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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4 07:48:43

중원(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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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청나라3. 태평천국4. 중화제국5. 아홉 번국
5.1. 반초동맹
6. 대륙 내의 지역

1. 개요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 등장하는 중국을 의미한다.

천명의 붕괴, 그리고 천명을 얻게 된 주인공으로 인한 춘추시대로의 회귀. 조선과의 전쟁 전에는 역사대로 청나라가 지배하는 중원이었으나 조선과의 전쟁 이후 태평천국이 부활해버리고 이로 인해 학살이나 약탈 같은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이를 빌미로 열강들과 주변국들이 마구잡이로 개입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 태평천국을 막아야 할 이홍장이 중화제국을 건국하면서 혼란에 빠진 지옥이 되었다. 원래부터 막장인 청나라와 태평천국, 여기에 중화제국 역시 내우외환으로 인해 막장으로 변하면서 원 역사에 비해 가장 개판이 돼버린 나라. 세계대전급의 유혈사태가 예약되었고 실제로 개시되었다. 그 내전이 진압되어도 미래는 없다. 이홍장과의 설전에서 이형이 직접 천자라는 자리의 권위를 일개 국왕으로 떨어뜨렸기 때문. 거기에 더해 이형이 자기 입으로 앞으로 중화를 몇 개의 큰 조각으로 쪼갤 생각이라고 말했는데 민족주의적 구심점을 상실했으니 최악의 경우 춘추전국시대 수준으로 갈가리 찢어져 서로 물고 뜯는 배틀로얄이 벌어지게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결국 이형이 포로들을 화중[1]에 정착시키고 이곳을 대한제국의 직할령으로 삼아 주중한국군의 주둔을 계획하면서 화북과 강남사이에 완충지대가 생겨났고, 강남 역시 이형에 의해 갈라지게 될 전망. 결국 이형이 중원의 춘추시대[2]로의 회귀와 천자직의 폐지, 대초원과 중원의 구분의 타파를 통해 중원을 중심으로 한 천하체제 타파와 한족 민족주의 붕괴, 중화사상 소멸을 목표로 함에 따라 중원의 통합은 앞으로 이형의 치세 동안은 절대 불가능해졌다. 이형이 죽은 뒤에라도 통일이 될 수 있냐고 한다면 근대 민족주의를 이용해 이형이 장기적으로 완전한 중원의 분열을 통한 소멸을 노리는 만큼 더욱 통일은 요원하다.

여기에 이형은 번왕으로 임명한 제후들에게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의 문화와 특색을 잘 파악하고, 그런 것들을 잘 신경써서 지원해달라는 신신당부를 했다. 아예 문화적 면에서부터 차이를 벌려 중원을 영구적으로 분열시키려는 것이다![3] 더불어 공식적인 중원 난민들의 남미 이민이 대한제국에 의해 실시되면서 인구의 숫자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중. 그리고 분리주의자[4]와 분열주의자의 내부 분열이 이어지면서 그야말로 개판이 되어간다.

덤으로 그 당시 시대상 전설로만 전해지던 진시황릉이 발굴되면서 카간=이형이 진시황릉에 직접 제사를 올린 뒤 천하분열은 당연한 것이라는 식의 비석을 세우면서 쐐기를 박는다.

2. 청나라

역사대로 흘러가는 국가였으나 조선이 청나라의 천명이 다했다고 공표해버리는 바람에 조선과 전쟁이 터져버린다. 질적인 부분은 둘 다 안 좋은 면에서 비슷했지만 수적으론 우위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리하게 계속 공격하면서 아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패배해버리고, 조선에게 땅과 거액의 배상금, 그리고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면서 원래 역사보다 일찍 무너져가기 시작, 이로 인해 재기에 성공한 태평천국은 장강 이남을 재장악한다. 서태후가 신뢰하는 이홍장이 태평천국을 어느 정도 소탕하는 데 성공하지만, 청나라의 상황이 갈수록 안 좋아지자 중화제국을 건국하면서 갈수록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이후 이홍장은 총력을 다해 북상하고 장강 일대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청 수군이 패배, 이후 북진하는 중화제국군을 청군 20만이 막아서지만 그것도 패배한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왕조 붕괴 전개였으나 조선이 먼저 낼름 뛰쳐나와서 베이징을 점령하고 공친왕을 내세워 명분을 잡은 뒤 열강들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버틴다. 실질적으로 통치 가능한 영토가 허베이성과 그 근방으로 축소되고 왕조의 기원이자 황실의 성지인 만주조차 대한제국과의 협상으로 인해 만주의 칸을 주장한 주인공에게 뺏겼지만. 이후 섭정으로 실권을 잡은 공친왕은 주인공의 권유대로 완전한 한족의 국가[5]로 변모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태평천국은 이홍장의 중화제국을 우선적으로 공격하고, 중화제국 자체도 근대화 개혁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큰 혼란이 일어나 간만에 평화를 누린다. 이후 아시아 조약기구에 가입, 가맹국으로서 대한제국군과 협력해 러시아에 맞설 의용군을 모집한다. 다만 썩어도 준치이고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이것저것 다 작살났는데도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간 대한제국이 역으로 털린다며 경계할 정도의 기초체력이 남아있어 자유무역협정은 보류되었다.(애초에 전성기의 영국도 쇠락한 청을 상대로 손해를 거듭하다가 결국 아편을 팔아먹었다.) 올바른 선택이었던 게, 실제로 최신화에서 언급되기로 조선의 상인들이 청을 상대로 벌어먹기보다는 청이 오히려 조선 상인들을 대상으로 벌어먹고 있다고 할 정도. 다만 이는 조선의 무역정책을 관리들이 관장하고 있는데, 관리들의 상황파악이 실제 청의 상인들의 상황파악을 못 따라가고 있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영국이 중화제국에서 벌인 혐성짓[6] 때문에 청이 천만 단위의 피를 흘려야 할 처지가 되면서 결국 이형은 이익을 포기하고 상호보호협정을 맺는다.[7]

이후 장강을 건너 피난을 오는 중화제국 주민들을 수용하는데, 징집 가능한 장정들은 대한제국에서 파견된 장교단이 그들의 식솔들이 청나라에 정착하는 것에 대한 편의를 봐주는 조건으로 몽골 내전에 투입하는 걸 돕는 한편, 대한제국을 비롯한 범아시아 조약기구 가맹국들과 함께 중화제국의 강남 대기근을 구제하기 위한 구호물자들을 유구 왕국의 명의로 보내고 있다. 이에 대해 공친왕은 씁쓸해하고 있다고.[8]

