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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8:57:51

종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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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진도
鍾鎮濤 | KENNY BEE
파일:2024종진도.jpg
이름 鍾鎮濤 (간체자표기 钟镇涛)
표준어 Zhōng Zhèntāo
광동어 Zung1 Zan3tou4
영문명 Kenny Bee
별명 아B(阿B), B꺼거(B哥哥, B형)
출생 1953년 2월 23일 ([age(1953-02-23)]세)
영국령 홍콩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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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 광동성 강문시 신회구 (廣東省江門市新會區)
신체 183cm, 73kg
배우자 장소혜 章小蕙 (1963~) [1](1988~1999)
범강소정 范姜素貞 (1973~) (2014~)
자녀 장남 종가준 鍾嘉浚 (1990~)
장녀 종가청 鍾嘉晴 (1995~)
차녀 종의 鍾懿 (2004~)
삼녀 종괵 鍾帼 (2010~)
종교 불교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시나 웨이보 아이콘.svg

1. 데뷔전2. 음악활동
2.1. 위너스(The Wynners) 활동2.2. 1970년대 후반, 80년대2.3. 1990년대2.4. 2000년대2.5. 2010년대2.6. 2020년대
3. 배우활동
3.1. 1970대 후반, 80년대
3.1.1. 70년대 홍콩에서의 영화활동3.1.2. 대만에서의 영화활동
3.1.2.1. 대만영화계의 대부 이행(李行)감독과의 작업3.1.2.2. 세계적인 거장 허우샤오셴(侯孝賢)감독의 초기작 3편
3.1.3. 80년대 홍콩에서의 영화활동
3.2. 1990년대3.3. 2000년대3.4. 2010년대3.5. 2020년대
4. 출연작
4.1. 영화
5. 수상 내역
5.1. 음악5.2. 영화
6. 사생활
6.1. 연애와 결혼
6.1.1. 첫사랑 진추하6.1.2. 좋은 친구이자 연인 등려군6.1.3. 은인 낙이령(樂易玲,로이링)6.1.4. 첫번째 부인, 장소혜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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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g2.baidu.jpeg.jpg
홍콩의 가수. 배우. 작곡가. 영화감독.
데뷔 초부터 주로 사용했던 '아비(阿B)'라는 예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현재도 자주 '아비'로 불리고 있으며 본명 '종진도'와 병기하는 경우도 많다.

1973년 스무살의 나이에 가수로 데뷔한 후 곧바로 최정상의 스타대열에 합류하여 특히 7,80년대까지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현재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지난 50여년간 연예계에 종사하며 가수와 배우로서 재능을 펼치며 꾸준히 업적과 공로를 쌓아온 원로 연예인이다.

1970년대 '위너스(the Wynners, 溫拿)' 로 밴드 활동을 했으며 메인보컬을 담당했다. 그룹 활동 중단 후 1979년 첫 솔로음반을 발표한 이래 가수로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988년 위너스로서 역대 최연소의 나이(35세)[2]로 업계 최고의 영예인 십대중문금곡 <금침장>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십대경가금곡 <영예대장>을 수상했다. 2002년 25회 십대중문금곡 시상식에서도 위너스로서 <은희영예대상>을 수상하였으며, 2015년 62세의 나이에 개인으로서 <금침장>을 다시 한번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또한 2016년 홍콩작곡가작사가협회에서 수여하는 <CASH음악성취대장>을 수상했다.

100여곡을 작곡한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다. 대중의 사랑을 받은 대표곡 중 자작곡의 비중이 높다.

80여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으며 특히 80년대에는 여러 로맨스영화와 로맨틱코미디영화에서 남자주인공으로 활약하였기에 당시 소녀였던 세대들에게는 아직까지 이상의 연인 혹은 백마탄 왕자님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큰 키와 잘생긴 얼굴, 밝고 환한 미소로 한 시대를 풍미한 대표미남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70세를 넘긴 현재도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는 얼굴과 잘 관리된 균형잡힌 신체, 패션센스 등으로 종종 화제가 되곤 한다.

영화 <살처이인조(殺妻二人組,1986)>를 연출하였으나 이후 감독으로서의 활약은 없다.

홍콩은 물론 대만, 동남아 등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린 대스타로, 중화권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높은 데에 비해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신기할 정도로 낮은 편이다. 한국에서는 진추하와 함께 <One Summer Night>을 부른 가수로, 혹은 <신정무문 1991>에서 주성치와 가래침 대결을 벌이던 소쇄형, <금옥만당>에서의 요리사 요걸 정도로 알려져 있다.

