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000000>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카를 대공비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 Prinzessin Sophie von Bayern | |
이름 | 조피 프리데리케 도로테아 빌헬미네 (Sophie Friederike Dorothea Wilhelmine) |
출생 | 1805년 1월 27일 |
바이에른 선제후국 뮌헨 님펜부르크 궁전 | |
사망 | 1872년 5월 28일 (향년 67세) |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빈 | |
배우자 |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 (1824년 결혼) |
자녀 | 프란츠 요제프 1세, 막시밀리아노 1세, 카를 루트비히, 마리아 아나, 루트비히 빅토어 |
아버지 |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
어머니 |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
형제 |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아멜리, 마리아 안나, 루도비카, 막시밀리아나 |
종교 | 가톨릭 |
[clearfix]
1. 개요
바이에른 왕국의 공주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공비(왕자비)이다. 바이에른 왕국의 초대 국왕인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와 그의 두번째 아내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사이에서 6녀 중 3녀로 일란성 쌍둥이 여동생인 마리아 안나[1]와 함께 태어났다.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이며 차남 막시밀리아노 1세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였다.2. 생애
2.1. 어린 시절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와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의 3녀로 태어났다. 조피는 막시밀리안 1세가 좋아하는 딸이었으며 쌍둥이 여동생 마리아 안나 및 다른 자매들과 매우 친했다.조피와 쌍둥이 여동생 마리아 안나 공주, 그리고 여동생 루도비카 공주[2]
2.2. 결혼
1824년 11월 4일, 조피는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3남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카를 대공과 결혼했다. 프란츠 카를의 새어머니이자 프란츠 2세의 네 번째 아내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황후는 조피의 이복언니이기도 했다. 프란츠와 조피 사이에서는 다섯 자녀가 태어났다. 억지로 결혼한 조피는 남편과 공통점이 거의 없었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에게 배려하고 헌신적인 아내였다고 한다.정신박약아에 뭐든지 무감각한 남편과는 다르게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매우 사랑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장남 프란츠와 차남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을 좋아했다. 장남은 후계자라서, 차남은 그냥 아들로 편애한 조피는 자신의 아들이 오스트리아 황위를 잇길 바랐다.
2.3. 황제들의 어머니
부부관계는 괜찮았지만 총명하고 당찬 조피에게 정신박약아였던 남편 프란츠 카를 대공은 당연히 손쉬운 먹잇감이어서 카를을 꽉 잡고 살았다. 아들도 많이 낳아줬으니 뭐 깔거리도 없고.이렇듯 야망있고 권위적이었던 조피는 당시 "궁정의 유일한 남자"라고 불릴 정도였으며[3], 결국 마음 약한 남편을 설득하여 황위 계승을 포기하게 만들고 장남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제위에 오르게 했다. 프란츠 요제프가 18세의 나이로 황제가 된 후 조피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마마보이마냥 어머니한테 찍소리도 못했다.
1867년 멕시코에서 혁명이 일어나 차남 막시밀리아노 1세가 총살당하자 충격을 받아 정치에서 물러난 후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1872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3. 악독한 시어머니
조피는 맏며느리이자 조카[4]이기도 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피는 엘리자베트의 첫 아이인 공주의 이름을 상의도 없이 자신의 이름을 딴 조피 프리데리케라고 짓고 자기 거처에 데려가 기르면서 엘리자베트와의 고부갈등은 극에 달했다.[5] 그리고 엘리자베트가 둘째딸 기젤라를 출산하자마자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이름을 짓고 자신이 데려가 길렀다.너무 어린 며느리가 의심스러웠는지 조피 대공비는 엘리자베트가 딸들을 보는 것 외에는 어떤 조치도 하지 못하게 간섭했다. 결국 엘리자베트는 공개적으로 아이들의 양육을 놓고 시어머니와 싸우기 시작했고 시어머니의 반대에도 딸 조피와 기젤라를 헝가리 왕국으로 데려갔다. 여기서 딸 조피가 죽는 바람에 실의에 빠진 그녀는 아이들 양육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 황태자 루돌프를 출산한 후 기젤라와 루돌프 둘 다 조피 대공비가 데려가게 내버려뒀다. 우울증에 빠진 엘리자베트는 꼴보기 싫은 시어머니 곁에 있는 아이들에게마저 일생 관심을 끊어버렸고, 이는 루돌프와 기젤라에 대한 무관심과 막내딸 마리 발레리에 대한 편애로 이어진다.
실질적으로 손주들의 양육을 담당한 조피 대공비는 장차 황제가 될 루돌프가 7살 때부터 군대식 보육교사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어린 루돌프는 총소리에 놀라 기상, 차가운 눈발 걸어가기, 찬물 끼얹기, 혼자 내버려두고 알아서 집까지 돌아오게 하기 등, 7살 아이가 소화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교육 속에서 자라면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루돌프의 우울증에는 이런 가혹한 환경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외가 비텔스바흐 가문 사람들에게는 우울증, 광증 등의 유전적 정신병력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루돌프가 받은 저 가혹하기 그지없는 교육은 정신병력 없는 집안의 애들도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의 환경이었던지라 결국 루돌프에겐 온갖 스트레스성 정신 증상이 나타났다.
