식을 열고 황제도 헌법 아래에 있음을 온 나라에 밝혀 이후 누구도 헌법을 뒤엎지 못하게 만든다. 자식, 손자들이 특권 의식에 물들어 강종의 잘못을 반복하는 일을 막고자 제위한 다음에도 황태자 내외는 사동궁에 그대로 지내도록 조처했다. 덕분에 황태자 내외와 이웃 주민들이 오다가다 인사도 나눌 정도로 친숙해졌다고.
부황이 사망하자 국왕 장례에 뒤따르는 모든 절차는 생략하되 마지막 자식된 도리로 시신을 한성으로 운구해 장례를 치뤄주려 했으나 평양과 의주 시민들이 운구 열차를 가로막고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철도가 막힐시 대신 동원할 수 있는 우정국과 농상공부 기선의 선원들까지 파업을 예고하자 포기하고 현지에 매장하고 조촐한 비석만 세우도록 한다.
3. 기타
을미사변을 기점으로 역사가 크게 변화한 영향인지 원래 역사와 후계구도가 달라졌다. 원 역사에선 정실부인 김덕수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었고, 첫 번째로 공인 받은[5] 자식이 1909년생 이건인데, 작중에선 1916년 시점에 임신한 의친왕의 며느리가 등장하며 그해 겨울에 손녀를 얻었다고 언급된다. 1916년 시점에 이미 혼인해 자식까지 볼 정도로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것.연재가 지속되면서 의친왕에 대한 호칭이 저하와 전하가 왔다갔다하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의친왕과 영친왕을 전하라고 칭했기에 전하라고 칭하는게 맞음에도 계속 혼용되는 중이다.
[1] 제1근위기병사단장 김석중, 수도보병사단장 박승환, 제9보병사단장 노백린, 제2강습보병여단장 홍범도, 독립 시베리아 여단장 김시진.[2] 이 덕분에 뼛속까지 공화주의자였던 프랑스 해병들이 저런 친왕 아래였으면 우리도 왕당파였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3] 원 역사 의친왕은 6.25 전쟁이 끝난 이후인 1955년에 사망한다. 그것도 625 이후에 고난 때문에 죽은걸 생각하면 쿠데타의 세계에서는 더 장수할 가능성이 높다.[4] 세계대전 참전 상여금과 혁명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금을 전부 지불하고도 돈이 한참 남아 돌아서 탁지부를 경악시켰다. 게다가 국고로 환수할 권한이 없는, 투자 배당금 수익도 연간 수십억 원이었다. 황실에 필요한 자금은 탁지부와 논의해서 함께 정하고 일정 이상의 잉여 자산 발생시 국가 예비 재정으로 돌릴 수 있도록 합의는 했지만 황족 수를 반토막냈기 때문에 황실 지갑이 마르는 일은 없었다.[5] 의친왕이 순종과 달리 남성으로서 능력에 아무 문제가 없었고 젊어서부터 여성 편력이 화려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건은 첫 자식이라기보단 처음으로 공인받은 자식일 가능성이 높다. 이건 역시 생모 수관당 정씨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고 의친왕의 이유 없는 냉대까지 더해 실은 일본인 소생이라는 소문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