1. 데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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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진도와 어머니
종진도는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인 종석천(鍾石泉)은 부동산업자이자 예술품수집가로, 2005년에는 그가 소유한 유명 화가 겸 서예가 장대천의 작품 508점으로 홍콩대회당에서 서화전을 열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종진도 역시 서도가 취미이며 상당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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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진도의 글씨
그러나 부모가 이혼한 후 아버지는 재혼을 하고 어머니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종진도는 외가와 외삼촌댁에 맡겨졌고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된다.
어머니는 종진도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나중에 가업을 이어받기를 바랐지만 종진도는 미국 유학에 그닥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종진도 본인은 노래하고 악기 다루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만 6,70년대 홍콩에서는 음악을 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 것을 부모가 달가워 하지 않았다. 종진도는 부모님의 이혼을 계기로 이른 나이에 자립을 하게 되면서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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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시절 밴드 친구들과 (사진 가운데)
15세가 되면서 독립생활을 시작한 종진도는 밴드 <Tea>를 결성했고, 완차이의 클럽에서 연주자 겸 바텐더로서 일했다.
어린 나이였기에 클럽사장에게 품삯을 떼인 적도 있다고 한다.
한가지 재밌는 점은 종진도가 클럽에서 한창 연주자로서의 일을 하던 시기에는 가수로서의 본인의 재능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이다. 클럽의 가수가 한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할 지 고민하던 중 종진도가 "이렇게 부르면 어때?"라며 가볍게 조언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본 밴드의 리더가 종진도에게 노래를 시작해본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 후 종진도는 펀윅스트리트의 Mikado에서 2년간 보컬로 활동했다. 이어 침사추이 한커우 스트리트의 Glogo와 Basemenet 18, Club Joker를 거치며 노래를 불렀다. 밴드 <Sergeant Majors>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파일:Sergeant majors.jpg
▲ 밴드 동료들과 (사진 가운데)
당시 탁월한 가창실력에 색소폰, 키보드 등을 능숙하게 다루어 높은 출연료를 받았다고는 하나, 자립해서 생활했기에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고 한다. 건물 꼭대기층에서 지낸 종진도는 겨울에는 추위를 견디기가 힘들었고 여름에는 더위로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영화관에 들어가 밤을 보낸 일도 잦았다고 한다. 위너스 멤버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다룬 1993년 홍콩 드라마 <소년오호>[3]에서는 종진도의 궁핍한 생활만을 지켜봐왔던 다른 위너스 멤버들이 어느날 그의 본가에 놀러가서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홍콩의 유명 여성작가 임연니[4] 가 종진도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회상에 의하면, 종진도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스무살이었던 그는 화사한 옷차림에 부잣집 도련님처럼 보였으며, 노는 것을 좋아했고 하루 종일 무슨 이유인지 항상 웃고 무척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쾌활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가 혼자 옥탑방에서 화장실도 욕실도 없이 살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 했고, 종진도는 그런 점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고 한다.

클럽에서 일하던 무렵 진우와 알게되는데 진우는 종진도가 색소폰을 잘 연주하고 매우 높은 개런티를 받으며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함께 음악을 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종진도는 일을 마친 뒤 진우와 함께 홍콩섬으로 가서 알란탐을 만나면서 다른 위너스 밴드 멤버들과 의기투합하게 됐다.

2. 음악활동

2.1. 위너스(The Wynners)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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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우, 알란탐, 엽지강, 팽건신, 종진도 (왼쪽부터)
溫拿(온나) 혹은 溫拿樂隊(온나악대) 라고 불리는 위너스는 1973년 결성된 밴드로 멤버는 종진도(보컬, 키보드), 알란탐(보컬), 팽건신(기타), 진우(드럼), 엽지강(베이스)이다.

위너스의 전신은 1969년에 결성된 루저스(The Loosers)인데, 알란탐, 팽건신, 진우, 엽지강과 진백상(배우), 진백신(진백상의 동생)으로 구성된 그룹이었다. 그러나 크게 성과를 내지 못 한 상태에서 1972년 진백상 형제가 탈퇴하며 해산되었다.

1973년 말 팽건신, 엽지강, 진우가 밴드를 재건했고, 싱가폴에서 유학중이던 알란탐도 귀국했다. 이어 종진도가 합류하면서 위너스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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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건신, 종진도, 엽지강, 알란탐, 진우 (왼쪽부터)
프로덕션을 계약하고 1974년 처음으로 발표한 <Sunshine Lover>는 큰 인기를 얻었고, 이어 선보인 <Sha-La-La>는 홍콩 라디오방송국 히트곡 1위를 3주 동안 차지했다. 두 곡 모두 종진도가 보컬을 맡았다. 이후 1집 <Listen to the Wynners>를 발매하여 홍콩과 동남아시아에서도 높은 음반 판매 실적을 거두었다. 위너스는 데뷔하자마자 큰 인기를 얻으며 홍콩, 동남아 지역을 단숨에 점령한 홍콩 1세대 슈퍼 아이돌이 되었다. 허관걸에 이어 위너스가 홍콩 70년대 유행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이후 <Love and other pieces>, <Under the lion rock>, <Same Kind of Magic>과 <The Wynners' Special TV Hits 75-76'>등의 앨범을 차례로 발표해나가며 명실공히 70년대 최고 아이돌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밴드 스타일도 초반기에는 영어노래 리메이크였지만 후기에는 창작곡으로 바뀌었다.
▲ The Wynners - LOVE
당시 가장 강력한 팬덤을 형성했던 멤버는 메인보컬을 담당했던 종진도였다.
1980년대 개인활동을 시작하면서 알란탐이 큰 성공을 거두어 홍콩대중음악계에서 높은 위상을 갖게 되었으나 위너스 시절에는 종진도가 가장 주목받는 멤버였다.
큰 키와 잘생긴 얼굴, 친근한 미소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뛰어난 가창실력과 세련된 무대매너는 가장 큰 매력이었다.
그는 <Sunshine Lover>,<Sha la la>,<L-O-V-E>,<추간포도팽>,<Lion Rock> 등 위너스의 히트곡 대부분의 보컬을 맡았다.
위너스는 초기에는 팝 커버곡들을 발표했는데 종진도가 특히 영어실력이 뛰어나고 발음이 좋아 호평을 받았다.
▲ Gonna Get You (영화<온나여교수> 주제곡)
위너스 멤버가 주연으로 활약하는 영화들도 만들어졌다. 1975년에는 영화 <대가락>이 개봉하여 200만홍콩달러(약 1억2000만원)의 흥행 성적을 거두며 그 해의 박스오피스 4위를 차지했고 OST음반을 발표해 큰 인기를 얻었다.
이어진 <온나여교수>와 <추간포도팽>은 영화 뿐만 아니라 그 삽입곡으로도 역시 대히트를 기록했다.

