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1-03 13:29:56

쿨라크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소련의 강제수용소에 대한 내용은 굴라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역사
2.1. 스탈린 집권 이전2.2. 스탈린 집권 시기

1. 개요

кула́к

러시아 제국 말기부터 소련 초기까지 상당한 토지와 가축을 소유한 농민, 즉 부농을 말한다. 공산주의집단농장 이론에 따라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에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처음에는 농번기에 빈농을 일용직 노동자로 고용해서 써야 할 만큼 넓은 농지를 가지고 남은 수확량을 팔아 소득을 올리는 부농을 뜻했으나, 나중에는 입에 풀칠도 겨우 하는 수준의 자영농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확장됬다.

2. 역사

2.1. 스탈린 집권 이전

러시아 제국 말기 1861년 농노해방 이후에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 넓은 토지를 보유하는데 성공한 사람들을 뜻한다. 농노 해방 직후에는 쿨라크의 수가 별로 없었지만, 1906년 스톨리핀의 개혁으로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일단 땅을 사게 하고 이후에 여러 해에 나누어 그 땅에서 나오는 수확으로 대출을 값게하는 정책이 실행되자 쿨라크의 수가 늘어났다. 이들은 러시아 제국 체제를 옹호하며 상업적 농업을 했다.

쿨라크는 본래는 '주먹'을 의미하는데, 잘사는 농민이 보릿고개 때에 빈농들에게 식량을 빌려주고 수확철이 돌아오면 무력을 써서라도 빚을 받아냈기에 붙은 말이다. 고리대금업을 할 정도의 부농은 많지 않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쿨라크라는 의미가 자기 가족만으로는 경작할 수 없을만큼 넓은 땅을 가지고 농번기에 빈농을 고용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정착됬다. 이런 쿨라크도 직접 힘든 노동을 하는 농민이기에 완전한 지주라기 보다는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가 반반씩 결합된 형태였다.

볼셰비키가 집권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쿨라크는 공산주의의 적으로 규정되어 탄압을 받았지만, 러시아 내전에 따른 혼란과 급격한 공산화 정책의 폐해로 인해 생산능력이 바닥을 찍자 1921년 블라디미르 레닌은 고집을 꺾고 신경제정책을 통해 쿨라크 탄압을 중단했다. 그래서 부분적 시장 자유화를 시행한 신경제정책 하에서 쿨라크의 수가 늘어났다. 다만 이 때의 통계는 부농 뿐만 아니라 간신히 자기 가족이 먹을 만큼의 식량만 겨우 생산하는 농부들까지 합친 수, 즉 빈농을 제외한 농부의 수이긴 하다.

신경제정책이 펼쳐진 기간 동안 쿨라크가 번성하는 것에 대해서 공산주의 이상에 사로잡혀 있던 공산당원들이 당연히 분노했던 반면에,[1] 처음에 농촌에서 농민들의 반응은 복합적이었다. 항상 더 많은 땅과 가축을 원하는 농민들이기에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쿨라크의 재산을 가져오고 싶었던 동시에, 만약 자신도 땅과 가축을 불려서 쿨라크가 되는 날이 오면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라 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업 분야가 느리게 회복되고 도시의 식량난이 계속되면서 도시에 나가 일하던 농촌 출신의 노동자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총경작지의 면적에 비해 농촌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났고, 결과적으로 숫적으로 증가한 빈농들이 쿨라크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소련의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대표작 《수용소 군도》에 <쿨라크>라는 말이 원래는 <스스로 일하지 않고 고리대금업이나 중개업으로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간사하고 인색한 거간꾼>을 뜻하다가, 1917년 이후 즉 이런 거간꾼들이 혁명으로 일소된 뒤로는 <자기 가족의 노동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경우 날품팔이 노동자를 이용하는 자>라는 뜻으로 변했고, 1930년경에 이르러서는 <강인한 농민>이라는 뜻으로까지 바뀌었다고 서술했다.[2]

2.2. 스탈린 집권 시기

쿨라크 탄압(라스쿨라치바니예)은 스탈린 시기에 다시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제 1차 5개년 계획에서는 쿨라크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 한쌍" 혹은 "5~6에이커"의 땅[3]을 가진 농민으로 규정되었다.