천명대전에서 황하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는 프랑스 극동해군의 가세로 승전을 거둔다. 그러나 중화제국이 최대 20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해서 침공하는데 못해도 6-70만을 모아주었을 거란 이형의 기대와는 달리, 겨우 40만 명밖에 소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만주족 정부끼리의 싸움에 나서기 싫어하고 애초에 남 일 취급하던 한족 계열이 국외 취직을 빌미로 대거 병역 기피를 시전한 것인데 애초에 이민족 왕조라는 태생적인 한계가 천명의 상실과 민족주의 광풍이라는 대사건으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꼴. 공친왕이 그리 무능한 인물이 아니고 친정을 왔는데도 대한제국군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도 벌어주지 못하는 국가의 무기력함에 질린 이형의 탄식은 덤. 이걸로도 모자라 대한제국군이 잘 싸우는 와중에 자기들이 먼저 무너져[9] (이미 계산에 넣어두긴 했지만) 대한제국군이 후퇴하게 만드는 트롤링을 해주었다. 비록 중화제국군 격퇴는 성공했지만 도적떼로 변모한 농민군의 약탈에 시달릴 것이 예견되었고 거기에 더해 대한제국에게 명분에서도 국력에서도 뒤떨어질 것이 예정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에 의해 중국 대륙의 질서가 전국시대로 회귀하게 됨으로서 사실상 중국 대륙에서 가장 힘 있는 대국 A 정도의 위치로 굴러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청의 섭정왕으로서 사실상의 통치자인 공친왕이 베를린 종전협의에 대한제국이 참석을 권유받은 걸 계기로 이형이 추구하는 전면적인 근대화가 정답이고 그가 주도하는 체제에 편승하는 게 청의 존속에 이롭다고 생각을 바꾼 것. 아마도 범아시아 조약기구 내에서 2인자 자리를 두고 요시노부가 통치하는 일본과 경쟁할 듯. 그리고 정월 제후국 국왕 책봉식에서 청나라의 왕으로 현 섭정인 공친왕이 책봉됨에 따라 완전히 대한제국의 제후국이 되었고, 게다가 황태자가 만주 황실과 조선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이점을 이용해 현 황제인 이형이 후대에 산둥기반 제나라와 함께 대한제국에 완전히 흡수할 것을 밝힘에 따라 청나라의 국운은 사실상 시한부임이 확정되었다.

다만 공친왕 혁흔이 북평왕으로 즉위한 이후, 만주족-한족의 화합과 의회정치를 도입해 수십년간 조율한 끝에 불만이 많던 한족도 혁명이 아닌 개선을 요구할 정도로 정세가 안정되었고, 대한제국 입장에서도 굳이 흡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친왕이 사망하고 난 뒤 만주족은 민족이 아닌 '귀족'으로서의 의미만 가지게 된다. 그 의미는 곧 대한제국과의 합병 및 제후국화. 결국 청나라는 대한제국의 구성국으로 편입, 대한제국은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삼중제국이 됐다.

다만 이를 계기로 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유럽권이 '아시아 대통일 운동이 시작된 게 아닌가?' 라는 황화론의 계기가 되었다. 정작 한국은 황제 이형과 태자가 다같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이 일폭탄을 어떻게 처리하지? 하는 중이지만, 유럽에선 북독일연방과 유사한 평화적인 통합제국 설립을 우려했다.

3. 태평천국

작중 시작시점에는 쇠락해서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었지만 조선이 청의 천명이 다했음을 선포하고, 청나라가 조선에게 패배하면서 다시 살아나는 것에 성공한다.[10] 다만 이 과정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하면서 열강들에게는 사회주의 국가로 찍혀버린다. 그리고 열강에 대한 분노로 외국인들과 청나라 사람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던 지역을 습격하여 학살하면서 열강과의 전쟁도 시작되어 버린다.

서태후의 야욕 편에서 작중 묘사를 보면 정말 처참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잔인하게 학살했고, 심지어는 강간까지 자행되었음을 암시하는 묘사까지 나왔을 지경. 마지막에는 도시를 약탈하고 모조리 불태웠다고 한다.
인간이 지상에 두 발을 디디고 선 이래 처음으로 인간이 갓난아이를 집어던져 대나무 창에 꽂으며 즐거워하는 지옥을 보았다. 시체가 우물을 가득 메우고, 핏물이 바다를 붉게 물들게 하고, 한때 신사 숙녀들이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던 도시가 하루 아침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고 밤하늘이 지상의 불꽃으로 붉게 더럽혀졌다.
상하이는 지옥이다. 그조차도 지금의 현실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이곳은 야만의 궁극이며, 이단의 소굴이고, 인간 악의의 끝이다. 누구도 이곳의 풍경을 보고서는 세상의 종말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홍수전이라는 이단의 교주는, 적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열강과 전투를 치르기엔 피해가 너무나도 막심하고, 청나라 사람들까지 학살하다보니 민심도 떠나버렸다. 거기에 청나라 이홍장이 열강의 지원을 받아 태평천국으로부터 연승을 거두면서 갈수록 쇠락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대로 다시금 붕괴하나 했으나 운 좋게도 이홍장이 중화제국을 건국하고 북경 점령을 위해 북상하면서 쓰촨 성 일대로 후퇴해 세력을 온존하는 데는 성공했다. 다만 청이든 중화제국이든 딱히 포섭할 필요를 못 느끼는 사이비 종교다 보니 수명연장에 불과...한 줄 알았지만 오히려 쓰촨 성으로 세력이 한정된 것이 소수정예화로 이어져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체제를 이용, 농민들을 선동해 폭동이나 지주 살해 등을 유도하는 게릴라 전법을 쓰며 적극적으로 활동을 이어가 중화제국을 위협하고 있다. 한 때 막장행각을 벌여 민심이 떠났음에도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진짜로 실시했던 실적이 있기에 반지주적인 농촌 소작농들의 민심이 크게 흔들린다고.[11] 쓰촨, 우리 말로 사천 지역은 태평천국의 마지막 거점처럼 되어 반쯤 종교 지역이 된 상황. ISIS? 의외로 통치력을 확실히 다진 태평천국이 티베트인들의 도움으로 대외 교역로를 확보했다고 한다.