1978년 위너스는 활동을 중단하고 멤버 개개인이 각각 성장해 5년마다 만나서 한 장의 음반을 내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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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결성 10주년
알란탐, 팽건신, 종진도, 진우, 엽지강 (왼쪽부터)
1983년 홍캄체육관이 완공되자 9월 위너스가 홍콩밴드 최초로 콘서트를 열었다.[5] 위너스는 2022년말까지 홍캄체육관에서 76회의 콘서트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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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결성 15주년
종진도, 진우, 팽건신, 알란탐, 엽지강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
▲ The Wynners 1988년 십대경가금곡 영예대장 무대

1988년 위너스 결성 15주년을 기념해 마카오에서 애장판 기념 특집을 촬영한 뒤 기념음반을 내놓았다. 같은 해 홍콩음악계 최고 영예인 <금침장>을 받았고, 종진도와 알란 탐이 공동 작곡한 <천재불변>은 1988년도 '10대 중문금곡' 및 '10대 경가금곡', '10대경가금곡 영예대상'을 수상했다.

2006년 말 컴백을 선언한 위너스는 2007년 2월 18일부터 3월 1일까지 홍콩 체육관에서 컴백 콘서트를 열어 밴드 결성 33주년을 축하했다.

2010년 말 '온나 38 대약진 콘서트'라는 제목으로 다시 한 번 콘서트 개최를 발표했다. 2011년 2월 4일부터 2월 9일까지 홍콩 체육관에서 열린 이 콘서트는 '팬을 위한 봉사'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콘서트와 함께 나온 음반 제목은 <악단풍운>으로 같은 제목의 타이틀곡은 진환인이 작곡, 편곡을 맡고 임민총이 작사했다.

2015년 위너스는 <온나정신>이라는 제목으로 콘서트 개최를 발표했다.같은 해 <IFPI 홍콩 팝 문화공헌 밴드 어워드>를 수상했다.
2016년, <온나 NEVER SAY GOODBYE> 콘서트를 개최한다.
▲ The Wynners CCTV 춘완무대
위너스는 2022년 1월 31일 중국CCTV 춘완무대에 출연해 <붕우>, <Sha-la-la>를 열창했다. 하지만 베이시스트 엽지강은 코로나19로 인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위너스 멤버들은 70년대 말 이후 개인 활동이 주가 되었지만 해체하지 않았고 가끔씩 모여 그룹활동을 이어나갔다. 2015년 후반에는 2016년 음력 신년 콘서트 후 최종 해체를 선언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활동을 이어갔다. 팽건신은 자신이 해산을 제안했으나 알란 탐이 반대했다는 후일담을 전했다.

위너스는 2023년 데뷔 50주년을 기념하여 투어를 시작했고 성황리에 진행중이다. 홍캄체육관에서의 공연은 순식간에 매진되어 바로 두차례 추가공연이 결정되었다. 투어는 24년까지 계속되어 마카오, 싱가폴, 말레이시아, 중국, 미국 등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2.2. 1970년대 후반, 80년대

2.3. 1990년대

2.4. 2000년대

2.5. 2010년대

2.6. 2020년대

3. 배우활동

3.1. 1970대 후반, 80년대

3.1.1. 70년대 홍콩에서의 영화활동

파일:온나여교수.jpg
▲ 온나여교수 (1977)
종진도는 1975년 위너스 시절 멤버들과 함께 <대가락>에서 주연을 맡으며 배우로 데뷔했다. <대가락>은 흥행에 크게 성공했으며 이어 선보인 <온나여교수>,<추간포도팽> 등도 마찬가지였다. 세 작품은 모두 코미디 음악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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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하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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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도채홍 (1977)
개인으로서는 진추하와 <추하(한국개봉명:사랑의 스잔나)>,<제이도채홍(한국개봉명:추하내사랑)> 두 작품을 함께 하며 로맨스 장르에서의 가능성을 보였다.

3.1.2. 대만에서의 영화활동

종진도의 본격적인 배우로서의 활동은 대만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소성고사>로 대만에서의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몇 년간 스무편이 넘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고, 그 중에는 상당한 평가와 인기를 얻은 작품이 많다.
이행감독과 몇 작품을 함께 했고, 허우샤오셴 감독의 초기작 세 편에서 주연을 맡았다. 경요 소설을 바탕으로 한 로맨스영화에서 멋진 남자주인공 역할을 맡기도 했다.
3.1.2.1. 대만영화계의 대부 이행(李行)감독과의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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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성고사 (1979)
<소성고사>는 등려군이 노래한 동명의 주제가와 함께 중화권에서 잘 알려진 명작이다. 대만영화계의 대부라고 불리는 이행 감독이 연출하였고, 임봉교[6] 와 종진도가 주연을 맡았다. <소성고사>는 16회 금마장영화 시상식에서 10개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아역상 등을 수상했다.

종진도가 맡은 진문웅은 불의의 사건으로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막 출소하여 나무조각기술을 배우고 아수(임봉교 분)를 사랑하며 새 삶을 시작하는 인물이다.

이행 감독은 종진도에게 이제까지 사용해온 영어식 예명 '아B'가 아닌 본명 '종진도'로 출연할 것과 머리카락을 짧게 자를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열살 이후로는 머리를 짧게 잘라본 적이 없었고 위너스 시절에도 내내 긴 머리로 활동한 종진도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삭발식에 참여했다고 한다.
후일 이행감독은 이같은 일이 배우로서의 종진도의 이미지를 확립하고 그의 결심을 시험해보려고 했던 의도라고 이야기했다.

