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타 텐요(太田天洋)가 일본 해군의 하청을 받고 그린 그림. 본래 일본 해군 부대 건물에 걸려있다가 현재는 일본 도쿄 긴자에 있는 아오키 화랑에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임란 당시나 직후에 일본측에서 그렸다는 주장이 퍼졌었는데, 사실은 20세기에 이르러 그린 그림이다.그림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조선군 전부가 두정갑을 입고 있는데, 결국 이 그림으로 인하여 〈불멸의 이순신〉의 고증이 대차게 까였다. 바로 이 그림에서는 조선군이 전부 두정갑을 입고 있는 것 때문이다.
영화 명량에서 주요 참고자료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2. 정말 그림처럼 입었나?
조선군이 상당히 잘 무장하고 꽤 멋있게 그려져서 이 그림을 맹신하는 경우가 있지만,[1] 그림의 제작시기가 이미 임란이 지난지 300여 년을 훌쩍 지나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그림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좁은 배 위에서 중갑을 입고 활동하기는 굉장히 불편하며, 물에 빠지면 바로 용궁으로 직행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바닷바람 맞는 환경에서 철제 갑옷을 하나하나 유지관리하는 것은 지극히 번거롭기 때문이다. 두정갑보다는 차라리 가죽찰갑이 더 현실성있다.[2] 이른바 칠천량 해전에서의 승리를 극대화하기 위한 표현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저렇게 짱짱 센 조선 수군을 개발랐다" 라는 자뻑이 들어가 있는 셈. 애초에 임란 당시에는 두정갑보다는 찰갑이나 쇄자갑, 경번갑 등이 주류 갑옷이었을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이 그림에 나오는 일본 전투함이 대포를 대들보에 밧줄로 매달고 쏘는 묘사 때문에 한동안 '일본 배는 구조강도가 약해서 포를 갑판에 설치할 수 없다!'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었는데, 최근 신재호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은 화가가 사료를 오독해서 잘못 그린 것이고, 판옥선에 비해 약하다는 평을 받기는 해도 일본 배의 구조강도가 대포 한두 문의 반동도 못 견딜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으며, 대포도 정상적으로 갑판에 거치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고증과 관련하여 까려면 끝도 없이 깔 수 있는 그림이다. 당시 조선군에는 거의 쓰이지 않은 무기(불랑기포, 수노기 등)이 대표 무기로 그려진 점, 조선군 배의 목재 연결방식이 일본식으로 그려진 점, 화살집이나 저고리가 18~19세기의 방식인 점, 조선군이 신기전을 활로 쏘는 점, 육군 병종인 팽배수가 수군에 있고 환도가 아닌 검을 들고 싸우는 점 등등.[3]
조선에서 군대의 장비 조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권자는 최종적으로 임금이고, 그 과정에서 영향을 주는 사람은 임금과 논의하는 대신들이다. 조선 정부는 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다양한 정부 기록을 남겼고, 이를 통해 임금과 대신이 논한 일들도 상세히 알 수 있다.
최종 결정권자인 임금과, 임금에 조언하는 대신들이 ‘조선수군에 대한 갑주 보급’에 대해 논한 내용을 살펴보자.
1) '인조 27년 1649년 03월 19일(음)' 당시의 비변사등록 기사(#)와
2) '효종 1년 1650년 04월 17일(음)' 당시의 비변사등록 기사(#)를 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인조 27년 1649년 03월 19일(음)’ 당시의 비변사등록 기사의 일부를 발췌하였다.
또 지난번 통제사의 장계에 따라 전선(戰船)의 군졸에게 모두 갑옷과 투구를 입히게 하였으며, 지금 또 거듭 밝혀 제조하도록 하였습니다. 배 1척에 90 사람이 승선하는 것이 예이니, 철갑(鐵甲) 90벌이 제조되어야 합니다. 비록 해마다 점진적으로 제조하더라도, 한 읍의 공역(工役)으로는 치러낼 방법이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다가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찌 나라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군과 육군은 모두 적을 막는 군병입니다. 전선에는 그래도 참나무으로 된 방패가 있어 한 배의 사람들을 보위하고 있으므로, 육군의 경우처럼 막아줄 수단 없이 직접 화살과 돌을 맞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수륙의 병사로 하여금 모두 견고한 갑옷과 투구를 입게 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국가의 물력이 부족하여 고르게 입히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군병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육군이 마땅히 먼저여야 하고 수군은 뒤에 해야 합니다. 모두들 이 일을 말할 때 마땅히 변통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단지 선상의 장령(將領)이라 칭호하는 자에게만 갑옷과 투구를 입히도록 하면, 마련하는 데에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고 거행하는 실효도 있을 것입니다.
해당 기사에서는 전선에는 방패가 있어 수군의 군졸에게 육군보다 갑주 보급을 우선할 필요가 없고, 장령(군관=장교)에게만 갑옷과 투구를 입히도록 하자고 한다. 즉 '지난번 통제사의 장계에 따라 수졸 모두에게 갑옷과 투구를 입히게 하였는데, 이에 따라 배 한 척마다 90벌의 철갑이 필요한데, 해마다 점진적으로 제조하더라도, 한 읍에서 조달할 수가 없다. 물론 육군과 수군의 병사 모두가 갑주를 갖추면 좋은 것은 알고 있으나, 나라의 물력이 부족하여 고르게 입히기 어렵다'고 하고 있다. '수군 병졸에게 갑옷을 입히는 것은 중요하거나 급하지 않은 일이고, 나라의 경제적 여건이 부족하여 수군은 우선 장교에게만 갑옷과 투구를 입히도록 하자'는 것이 요지.