쓰촨성에서 세력을 다진 시점에서 초대 교주 홍수전은 병사했으며 그 아들인 홍천귀복이 2대 교주로서 통치하고 있다. 청과 평화조약을 맺고 개혁실패로 혼란 상태인 중화제국에 간첩들을 파견해 그 혼란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정확히는 쓰촨성의 본진이 주도한다기엔 너무나 확장이 빠르고 티가 안 나는지라 한성근과 김옥균이 추리한 결과, 태평천국이 이전에 중화제국에 잠입시켜 둔 첩자들이나 한때 태평신도였다가 태평천국이 밀려나자 다시 농민으로 돌아간 전 신도들이 상황이 변하자 숨겨뒀던 무기를 꺼내들고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농촌에서 세력을 규합해 지방군을 공격하는 등 다시 세를 올리는 것. 대한제국에도 혼란을 전파시킬 생각인 듯 난민들 틈새에 간첩들을 끼워보냈고 소위로 승진한 김옥균이 색출을 개시해 잡아들이고 있다.[12] 그러나 대한제국과 청의 영향이 닿지 않는 강남의 태평천국교도들은 진짜로 굶주리다 못해 일어난 농민들과 구분이 안 돼서 계속해서 농민봉기를 확대하고 있다. 결국 어떻게든 민심을 가라앉히지 않으면 파멸할 위기였던 중화제국과 협정을 체결한다. 이 때 밝혀진 바로는 내부가 불안할 거라는 예측과는 달리 상당히 안정된 지지기반[13]을 쌓아올렸으며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던 티베트인들과의 협력 덕에 외국과의 교역로까지 확보한 상태라고 한다. 거기에 더해 대한제국의 등을 찌르라고 러시아의 은밀한 지원까지 받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근대화된 군대와 맞붙으면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기에 중화제국과 조건부 동맹을 체결, 그 모자란 군사력을 보강한다. 그러나 첩자를 색출하던 김옥균을 통해 이어진 라인으로 이들의 또 다른 속내가 드러나는데 중화제국이 청과 대한 제국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뒤통수를 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대한 제국에 협조를 요청하고 이형은 태평천국을 믿을 수 없지만 일단 이들이 중화제국과 진짜 손을 잡는 것은 막기 위해 긍정적인 망설임을 보이는 것으로 화답한다.

결국 천명대전이 대한제국의 대승으로 종전될 때까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바람에 사실상 시한부가 되었다. 차라리 중화제국과 함께 최전방에서 투쟁했다면 이홍장 사망 이후 휘하 군벌들을 흡수할 가능성이 있었고, 아니면 상술한대로 늦지 않게 움직여 중화제국의 뒤통수를 쳤다면 대한제국도 중원 내의 친한세력이 아쉬우니만큼 막 대하지 못했을 것인데 끝까지 망설이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멸망의 기로에 들어서게 된것이다. 중화제국이 멸망한 뒤 이형에 의해 정식 국가로 인정받았지만 이형도 이들의 사상이 위험함을 알기에 때를 잡아 토벌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 본인들도 이형이 언제까지나 내버려둘 리 없는 걸 알아서 이형을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 25만 대병력 사이에 있을 때는 감히 건드릴 수 없지만 3만 기병대라면 충분히 가망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 이때 밝혀진 태평천국의 병력은 5만여 명이지만 러시아의 후원을 받아 무장한 극소수를 제외하면 질적으로도 형편없다. 게다가 태평천국 간부들 중 군을 다루는 소양이 있던 간부들은 거의 다 청나라와 중화제국과의 전쟁에서 죽거나 토사구팽되어 사라졌기에 군의 질적 하락은 더욱 심각했다. 전성기 시절 백만대군을 몰고 증국번과 이홍장과도 싸우던 시절이 아니었던 것. 이후 이형이 장안에서 당한 암습에 의해 부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오보를 접한 홍천귀복은 이를 반기며 대한제국의 뒤통수를 치려한다. 인재가 없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스스로가 진정한 현인신이란 근거없는 자신감을 믿고 출정을 명했고, 태평천국은 쓰촨 일대의 총력을 모아 구성한 5만여 명의 군대를 기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쓰촨성 일대를 벗어나자마자 그들을 맞아준 것은 한성근 준장이 이끄는 대한제국군이었고, 애초에 병력의 질이 확연히 다르다 보니 태평천국군은 말 그대로 박살나며 홍천귀복이 겨우 도망칠 정도로 참패한다. 그러나 홍천귀복은 결국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쓰촨성에 진입해서 초계중이던 대한제국군에게 붙잡혀 참수되면서 태평천국이 공식적으로 항복을 선언,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4. 중화제국

조선과 대립하다 근대화와 내부정리의 실패로 멸망했다. 이홍장의 주위 사람들과 열강들이 이홍장을 부추겨서 건국한 국가로 수도는 남경이다. 이 과정에서 타이완 섬을 열강에게 넘겨야 했지만 독립 보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열강의 손을 빌려 독립한 것에 가깝고[14] 이홍장의 지지기반이 기득권층인지라 개혁을 펼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고 작중 언급된다. 이홍장은 장강을 넘어 북상해 북경 공략을 노리지만 조선군이 먼저 북경을 점령하고 프랑스를 비롯한 열강을 끌어들여 친열강 공친왕 정권을 수립해버렸기에 이홍장도 함부로 전쟁을 걸 수 없게 되었다.

일단은 장강 이남에서 개혁해 외세를 몰아낸 다음 다시 북상해서 청을 치겠다고 벼르지만 열강을 비롯한 주변국에선 모두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태평천국이 몰락하고 조선이 러시아 견제를 맡고 있는 현 상황에서 열강들이 지금까지처럼 지원해줄 가능성도 희박한 상황. 그나마도 지지층인 지주층은 근대화에 회의적인데다, 근대화의 이득은 하나도 못 보고 필요한 비용만 지불하는, 한 단어로 말해 수탈만 당한 농민들의 반발, 그리고 이런 반발을 교묘히 이용하는 태평천국의 게릴라 전술이 전국에서 벌어지며 내부 치안이 매우 심각하게 불안정하다. 거기다 근대화 속도가 더뎌지자 지식인층이 정권에서 등을 돌리고 있고, 대한제국의 근대화상에 매료된 지식인들은 친한파 인사로 심지어는 매국노로도 변하고 있다. 중산계층은 이런 중원 대륙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해 대한제국으로 귀화, 심지어 불법 이민마저 시도하는 이들마저 생겨나는 등 원역사에서의 남베트남 공화국을 연상케 한다.

