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조조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본작의 메인 빌런이자 주인공의 적대자. 단 최종보스는 아닐 거라고 추측되는데 조조와 유비의 사망 시기가 본작에서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암시가 있고 주인공도 조조가 죽을 때까지 버티자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특징
진군과의 대화에서 밝혀지길 조조는 한나라 자체를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보고, 순진한 유비에 비해[1] 자신의 찬탈은 대의가 있는 혁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수의 세력을 흡수하기 위해 염행을 보낸 뒤 혼자 남은 자리에서 유비가 한나라의 상징이 되었으니 때를 봐서 그 한명만 죽이면 찬탈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다.식자층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풍기 문란을 조성하거나, 권력이 조금이라도 흔들릴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국가가 부강해질 기회[2]를 제발로 차버리거나, 외부의 큰 적은 방관하면서 내부에선 (저항이 아닌)작은 이견 제시조차 용납하지 않는 등 현대 독재자들 사이에서도 흔한 정권 보위 패턴을 보여주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선호가 빙의하며 제 발등을 찍는 빌미가 된다.
위왕 즉위식을 준비하면서 드러난 내적 심리에 따르면 의외로 헌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동탁 치하에서 즉위해 당장 내일도 장담할 수 없었던 처지의 어린 헌제를 보호하고, 선제들을 몰락시킨 외척과 환관을 쓸어낸 조조 자신 같은 충신은 세상에 없다고 자부한다. 자신은 헌제가 8살에 즉위할 때부터 헌제를 봐왔으며 자신이 헌제를 키우다시피 해서 헌제가 다른 황제와 달리 30대 중반인데도 몸 건강히 살아있다는 것에 부심을 보이는데 의외로 조조의 저 말은 사실이다.
후한 황제는 광무제부터 헌제까지 총 14명인데, 광무제(62세)-명제(42세)-장제(32세)-화제(27세)-상제(0세)-안제(31세)-전소제(불명, 200일 재위)-순제(29세)-충제(2세)-질제(8세)-환제(36세)-영제(33세)-후소제(14세)-헌제(8세 즉위)로 광무제의 즉위(25년)부터 헌제의 즉위(189년)까지 164년 동안 총 14명이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은 그렇다 쳐도 평균 수명도 매우 짧은 편이라서 50세 넘게 산 게 광무제뿐이고 40세 넘게 산 게 명제뿐이다. 전한 15명까지 포함해도 고제(52세 이상)-혜제(23세)-전소제(불명, 4년 재위)-후소제(불명, 4년 재위)-문제(46세)-경제(47세)-전한(69세)-소제(20세)-폐제(33세)-선제(43세)-원제(42세)-성제(44세)-애제(26세)-평제(15세)-정안공(20세)과 비교하면 더 두드러지는데, 전한 황제들은 그래도 과반 이상이 40대 정도 살았다. 외척과 환관으로 대표되는 후한 정계의 정치적 난맥상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3]
조조와 조비 부자는 후한 왕조의 요절 징크스 주 원인이던 외척과 환관을 모두 죽이거나 제어하고 10대 초중반의 어린 나이에 동탁, 이각, 곽사 등으로 인해 8세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면서 전대 후한 황제들처럼 언제 요절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유협의 목숨도 보전해 주어 54세까지 살 수 있게 했다. 제위는 가져갔을지언정 황폐해진 장안에서 핍박받던 유협을 구해 부족함 없이 살게 해줬고 사마씨처럼 목숨을 빼앗지도 않아 명제 이후 200년 만에 천수를 누린 황제로 만들어줬으니 (황후, 귀비, 자식을 잃고 제위도 가져다 바친 헌제의 의사는 어쨌든 간에) 조조 부자 입장에선 헌제를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준 것만으로도 잘 챙겨줬다 생각할 수도 있다.
전처를 죽이고 강제로 시킨 결혼임에도 사위이기 때문에 장인으로서 헌제 생전에는 황제 자리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는 반면, 그런 자신을 비난하는 손권과 유비에 대한 분노는 매우 극심하며 가능한 한 자신이 전부 끝장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막말로 자기들도 헌제가 말릉이나 성도에 가서 군사와 벼슬을 포기하라고 하면 극렬히 거부할 거면서 자신한테는 그렇게 안 한다고 역적이라고 모욕한다는 것.
사실 본작의 유비가 조조를 상대로 맞설 것을 결심한 이유는 조조가 역적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승자로 남을 경우 조조의 악행이 하나의 승리 공식으로 남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며,[4] 동오 역시 역적 소리는 명분일 뿐 최소한 그 산하의 호족인 고옹, 육손 등은 중앙 조정에서 강동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손권을 모시고 있다.