또한 '지난번 통제사의 장계에 따라 입히게 하였다'는 문구를 통해, 이전에는 수졸에게 갑옷을 입히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입히도록 제도를 바꿨으며, 갑옷을 제조하도록 시켰으나 아직 수졸이 입을 갑옷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사가 쓰인 시기가 임진왜란이 끝난 지 5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도 유의해야 한다. 만약 임진왜란 중에 계속 갑옷을 제조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양대 왜란이 끝난 지 5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수군에게 입힐 갑옷은 부족하다는 것은, 갑자기 갑옷의 대량 손망실 또는 폐기가 이루어지지 않았고서야, 수졸 모두에게도 완전히 갖출 수 있던 갑옷이 갑자기 부족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전시에도 빠듯하게 입혔을 것이다.
다음은 효종 1년 1650년 04월 17일(음)의 기사이다.
아뢰기를 "각진 갑주의 경감에 관한 비변사의 초기에 대해 전교로 '경감한 이 숫자는 영원히 경감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1년에 제조할 수를 경감하는 것일지라도 결국에는 이를 기준수로 삼게 하려는 것인가'라고 하셨습니다. 갑주는 말 위에서 필요로 하는 것으로써, 배위에 방패를 벌려놓고 몸을 가린 병졸로 하여금 모두 갑주를 입게 하면, 실로 제승(制勝)을 위한 급무가 아니며 단지 수군에게 유지하기 어려운 폐단만을 줄 뿐입니다. 더구나 전선은 덩치가 크고 위에 누로(樓櫓)註 001 를 설치하므로 그 바탕이 무거워 움직이기 어려움이 걱정인데, 이에 또 갑주를 입힌 군졸을 태우면 곱이나 되는 무게를 더하는 것입니다. 해상에서 군졸을 연습시켜 본 자는 대부분 불편함을 말합니다. 옛날 수군을 용병하는 지혜와 기계 제조의 정밀함은 고 통제사 신 이순신 만한 사람이 없어 그 바다를 횡행한 공렬(功烈)은 지금까지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에도 갑주를 입고 배에 오른 제도가 없었으니, 어찌 그 지혜가 지금의 사람들에 미치지 못해서 그러했겠습니까? 갑주를 입도록 한 뒤부터 크고 부유한 주읍(州邑)에서도 관에서 자력으로 준비하지 못하고 민결에까지 침범하니 그 폐단이 적지 않으며 연해의 주현에서는 하나의 크나큰 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포의 경우에 있어서는 전선의 수졸(守卒)은 바람이 잔잔할 때는 1백명 혹은 80명이요, 바람이 거셀 때는 40명 혹은 30여 명으로서 모두 선제(船制)의 대소에 따라 가감합니다. 이 밖에 전곡(錢穀)과 인민이 없는 변장(邊將)이 먹는 것은 제방군(除防軍) 약간 명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무릇 책응(策應)이 있을 경우 모두 수군에게 책임을 지웁니다. 수영은 각포에 배정하고 각포에서는 수졸로부터 무명을 징수하니, 착취하는 상황은 차마 말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변장이 어찌 모두 탐학을 부리겠습니까마는 그 사정이 자연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변(三邊) 수군의 역은 다른 곳보다 10배나 더하여 군사가 연이어 흩어져 달아나고 피해가 인족(隣族)에까지 미침은 곧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만약 갑주에 대한 역을 간신히 유지하는 가난한 포에 해마다 요구하여 수에 따라 준비하여 바치게 한다면, 각포의 수졸은 견디어 갈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신 등이 본래 아뢰어 변통하려 하였는데, 지금 전남 우수사 윤창구(尹昌耉)의 장계로 인하여 그 폐단을 대략 진달하고 감히 참작하여 경감하시기를 앙청하는 바입니다. 갑주는 전선에서 절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요, 그 폐단은 이루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이 경감하는 수를 여러 해를 두고 계산하면 이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 신 등의 뜻은 이렇게 경감하는 수를 해마다 있는 것으로 하는 경우 과연 편의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하교를 받들고 아울러 그 이해관계를 진달하고 앞서의 계사를 도로 들이며 엎드려 성상의 결재를 기다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대체로 이 일은 어떤 사람의 건의로 설립한 것인가? 그 전말을 알지 못하니 본래의 문서를 찾아 들이라." 하였다.
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수졸에게는 판옥선에 세워둔 방패가 있으니 갑주를 입히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수졸에게 갑옷을 입혔더니 훈련 때마다 불편하다'는 현장 지휘관의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아예 "갑주를 입도록 한 뒤부터"라는 언급으로 제도를 이전과는 다르게 바꿨다는 것을 알리고 있으며, 바꿨더니 불편해 한다는 것에서 이전에는 불편하지 않았으므로 지금과는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제사 이순신 시절에도 수졸에게 갑주를 입히는 제도가 없었다'고 아예 언급하고 있다.
경제적인 사정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크고 부유한 주읍에서도 관이 자력으로 조달하지 못하여 민간에 크나큰 역이 더해지는 폐단이 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수군의 역은 다른 곳의 10배에 달하도록 고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으니 수졸 개인에게 스스로 입을 갑옷을 조달할 경제적 능력이 있을리도 만무하다. 이로 보아 경제적으로도 조선수군이 수졸에게까지 입힐 갑옷은 충분치 못했을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군대가 예산도 부족한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을 먼저 장만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