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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8:24:13

진정표

"공명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충신이 아니요, 이밀의 진정표를 읽고 울지 않는 사람은 효자가 아니다."[1]

1. 개요2. 전문
2.1. 번역본2.2. 원본
3. 그 외

1. 개요

陳情表

중국 삼국시대 말, 서진 초의 관료 이밀(李密)이 진나라 태시 3년(268년)에 진무제의 부름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기 위해 바친 표. 표(表)란,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일컫는다. 관직 제수를 기어코 사양하는 까닭을 표로 밝히고 있는데, 중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효행명문으로 통용된다. 상기한대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며, 진정표를 읽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효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

2. 전문

공신력 있는 사이트에서 전문을 구하지 못한 바 정확하지 않거나 오자가 있을 수 있다. 한국어 번역 역시 최초 기여자가 임의와 윤문으로 고쳤으므로 더욱이 확실치 않다. 공신력 있는 기관의 인증된 전문 및 번역을 요함.

2.1. 번역본

신(臣) 밀[2]이 삼가 아룁니다.

신은 일찍이 불행하여 태어난 지 여섯 달만에 아비를 여의었습니다.

신의 나이 네 살에 외삼촌은 수절하겠다는 어머니의 뜻을 빼앗았고, 조모(祖母)이신 유씨께서 외롭고 병약한 것을 가엾게 여겨 친히 다독이며 길러주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병이 많았던 신은 아홉 살이 되도록 걷지 못하였고, 고되고 어렵게 성장하였습니다. 본래 신에게는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 형제조차 없으며, 가문이 쇠락하고 복이 없어 자식도 늦게야 두었습니다. 밖으로는 왕래할 가까운 친척도 없었고, 안으로는 부릴 만한 어린 종복도 없었습니다. 그저 외롭게 홀로 선 신의 몸과 그림자만이 서로 위로해주는 처지였습니다. 더욱이 조모께서도 이른날부터 투병하여 몸져 누워 계신지라 탕약을 지어드려야 하므로 곁에서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성스러운 조정을 받들고나서야 맑은 교화로 몸을 씻고 있습니다.

일전에 태수였던 규(逵)[3]가 신을 효렴으로 천거하고 그 후엔 자사 영(榮)[4]수재로 추천한 바를 압니다. 신으로서는 조모의 공양을 맡을 이 없어 그 명(命)을 미처 따르지 못했는데, 폐하께서는 특별히 조서를 내리시어 낭중직을 주셨고 거듭 성은을 내리시어 선마의 벼슬도 내려주셨습니다. 외람되게도 이 미천한 몸으로 동궁을 모시며 남은 평생 목숨 바쳐 일한다 한들 그 은혜에 차마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은 신의 사정을 적은 표문을 지어 아뢸 뿐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조서로 엄단하시어 신의 오만을 책망하셨고, 군현에서도 길에 오르라 신을 재촉하며, 각 주의 관리들 역시 문 앞에 와 말썽입니다. 신 역시 명을 받들어 속히 달려가고 싶으나, 조모의 병세가 날로 위독한 터라 잠시 사사로운 정을 따르고자 한다 하여도 허락하지 않으시니, 신은 나아가야 할지 물러나야 할지 몰라 참으로 어지럽게 허둥대고만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오늘날 조정은 효행을 앞세워 천하를 다스리므로 모든 늙은이들이 공경 속에 살고 있는데, 신의 입장은 심히 고통스럽습니다. 또한 신이 젊어서 거짓조정을 섬기며 성서의 관직에 있던것은 본디 출세와 영달을 바란 것이지 명예나 절개로 자랑할 바가 아니며, 이제 신은 망국의 포로로서 지극히도 천하고 비루한 자인데 과분하게도 발탁해주심에 후한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감히 주저하며 더 바라는 바가 있겠습니까?

다만 조모 유씨의 숨이 흡사 해가 서산에 기울 듯 위태로우므로 그 목숨이 위급하여 아침에 일어나 그날 저녁의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신에게 조모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며, 조모께서도 신이 없다면 여생을 마칠 수가 없습니다. 조모와 손자 두 사람이 서로의 목숨이 되어주고 있어 이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멀리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 밀은 올해 마흔넷이요, 조모 유씨는 올해가 아흔여섯입니다. 이는 신이 폐하께 충절을 다할 날은 길지만 조모 유씨의 은혜에 보답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니, 까마귀[烏鳥]에게도 어미에게 보답하려는 사사로운 마음[私情]이 있듯 신은 조모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하기를 바라옵니다. 신의 이러한 괴로운 처지를 촉 지방 사람들과 양주, 익주주목과 각 지방의 관리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실로 천지신명께서도 굽어보고 계십니다.

