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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정협 부주석 | ||
정체 | 蔡廷鍇 | |
간체 | 蔡廷锴 | |
한국식 독음 | 채정개 | |
영문 | Cai Tingkai | |
자 | 현초(賢初) | |
출생 | 1892년 4월 15일 청나라 광둥성 뤄딩현 | |
사망 | 1968년 4월 25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
학력 | 없음 | |
직업 | 군인, 정치가 |
1. 개요
중화민국의 군인, 19로군을 지휘하여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활약했으나 복건사변을 계기로 장제스에게 반기를 들고 추방자 신세가 되었다. 국공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합류했다.鍇와 諧자가 비슷해서 그런지 채정해로 잘못 표기된 곳이 자주 보인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2년, 광동성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기에는 공부를 하였으나 1909년 광동신군에 입대함으로 군문에 들었다. 1920년, 2차 광동군정부가 수립되자 월군 참모장 등갱의 휘하에 들어가 리지선의 건국월군 1사단 4단 단장 천밍수의 부하가 되었다.1925년, 국민정부와 국민혁명군이 수립되고 천밍수가 4군 10사단장으로 승진하면서 차이팅카이는 10사단 28단 단장이 되었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자 4군은 호남 전선에서 큰 공을 세워서 철군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난창 군무선후회의 이후 3개 군으로 확대개편되었다. 이때 천밍수가 11군 군장으로 승진하였고 차이팅카이는 24사단 부사단장이 되었다. 1927년 4월, 탕성즈의 압력으로 천밍수가 우한 국민정부를 이탈하여 장제스에게 합류하자 차이팅카이는 잔류한 11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927년 8월, 탕성즈의 지시에 따라 난징 공격을 준비했으나 중국공산당의 주도로 난창 폭동이 발발하자 차이팅카이는 10사단을 이끌고 여기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난창 폭동을 지지해줄 것으로 예상되었던 장파쿠이가 토벌에 나서자 아무래도 잘못 끼어들었다는 생각에 부대 훈시를 한다는 명목으로 공산군에게서 이탈하여 다시 천밍수에게 합류했다. 이때 상당수의 부하들이 홍군으로 빠져나가면서 타격을 입었다.
2.2. 반장전쟁과 1차 양광사변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성공한 후, 1929년 편견회의의 결정에 따라 11군이 1군, 1개 독립여단으로 축소되자 독립여단장이 되었다. 이후 독립여단장이 60사단으로 확충되면서 60사단장이 되었고 8로군 총지휘 천지탕의 지휘를 받으며 1차 장계전쟁, 2차 장계전쟁 중에 리쭝런, 바이충시, 장파쿠이의 부대와 교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천지탕은 차이팅카이와 장광나이의 부대를 독립시킬 것을 건의했고, 이에 따라 차이팅카이의 60사단은 장광나이의 61사단과 함께 19로군으로 편제되었다. 차이팅카이는 19로군 군장에 임명되었다.1930년, 마오쩌둥의 강서 소비에트가 강성해짐에 따라 19로군은 강서성으로 이동하여 공산군과 교전했다. 1930년, 강서성 정부주석 겸 9로군 총지휘, 난창 행영 주임 루디핑의 휘하에서 제1차 초공작전에 참여했으나 장휘찬의 18사단 등이 참패하면서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31년 제3차 초공작전과 제4차 초공작전에서 공산군과 여러번 교전했고 특히 3차 초공작전 중에 정부군을 얕잡아보고 추격해오는 홍군을 크게 격퇴하면서 홍군의 기세를 꺾어놓았다. 1931년 1차 양광사변이 발생하자 내정 반대를 주장하며 천지탕과 대립했다. 이후 장제스는 천밍수를 통해 19로군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천지탕은 천지탕대로 19로군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1931년 5월, 차이팅카이는 장제스 지지를 통전했다.
