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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11:04:24

홍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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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초대 황제
홍광제 | 弘光帝
파일:弘光帝.jpg
출생 1607년 9월 5일 (음력 7월 15일)
사망 1646년 7월 1일 (음력 5월 9일, 38세)
묘호 질종(質宗) → 안종(安宗)
시호 성안황제(聖安皇帝) →
처천승도성경영철찬문비무선인도효간황제
(處天承道誠敬英哲纘文備武宣仁度孝簡皇帝)
연호 홍광(弘光)
주(朱)
유숭(由崧)
황후 효철간황후(孝哲簡皇后)[1]
효의황후(孝義皇后)[2]
재위기간 명 복왕
1643년 ~ 1644년
남명 황제
1644년 ~ 1645년

1. 개요2. 생애3. 사후 추존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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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명의 초대 황제.

묘호안종(安宗), 시호는 처천승도성경영철찬문비무선인광효간황제(處天承道誠敬英哲纘文備武宣仁度孝簡皇帝)였다. 휘는 유숭(由崧)이었으며, 연호가 홍광(弘光)이라 홍광제(弘光帝)라고 부른다. 제13대 신종 만력제의 손자이자 복왕 주상순(공종)의 장남이었으며 제16대 의종 숭정제사촌이었다.

2. 생애

아버지인 복왕 주상순은 1641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복왕부의 영지였던 낙양에 쳐들어왔을 때 사로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때 주유숭은 어머니 추씨와 함께 남쪽으로 피신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남경에 왔을 때 낡고 더러운 각건을 쓰고, 부채를 부치는 모습이 마치 시골 부자 정도로만 보였다고 한다.

홍광제는 무능했으나, 단지 황족 생존자 중 서열이 높고, 나이가 어리지 않다는 점이 감안되어 남명 정권의 초대 황제로 옹립되었다. 원래 숭정제의 황태자 주자랑이 있었으나, 이자성의 난 때 실종되었다가 전란 중에 살해되었다.[3] 어쨌든 태자 주자랑이 부재한 상태였으므로 일단 감국(섭정)으로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으로 즉위했다.

일부 신하들은 홍광제가 인간적인 결함 7가지가 있다는 이유로 옹립에 반대했는데 과연 홍광제는 재위 기간 1년 내내 정치엔 관심없고 사치와 향락만 즐기며[4] 후궁들을 뽑는데만 열을 올렸다.[5] 이러다보니 신하들은 홍광제를 촉한의 열조 소열제 유비의 아들이었던 후주 유선과 비슷하게 취급하며 무시했다고 한다.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동림당은 황제와 훈신들 탓만 했으나, 홍광제는 피난 조정에서조차 당쟁을 일삼는 동림당원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6].

마침내 1645년 청나라 남정군과의 교전 중에 패주하다가 청나라로 투항한 전유승(田維乘)과 마득공 등[7]에게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마침 남경이 함락된 날이 바로 그가 즉위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사실 이것도 좋게 봐준 기록이고, 청군이 장강을 도하했다는 소식에 조정 신료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도망쳤는데, 멀리 도망치지도 못해 황득공의 진영까지밖에 못 갔다는 말도 있다. 황득공은 이후 전사하고, 그 부하들이 살기 위해 청군에 투항하며 홍광제를 사로잡아 바쳤다.

홍광제는 모반죄로 감금당했다가 1646년 5월 23일 화살끈으로 교살되었다. 정달의 《야사무문》에 의하면 전유승과 마득공이 홍광제를 통나무에 묶어서 끌고 갔는데 그는 울면서 살려줄 것을 호소했으나 무시당했다. 화가 난 홍광제가 전웅의 목을 깨물어서 피가 흘렀으나 무용지물이었다고 한다.

하도 무능하고 어리석어서 남명을 다룬 사서들에는 심지어 그가 진짜 복왕 주상순의 아들이 아니라, 복왕의 신분을 사칭한 사기꾼이라는 내용까지 들어있을 정도다. 그래서 명말 청초의 유명한 시인인 오매촌(吳梅村)이 지은 문헌인 《녹초기문》(鹿樵紀聞)에 따르면, 당시 학자인 황종희(黃宗羲)와 전병등(錢秉鐙)은 이 복왕이 실제로는 이시독(李侍讀)인데, 복왕의 집안 일을 잘 알았고, 복왕의 금인을 훔쳐내어 복왕의 신분을 사칭한 것이라고 봤다. 황제의 신분조차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은 중국 역사상 아마도 유일무이할 것이다.