원컨대 폐하께오서는 어리석은 정성을 어여삐 여기시어 하찮은 신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바라건대 요행으로나마 조모께서 여생을 무사히 마치시거든, 신이 살아서는 목숨을 바칠 것이며 죽어서도 결초하겠나이다.

신,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한 채 삼가 절하며 표문을 지어 올립니다.

2.2. 원본

臣密言
신밀언

臣以險釁夙遭愍凶 生孩六月 慈父見背
신이험흔숙조민흉 생해육월 자부견배
行年四歲 舅奪母志 祖母劉閔臣孤弱 躬親撫養
행년사세 구탈모지 조모유민신고약 궁친무양
臣少多疾病九歲不行 零丁孤苦 至於成立
신소다질병구세불행 영정고고 지어성립
旣無叔伯 終鮮兄弟 門衰祚薄 晩有兒息
기무숙백 종선형제 문쇠조박 만유아식
外無朞功强近之親 內無應門五尺之童
외무기공강근지친 내무응문오척지동
焭焭孑立 形影相吊
경경혈립 형영상조
而劉夙嬰疾病 常在牀褥 臣侍湯藥 未嘗廢離
이유숙영질병 상재상욕 신시탕약 미상폐리
逮奉聖朝 沐浴淸化
체봉성조 목욕청화
前太守臣逵 察臣孝廉 後刺史臣榮 擧臣秀才
전태수신규 찰신효렴 후자사신영 거신수재
臣以供養無主 辭不赴命 會詔書特下 拜臣郞中 尋蒙國恩除臣洗馬
신이공양무주 사불부명 회조서특하 배신낭중 심몽국은제신선마
猥以微賤 當侍東宮 非臣隕首所能上報 臣具以表聞 辭不就職
외이미천 당시동궁 비신운수소능상보 신구이표문 사불취직
詔書切峻臣逋慢 郡縣逼迫催臣上道 州司臨門急於星火
조서절준신포만 군현핍박최신상도 주사임문급어성화
臣欲奉詔奔馳 則以劉病日篤
신욕봉조분치 즉[5]이유병일독
欲苟順私情 則告訴不許 臣之進退 實爲狼狽
욕구순사정 즉고소불허 신지진퇴 실위낭패
伏惟 聖朝以孝治天下 凡在故老猶蒙矜育 況臣孤苦 特爲尤甚
복유 성조이효치천하 범재고노유몽긍육 황신고고 특위우심
且臣少事僞朝 歷職郞署 本圖宦達不矜名節
차신소사위조 역직낭서 본도환달불긍명절
今臣亡國之賤俘至微至陋 過蒙拔擢寵命優渥 豈敢盤桓 有所希冀
금신망국지천부지미지루 과몽발탁총명우악 기감반환 유소희기
但以劉日薄西山氣息奄奄 人命危淺朝不慮夕
단이유일박서산기식엄엄 인명위천조불여석
臣無祖母無以至今日 祖母無臣無以終餘年
신무조모무이지금일 조모무신무이종여년
母孫二人更相爲命 是以區區不能廢遠
모손이인경상위명 이시구구불능폐원
臣密今年四十有四 祖母劉今九十有六
신밀금년사십유사 조모유금구십유육
是臣盡節於陛下之日長 報劉之日短也
시신진절어폐하지일장 보유지일단야
烏鳥私情[6] 願乞終養
오조사정 원걸종양
臣之辛苦非獨蜀之人士及二州牧伯所見明知 皇天后土實所共鑑
신지신고비독촉지인사급이주목백소견명지 황천후토실소공감
願陛下矜愍愚誠 廳臣微志
원폐하긍민우성 청신미지
庶劉僥倖卒保餘年 臣生當隕首 死當結草
서유요행졸보여년 신생당운수 사당결초
臣不勝怖懼之情謹拜表以聞
신불승포구지정근배표이문

3. 그 외


[1] 누가 처음 한 말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 두 가지에 당나라 때 문장가 한유(韓愈)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을 더해 중국 3대 문장이라고 평한다.[2] 출사표 문서에도 같은 부문에 적혀 있는데, 신하는 제왕에게 자신을 칭할 때 성씨를 붙일 수 없다.[3] 역시 신하라서 성을 적지 않았다. 가규와 한자는 같지만 생몰년(174~228)이 맞지 않으므로, 이름만 같은 다른 인물일 것이다.[4] 동영(董榮)으로 화양국지에는 동책(童策)으로 오기되었다.[5] 이때는 법 칙이 아니라 곧 즉으로 읽는다.[6] 이 네 글자가 그대로 고사성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