이제는 중원 최강의 세력이란[15] 명칭이 무색할만큼 부실한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걸 뒤에서 영국이 조율해 줘야 하는데, 영국이 나몰라라 하고는 어떻게든 중화제국의 명줄만 붙잡아 놓기 위해 '멸청흥한'이라는 민족주의적 구호를 내세워 대책없이 호전론을 일으켜 내부의 반발을 외부로 돌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

이 사실을 공친왕을 통해서 알게 된 이형은 영길리 혐성에 제대로 질리면서 분노해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경제, 정치, 사회 모든 것이 청나라 시절보다 못함에도 오직 하나 군사력만큼은 능력있는 군벌이던 이홍장과 군인들이 세웠단 점과, 열강이 태평천국 잡으라고 준 지원 덕에 질적으론 대한제국에 밀리더라도 백만이 넘는 규모까지 종합적으로 따지면 동북아에서 명백히 최강 국가라는 것.[16]

여담으로 중화제국은 강남이 본거지인데, 영국의 장난질로 인해 폭발하게 될 민중들이 존재하고 거기에 더해 수도가 난징이라 독자들에게 오싹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중... 이듬해인 1871년 봄으로 넘어오면서 친영파와 영국인, 지주들이 쟁여놨던 쌀까지 전부 바닥났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인 듯했으나 중화제국군을 지원할 대규모의 군수물자와 구호물자를 실은 대영제국의 첫 번째 수송선단이 광저우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장의 기근이 해결된다 쳐도 굶주린 백성들의 분노를 잠시 미뤄둔 것에 불과할 뿐, 풍년 중의 기근을 일으킨 집권상류층에 대한 증오는 사라질 것이 아닌지라 이형은 중화제국 지도층이 분명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방출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대두시킬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전쟁은 이홍장의 중원통일이 아니라, 이홍장과 집권층이 살기위해 성난 민중을 애꿎게 전장으로 내모는 극악한 짓거리인 셈. 민란이 진압되고 나서 중원내전이 발발할 경우, 군재만큼은 뛰어난 이홍장과 그 수하들이 키운 '준 근대화된 병력 100만'이 민족주의 광풍을 타고 그 두세 배 이상으로 불어나는 건 시간문제인지라 러시아와 중화제국의 남북 협공을 버틸 수 없는 대한제국과 범아시아 조약기구는 끝장이라는 걸 잘 아는 주인공이 미국을 통한 영국의 정권 교체를 추진함에 따라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청나라를 앞세운 대한제국에 의해 갈가리 찢어질 수도 있다.

결국에는 사실상 하나의 국가라 보기도 애매할 정도로 내부 군벌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데 그 군벌들도 민심을 다 잃어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만큼 규모만 크고 통솔되지 않았으며 엉뚱한 원망을 화풀이하기 위한 군단이라면 전쟁에서 어떤 꼴을 당할지 뻔한 노릇. 미국발 오보 이후 격노한 대영제국에게서 지원이 끊기자 민족주의 광풍에 휘말려 불가피하게 빨리 치르게 될 대외전쟁을 지속할 여건을 갖추려고 쓰촨 성으로 대표단을 보내 태평천국과 조건부 동맹을 맺는데, 여기서 청의 고관대작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입은 자와 러시아인을 보고 경악한다.

대전쟁이 임박한 시점에서는 250만이나 되는 병력(빙자한 도적떼)을 동원하는 등 아직 죽지 않았음을 어필하고 있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추수기인데도 저런 대병력을 긁어 모았다는 점과, 중화제국의 근대화는 나라 사정이 엉망진창이라 제대로 되지도 않았다(즉 병농분리조차 안 됐다)는 점. 그러니까 저 250만 대군은 쌀 추수해 봤자 어차피 그게 다 제대로 농민들에게 돌아가지도 않으니 추수를 아예 포기했을 경우의 뒷감당도 생각 안 하고 막 나간 결과[17]인 것이다. 이제 중화제국은 청을 무너뜨리고 기사회생하던지, 아니면 전쟁에서도 진 걸로도 모자라 그나마 있는 쌀도 추수 못 해서 아예 쫄쫄 굶주리게 생겨 분노 게이지가 MAX를 넘긴 농민들의 진노에 의해 무너지던지 둘 중 하나의 기로에 서 버린 셈.

결국 황하 일대에서 한청연합군과 대치해 운명을 건 천명대전을 시작한다. 이형의 예상보다 꽤나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수가 적어도 여전히 훨씬 강력한 프랑스 극동함대, 한 수 위의 대한제국군, 언제든지 백만단위로 부풀 잠재력을 지닌 청군을 상대로 당장 농민반군의 배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싸워야하는 살얼음판을 걷는 중.

이와중에 이형이 걸어오는 갖가지 심리전에 휘둘리면서 농락을 당하고 결국 전쟁에서 패하여 황제인 이홍장의 목이 달아나버렸다. 그것도 이형의 손에 의해서. 이제 남은 것은 '군벌들의 항복' 혹은 '후퇴 후 강남 각지에서의 난립'과 도적 떼가 된 농민반군의 화북 약탈뿐. 결국 군벌들의 항복[18]으로 난징에 무혈입성, 멸망한다.

5. 아홉 번국

중화제국은 멸망했지만 사천(쓰촨)지역[19]을 제외한 강남 군벌들은 아직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질적 차이가 막심해 대한제국군의 상대가 안 되지만 섣불리 싸웠다가는 강남 전체가 민족주의를 통해 뭉쳐 제2의 이홍장을 탄생시킬 우려가 있었다. 군벌들 또한 천명대전에서 대한제국의 압도적 우위를 확실하게 실감했기에 순순히 항복한다. 그러나 야망을 숨긴 게 뻔했기에 이형은 전주 이씨 종친들을 왕으로 임명하고 고대 주나라 중심의 체계를 새로 구축했다. 이형의 중원분할에 분노하는 유자들을 납득하게 만들기 위한 명분이기도 하지만 때문에 영토경계선도 초나라 지역이 제일 크다.