종진도는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당시 유행을 선도하기도 했는데, 그런 종진도를 반삭발을 시키고 하얀 티셔츠만을 입게 한 감독이 대단하게 여겨진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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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회 금마장 시상식>에서의 종진도
주제곡인 <소성고사>를 종진도도 음반에 실었으며, 16회 금마장 시상식 무대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파일:Goodmorningtaipei.jpg
▲ <조안태북(早安台北),1979>
대만영화계 진출 후 두번째 작품인 <조안태북>은 역시 이행감독의 작품으로 <소성고사>에 이어 2년 연속 금마장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종진도가 연기한 엽천림(葉天林)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곡과 노래를 하기 위해 휴학까지 한 대학생이다. 그렇기에 영화 곳곳에 종진도가 노래하는 장면이 수시로 등장한다. 종진도가 부른 주제곡과 삽입곡은 모두 아홉 곡이다. 특히 영화 오프닝을 여는 동명의 주제곡은 영화 전체의 건전하고 활기찬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3.1.2.2. 세계적인 거장 허우샤오셴(侯孝賢)감독의 초기작 3편
종진도는 허우샤오셴 감독의 데뷔작부터 세번째 작품까지 계속해서 주연을 맡았다. 이른바 '허우샤오셴의 초기 3부작'이라 일컫는 <귀여운 여인(就是溜溜的她,1980)>,<바람이 춤춘다(風兒踢踏踩,1981)>,<고향의 푸른 잔디(在那河畔青草青,1982)>이다. 세 작품은 이후 허우감독의 작품들과는 다른 결을 보이는데, 종진도와 봉비비, 강령 등 아이돌 스타를 기용하여 청춘들의 연애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귀여운 여인>은 대목인 설연휴에 개봉하여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전편의 흥행 성공으로 이듬해 제작진은 다시 뭉쳐 <바람이 춤춘다>를 내놓게 되는데 이 또한 설연휴 흥행 1위를 기록한다.
<고향의 푸른 잔디>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3.1.3. 80년대 홍콩에서의 영화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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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도정 (1980)
<당도정(撞到正, The Spooky Bunch>은 허안화 감독의 판타지 영화로 홍콩 누벨바그 영화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이다. 2005년 홍콩 영화 금상장 협회의 표를 받아 '최고의 중국어 영화 100편' 중 하나로 선정었고, 2010년 8월에는 타이베이 금마영화제 집행위원회의 표를 받아 '영화사 100대 중국어 영화'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어 2011년에는 홍콩 영화 자료관에서 '100편의 홍콩 영화'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종진도는 부잣집 도련님 Dick 역할을 맡았으며 주제곡 <撞到正>과 삽입곡 <閃閃星辰>을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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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착칠일정 (1983)
<표착칠일정(表錯七日情, Let's Make Laugh)>은 1983년에 개봉한 홍콩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장견정이 감독 및 각본을 맡았고 종진도와 엽동이 열연했다. 저비용으로 제작됐지만 영화사 쇼브라더스가 제작한 영화로서 처음으로 1000만 홍콩달러를 돌파하며 그 해 전체 박스오피스 3위를 달성했다. 제3회 홍콩금상장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과 각본상을 수상했다.
주인공 이도를 맡은 종진도는 재치 있고 마음 따뜻한 모습을 잘 표현했다. 종진도가 부른 주제곡 <일단정>과 삽입곡 <요시유연> 역시 대히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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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하이블루스 (1984)
<상하이블루스(上海之夜, Shanghai Blues)>는 1984년 서극감독이 영화 스튜디오 '전영공작실'을 설립한 후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로 서극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이다. 종진도, 장애가, 엽천문의 화려한 캐스팅이 돋보인다. 흥행에도 성공적이었으며, 작품성도 높이 평가받았다. 그 해 홍콩 국제 영화제에서 10대 중국어 영화로 선정되었으며, 제4회 홍콩 금상장 영화제에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프랑스 낭트 영화제 에서 심사위원단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는 홍콩영화금상협회로부터 '최고의 중국어 영화 100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파일:SHANGHAIBLUES_CANNESCLASSICS.jpg
2024년, 전영공작실 설립 40주년을 기념하여 서극감독의 지휘아래 4K 리마스터링과 여러 언어로의 더빙 작업이 이뤄졌다고, 77회 칸 영화제 클래식부문에서 상영되었다. 더빙의 경우 여주인공들을 비롯 다른 역할들은 젊은 배우들이 맡아 목소리 연기를 했는데, 종진도는 젊은 시절과 목소리가 크게 다르지 않기에 직접 맡아, 70세를 넘긴 나이에 본인이 갓 서른이 넘었을 때 연기했던 인물에 목소리를 입히는 작업을 수행했다.

종진도가 맡아 연기한 주인공 동국민(도레미)이라는 인물은 작곡가를 지망하는 청년으로, 순애보를 간직한 마음씨가 곱고 밝은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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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수호접몽 (1989)
<살수호접몽(My Heart Is That Eternal Rose,1989)>은 담가명 감독의 작품으로 종진도는 주인공 킬러 릭으로 분해 여주인공 랩(왕조현 분)과의 안타까운 사랑을 나눈다. 랩을 짝사랑하는 청 역을 맡은 양조위는 이 영화로 1990년 제9회 금상장 영화제 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이 때 시상자로 등장한 사람은 종진도와 장만옥이었다. 양조위와 종진도는 이 영화를 계기로 친해져 지난 30여년동안 절친한 사이로 지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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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탈말적인 (1989)[7]
<불탈말적인 (不脫襪的人)>은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러브스토리로 자주 콤비를 이루었던 장만옥과의 공연작이다. 장만옥은 이 영화로 제9회 홍콩금상장 영화제 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최우수촬영상과 최우수미술상도 수상한 수작으로 감독은 진우가 맡았다.
종진도는 팍팍한 삶을 견뎌내며 황소저(장만옥 분)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택시기사 아공(阿恭) 역을 맡아 열연했다.