스탈린이 쿨라크를 적대시하며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에는 산업화를 위한 막대한 곡물(도시 노동자들을 먹이고, 외국에서 고급 기술과 설비를 수입하는 용도로 쓸)이 충분히 수급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러시아 내전은 러시아 전영토에서 장기간에 걸쳐서 펼쳐졌는데 처음에는 농민들이 붉은 군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농촌에서 형성된 지역 소비에트들은 볼셰비키의 도움없이 알아서 지주의 땅을 빼앗아 나누어 가졌고,[4] 완전히 도시 출신인 중앙 공산당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시골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전 기간에 붉은 군대는 후술한 것처럼 농촌의 잉여 농산물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국가 공인 도적단과 같았기에 농민들이 지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붉은 군대가 내전에서 진다면 지주가 돌아와서 땅을 도로 가져갈 것이라는 염려가 생기자 농민들은 땅을 지키기 위해 붉은 군대를 지지했다. 1920년대에는 신경제정책 하에서 쿨라크가 다시 성장하자 자기 땅이 거의 없어 품팔이로 연명하는 빈농들이 쿨라크의 땅과 가축을 빼앗아 가지기 위해서 공산당의 지지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지주가 사라지게 되자 도시로 공급되는 곡물의 양도 급감했는데 이는 부재지주가 농촌에서 식량을 착취 수준으로 수탈하여 도시에 판매함으로서 유지되는 식량공급 시스템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 정부는 상업적 농업과 곡물의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세금을 높이는 동시에 곡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것을 금지하고 돈으로 내도록 했다. 그래서 지주 뿐만 아니라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자영농들도 자신이 먹을 것을 줄여가면서까지 생산한 농산물을 팔아야 했고, 이렇게 시장에 넘겨진 곡물이 중심 도시로 집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로 지주의 땅을 나누어 가진 소규모 농민들은 남은 식량을 숨기고 그냥 자신이 배부르게 먹는 것을 택했다. 러시아 혁명 직후 몇년간은 볼셰비키 혁명 정부가 농산물 시장 자체를 없앤데다가, 공장의 공산화로 인해 공업 생산량이 급감했기에 곡물을 팔아서 구입해야할 공산품을 구할 수가 없어서 농민이 식량을 시장에 내놓을 이유가 없어졌던 것이다. 즉 역설적이게도 귀족이 행하는 착취의 부재가 모스크바를 비롯한 도시들에 대규모 식량난의 원인이 되었고 공산주의 지도부는 이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한편 스탈린 초기까지만 해도 공산당 중앙 정부는 드넓은 러시아 지방 영토를 장악할 인력이 없었다. 현지를 관리하던 짜르 정부와 귀족은 혁명으로 쓸려나갔는데, 현지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함량이 의심스러운 데다가 지나치게 지방에 밀착되어 있어 중앙당이 그들을 신뢰할 수 없었고, 중앙에서 임명한 노동자 출신 지도자들도 문맹을 겨우 면할 정도로 무능한 사람들이라 지방행정을 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난국은 훗날 대숙청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결국 징세제도 역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는데 혁명의 수도 모스크바의 주민들이 굶주리기 시작하자 정치적인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를 감지한 중앙당 지도부는 이를 반혁명적인 농촌의 반동분자의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으며 그 해결책으로 그 반동분자들에게 식량을 강탈할 식량징발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차르 정부 때보다 (공식적인) 수탈량을 올릴 수는 없었다. 해답은 대대적인 곡물징발대의 운용이었다. 도시 출신의 군인들을 곡물징발대로 편성해 농촌에 보냈다. 명목은 공산주의의 발전과 건설을 위한 "기부"였지만 총칼을 든 외부인이 종자와 겨우내 버틸 식량조차도 모두 빼앗아가는 행태 덕에 농민들은 극렬히 저항했고 이는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행정조치로 수확량을 조사한 후 수취한 게 아니라 애초에 숨겨놓은 물건이 많을 것이라고 간주하고 눈에 보이기만 하면 몰수하는 징발대를 운영했으니[5] 농민이 협조하면 아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수확물과 가축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반대의 입장에서 보면 징발대가 순순히 협조를 고하면 농민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협박과 고문을 통해 "취조"하면 성공적으로 수확물이 "발견"될 수 있었다. 번번히 나타나는 이런 상황은 중앙당에게 있어 농민의 반동성을 확인시켜주는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졌으며 점점 수탈은 거의 농촌에 대한 습격에 가까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은 자영농까지 부농, 즉 "쿨라크"로 칭하며 국가의 적으로 명문화하고 이들에 대한 약탈을 장려했다. 징발대는 사실상 국가공인 산적떼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스탈린은 자국 농민들에 대한 증오감을 감추지 않게 되었다. 이게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부농이라는 쿨라크가 180만이나 낙인찍힌 이유가 되었고 소비에트 정권은 이들을 신속하게 굶겨죽여서 식량위기를 해결했다. 다.