이렇게 황제의 정통성이 의심스러우니 홍광제의 치세때 남경으로 와서 자신이 진짜 황제이거나 혹은 황족이라고 우기는 사칭 사건들이 여럿 있었다. 먼저 대비(大悲)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남경으로 와서 스스로 숭정제라고 말했다. 관원들이 붙잡아서 심문을 해보니, 대비는 제왕의 후손으로 이미 서인으로 폐해진 인물이었고, 노왕과 은원이 있어 남경으로 와 노왕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왕지명(王之明) 사건도 있었다. 한 젊은이가 돌연 남경으로 와서, 스스로 숭정제의 태자 주자랑이라고 말했다. 각종 사료를 보면, 그의 이름은 왕지명인데,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에 들어오자 이를 피해 남경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런데 홍광제는 왕지명이 가짜 태자라고 폄하하면서 그를 죽이지 않고 그저 감옥에 가두었는데, 나중에 청나라 남명 토벌전의 선봉장 도도(多鐸)가 쳐들어오자 감옥 안에서 목졸려 죽었다. 헌데 정작 섭정왕 도르곤은 왕지명이 진짜 태자였다고 믿었다.[8]

한편 홍광제가 포로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갔을 때 도도(多鐸)도 그를 한심하게 여겼던지 그에게
"너는 숭정 황제의 사후에 충효를 다하지 않았으면서 감히 황제의 자리에 스스로 앉았다. 너의 선제에게는 태자가 있었는데, 태자가 왔는데도 왜 황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진상을 숨기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라고 욕을 했다. 도도는 진짜 황제가 되었어야 할 인물을 홍광제가 아니라 왕지명으로 봤으며, 홍광제를 진짜 황제가 아닌 사기꾼으로 취급했다. 이에 홍광제는 진땀만 흘릴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이런 홍광제의 무능함에 대해서는 반론도 더러 있다. 먼저, 홍광 시절의 사증이란 사람이 내시 임이량의 이야기를 듣고 지은 책인《통여잡기》에
"홍광제가 궁중에서 여러가지 웃긴 일들을 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는 혼용하고 방탕하여 망했으니 불쌍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훗날 임이량을 만났더니 그가 혼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제위에 오르고 싶지 않았으나 뭇 사람들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고, 한 가지 일도 그가 하자는대로 진행되지 않았으며, 그저 시키는대로 해서 망쳤다는 것이다."
라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홍광 연간의 급사중이었던 이청(李靑)은 홍광제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신하들이 모든 책임을 홍광제에게 떠넘겼다고 적었다. 그리고 홍광제가 남경성을 버리고 도망간 것에 대해서도 이청은 《삼원필기》에서 본래 홍광제는 태조(홍무제)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며[9] 끝까지 성에 남자고 했으나, 사례태감 한찬주의 권유로 마사영 등의 호위와 함께 성을 나갔다고 기록했다.[10]

3. 사후 추존

명나라 부흥군은 홍광제에게 성안황제(聖安皇帝)라는 시호를 추서하고, 묘호를 질종(質宗)이라 했다. 이에 따라 최종 묘호와 시호는 질종 독천계도장민경숙소문강무혜도의효혁황제(質宗 續天繼道莊愍敬肅昭文康武惠悼懿孝赧皇帝)라 했다. 그 뒤 영력제 주유랑은 다시 묘호를 질종에서 안종(安宗)으로 고치고, 시호는 처천승도성경영철찬문비무선인광효간황제(處天承道誠敬英哲纘文備武宣仁度孝簡皇帝)로 개시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청나라 황제의 연호 대신 그의 연호를 따서 사용하기도 했다.

4. 기타

제2대 건문제와 제7대 경태제, 제16대 숭정제에게 각각 혜종(惠宗), 대종(代宗), 의종(毅宗)의 묘호를 올린 인물이 바로 홍광제였다. 어찌 보면 홍광제가 한 일 중 그나마 좀 의미있는 일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청나라는 남명 정권이 올린 묘호를 인정하지 않아 기존에 부여되었던 시호가 계속 쓰였다. 또한 자살한 숭정제의 아들인 주자랑에게 헌민태자(獻愍太子)를, 아버지인 복왕 주상순에게 공황제(共皇帝)의 시호를 추서했다.