3.2. 1990년대

3.3. 2000년대

2006년에 〈신조협려 2006〉에서 공손지 역으로 출연했다.

3.4. 2010년대

3.5. 2020년대

4. 출연작

4.1. 영화

<rowcolor=#ffffff> 연도 작품 배역 / 주조연 비고
1975 大家樂
(대가락)
주연 위너스 멤버 주연. 연간 흥행 4위
1976 溫拿與教授
(온나여교수)
주연위너스 멤버 주연. 연간 흥행 23위.
秋霞
(추하) /한국제목 <사랑의 스잔나>
조연한홍합작영화. 1976년 한국 흥행 1위 기록. 홍콩 연간 흥행 44위. 진추하와 부른 삽입곡 <One Summer Night>이 인기.
1977 第二道彩虹
(제이도채홍) / 한국제목 <추하 내사랑>
주연 한홍합작영화. 진추하, 호인몽과 공연.
1978 追趕跑跳碰
(추간포도팽)
주연 위너스 멤버 주연. 연간 흥행 32위.
1979 小城故事
(소성고사)
陳文雄
주연
임봉교와 공연. 등려군이 부른 동명의 주제곡이 인기.
早安台北
(조안태북)
葉天林
주연
임봉교와 공연. 주제곡과 삽입곡 아홉곡을 종진도가 부름.
尋夢的孩子
(심몽적해자)
林五順
주연
호혜중과 공연.
1980 撞到正
(당도정)
주연 허안화 감독의 초기 걸작. 소방방과 공연. 연간 흥행 5위
美麗與哀愁
(미려여애수)
江雲濤
주연
응채령과 공연
燃燒0.7度 주연 .
天下一大笑
(천하일대소)
주연 장애가와 공연.
特別治療
(특별치료)
.
주연
임봉교와 공연.
佳期鬧翻天
(가기틈번천)
小熊
주연
심안과 공연.
你那好冷的小手(이나호냉적소수) 魯志成
주연
은하와 공연.
天涼好個秋
(천량호개추)
程偉
주연
임봉교와 공연.
西風的故鄉
(서풍적고향)
阿吉
주연
염뉴와 공연. 촬영 당시 염뉴와 교제.
1981 聚散兩依依
(취산량의의)
高寒
주연
경요 작가의 작품. 여수능과 공연
烏龍行大運
(오룡행대운)
주연 위너스 주연영화
夢的衣裳
(몽적의상)
萬皓然
주연
경요작가의 작품. 여수능, 진한과 공연.
就是溜溜的她
(취시유류적타)
顧大剛
주연
허우샤오셴감독 데뷔작. 봉비비와 공연. 설연휴 시즌 개봉 흥행 1위.
又見春天 葉中
주연
임봉교와 공연
根號一七九(근호일칠구) 주연 .
蹦蹦一串心(붕붕일관심)주연 .
瘋狂世界(풍광세계) 주연 .
1982 殺入愛情街(살입애정가) 주연 엽천문과 공연. 연간 흥행 33위
風兒踢踏踩(풍아척답채) 顧金台
주연
허우샤오셴감독 작품. 봉비비와 공연. 설연휴 시즌 개봉 흥행 1위.
野性的青春(야성적청춘) 주연 .
俏如彩蝶飛飛飛(초여채접비비비) 魯康
주연
.
在那河畔青草青(나재하반청초청) 盧大年
주연
허우샤오셴감독 작품. 강령과 공연.
馬騮過海
(마류과해)
. .
1983 表錯七日情
(표착칠일정)
李度
주연
종진도가 부른 주제곡 <일단정>과 삽입곡 <요시유연>이 대히트. 연간 흥행 5위.
1984 先生貴姓
(선생귀성)
주연 미설과 공연. 연간 흥행 40위.
上海之夜(상해지야) 董國民
주연
서극 감독 작품. 장애가와 공연. 연간 흥행 15위.
青蛙王子(청와왕자) 陳立品
주연
종초홍과 공연. 장만옥의 데뷔작. 연간 흥행 10위.
1985 鬼馬飛人(귀마비인) 阿B
주연
종초홍과 공연. 연간 흥행 14위
1986 殺妻二人組(살처이인조)/한국제목 <공처이인방> 阿B
주연
종진도 감독 작품. 주윤발, 왕조현, 매염방과 공연. 연간 흥행 13위.
富貴列車
(부귀열차)
來福
주연
연간 흥행 2위
龍兄虎弟
(용형호제)
客串樂隊團員
특별출연
兩公婆八條心(양공파팔조심)客串溫拿五虎
우정출연
.
1987 標錯參(표착삼) 弱智浩二
주연
홍금보, 왕조현과 공연. 연간 흥행 27위.
天官賜福
(천관사복)
細仔
주연
엽동과 공연. 연간 흥행 40위.
表哥到(표가도)周小勇
주연
연간 흥행 21위.
A計劃續集 (A계획속집) 客串陸警
특별출연
연간 흥행 3위.
一屋兩妻
(일옥양처)
許安華
주연
매염방과 공연. 연간 흥행 7위.
1988 一妻兩夫(일처양부) 許安華
주연
종초홍과 공연. 연간 흥행 21위.
撞邪先生(당사선생) 利志
주연
정유령과 공연. 연간 흥행 23위.
好女十八嫁(호녀십팔가) 王傑
주연
종초홍과 공연. 연간 흥행 56위.
1989 相見好(상견호) 阿林 종초홍과 공연. 연간 흥행 11위.
殺手蝴蝶夢(살수호접몽) / 한국제목 <살수특급> 馬列
주연
담가명 감독 작품. 왕조현, 양조위와 공연. 양조위는 금상장 남우조연상 수상. 당시 시상자는 종진도와 장만옥.
火燭鬼(화촉귀) 阿健
주연
연간 흥행 32위.
偷情先生(투정선생) 王小強
주연
연간 흥행 53위.
再見王老五(재견왕로오) 陳子南
주연
장만옥과 공연. 연간 흥행 39위.
不脫襪的人(불탈말적인) 주연 장만옥과 공연. 장만옥은 금상장 여우주연상 수상.
少女心(소녀심) 주연 장만옥과 공연. 연간 흥행 40위.
奇蹟(기적) 記者甲
특별출연
연간 흥행 2위.
1990 中日南北和(중일남북화)주연홍콩, 일본 합작영화.
BB30 주연 정유령과 공연. 연간 흥행 39위.
1991 新精武門1991
(신정무문1991)
瀟灑
조연
주성치와 공연. 연간 흥행 11위.
九一神鵰俠侶
(91신조협려)
小村
조연
우정출연. 유덕화, 매염방, 곽부성과 공연
莎莎嘉嘉站起來(사사가가참기래) 주연 .
志在出位(지재출위) 瀟灑
주연
.
表哥我來也(표가아래야) 주연 .
賭聖延續篇:賭霸|賭霸 大B
조연
.
1992 漫畫威龍
(만화위룡) / 한국제목 <신정무문2>
瀟灑
조연
.
戰神傳說
(전신전설)
燕十三
조연
.
草莽英雌(초망영자) 趙志龍
주연
夢醒時分
(몽성시분)
주연 공리와 공연. 장애가 감독 작품.
特異功能猩求人(특이공능성구인) 芝達
주연
.
1993 射鵰英雄傳之東成西就(사조영웅전지동성서취) 王重陽
조연
.
廣東五虎之鐵拳無敵孫中山(광동오호) 鍾國仁
주연
.
玫瑰玫瑰我愛你(매괴매괴아애니) / 한국제목 <신용도성>[8] 梁醒波
주연
양가휘, 유가령, 임달화, 엽옥경과 공연.
1995 十兄弟
(십형제)
陳大蝦
주연
장민과 공연
金玉滿堂
(금옥만당)
廖傑
조연
장국영 ,원영의와 공연
1996 運財智叻星 二郎神
조연
.
奇異旅程之真心愛生命 조연.
1998 九星報喜 조연 .
2000 俠骨仁心 조연 .
2002 風流家族 조연 .
2004 我要做Model 柯現溫
조연
.
性感都市조연 .
花好月圓 太醫
조연
.
阿孖有難 조연 .
2005 頭文字D 立花佑一
조연
.
情癲大聖 眾生相
조연
.
2011 宅男總動員之女神歸來 조연 .
東成西就2011 조연 .
無界之地 조연 .
2012 甜·祕密 阿賓
주연
.
2013 天台 老李
조연
.
微光閃亮第一個清晨 李毅
조연
.
2018 兄弟班 阿B
조연
.
大轟炸 部长
조연
.
2019 花椒之味 夏亮
조연
.
2022 六扇门之血虫谜案(網絡電影) 조연.