번국은 전국칠웅을 기준으로 진, 초, 정[20], 위, 제가 선정되었는데, 조나라와 연나라는 이미 청의 영토이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여기에 기존의 청나라와, 광동(월나라), 광서(장나라), 운남(전나라)을 각각 떼어내 총 9개의 번국이 세워졌다. 번왕들은 종친 중 실제 역사에서 왕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원역사에서 종친들은 친일파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번국의 왕실이 중심을 잡고 제국을 따라야 한다고 판단했고, 김홍집 주도의 교육체계가 잡힌 뒤 번왕들과 이들의 자손들에게 민족의식을 주입할 생각이다.[21] 분할건국 15년여가 지난 후에 점차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급속도로 번영하는 한반도에 비해 지지부진한 자국의 근대화에 불만을 가진 지식인들이 반 대한파가 되어 활동하기 시작하며 분리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분리주의자들은 수만 많지, 태생적으로 하나로 뭉칠 수 없는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로 묘사되는데 먼저 중원에 대한제국이 직접적으로 뭔가 압제를 가한다는 가시적인 증거가 없다. 이는 이형의 중원통치가 19세기식 식민통치가 아니라 하청을 돌리는 21세기식 간접착취라서다. 일제강점기처럼 한국 총독부가 설치되고 한국군 헌병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열강처럼 강력한 탄압을 가한 것도 아니고, 토지조사사업이나 화폐정리사업처럼 중원의 사업가들을 대놓고 차별탄압하는 정책이 실시된 것도 아니다. 대한제국은 말 그대로 앞서가는 기술과 발상, 국가간의 조약에 따라서 '합법적'으로 대가를 치르고 경제에서 우위를 점했을 뿐이다. 각국 번왕가와 조정은 대한제국에서 설치한 것이고 당연히 친한파지만, 나름 자국의 국익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적당히 투자수익이나 중간유통 마진을 떼먹는 수익형태라, 한국이 막대한 소득을 올리고는 있는데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질 않으니 민중의 분노도 적다.

그 예시가 조약기구의 1-2인자인 대한과 일본이 반대한 장강 댐 건설을 초-위-진이 합심해 밀어붙인 사례다.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기술진들이 모두 장강의 물살을 보고는 난색을 표해 유야무야되었지만, 이는 조약기구의 효용성이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즉, 대한제국이 아무리 맹약의 중심이래도 머리수로 밀어붙이면 의견을 통과시킬 수 있다는 증거가 된 것. 물론 대한제국이 거부권을 사용한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대한제국도 분리주의자들에게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정말 큰일이 아니면 거부권을 발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작중에서 거부권이 발동된 것은 일본이 건의한 범아시아 조약의 통화를 원화 기반 공동화폐로 통일하자는 내용뿐이다.[22] 이후 조약기구는 청이 만주어 학회를 설립하고 진의 요청으로 합종군의 대민지원 투입이 가능해지는 등 각국의 필요에 따라 제대로 운영되고 있다.

게다가 1-20년 전의 천명대전의 원인이었던 강남 대기근을 일으킨 중화제국과 중원에 깊은 상흔을 남긴 태평천국이 내건 구호가 알다시피 멸청흥한이기에, 결국 이들이 작정하고 봉기해도 테러건 뭐건 할 대상이 없다. 찾아봐야 대한제국과 관련된 일을 해서 대한의 국익에 도움을 주는 한인들이 피해자가 된다.

더욱이 본래부터 한족이 아닌 장족이나 회족같은 중원의 소수민족들은 한족-만주족 국가에게 연달아 탄압당하는 신세였다가 대한제국 덕에 종교와 문화의 자유를 보장받았기에 이들의 활동에 반감을 품고 있다. 한족에 의해 중원이 지배되는 순간 다시 탄압받을 것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 치하에서는 입 다물고 지내던 이들이 유화책을 펼치는 대한제국에게 대드는 것을 보고 약강강약이냐면서 조롱하면 역린을 찔린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할말이 없다고 한다. 만주족을 몰아낸 게 조선군-한국군이라 중화 한족들로선 '그래서 한국이 니들을 해방시킬 때 니들은 뭐 했냐?' 라는 핀잔에 대꾸할 군공이 없다. 한족주의자들끼리의 논쟁을 보면 각국의 문자정책도 다른 모양이다. 순한문 그대로 쓰는 나라와, 한글을 혼용해 쓰는 나라가 있는 모양.

또한 이들 분리주의자들은 공통목표부터 애매모호하다. 조약기구에서 탈퇴하자는 이들과 조약기구에서 권리확충과 자치권 보유를 노리자는 학자들이 첨예히 대립중이고, 각 번국이 각기 다른 국책에 몰두하면서 고향 국가에 따라 파벌이 갈려 자기들끼리도 싸우느라 바쁘다. 애당초 굳이 대한제국과 전면 대립할 필요성부터 민중들과 동포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싸울수록 서로 한민족이란 인식은 희미해져 간다. 이런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형의 계획 1단계였다.

제 2단계는 바로 진시황릉 발굴을 통해 진나라 사람들에게 한족이 아닌 별개의 민족 정체성 형성이었다. 때문에 진시황릉 발굴은 황제 이형이 흑룡이 된 진시황제가 무리한 천하통일을 후회하면서 조선 황제의 꿈 속에 나타나서 능의 위치를 알려주었다는 괴력난신스러운 주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진짜로 황릉이 발견되자 대륙 전체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한국 황제는 진시황제가 자기 목숨을 구해주었다면서 직접 찾아가 제사까지 지내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 모습에 국뽕이 차오른 진나라 국민들은 진시황제를 자신들의 영웅으로 치켜세우기 시작했고, 은연중에 진시황의 진나라를 다음 대에 무너뜨린 유방의 한나라, 항우의 초나라를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이에 가장 앞장서는 것이 대부분 반한주의자 겸 분리주의자인 진나라 민족주의자들이라는 것이 한족 민족주의자들에게 치명타였다.