피난 조정이 남경에 자리잡게 되자, 정난의 변으로 상당 부분 파손된 뒤 재건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었던 남경 고궁[11]을 중건하려고 했다. 그러나 즉위한 지 불과 1년 만에 남경이 청나라군에게 함락되면서 중건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중단되었고, 이후 남경의 고궁은 다시는 중건되지 못했다.[12]

도현신의 저서인《중국의 판타지 백과사전》에서는 적군이 와도 주색만 탐했다며 악당으로 분류했다.


[1] 홍광제 즉위 이전에 사망, 생몰 연도나 행적은 미상.[2] 1641년 이자성의 난 중에 자살[3] 이자성이 죽였다는 소리도 있고, 남경으로 피난을 갔다가 정통성 문제를 우려한 홍광제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설도 있으며, 전란 중에 피살되었다는 설도 있는 등 말이 많다.[4] 홍광제는 술도 좋아했는데, 한 번은 신하인 유종주(劉宗周)가 그에게 술을 끊으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홍광제는 잔뜩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선생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앞으로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유종주는 미안해서 말을 바꾸어 "그저 매번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고, 그러자 홍광제는 금방 말을 바꾸어서 "경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앞으로는 한 잔만 마시겠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홍광제는 태감들을 시켜 엄청나게 큰 금술잔을 만들게 한 다음, 이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서 절반 정도 마시고 내려놓으면, 주위에 있던 사람이 가득 채운 후, 아직 다 마신 것은 아니니 한 잔은 안되었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오히려 마시는 술의 양이 예전보다 늘어났다는 것이다.#[5] 그와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 번은 설날 전 날, 홍광제가 갑자기 신하들을 소집했다. 신하들은 계속된 패전으로 홍광제의 심기가 불편해서 그러는 것으로 생각하여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는 말들을 끄집어 냈다. 그러나 이 황제는 그 말을 듣더니 "여러 신하들아, 짐은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이 없다네. 짐이 보니까 노래하고 극을 하는 아이들 중에 제대로 생긴 애가 없다. 그러니 좀 더 미녀들을 많이 뽑아서 후궁을 채워주면 좋겠다. 너희들은 빨리 이 일부터 처리해라"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신하들은 모두 그가 고민하는게 그런 것이었는지 생각하며 서로 얼굴만 바라보다가 흩어졌다고 한다.#[6] 사실 홍광제는 동림당과 엄당 같은 조정 내의 파벌들에 의해 옹립되었기 때문에 권위도 힘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도 무능한 인물이어서 조정 내의 파벌들을 통제할 능력도 없었다.[7] 전사한 황득공의 부하 장군들이었다.[8] 다만 왕지명 이후에도 자신이 숭정제의 태자라고 자칭한 사건들이 계속 벌어졌는데, 이를 가리켜 이른바 주삼태자 사건이라고 한다. 이 주삼태자 사건은 청나라 제4대 성조 강희제 때까지 청나라를 줄곧 괴롭혔는데, 왜냐하면 만약 주삼태자가 진짜로 밝혀진다면 이는 청나라의 중국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명나라 부흥을 주장할 수 있는 합법적인 명분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청 황실은 누가 주삼태자라는 소문만 들리면 진위여부도 확인해 보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렸다.#[9] 명나라 초기의 홍무제부터 건문제 연간까지는 남경(난징)을 수도로 했기 때문이다.[10] 여담으로 《명사》에 따르면, 마사영은 홍광제가 청나라에 투항한 후 이리저리 떠돌다가 청군에게 패배한 뒤 군중에서 참수당했다고 한다.[11] 명나라 초기 남경이 수도였던 시기의 황궁.[12] 그나마 청나라 시기에도 일부 전각이 남아 관청의 용도로 쓰이기는 했지만, 태평천국 운동 때 태평천국군이 새 궁궐을 짓는 데 사용하기 위해 전각 부재를 뜯어가 모든 전각이 사라졌고, 지금은 전각의 주춧돌 일부와 동, 서, 남문의 석축만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