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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6:59:53

조성훈(1923)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조성훈
趙誠勳[1]勳으로 오기되어 있다.]
파일:조성훈(1923).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23년 음력 9월 2일[2]
경상북도 상주군 낙동면 상촌리 868번지
사망 2004년 11월 14일[3] (향년 81세)
본관 풍양 조씨[4]
학력 중앙중학교 (33회 / 졸업)
주오대학 (학사)
묘소 경기도 광주시 문형동 시안가족추모공원
상훈 2020년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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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생애

1923년 음력 9월 2일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 낙동면 상촌리 868번지에서 아버지 조익연(趙翼衍, 1899. ~ 1970.2.7.)[5]과 어머니 진주 강씨(1895. ~ 1980.12.15.)[6]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친조부 조남탁(趙南倬, 1864. ~ 1928.8.14.)[7][8]대한제국광릉 참봉, 내부 참서관(參書官) 등을 지냈다.

중앙중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39년, 평소 친했던 노국환·이기을·황종갑(黃鍾甲)·유영하(柳永夏) 등과 시험기간을 제외하고는 매주 한두 번 만나면서 자연과학한국사 관련 서적을 읽고 토론을 벌였다. 그 뒤 4학년 진급 후 1940년 10월 이들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북한산 자락의 우이동[9] 계곡으로 소풍을 갔다가 고담준론만 일삼을 게 아니라, 내일을 위해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이들은 5학년 진급 후 1941년 4월 역사와 정치, 민족의 진로, 민족정기 고취, 독립 쟁취를 위한 민중의 조직화, 일제의 정치 형세 등을 주제로 개인적으로 한 문제씩 연구해서 매주 일요일 모여 토론하는 '5인 독서회'를 조직하고 모임의 지도교사로 최복현(崔福鉉) 선생을 위촉했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 모여 각자 정한 주제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했으며, 종종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장 자크 루소의 『에밀』, 『사회계약론』 등 당시의 금서를 읽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1941년 7월 초, 5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만나 민족해방 등에 대해 토론하고, 다른 학교와 연락 문제 및 여름방학 계획 등에 대해 협의한 끝에, 활동의 범위를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고향이 함경남도 북청군인 이기을은 경기도 광주군 출신인 황종갑과 함께 각자 고향에서 항일 유격대와 연락하기로 하고, 조성훈은 유영하와 함께 일본 유학 중인 중앙고등보통학교 선배들과 연락하고, 노국환은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하던 맏형 노일환과 아버지 노병권을 통해 김성수·송진우·백관수·정인보 등 인맥을 동원해 국제 정세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식 등을 들어 오기로 했다. 그리고 방학 중에 각자 임무를 마치고 2학기 개학 3, 4일 전에 경기도 경성부에서 만나 그동안의 연락 상황을 설명하고 토의하자는 편지를 교환했는데, 얼마 후 황종갑이 방학 동안의 활동을 적어 노국환에게 발송한 연락 편지가 함흥경찰서 소속 일본 제국 경찰의 사전검열에 발각되고 말았다.#

그 뒤 8월 14일 이기을은 함경남도 함흥부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다가 일본 제국 경찰에 검거되어 황종갑과 함께 함흥경찰서에 연행되었다. 8월 17일에 조성훈은 경기도 경성부를 다녀왔으나, 8월 21일 가택수사를 당하고 『조선역사』·『조선야담전집』·『호암전집』·『기독교의 본질』 등 10여 종의 책과 강의록을 압수당한 뒤 체포되었다. 이튿날인 8월 22일에는 지도교사 최복현과 독서회 회원 노국환·유영하도 같이 검거되어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된 뒤 얼마 후 함흥경찰서에 송치되었다.

이때 최복현 선생은 '내 강의를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나는 어떠한 처형도 감수하겠으니 학생들만은 석방해 주기 바란다'고 요청했는데, 이 요청이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 받아들여져 조성훈은 이기을·황종갑·유영하·노국환 등 다른 4명의 학생과 함께 1941년 10월 15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불기소처분을 받아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10]

석방 이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현상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게 조성훈을 비롯한 독서회 관련 학생 5명을 퇴학시키라고 지시했지만, 현상윤 교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퇴학을 면했고 무사히 33회로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대학을 졸업하였고, 2004년 11월 14일 사망했다. 유해는 경기도 광주시 문형동 시안가족추모공원에 안장되었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
[1] 한민족독립운동사에는[2] 양력 10월 11일[3] 음력 10월 3일[4] 전직공계(殿直公系)-호군공파(護軍公派)-부사공파(府使公派) 28세 성(誠) 항렬.[5] 독립유공자 허용(許龍)이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었을 당시 5월 2일 신문 조서에 등장한다. 별 것은 아니고 고향 상주군에서 올라와 경기도 경성부 당주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당주동)에 숙박하던 중 허용에게 책을 얻어 달라는 부탁을 한 것으로 나온다. 그 뒤 1929년 주식회사 상주주조(尙州酒造) 감사,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주식회사 상주곡자(尙州麯子) 이사, 8.15 광복 후 1959년 상촌주조장(上村酒造場) 대표 겸 사장 등을 지냈다.[6] 강신규(姜信圭)의 딸이다.[7] 자는 극립(克立).[8] 아버지 조익연은 조남탁의 차남이나, 작은아버지 조남석(趙南鉐, 초명 조남직(趙南稷), 1879. ~ 1942.12.15.)의 양자로 입적하였다.[9]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10] 조성훈 독립유공자 공훈록. 다만 한민족독립운동사에는 검거된 지 100일 만인 1941년 11월 30일에 석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