진나라 민족주의자들은 분리주의 운동보다도 진시황제 신성화에 노력했다. 진시황제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항우 따위는 산채로 회를 쳤을 것이고, 한나라의 유가 사상 탓에 중원이 약해졌다고 주장했다. 법가는 유가보다 우수한 통치사상이며, 분서갱유는 원래 통일제국 초기에는 벌어져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진시황릉을 부정하는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이들의 원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초나라가 진나라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항우가 수천년 전 춘추전국시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전국시대대로 분봉받아 초라는 국명을 단 국민들이 항우를 욕하고 초나라를 깎아내리는 진나라 사람들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의 국가감정은 순식간에 극도로 악화되었고, 합동 훈련 중에는 기어이 부상자만 천명이 넘게 발생하는 패싸움으로 번졌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질소비료 개발로 인해 시작된 신농유업 정책은 아주 전체의 호황과 열기를 끌어내면서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이 정책에 대해서도 쓰인 당소의[23]란 초나라 한족주의자 거두의 <대륙중화론> 출판은 한족주의자들의 분열과 몰락을 가속시켰다. 당소의는 대한의 황제는 명백히 중원을 분열시켰지만 분봉이란 행위 자체는 본래 중원의 천자국들에게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며 그 초인의 업적에는 감탄할 수밖에는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아주에서 전쟁은 사라졌으며, 열강들은 대한이 두려워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되었고, 각국마다 차이는 있어도 근대화는 분명히 진척되면서 중원을 포함한 아주는 발전하고 있었으며 중원은 대한보다 못한 입장이어도 유사시에 힘을 더할 때면 꽤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대한의 황제는 국고로도 모자라 사재까지 털어 식량농업기구와 아주연금기구의 관료와 학자들을 지원하고 독려해 전세계에 남을 만한 위업을 달성했으니 어디를 봐도 완벽한 중화의 천자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당소의는 한족은 범아주 조약기구와 한민족과의 협력을 통해 아주 전체를 중화의 색채로 물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선비족이나 거란족 등의 과거 중원을 호령했던 이민족들이 끝내 중원에 동화되었고 만주족과 몽골족도 비슷한 문제를 막기 위해 기를 쓰고 강경하게 나올 수밖에 없던 걸 생각하면 현실성이 없는 꿈나라 이야기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대륙중화론>은 이미 의견대립이 심하던 한족주의자들에게 폭탄이 터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동안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자존심과 양심으로 버텨오다 신농유업 사업으로 어떤 천자나 중원왕조보다 큰 업적을 세운 대한에게 저항할 의지를 잃고 대륙중화론과 당소의 노선을 도피처이자 변명삼아 따르면서 급속도로 변절해 사회적 출세를 목표로 삼게 된다. 그 대표로 나온 사람이 캉유웨이 였다는 인물선정이 또 웃음.

한족주의 학자의 사상교육 서적이긴 하나 범아주 조약기구와 대한제국의 패권을 인정, 강경하게 지지하는 대륙중화론은 천 오백만 부가 넘어가는 초대형 히트를 쳤고, 각 번국의 조정도 암암리에 이를 묵인했다. 이미 대한제국의 문화를 깊게 침투시키고 중원의 문물을 나라별로 분리해가는 계획이 잘 진행중인 각 번국 조정과 대한제국 입장에서는 흡수당하지 않을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고 한족 민족주의자들이 다른 국적을 달고 체제에 협조하는 편이 여러가지로 좋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백년쯤 지나면 아주의 문물은 한국(조선)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정도.

점차 줄어드는 세력과 늘어나는 이탈자에 다급해진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분열에 어떻게든 움직여 세를 키워보려 했지만 서로간의 분열로 인한 상호감시와 민심의 무호응으로 혁명은 계획조차 세워지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거두들이 변절하거나 발목을 잡힌 사이 젊어 혈기가 넘치지만 미숙하기 그지없는 청년들의 무차별 유혈투쟁이 벌어지면서 큰 혼란에 휩싸이자 민심은 무호응을 넘어 경멸과 분노로 변하게 된다.

건함경쟁이 시작하면서 각국 조정끼리도 동질감이 많이 사라진 모양. 서로에 대한 견제가 시작되었다. 대한 입장에서는 각국 민심이 그대로 반영되었단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유교 민주주의로 촉발된 혁명이 대한의 지원을 받아 각국은 정치적 변혁을 강제적으로 단행하게 되었다.

5.1. 반초동맹

초나라는 이형의 고의적인 계획 아래 드넓은 해안가를 비롯한 유용한 인구밀집지대와 전통의 대도시 남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분봉 전에 한국군이 군벌들을 철저히 토벌해 집권의 기틀을 마련한 진나라나, 한반도나 정주에 가까워 힘과 권위가 닿는 제와 위에 비하면 태평천국 사교도와 중화제국의 잔당이 숨어든 내륙은 건국하고도 한참 동안 통제하지 못했다. 결국 초국 내륙은 근대화를 비롯한 정부시책조차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한족주의와 공산당 등의 반정권 세력들이 숨어들게 되는, 극단 세력들의 근거지로 전락해 초의 발전을 저해하는 무거운 사슬이 되었다. 다만 덩치가 크다보니 내륙은 봉건지주 소작농 경제인데 해안 도시는 엄청난 무역량을 소화하며 여성권 운동까지 일어나고 있다. 좋게 봐도 나쁘게 봐도 덩치가 크고 인구가 많으니 격차가 엄청난 셈.

그럼에도 거대한 덩치와 유리한 입지를 활용해 국력을 신장한 초국 조정은 분봉 이후부터 내부의 극심한 혼란상에도 대외적으로는 번듯한 강국임을 과시하려 했다. 건국 20여년이 지난 1890년대에도 의회에서는 6개 정당이 싸우고 대륙중화론에 자극받은 극단세력의 테러가 이어짐에도 아주기구에서 권위 상승을 노리기 시작한다.