소련라스쿨라치바니예를 통해 궁극적으로 쿨라크의 땅과 재산을 몰수하고 수용소로 가두고 굶겨죽였다. 가령 카자흐스탄의 유목민들은 전부 쿨라크로 규정되었으며 모든 가축을 몰수당한 채로 목화농장과 옥수수농장으로 무리배치당했다. 이들 농장에 대한 식량공급은 부실하기 그지없고 수탈량은 가혹해서 결국 인구 절반이 총살당하거나 아사했으며 그 자리는 중앙에서 이주시킨 러시아인들로 채웠다. 러시아 농촌 어디에나 굶어죽은 사람들이 널려있었고 처음에는 기초대사량이 많음에도 식량공급 없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남자들이 쓰러졌다. 이후 식량공급을 못 받아 굶주렸던 아이들이 굶어죽었으며 최후에는 여자들이 남편과 아이들의 시체를 파먹다가 그마저도 떨어져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죽어나갔다.결국 소련의 대부분 지방에서 대기근이 발생해 홀로도모르의 500만 사망자를 포함해서 적어도 1,450만의 농민이 죽었다고 한다.

이런 지옥도를 연출한 중앙당은, 5년이라는 단기간에 사람들이 굶어죽은 만큼 수요가 없어지니 곡물수지가 점점 개선되는 걸 기뻐하며 스탈린의 노고를 칭송했다.

스탈린은 훗날 이들 농민과의 전쟁이 독일과의 전쟁보다 더 어려웠다고 회고했다는 야사가 있다.
[1] 하지만 니콜라이 부하린처럼 쿨라크를 양성하는 레닌의 농촌 정책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기에 반대하여 쿨라크를 말살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까지는 부하린의 맹우였던 스탈린이었다.[2] 《수용소 군도》 1권 p97-98, 열린책들, 김학수 옮김..[3] 참고로 쌀농사 문화권인 남한의 농지개혁법 당시 가구당 농지 소유 상한선이 3헥타르(약 7.4에이커)였다. 그러니까 대략 그 정도를 일개 농가에서 현실적으로 경작할 수 있는 최대 면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다만 밀농사의 특징상 쌀농사보다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떨어지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러시아는 삼포제 농업을 했기 때문에 휴경을 하지 않고 경작을 하는 농지는 전체 농지의 1/3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집약적 농업을 하는 한국의 3헥타르는 실질적으로 당시 러시아의 9헥타르와 같다고 봐야한다. 대다수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바는 만약 스탈린의 기준을 동시대 서유럽에 적용한다면 중간층 농민도 아니고 빈농에 가깝다는 사실이다.[4] 무기를 가지고 탈영한 구 러시아 제국의 병사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소비에트에 합류했기에, 각 지역 소비에트의 무력만으로 토지의 재분배를 해결할 수 있었다.[5] 징발을 수행하는 군인들 역시 도시 빈민들이었기 때문에 농민에 대한 증오에 가득차있었으며 굶주려 있었다. 당연히 현지에서 무자비하게 모든 식량을 징발했으며 그 중에서 일부를 횡령하고 상부로 올려보냈다. 저항하면 가차없이 죽였으며 저항하지 않아도 예쁜 처자가 있다고 하면 강간살해한 후 저항했다고 조작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