부모인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격무에 시달린 데다가 엘리자베트는 자신의 정신병 때문에 여행을 빌미로 밖으로만 나돌았기에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어린 손자를 친할머니가 후계자 교육이랍시고 학대한 셈이다. 그래도 어머니 엘리자베트가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이에 대해 프란츠 요제프에게 강력히 항의했고, 그런 아내에게 탈탈 털린 프란츠 요제프 1세도 이를 수락하여 조피 대공비를 설득시킨 끝에 교관을 관대한 사람으로 바꿨다고 한다.
하지만 루돌프 황태자는 계속되는 아버지와의 불화와 어머니의 무관심에 지쳐 결국 애인인 마리 폰 베체라와 함께 사냥용 별장 마이어링으로 밀월여행을 가서 동반자살했다. 이 동반자살 사건은 이후 '마이어링 사건'으로 언급된다.
이런 가정사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는데, 이름뿐인 멕시코 황제 자리에 올랐던 차남 막시밀리아노 1세가 총살당했다는 소식까지 들어야만 했다. 제일 사랑하는 아들 막시밀리안의 부고를 들은 조피는 충격을 받고 칩거하다 죽었다.
비록 그녀보다 나중이지만 다른 아들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 역시 위장병으로 일찍 사망했으며 루돌프 사후 후계자가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카를 루트비히의 아들) 역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서거하기 2년 전 사라예보에서 부인과 함께 암살당하는 바람에 프란츠 요제프는 또 다른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황실의 불행한 가족사도 그렇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을 앞두고 공적으로도 국제사회에서 이미 궁지에 몰릴대로 몰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마이어링 사건과 사라예보 사건으로 연이어 후계자들을 잃으면서 내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 되어 멸망했다.
어떻게 보면 조피 대공비는 자신의 행동으로 가족들을 비극으로 내몰았고[6] 제국을 간접적으로 멸망에 몰아넣은 인물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도 서양에서는 고부갈등하면 떠오르는 악독한 시어머니의 대명사 같은 인물로 유명하다.
3.1. 반론
사실 조피와 엘리자베트 황후(시씨)의 고부갈등은 좀 사연이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시씨는 조피의 조카로 피가 이어진 가까운 친척이었으며 거기다 조피는 자신의 아들에게 열렬한 사랑의 기쁨을 느끼도록 해준 이 어린 조카에 대해 처음에는 그래도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당장 자신이 정략결혼으로 마음고생을 했기에 아들의 감정에 의외로 많은 가치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결혼 준비 과정에서도 콧대 높은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시씨를 얕잡아 보지 않도록 혼수도 보충해주고 이런저런 필요사항들을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물론 시씨가 조피를 매우 부담스러워하고 꺼렸던 것은 확실하지만 최근에는 일기나 편지 등, 당시 기록들을 살펴볼 때 정작 조피는 시씨에 대해 그렇게까지 안 좋게 보지는 않았다는 분석들 또한 대두되는 분위기다.[7]또 시씨가 본격적으로 자녀들의 양육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 계기는 장녀 조피의 요절이었는데, 이건 당장 조피 대공비가 말렸는데도 본인이 외국까지 어린 아이를 데려갔다가 사달이 난 것이다. 루돌프가 받은 혹독한 군대식 교육은 문제가 많았지만 이건 조피 이전에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지시에 따라 실시된 교육이었다. 루돌프의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을 제일 우려했던 건 다름 아닌 부친인 프란츠 요제프였고 조피 대공비는 고생하는 어린 손자를 걱정스러워하면서도, 전통적인 보수적 관점에서 황족 남성은 강건한 군인형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는 아들의 생각을 지지했던 것 정도에 가깝다. 즉, 주범은 황제고 조피는 종범 정도.
어쨌든 조피 대공비는 그나마 이 특수하고 탈 많은 대가족에서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보이고 생활을 챙기며 가족들 중 어른의 역할을 수행했던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래서 시씨를 제외한 다른 자녀들과 며느리, 손주들도 이러한 조피를 대개 잘 따랐다. 특히 시씨의 차녀 기젤라는 손녀를 세심히 관찰한 조피가 그녀의 성향과 잘 맞는 교육방식을 적용해 안정적으로 잘 자랐던 케이스.