일본이 내부 분열로 신농유업에서 뒤쳐지자 중립을 지키는 대한제국 대신 그들을 비난한 것도 그 일환. 더욱이 내부의 혼돈상 속에서도 초나라는 남방의 번국과 월남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 강남의 토호들과 조정의 의견이 드물게도 일치한 순간이라고 하며, 당연히 남방국가들은 반발했다. 장국은 어느정도 숙였으나, 월국은 초의 간섭을 배제하려 했다. 그러나 아주 기구의 수장인 대한제국은 정한 선만 지킨다면 각국에 함부로 간섭하지 않았다. 월국은 홀로 저항하긴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만을 끌어들인다. 초와 직접 국경이 닿지는 않지만 역시 남방국가의 일원이던 대만은 국력과는 별개로 황제의 친형이자 범아주 조약기구의 초기 구성원으로 천명대전에도 참전했다는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 아주 합동 해군함 건조. 청해사업이었다. 아주의 바다를 책임질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일본과 패권국 대한은 각자 세척의 전함을 발주한다. 그리고 초국도 두척의 전함을 발주한다. 1890년대부터 월남의 가입에 발맞춰 번국을 얻고 싶던 초가 동남아에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독자적 대양함대를 얻으려 한 것이다. 대한이 선두에 선 질서 내에서 일인지하의 지위를 노리는 이 행위는 대한에게는 좀 걱정되는 수준밖에 안 됐지만,[29], 2인자를 자처하던 일본. 그 이상으로 초를 둘러싼 나라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이에 반초동맹의 수장인 대만의 동녕왕 이희는 장갑순양함을 발주하고 월국도 발주를 키우면서 초를 견제한다. 의도를 눈치챈 진국은 구축함 세 척을 주문해 월이나 대만에 맡긴다면서 힘을 보탠다. 이에 군사력 투자에 소극적이던 제나라도 전함을 주문, 청도 발주규모를 늘리면서 초를 포위하는 반초동맹이 아주에서 그 존재감을 알리게 된다.

초나라는 중원 번국 몇 개를 합친 수준의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처음부터 중원의 불만분자들을 모조리 쓸어넣으려는 설계였다. 의도대로, 초는 그 거대한 덩치와 혼란스러운 국내정세, 그를 덮으려는 국뽕 정책 등으로 다른 번국들과 대립한다. 한국이 확고한 1인자 자리를 굳혔고, 확고한 2위를 노리던 일본은 초나라에게 도전받고, 다른 번국들도 당장 초나라의 깡패짓이 무서워 한국에게 붙는 정치공학적 구조다.