3. 능력
유비(곽선호)의 평가로는 능력은 삼국 군주 중 제일이나, 현재 통일보다 찬탈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서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한다. 망탁조의 중에서 가장 그 찬탈 수법이 창의적이고 뛰어났다고.[5]210년대 들어서는 노골적으로 그 행보가 드러나는데, 낙양과 업에서 찬탈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면서 본인이 대군을 가지고 있을 정당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계속해서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키지만 조조 본인은 장강을 두고 손권과 대치 이상은 하기 힘든 동오 공격만 나선다. 만일 유비의 입촉 시기에 한중의 장로를 무너뜨린 조조가 그대로 익주까지 왔다면 유비의 입촉은 실패했을 테지만, 그러면 조조도 죽을 때까지 전쟁을 이어가야 했기에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후의 판단 역시 유비와 비슷한데, 유비는 분명 미래에 조위를 위협할 인물이지만 역으로 그가 버티고 있기에 조위는 내부의 잠재적 반역분자들을 색출할 수 있다고 한다. 유비가 빠르게 강해지는 걸 알지만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남중국의 역량으론 최대한 뽑아내도 북중국을 차지한 자신을 넘을 수는 없음을 알기에 방치하며 정치와 명분작에 몰두하는 것. 호족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익주의 비단을 구매해 사치 풍조를 조장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본인이 조조와 정면대결해서 이기긴 힘듦을 잘 알고 있는 유비(곽선호)는 미래인이기에 알고 있는 조조의 사망 시기에 찔러 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4. 작중 행적
현 북중국을 통일한 중원 최대의 세력가. 유비와는 긴 인연으로 유비와 몇 번이나 싸우면서도 좌장군으로 제수해 유비가 기반을 닦을 계기를 세워준 것도 조조다.유비가 유장을 배신할 것이라 생각해 신경 쓰지 않고 손권을 제압하려 유수구 전투를 벌였으나, 도중에 유비가 뜬금없이 한중을 제압하고 서량과 연결되자 그 돗자리 장수가 서주에서 자신에게 배신했듯이 유장을 배신할 줄 알았는데 정말 유비 본인이 맞냐고 광분하다가 결국 철수한다.
이후 원 역사대로 유수구 전투에서 손권 상대로 별 다른 실익은 못 거둔 채 213년 기주 인근의 10여개 군을 하사받고 위공국을 세워 위공이 된다. 말이 공작이지 기주 10개 군은 군사경제적으로 핵심지역이기도 하고 일반적인 왕공작의 봉작 영역을 한참 넘어서서 사실상 한실을 찬탈하겠다는 예고나 다름 없었다. 비유를 하자면 큰 공을 세운 장군이 수원, 화성, 성남, 군포, 안양, 오산, 용인, 평택, 여주, 안성이라는 경기도 대부분을 자기의 땅으로 만든 꼴이라고. 실제로 이후 선양으로 가는 길을 여는 찬탈자들이 이런식으로 왕공작을 받아 선양을 받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기도 했다.
유비의 죽서기년 발굴로 공들이던 여론조작이 방해받게 되자 이를 간다.
손권과 유비의 동맹에 균열을 내기 위해 일부러 유비는 내버려두고 부족한 병력으로 대치중인 하후연을 반쯤 내버리다시피 하는 반면 손권쪽으로는 격년제로 대군을 끌고 가 대치하는 식으로 부담을 준다.
한편 내부에서는 편집증 증상을 강하게 드러내며 충실히 봉직하는 최염과 모개를 차례로 숙청하고 교사직을 지난날 서원팔교위보다 더 폭넓게 운용해 중신을 밀착 감시한다. 그나마 감시라도 해주며 살려두는 업성의 신하들은 양호한 축이고 한실에 가까운 허도의 중신들은 죄다 죽여버릴 생각이라 처음부터 감시조차 하지 않았다.[6] 또한 전한 시기에 너무 잔인하다고 폐지된 육형(코,귀,생식기를 자르거나 낙인을 새기는 형)을 부활시켜서 공포 분위기는 조성하면서 노동력을 보존하는 악독한 방식을 생각해낸다.
