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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22:59:00

채소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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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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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蔡)나라 21대 국군
소후
昭侯
희(姬)
채(蔡)
신(申), 갑(甲)
할아버지 채영후(蔡靈侯) 희반(姬般)
아버지 은태자(隱太子) 우(友)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491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18년 ~ 기원전 491년

1. 개요2. 생애
2.1. 낭와에게 잡히다2.2. 낭와에게 풀려나고 초나라에 복수하려 하다2.3. 천도로 인해 피살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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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채나라의 제21대 군주. 채도후의 동생. 채성후(蔡成侯)[1]의 아버지. 초(楚)나라의 영윤 낭와에게 잡혀 죄수 신세가 되었다가 풀려나 그 원한으로 오(吳)나라가 초나라를 멸하는 것을 도왔으나 초나라가 부흥해 결국 초나라에 패해 나라 위치가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옮겨진 곳에서 도읍을 옮기다가 기득권 층의 불만을 사서 죽게 된다. 동시대의 오자서, 부차, 구천에게 묻혀서 그러지 근성가이에 복수귀다.[2]

2. 생애

2.1. 낭와에게 잡히다

채 소후 10년(기원전 509년), 채 소후가 초나라에 입조해 당시 초나라 왕인 초소왕(楚昭王)을 알현했다. 채 소후는 초 소왕에게 패옥, 귀한 가죽 옷을 진상했다.[3] 그런데 초나라의 탐욕스러운 영윤 낭와가 그것을 달라 했으나 채 소후가 거절했다.[4] 이에 화가 난 낭와는 채 소후를 옥에 3년 동안 가두었다.[5] 그리고 역시 초 소왕을 알현하러 온 당(唐)나라[6]의 군주인 당성공(唐成公)이 초 소왕에게 명마를 진상했다. 이에 낭와는 또 그것이 탐나 당 성공에게 명마를 달라고 졸랐으나 당 성공이 거부하자 당 성공 또한 3년 간 가두었다.

2.2. 낭와에게 풀려나고 초나라에 복수하려 하다

채 소후 12년(기원전 507년), 당나라의 신하들이 낭와에게 명마를 바치자 낭와는 당 성공을 풀어주었다. 이에 채나라의 신하들도 낭와에게 가죽 옷과 패옥을 내놓으니 역시 석방되었다. 채소후는 귀국 뒤에 진(晉)나라에 구원을 청하면서 아들은 공자 원과 대부 자작을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진(晉)나라에서 뇌물을 요구하는 바람에[7] 채 소후는 그것을 내지 않아 진(晉)나라가 구원을 오지 않았다.

채 소후 13년(기원전 506년) 봄, 근성가이인 채 소후는 위(衛)나라의 군주 위영공과 소릉에서 회맹했다. 여름, 채나라는 진(晉)나라의 도움으로 심나라를 멸했다. 가을, 초 소왕은 그 행위에 크게 노해[8] 채나라를 포위했다. 당시 오나라의 대부 오자서는 초나라를 치려했다. 초나라의 간신 비무기[9]백주리의 아들 백극완을 죽일 때 그 아들 백비가 달아나 오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그리하여 합려와 오자서는 초나라를 칠 뜻을 굳혔다. 이에 채 소후는 오나라에 공자와 대부의 자식들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냈고, 오나라에게 초나라를 쳐달라고 했다. 겨울, 채 소후는 오왕 합려와 함께 초나라를 쳐부수고 영성으로 진입해 들어갔다.[10] 채소후는 낭와에게 한을 품어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런데, 낭와는 그것을 알고 정나라로 달아났다가 오군이 정나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채 소후 14년(기원전 505년) 여름, 채나라에 양식이 다하자 노나라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 가을, 오나라가 진(秦)나라의 원병과 동생인 부개의 반란으로 초나라를 떠나자 초 소왕이 영으로 돌아왔다.

채 소후 16년(기원전 503년), 초나라의 영윤 자서(子西)가 백성들이 울며, 초 소왕에게 채나라를 치자 하니 채 소후는 두려움을 느꼈다.

채 소후 25년(기원전 494년) 봄, 국력을 회복한 초 소왕은 병사를 일으켜 채나라를 치니 채나라 도성은 포위되었다. 이에 채 소후는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에 초 소왕이 장강[11]과 여수 사이로 옮겼다.[12]

2.3. 천도로 인해 피살되다

채 소후 26년(기원전 493년), 채 소후는 초나라에 두려움을 느끼고 오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오왕 부차는 채나라의 거리가 너무 멀어 도읍을 오나라와 가까운 곳으로 옮기라 했다. 채 소후는 신하들과 의논하지 않고 따르기로 했다. 11월, 오군이 채나라를 구원하러 오자 도읍을 주래로 옮겼다.

채 소후 28년(기원전 491년), 채 소후는 오나라로 갔는데, 대부들이 또 도읍을 옮길까 두려워해서 도적들을 시켜서 채 소후를 살해했다. 그리고는 그 도적을 죽여 무마하고는 아들인 공자 삭이 뒤를 잇게 하니 그가 바로 채 성후(蔡成侯)다.

[1] 채성후(蔡聲侯)와 구분하기 위해 한자를 병기한다.[2] 다만 국력의 한계 때문에도 부각되지 못한 감이 있다.[3] 채나라가 초나라 왕에게 바치기로 한 품목으로 보여진다.[4] 애초에 왕에게 진상한 물품을 영윤 즉 재상이 가로채는 것은 반역이다. 즉, 채 소후의 행동은 정당한 것이다.[5] 아무리 강대국의 재상이라지만, 제 아무리 초나라의 속국인 소국이라도 엄연히 군주를 잡아 가둔 것은 엄청난 무례다.[6] 통일 왕조 당(唐)나라가 아니다.[7] 범인은 당시 권력을 잡은 범씨와 중항씨였다.[8] 정확히는 영윤 낭와가.[9] 달리 비무극이라고도 한다.[10] 이렇듯 어이없게 초나라가 도성을 내준 이유는 방어보다는 공격에만 치중하는 전술 탓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은 금성탕지가 아니라 오히려 차지하기 쉬울 정도로 성이 낮아 당시에 발달되지 못한 공성전 전술로도 쉽게 함락된 것이다.[11] 당시 명칭은 강수(江水)[12] 즉 초나라는 채나라를 아예 속국 정도가 아니라 보호국으로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