6. 대륙 내의 지역


[1] 정확하게는 정저우 등을 비롯한 하남성 지대.[2] 통일되었던 중국분할했다는 점은 전국시대로 회귀하려 했던 역사상 전례와 비슷하지만, 천자라는 칭호만 안 쓰지 그 권위는 사실상 이형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명목상이나마 천자가 존재하고 각국의 제후들로부터 존중받던 춘추시대가 더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춘추시대의 허울뿐인 주나라 천자와 달리 이형은 그 어떤 번국도 반항할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권력과 무력이 막강하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직할령으로 삼은 곳이 주나라의 수도였던 낙읍 일대를 끼고 있는 하남성인 걸 보면 중원의 중앙이라는 지정학적 이점 외에도 역사성과 상징성까지 염두에 둔 듯하다.[3] 괜히 분리주의가 일어나는 국가에서 분리주의를 외치는 민족들을 대상으로 강제적으로라도 동화주의를 추진하는게 아니다. 이래야지 문화적 동질성을 구축하여 떨어져나갈 동인을 제거하고 나아가 민족성 자체를 말살시켜 아예 같은 민족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에 중국만 해도 민족성을 유지한 민족들은 분리주의가 강하거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민족들은 그렇지 않다. 예시로 한족에 동화되다시피한 만주족은 티베트인이나 위구르인과는 달리 분리주의가 없다.[4] 이 안에서 또 조선 세력과 동아시아 조약기구를 축출하고 과거 통일 중국으로 돌아가자는 과격파와 동아시아 조약기구에서 목소리를 키우고 자치권을 얻자는 온건파로 갈라졌다.[5] 강옹건성세를 거친 청나라의 통치 시스템은 그 강역 내에 있는 여러 세력들을 청의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정부가 아울러 통치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청나라 황제는 만주와 몽골의 대칸이자 한족들의 천자를 겸했다. 뿐만 아니라 만주와 몽골의 귀족들 대부분이 티베트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이들이 거느린 만주팔기와 몽골팔기를 통제하고자 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달라이 라마와 깊은 관계를 맺고 티베트(+티베트 불교)의 수호자를 자처했고, 사천/운남/귀주 등 서남 지역은 (청나라의 실질 화폐 경제를 이끄는)동전의 원료인 구리 등 광물이 매우 풍부했기 때문에, 그 일대의 유지격인 토사들의 우두머리를 청의 황제가 겸하다가 중앙집권에 골몰하던 옹정제 때 자치권을 회수하여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두는 등 동아시아에서 극히 드물지만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동군연합 체제로 제국을 운영해왔다.[6] 훗날 대만을 중국에 뺏기지 않겠다고 대만의 인구를 늘리려고 중화제국에서 닥치는 대로 쌀을 사들여 싼 값에 대만에 풀어 중화제국 내의 쌀값을 잔뜩 올려놓고는, 풍년이 되니까 또 안 사서 쌀을 갖고 있던 지주들과 상인들이 공급량을 줄이려고 창고째로 쌀을 불태웠다고 한다. 중농주의 사회인 동양, 특히 유교 문화권에서 쌀을 태우는 건 기독교도 앞에서 십자가 앞에 오줌 누기, 이슬람교도 앞에서 코란을 찢거나 불태우기와 비슷한 수준의 만행이라는 걸 고려하면 대영제국은 욕먹어도 할 말 없다. 게다가, 거기까지 안 가도 힘들여 농사를 지어서 풍년이 들었는데도 정작 내가 먹을 쌀은 없다는 모순된 현실에 눈이 안 뒤집힐 리가... 흉년이라면 이 탓을 흉년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누가 봐도 풍년인데 굶주린다는 것은 흉년 탓으로도 돌릴 수 없다.[7] 만약 이 유혈사태가 청을 넘어 대한제국까지 여파를 미치게 되면 아직 불안한 대한제국으로서는 당해낼 방도가 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당장의 이익을 포기하고 청을 지키기로 결정한 것.[8] 원래는 그들도 청의 백성인데, 그들을 구제하는 것조차 당당히 못하는 현실이 비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9] 한족에 대한 우월감과 자존심만 남은 만주계와 만주계에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던 한족계의 갈등이 원인으로 부대간 연계가 개판이 되고 거기에 더해 '설마 같은 민족인데 죽이기야 하겠냐.'라는 어설픈 한족 민족주의가 결정타를 날렸다. 물론 굶주림과 피냄새에 이성이 먼 중화제국군에겐 그딴 거 없었다.[10] 실제 역사의 홍수전은 하렘 안에 처박힌지 10년이 다 되가는 폐인에 이슬로 연명하고 하늘에서 군대를 끌고 오겠다고 지껄이던 광인이었다. 또한 고종이 즉위하던 시점의 태평천국은 상군 주력군이 천경을 포위하고 남방에선 회군과 초군이 밀고 들어오던 처지라서 소설처럼 사천으로 이주해서 살아난다는 것은 현실성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병력도 지지 세력도 없는 상황에서 남경 포위를 뚫고 상군이 장악한 장강과 호광을 돌파해 석달개를 조져버린 낙병장과 황팽년이 지키는 사천을 장악한다? 홍수전이 장각마냥 번개 폭풍을 일으켜도 힘든 일이다. 그리고 태평천국이 실시한 천조전무 제도는 지주와 부농의 지지를 얻기 위해 협조적인 이들에겐 관용을 베풀고 형식적으로만 이뤄지기도 하는 등, 매우 불철저하게 실시한 제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따라서 태평천국의 이주와 생존 성공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고증 오류가 심한 전개라 할 수 있다.[11] 이 때문에 이형이 흥선군을 움직여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을 선제적으로 실시했다.[12] 이 수단이 굉장히 골때리는 것이 난민들에게 '태평천국 XXX해 봐' 식으로 걸러내고 있다. 더 골 때리는 것은 태평천국이 교주 홍수전을 중심으로 한 사이비 종교를 국교로 해놓은 신정일치 국가인지라 상당히 효과적이라고..[13] 홍수전이 죽기 전까지 자신을 현인신 비슷한 존재로 격상시켜 자신이 죽더라도 결코 태평천국이 흔들리지 않게 조치를 취해 놓았다고 한다.[14] 청과 중화제국의 평화 협정 자리에서 이홍장이 '청에게는 허베이성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며 세를 과시하려 하자 공친왕이 '피차 겨뤄야할 것은 서로 모시고 있는 오랑캐들의 힘'이라고 비꼴 정도. 나라 사정이 이래서 이홍장으로서는 열강들이 강하게 반대하는 일은 할 수가 없다. 실제로 북경 공략이 바로 직전인데 열강들이 반대하자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을 정도.[15] 해설 공인으로 막 개막해 중원을 3등분했을 때까지만 해도 조선까지 포함해 동북아시아 최강을 다툴만한 세력이었다.[16] 차라리 완전히 폭발하여 내부에서 혁명이 일어나거나 중화제국 내부로 한정된 내전으로 터져버리면 낫겠지만, '중화제국 수뇌부가 살아보겠다고 끓어넘치는 민의를 받아들이려고 하면' 그 순간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수천만 단위의 생명을 앗아갈 천명쟁탈전이 확정된다. 게다가 이들은 이 풍년 속 기근이란 어이없는 재앙의 원흉인 영국 상인, 지주세력의 존재를 아주 잘 안다. 이형의 판단으로는 한번 폭주가 시작되는 순간, 준 근대화 군단 수준인 중화제국군 백만이 이백만 삼백만으로 늘어나는 건 아주 순식간일 것이라고 한다.[17] 전근대 시대 농민들에게 있어서 추수기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다. 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 지도층들이 어떻게든 병농분리를 이룩하고자 머리를 싸맸는지를 생각해 보자.[18] 아홉 번국으로 중국을 쪼갠다는 선언을 듣고 제발 자신을 번왕으로 삼아달라며 아부를 떤 것에 가깝다.[19] 태평천국 세력권. 위에 서술되다시피 허무하게 소탕되고, 이후 진나라가 들어선다.[20] 원래는 한나라. 대한제국과 명칭이 겹치기 때문에 이름이 바뀌었다. 나름대로 적절한 국명선택인게 한나라의 두 번째 수도인 신은 한나라가 정나라를 멸망시킨 후 옛 정나라 수도로 천도한뒤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21] 중국의 지속적인 분열을 위해 각 지역의 고유의 전통, 특색, 문화, 역사, 문자 등을 만들어 교육해야 할 것이다.[22] 대륙간 화폐가 통합될 경우 환율을 통한 경제력 조율이 불가능해져 부유국들에 부가 집중되고, 어느 한 국가에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다른 국가들도 연쇄적으로 휩쓸리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자세한 내용은 유로화 사태 문서 참고. 간단히 말하면 부가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거야말로 분리주의자들에게는 정말 좋은 건수다.[23] 실역사에서는 중화민국 1대, 20대 국무총리였으며 마지막에는 한간 취급당한 인사다.[24] 대한민국의 국호를 만든 인물.[25] 이 세계관속 공식적인 발굴계기는 대한제국 황제가 초여름밤에 꾼 악몽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작중에서 진시황릉 발굴 계기를 작가가 작중 조선의 실록이라는 형식으로 기술했다.[26] 진의 분리주의자들이 초에게 하는 말이 "그 커다란 땅이래봤자 다 지주들 것이고, 백성들도 거의가 소작농 신세면서 뭐가 그리 잘난 체냐?" 다.[27] 초국 땅에서의 범아시아 조약기구 육군 연합훈련이 끝난 뒤, 유흥가를 돌아다니던 진국 병사들과 초국 사람들 간에 붙은 시비가 커지면서 수천 명 단위(...)의 대규모 폭력사태로 번진 것.[28] 현재 장족의 명칭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壯이라는 민족명은 1948년에나 붙은 것이고 그 이전에는 동(獞)족이었다. 물론 獞은 야생 들개를 뜻하기 때문에 쓸 수 없기는 하지만. 아마 여기서는 대한제국 황제가 친히 모욕적인 이름을 갈아버리고 내려준 은혜로운 민족명이 될지도. 참고로 중국 내에서 광서 지역을 일컬을때는 보통 桂라고 한다.[29] 당시 조선기술이 군함 건조 가능까지 오른 나라는 대한과 일본, 잘 쳐줘도 제나라 뿐이었다. 당연히 초가 무모하게 함대를 발주할수록 대한에 대한 의존도는 커진다. 걱정하는 건 초가 무모한 지출이나 군대 확충으로 내정이 불안해질 가능성에 더 가깝다. 다만 원 역사의 청나라도 나라꼴이 개판이지만 현찰박치기로 전함 함대 하나를 사들였음을 고려하면 초나라도 이정도 돈은 있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