5. 수상 내역

5.1. 음악

5.2. 영화

6. 사생활

6.1. 연애와 결혼

종진도는 홍콩과 대만 여자 연예인들 사이에서 인기인이었다. 특히 대만활동 시기에는 그를 좋아하는 여배우들이 많았다고 한다. 솔직하고 다정한 성격으로 알려진 그인데 외모까지 출중했으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종진도는 결혼 전 몇 명의 유명한 인물들과 교제를 한 일이 있고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종진도도 2006년 출간한 자서전에서 짧게 언급한 바 있다.
단지 몇 번의 교제사실이 알려졌을 뿐, 그로 인해 추문에 휩싸이거나 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의 팬들은 선남선녀의 만남을 아름답게 바라봤다고 한다.
그는 교제했던 여성들과 결별 후에도 계속 친구로 잘 지냈고 공식석상에서 만나서도 서로 반가워하는 모습들을 최근에도 기사를 통해 접할 수 있다.

종진도는 1988년 첫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1997년 이혼을 하였다. 현재의 부인과는 오랜 동거생활 후 2014년 결혼식을 올렸으며 성실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부인과 4명의 자녀들과 함께 한 화목한 모습을 방송이나 SNS를 통해 볼 수 있다.

6.1.1. 첫사랑 진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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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진도와 진추하

진추하와 종진도. <사랑의 스잔나>의 삽입곡 <One Summer Night>을 함께 부른 두사람은 1976년부터 1979년까지 3년간 교제했다.

당시 진추하와 종진도는 같은 매니저에 속해 자주 함께 공연을 하곤 했는데, 둘 다 피아노를 치고 작곡을 하는 음악인이어서 자연히 가까워졌다. 1976년 두 사람이 23세, 19세일 무렵 영화 <사랑의 스잔나>를 촬영하며 사랑을 키웠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음악활동도 함께 하고 1977년 <제이도채홍>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지만, 1979년 헤어지게 된다. 결별의 기폭제가 된 건 작은 오해였지만, 주된 이유는 인생 발전시기의 불일치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추하는 훗날 인터뷰에서 본인은 연예계에서의 6년간의 투혼이 매우 힘들었고 연예사업도 한계에 다다른 듯한데, 종진도는 위너스활동이 끝나고 개인활동이 막 시작되어 영화와 음악에서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해서 잠잘 시간도 없을만큼 바쁜 시기였기에 서로 맞지 않았다고 했다.