가볍게 대치 상태만 유지하다 여차하면 신속히 후퇴하려 했던 유수구 전선에서 역병이 돌아 이전, 사마랑, 진림, 왕찬 등이 연달아 급사하고 본대 병력이 통째로 발이 묶이자 당황하면서 자신이 유비를 괜히 키운 것이 아닌가, 화타를 괜히 죽였다며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결국 서량을 지킬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장수들에게 밀서를 보내 해결책을 알려주는데 그 방법이란 접촉 가능한 친조조파 호족들을 전부 다 죽여버리는 것. 말이 좋아 친조조파지 박쥐처럼 왔다갔다할 뿐으로 지금 당장 조조군을 따르지만 곧 배신할 이들을 선수쳐서 제거해 유비에게 협력할 현지 세력을 일소, 유비가 서량의 호구와 민생을 빠르게 장악하는 걸 막아버린 것이다.[7][8] 그 후 서량의 호구를 병부로 옮기는 한편 본인은 역병을 피한 군사를 모은 대군과 함께 동관을 향해 진군한다.
5. 기타
원 역사에서 헌제에 대한 핍박과 찬탈 행각 때문에 헌제를 박대했다고만 알려졌지만 의외로 헌제가 조조 덕분에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생물학적으로는 정말로 잘 보호해줬다'는 재평가를 받았다.(...)흔히 조조란 인물을 해석할 때 젊었을 때는 통이 컸다가 나이 들어 몸이 쇠하고 여유가 없어지니 의심이 심해져 허도 OX 퀴즈 같은 잔혹한 짓을 연달아 벌였다고 풀어내는 경우가 많은데 본작의 조조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고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 따윈 해본 적도 없으며 당장 적절한 시기가 아니어서 참았을 뿐인, 무시무시한 간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소는 살인마이며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헌제가 제명에 못 죽었을 거라며 진심으로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9]
정사에 나오는 특유의 다혈질적인 성격이 잘 고증된 편이다.
젊은 시절부터 유비와 함께한 적이 많은 데다 유비에게 통수당한 것도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유비의 성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던 인물 중 하나이다. 유비가 유장을 공격하지 않고 대뜸 장로를 공격해서 한중을 장악했다는 말을 듣자 이자가 정말 내가 아는 유비가 맞냐고 의문을 느끼기도 했는데 관우와 장비조차 유비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부분.
[1] 진군과의 대화로 유비는 그저 십상시 때문에 한실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나 조조는 당시 황제인 영제가 어떤 패악질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봤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조 시점의 판단일 뿐 유비도 영제-헌제 시기에 한실이 패악질을 저지른 죄업이 있다는 건 인식하고 있었다.[2] 유엽이 제안한 서량-형남 정벌. 서량은 현지 호족들이 여전히 눈치 게임하는 가운데 마초는 간신히 기성과 상규성만 확보한 상태라 조조의 대군이 도착하면 단숨에 저울이 기우는 형국이었으며, 형주는 남쪽만 유비 소유인 상태에서 2번에 걸쳐 군사를 차출해 익주로 보낸지라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쳐내려 가면 어느 정도 버티더라도 결국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3] 당시 빈번했던 수은 사용을 원인으로 들기도 하나 진시황 시절에도 빈번히 쓰는 게 수은이고 하안의 오석산 일화에서 알 수 있듯 헌제 시절이라고 수은을 적게 쓴 것도 아닌데 유독 후한 황제들의 요절이 심하고, 조조가 끼고 있던 헌제만 54세까지 산 건 요절의 결정적인 요인은 따로 있었다는 뜻이다.[4] 실제로 원 역사의 조조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조조의 수법이 후대에 나쁜 방향으로 선례가 되어 589년까지 이어지는 위진남북조시대 잔혹사의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5] 사마의는 조조를 그대로 따라하기만 해서 창의성이 없었다고 평했다.[6] 원소를 꺾은 후 원소와 내통한 이들의 편지를 보지 않고 태워버린 건 관대함의 소산이 아니라 어차피 나중에 죽여버릴 생각이었기에 당장 참았을 뿐이었다.[7] 연회에 참석했다 제거되는 국연 등은 원역에서도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되는 인물들이다. 유서 깊은 서량의 자립성은 몇 번 잘 해준다고 꺾어질 게 아니고, (유비가 명분으로 쓸수야 있겠지만)몇 번 가혹하게 대했다고 더해질 것도 아니다보니 포기하고 나오기로 한 마당에 유비 편한 일 시켜줄 이유가 없다고 본 것.[8] 유비군의 대전략 융중대는 빙의한 주인공 유비의 활약으로 훨씬 더 강력하고 대대적인 공세가 가능해야 하는데 결국 일익을 맡아줘야 할 량주 방면의 호구가 부족하면 조조군의 대응이 원 역사처럼 형주 방면으로 쏠리게 된다. 조조가 융중대를 구체적으로 알진 못해도 유비의 행보를 보면 향후 어디로 공세를 취할지 모를리는 없으니 예상밖의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한방 제대로 먹인 것.[9] 물론 원소의 맹진학살보다 더 거대한 스케일로 벌어진 서주대학살에 대해선 조금도 죄책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