한편 일본에 망명했다가 난징을 통해 귀국한 천밍수는 토적우익군단총지휘에 취임하여 공산당을 토벌할 것을 선언했고 차이팅카이도 한동안은 공산군 토벌에 집중하였다. 그러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거국적인 협력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장제스는 광동파를 달래기 위해 천밍수를 경호위수사령장관 겸 송호경비사령에 임명하였다. 광저우 국민정부 측의 대표들이 난징을 방문하게 되자 광동 측은 안전보장을 위해 19로군의 배치를 요구하였고 10월 11일, 천밍수의 명령을 받고 차이팅카이는 19로군 예하 60, 61, 78사단을 난징-상하이 가도에 배치하여 광동측 인사들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결국 1931년 12월 15일, 장제스가 하야하고 쑨커가 행정원장에 취임함으로 내전은 종식되었으나 쑨커 내각은 한달만에 총사퇴하고 1월 28일, 왕징웨이가 행정원장에 취임함으로 장왕합작 체제가 수립되었다.
2.3. 반장활동
1932년 1월 28일, 제1차 상하이 사변이 터졌는데 차이팅카이는 민중에게 항전을 호소하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19로군을 지휘하여 일본군에 용맹히 맞서 싸워 장즈중의 5군과 함께 세차례나 일본군을 격퇴, 항일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일본군의 4차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송호정전협정 체결 이후 일본군이 항일 성향이 강한 19로군을 상하이에서 빼내라고 요구함에 따라 1932년 7월, 복건성으로 이동조치되었다. 복건성에 진주한 이후 제4차 초공작전에 투입되어 위한머우와 함께 대별산맥의 공산군을 소탕하였으며 복건성의 내정에 있어서는 복건의 일본 상품 보이콧 운동, 반일 민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일본 지폐 소각, 배일전단 배포 등 항일운동을 진행하였다.쑹칭링과 차이팅카이 |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이 실시되자 동로군 6개 사단을 이끌고 복건성 쪽의 봉쇄를 맡았으나 1933년, 장광나이, 리지선, 천밍수와 함께 복건사변을 일으켜 중화공화국을 수립하고 인민혁명정부 위원에 취임했으나 장제스의 반격으로 50여일만에 박살나고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하지만 상하이 사변에서의 분투 덕분에 미국의 화교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해외에서 반장활동을 하다가 1936년 2차 양광사변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호응하였고 쑹칭링이 주도한 상하이시 각계 구국연합회에 참여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반장활동을 중단하고 16집단군 사령관, 26집단군 사령관으로 항전을 수행했다. 1940년 26집단군 사령관에서 사임한 후 광동성에서 항일 유격전을 지휘했다.
1949년, 신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한 차이팅카이 |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4월 14일, 리지선, 허샹닝과 함께 광저우에서 중국 국민당 민주촉진회를 수립하여 다시 반장활동을 재개, 국민당 일당독재를 종식시키고 거국일치의 민주연합 정부 수립을 호소했다. 1948년 1월 1일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가 수립되자 중앙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신정치협상회의 2차 전체회의에서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2.4. 말년
1949년 신정치협상회의에서 중앙인민정부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인민지원군 위문단의 일원으로 방북하였다.1954년 9월, 1차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개최됨에 따라 정협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2월 정협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이후 국방위원회 부주석,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부주석 등을 역임했다. 1957년 일본을 방문하여 제3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석했다.
1968년 베이징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
3. 가족
아내는 2명이었다.딸 차이샤오즈는 후베이대학을 졸업했고 이후 전국정협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4. 기타
고향 뤄딩시에는 차이팅카이의 이름을 딴 '팅카이기념중학교'가 있다.5. 매체에서
영화 건국대업에서는 홍콩배우 여명이 차이팅카이로 분했다.
6.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송경령 연구, 이양자, 일조각.
- 중국공산당역사 1권 하,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중국 근현대사, 회전광의, 일월서각.
- 중일외교사연구, 구정승미, 삼인.
- '湯山事件' 後의 政局과 蔣介石의 對應, 김영신, 중국학연구 50권,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중국학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