1979년 진추하는 <忘了他!不要想>라는 노래로 첫사랑인 종진도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종진도 역시 1980년에 아름답고 슬픈 멜로디의 <不可以不想你> 뮤직비디오에서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며 순수한 사랑을 간직하겠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열린 <사랑의 스잔나> 3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함께 노래를 불렀으며 <KBS 콘서트7080>에도 출연했다.#

6.1.2. 좋은 친구이자 연인 등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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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진도와 등려군
등려군은 "한평생 나를 가장 슬프게 한 사람은 성룡이고, 나를 가장 화나게 한 사람은 종진도이다.(一生中最令她傷心的人是成龍,而最令她生氣的人卻是鍾鎮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동갑내기인 등려군과 종진도는 젊은 시절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론이 거듭해서 보도했지만 당시에 인정하지 않았다.
위의 등려군의 발언은 친구를 넘어 연인 사이가 되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아쉬움과 종진도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토로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등려군과 20년 간 함께 한 홍콩 매니저 두혜동은 자서전에서 종진도와 등려군이 실은 약혼을 논의하기까지 했다고 밝혔으나 그에 관해 당사자들은 언급한 적은 없다. 두혜동에 의하면 1983년 등려군의 부모님과 종진도의 모친이 타이페이에서 함께 만나 약혼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두 집안 식구들은 함께 사진도 찍었는데, 당시 등려군은 매니저 두혜동에게 약혼이 진행된다면 사진이 공개되겠지만, 약혼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이 사진은 영원히 공개되지 않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종진도는 70년대 후반 대만으로 건너가 영화배우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가 바로 이행감독의 <소성고사>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제곡은 등려군이 부른 동명의 곡이다.
두 사람은 함께 자주 무대에 오르기도 했고 자연히 가까워졌다. 등려군은 특히 종진도와 전화통화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잠도 제대로 자기 힘들만큼 바쁜 스케쥴이었지만 최대한 짬을 내어 전화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또한 둘 다 여행과 사진찍기를 좋아해서 틈나는대로 데이트를 했다. 종진도의 사진촬영 실력은 매우 훌륭한데 종진도가 찍은 등려군의 사진은 꽤 많이 공개되어있다. 특히 등려군이 양볼에 손을 대고 있는 유명한 사진은 종진도가 촬영한 것이다.
파일:0-4.jpg
▲ 종진도가 촬영한 등려군의 사진

80년대초 등려군은 홍콩에서 여러번 콘서트를 열었는데, 그때마다 종진도에 관해 언급하며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등려군이 광동어곡 <만보인생로>를 녹음했을 때, 종진도가 먼저 녹음해서 한 자 한 자 발음하는 법을 알려주며 도와줬다고 한다. 종진도는 등려군을 좋아하는 모친과 함께 콘서트를 관람하기도 했다.

1995년 등려군의 사망소식이 전해졌을 때 종진도는 대만에서 가수 장우, 양채니와 녹화중이었다. 무대 위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그에게 현장 스태프가 쪽지를 전해주었고, 그는 비탄에 빠졌다. 이어 <치심애니>를 부르기 시작했지만 슬픔에 입을 제대로 열지 못했다.
파일:등려군종진도.jpg

종진도는 종종 방송이나 행사에서 등려군에게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고 있다.
종진도는 장학우, 제진, 제예 등과 함께 등려군 추모헌정곡 <성원>에 참여했다.
등려군 60주년 기념공연에 참석한 종진도는 프랑스에서 주문한 양복을 입고 나왔다. 등려군이 생전에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종진도는 등려군의 죽음이 본인의 파산보다 괴로운 일이었고 그녀와의 암묵적인 이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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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은인 낙이령(樂易玲,로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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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이령과 종진도

종진도는 1982년부터 대만에서의 영화 활동을 줄이고 홍콩으로 돌아와 홍콩에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이 때 영화사 쇼브라더스와 계약하게 되는데, 이 때 쇼브라더스에서 제작 일을 하던 낙이령과 만나게 된다. 낙이령은 일본 유학파 출신의 미모의 엘리트 여성으로, 종진도와 교제를 하던 당시에는 신인 프로듀서였지만 지금은 홍콩 TV프로그램과 영화 제작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현재 TVB 부사장이며 영화사 쇼브라더스의 집행이사 및 사장이다.

영화 <표착칠일정>에는 종진도와 엽동의 짧은 베드신이 있는데, 그 점을 홍보 포인트로 삼지 않기로 계약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사진을 누군가 유출시키려 했고, 그 사실을 미리 알게된 낙이령이 유출을 적극적으로 막은 일이 있다고 한다. 그 일로 종진도가 낙이령에게 호감을 가져 교제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3년 가량 교제하였고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결국 헤어졌다. 낙이령은 후일 종진도가 소박한 깜짝 선물을 했던 추억 등을 언급하며 그가 매우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종진도의 책의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참고로 첫사랑 진추하 역시 추천사를 남겼다.
최근에도 공식석상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의 사진을 볼 수 있다.
파일:Img258677600.jpg
▲ 락이령과 종진도