나중에 시집 온 셋째 며느리 마리 테레제 대공비[8]가 이런 종류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했지만 그녀는 감히 프란츠 요제프와 시씨의 자녀들을 챙길 만한 연령과 서열은 아니었다. 결국 자녀의 상태에 진지한 관심을 갖는 어른이 가족 내에 부재한 상황에서 마이어링의 비극이 터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피 사후 그녀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꽤 안타까운 점.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바이에른의 조피 (Sophie of Bavaria) | <colbgcolor=#fff3e4,#331c00>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 <colbgcolor=#ffffe4,#323300> 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프리드리히 미하엘 (Frederick Michael, Count Palatine of Zweibrücken) | |
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크리스티안 3세 (Christian III, Count Palatine of Zweibrücken) | |||
나사우자르브뤼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Countess Caroline of Nassau-Saarbrücken) | |||
팔츠-줄츠바흐의 마리아 프란치스카 여백작 (Countess Palatine Maria Franziska of Sulzbach) | |||
줄츠바흐의 공세자 요제프 카를 (Joseph Charles, Hereditary Prince of Sulzbach) | |||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조피 여백작 (Countess Palatine Elisabeth Auguste Sofie of Neuburg) | |||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aden) | |||
바덴의 대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Charles Louis, Hereditary Prince of Baden) | |||
바덴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Charles Frederick, Grand Duke of Baden) | |||
헤센다름슈타트의 카롤리네 루이제 (Princess Caroline Louise of Hesse-Darmstadt) | |||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에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 |||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9세 (Louis IX, Landgrave of Hesse-Darmstadt) | |||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Countess Palatine Caroline of Zweibrücken)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프란츠 요제프 1세 (Franz Joseph I) | 1830년 8월 18일 | 1916년 11월 21일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슬하 1남 3녀[9] |
2남 | 막시밀리아노 1세 (Maximiliano I) | 1832년 7월 6일 | 1867년 6월 19일 | 벨기에의 샤를로트 공주 |
3남 | 카를 루트비히 대공 (Archduke Karl Ludwig) | 1833년 7월 30일 | 1896년 5월 19일 | 작센의 마르가레타 공주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눈치아타 공주 슬하 3남 1녀[10] | ||||
포르투갈의 마리아 테레자 공주 슬하 2녀 | ||||
1녀 | 마리아 아나 여대공 (Archduchess Maria Anna) | 1835년 10월 27일 | 1840년 2월 5일 | |
4남 | 루트비히 빅토어 대공 (Archduke Ludwig Viktor) | 1842년 5월 15일 | 1919년 1월 18일 |
5. 여담
조피는 라이히슈타트 공작으로서 오스트리아 궁정에 머물렀던 나폴레옹 2세와도 친밀한 관계였는데[11], 두 사람이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나폴레옹 2세가 사망하기 2주 전에 태어난 막시밀리안이 사실은 나폴레옹 2세의 친아들이라는 것.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두 사람이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은 확실하며, 나폴레옹 2세가 사망한 후 조피의 성격은 더 딱딱하고 야심찬 여성으로 변했다. 사실 조피는 나폴레옹 2세의 아버지인 나폴레옹 1세와도 연관이 있었다. 조피의 이복언니인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공주는 외젠 드 보아르네와 결혼했는데, 이 외젠 드 보아르네가 바로 나폴레옹 1세의 의붓아들이다.[12][1] 홋날 작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된다.[2]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어머니이다.[3]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공주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부르봉에 사내라고는 저 여자뿐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당시 유럽 궁정에서 남자들을 찜쪄먹을 만한 여걸들에게 흔히 붙는 수식어인 듯하다.[4] 여동생 루도비카 공주의 딸이다.[5] 다만 다른 며느리들인 벨기에의 샤를로트나 마리아 안눈치아타와는 사이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6] 특히 조피 대공비 때문에 조카이자 큰며느리인 엘리자베트 황후는 본인도 며느리인 벨기에의 스테파니를 냉대하고 황후로서의 의무도 내팽개치며 막내딸 마리 발레리를 제외한 남편과 자녀들에게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않는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고, 손자 루돌프 황태자 역시 아무리 가족들에게 학대받고 사랑없는 결혼이었다지만 아내 스테파니와 어린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냅두고 여러 애인을 만들며 방황하다가 결국 그중 하나인 마리 폰 베체라와 동반자살해서 가정을 파탄내버린 가해자가 된 피해자로 전락했다.[7] 소르본 대학교 교수인 장 폴 블레드의 견해도 이쪽에 가깝다.[8] 삼남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세번째 아내.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비롯한 나이차이도 얼마 안나는 의붓자녀들을 친자식처럼 아껴준 것으로 유명하다. 합스부르크 황실의 일원치곤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이기도 해서 프란트 페르디난트가 백작 영애인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와 귀천상혼을 할 때도 황실에서 유일하게 그 혼인을 지지해 주었고, 프란츠와 조피 부부가 사망한 뒤에 합스부르크 황실측이 두 사람의 세 자녀들에게 연금 지급조차 거부하자 앞장서서 의붓손자들을 보호해 주었다.[9] 바이에른의 레오폴트 왕자비 기젤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 오스트리아-토스카나 대공비 마리 발레리 등[10] 프란츠 페르디난트 등[11] 남편 프란츠의 첫번째 누나 마리 루이즈의 아들이다.[12] 나폴레옹 1세의 전처 조제핀 드 보아르네가 전 남편에게서 낳은 친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