6.1.4. 첫번째 부인, 장소혜

1987년 공연차 캐나다를 방문한 종진도는 동료 여가수 임산산의 무대를 보러 온 그녀의 동창이었던 장소혜와 만나게 된다. 당시 장소혜는 캐나다 토론토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에서 석사과정을 밟고있었다. 그녀는 종진도보다 10살 아래였고 명문가 출신에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재원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민국 시절의 고관 출신으로 아버지는 캐나다 최초의 중국어 방송국을 설립한 언론인이었고, 어머니 역시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녀는 대저택에 살면서 운전기사를 두었고, 4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명품점을 다녔다고 한다.
후일 장소혜의 가문은 소문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고 캐나다 이민 후 사업에 실패하여 기껏해야 선비 가문의 중산층에 불과하다는 폭로가 나오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녀가 어린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그녀가 공부한 분야는 미술, 영문학, 패션, 박물관 관리 등 모든 학문이 예술과 미를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사실 종진도와 장소혜, 두 사람의 출신 집안은 모두 부유했기에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살아온 삶은 전혀 달랐다. 어린 나이에 독립한 종진도는 자신의 힘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장소혜는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금의옥식하며 격식을 차리는 생활을 해왔다. 두 사람의 금전관과 소비관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이 부분은 후일 불화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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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 대표 주간지 <명보> 표지를 장식한 두 사람
첫눈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된다. 1988년 1월 18일 치러진 결혼식은 당시 300만홍콩달러(약 5억 3천만원)의 비용이 들었고 모든 비용은 종진도가 치렀다. 장소혜가 입은 웨딩드레스는 다이애나비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한 디자이너의 작품으로 가격은 13만홍콩달러(약 2천300만원)였다. 결혼식과 피로연에는 알란탐을 비롯한 위너스 멤버들은 물론, 등려군, 장국영, 성룡, 홍금보, 주윤발, 매염방, 왕조현, 진백강, 임자상, 장학우, 종초홍 등 수퍼스타들이 총출동했다. 당시 홍콩 연예인의 절반을 불러 들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며 결혼식이 홍콩 TVB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되기도 했다. 이 결혼식은 지금도 역대 초호화 결혼식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파일:장소혜종진도.jpg
▲ 장소혜와 종진도
결혼 초기부터 장소혜는 매달 거액을 들여 명품을 사는데, 집에 있는 신발은 천 켤레에 달하였고, 같은 스타일의 샤넬 상의는 다섯 가지 색을 모두 샀다고 한다. 홍콩 산꼭대기 부촌에 위치했던 그들의 신혼집은 고가의 가구가 가득했는데, 비싼 벽지를 바르고도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루만에 벽지를 뜯고 교체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에도 당시 종진도가 벌어들이는 돈이 천문학적인 수준이었기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들과 딸을 두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두사람이었지만, 90년대 중반부터 종진도의 연예사업이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면서 그들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주로 로맨스 영화의 주연으로 활동해온 종진도는 결혼 후에 입지가 좁아졌다. 특히 장소혜가 키스신이 있는 영화조차 찍지 못하도록 극렬히 반대하였기에 종진도는 점점 코미디 영화 쪽으로 활동분야를 옮기게 되었지만 예전만큼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 1995년 장소혜가 남자모델과 부적절한 만남을 가진 사실이 보도가 되고 두 사람 사이에는 큰 균열이 생긴다. 이어 장소혜는 홍콩의 패션계 거부 진요민과 불륜관계임 공표했고 두 사람은 이혼절차를 밟는다. 그 무렵 90년대 후반 외환위기로 장소혜의 주도로 종진도가 투자한 부동산이 폭락하면서 종진도는 재산을 모두 잃고 2억5000만 달러(약 442억)의 부채를 떠안게 되고 2002년 파산신청까지 하게 된다. 종진도는 2006년 모든 채무를 해결하고 홍콩 파산국의 관리에서 벗어나기까지 4년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물론 파산 이후 20년 가까이 지난 현재 종진도는 활발한 연예활동을 통해 다시 부유해졌으며 예전의 높은 경제적인 수준을 되찾았다.

이혼 후 두 사람 사이의 자녀는 종진도가 양육했다.
파일:2024년 장소혜.jpg
▲ 2024년, 61세의 장소혜
장소혜는 종진도와의 혼인 기간동안 'B수(B嫂,B형수)'로 불리며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기에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고 여러 CF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대중의 그러한 호의적인 반응과 관심은 어디까지나 톱클래스 연예인이었던 종진도의 배우자였기에 수반되는 것이었지 순수하게 본인의 재능이나 매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후 그녀는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으나 배우활동을 제대로 이어가지는 못 했다.

현재는 작가 겸 패션 인플루언서로 활동하고 있으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과 본인의 높은 수입으로 셀러브리티로서 여유있는 삶을 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갈고 닦아온 그녀의 글솜씨와 문화적인 소양, 패션 관련 지식들은 상당한 수준이라 업계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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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왕 방문 당시 사진. 여왕과 악수를 하고 있는 사람이 종진도


[1] 종진도와 결혼 후 가수, 영화배우로 활동. 現 작가 겸 패션 인플루언서[2] 1998년 매염방이 종진도와 같은 나이에 수상하였고 두 사람의 기록은 2023년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3] <소년오호>에서 종진도 역을 연기한 배우는 종한량이다.[4] 林燕妮 소설가, 칼럼니스트, 사업가, 사교계 명사. 이소룡의 형수였으며, 작곡가 황점의 오랜 연인이었다. 주윤발에게 드라마 기회를 주며 구두를 사 신을 돈을 준 에피소드로도 유명하다.[5] 허관걸(5월)-임자상(7월)-위너스(9월)-진백강(9월)순이다.[6] 7,80년대 대만영화계의 대표적인 여배우로 성룡과 결혼하면서 은퇴했다.[7] '양말을 벗지 않는 여인' 혹은 '스타킹을 벗지 않는 여인'으로 소개되었다.[8] 홍콩에서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92흑장미 대 흑장미'의 번외편으로 한국에서는 '신용도성'으로 소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