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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수/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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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1.1. 프로 데뷔 전

동래고등학교[1] - 연세대학교 출신이다.

부산금정초 4학년에 축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현재와 같은 유명세와는 달리, 중고교 시절 키가 컸지만 힘과 스피드가 부족했던 최용수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소극적인 선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래고 시절 감독이었던 박상인을 만나 기량에 눈을 떴고, 연세대 90학번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89학번 선배 김도훈을 비롯해 선배들에 가려 2학년까진 제대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다가, 당시 U-20 대표팀 감독이었던 박상인의 추천으로 경기 감각을 회복했고, 3학년부터 김호곤 당시 연대 감독 아래 대학 최고의 공격수로 우뚝선다.

1.2. LG 치타스 / 안양 LG 치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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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K리그 드래프트에서 2차 지명을 받으며 LG 치타스에 입단한다.

1.2.1. 1994 시즌

신인임에도 등번호 10번을 달았다. 새로 부임한 조영증 감독이 이끄는 구단 세대교체의 핵심으로 중용됐다.

리그 기준으로 29경기 9골 4도움을 기록했다. 이는 윤상철에 이어 팀 내 득점 2위이며, 리그 득점 및 공격 포인트 5위를 차지한 기록이다. 그만큼 신인으로서 인상적인 기량을 보였고, 아디다스컵을 포함해 총 35경기 10골 7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1.2.2. 1995 시즌

등번호를 9번으로 옮겼다.

지난 시즌 리그 득점왕인 윤상철이 부진했기 때문에 2년 차부터 팀의 핵심으로서 공격을 이끌어야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러나, 비쇼베츠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에 차출되느라 리그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리그와 리그컵을 포함해 28경기 11골 2도움을 기록했으나, 팀의 부진을 막진 못했다.

1.2.3. 1996 시즌

등번호를 10번으로 다시 변경했다.

1996 애틀란타 올림픽에 출전하느라, [2]리그를 절반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잦은 대표팀 차출로 인해 팀과의 호흡이 맞지 않았고, 안양에서 가장 부진한 시즌이 됐다.

1.2.4. 상무 축구단 (군 복무)

올림픽과 리그에서 한계에 부딪힌 최용수는 1996년 12월 논산훈련소에 입대, 훈련후 상무에서 군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상무는 실업팀이라 리그에 대한 부담이 없어 국가대표에 전념하게 되어 폭팔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1999년 2월에 전역했다.

1.2.5. 1999 시즌

1999년 2월 22일에 전역하며 팀에 복귀했다. 전역 후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입단 테스트 제의를 받고 김도근과 같이 런던행 비행기에 탑승했으나 낚시였다. 분명히 입단 테스트랑 메디컬 테스트까지는 받았는데 왠지 모르게 컴백. 본인도 왜 그때 입단을 못한 건지 영문을 모르고 있다.[3][4]

결국 안양으로 복귀했고, 등번호 10번을 다시 달게 됐다.

새로 부임한 조광래 감독 아래 팀 주전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후반기 강준호가 경기에 자주 나서지 못하자 임시 주장직을 역임했고, 99 아디다스 코리아컵에서 4경기 2골로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리그컵 포함해 27경기 14골 4도움을 기록했고, 리그에서만 12골을 기록해 샤샤, 안정환에 이어 득점 3위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1.2.6. 2000 시즌

2000년을 앞두고 공식 주장으로 선임됐다. 그리고 리그와 두 개의 리그컵을 포함해 34경기 14골 10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안양 연고 첫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우승과 더불어 2000년 K리그에서 득점 2위 도움 3위, 공격 포인트 1위를 차지했고, 총 81표 중 66표를 얻어 14표에 그친 대학 선배 김도훈을 제치고 K-리그 MVP를 따낸다. 이흥실, 김주성, 고정운, 신태용에 이어 역대 다섯 번째 신인왕 출신 MVP가 됐다.

당시 부주장이었던 이영표의 증언에 의하면 '무조건 용수한테 공을 보내!'가 전략일 만큼 조광래의 안양 시절 독보적인 에이스로 활약했다.

1.3. 제프 유나이티드

파일:attachment/Choi_Yong-Soo_JEF_United_Ichihara.jpg
2000년 말, 이적료 1억엔, 연봉 2억엔을 포함해 총 3억엔이라는, K리그에서 J리그로 넘어간 선수 중 역대 최고 대우를 받으며 J리그로 넘어간다. 등번호는 10번.

1.3.1. 2001 시즌

이적 첫 해에 17골로 득점 2위를 기록하였고, J리그 올스타 동군 팀 선정돼 후반 교체 투입됐다. 이때 당시 본인의 인터뷰 등을 보면 초반에 전혀 패스가 안 오는 등 심리적으로 팀원들에게 많이 서먹했던 듯했으나[5] 비 오는 날 첫 골을 넣은 뒤 그런 것이 없어졌다고 했다. 당시 전술로 보나 실적으로 보나 최용수 중심으로 모든 공격을 펼쳤다.

간략하게 그 시절 영상

1.3.2. 2002 시즌

2002년에는 J리그 8천번째 골을 넣는 등 활약을 펼쳤다. 웃기는건 이때 월드컵 전 J리그 시합에서 월드컵의 미국전과 비슷한 장면이 있었지만 이때는 독수리가 먹이를 낚이채는듯한 화려한 골을 넣었다. 하라는 월드컵에서는 날렷지만 이때 월드컵이 끝나고 4경기에서 6골을 넣는 등 득점력이 발군에 가까웠으나 문제는 이미 그리도 그리던 한일 월드컵은 끝났다.

1.3.3. 2003 시즌

2003년에서도 팀내 6-7할에 가까운 골을 넣으며 제프 이치하라의 3년간 에이스로 군림했다. 이때 개막전에 골을 넣고 다음 시합과 그 다음 시합에 해트트릭을 기록해 이 달의 아시아 선수에도 뽑혔다. 니코니코동화에서도 제프의 시합 등에서 오래 전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최용수보다 존재감 넘치는 공격수는 거의 없다.", "한국은 최용수 이후로 이렇다 할 공격수가 없지."라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8월까지 12골로 득점 공동 선수를 달리며 2년 만에 J리그 올스타에 뽑혔고, 선발 출전했다. 특히, 동군 공격수 중 최다 득표로 올스타전에 뽑힐 만큼,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받고 있었다. 지금도 최용수는 제프 유나이티드에서 팀의 레전드로 인정을 받는다.[6]2022년에는 구단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선정될 정도.#

1.3.4. 교토 퍼플 상가 (임대)

2003년 말 교토에서 당시 임대료 1억엔에 연봉 2억엔을 보장하며 J2리그로 이적했다. 등번호는 21번이며, 시즌 도중에 부상이 있기는 했으나 주장도 겸임할 만큼 많은 신뢰를 받고 많은 골을 넣었으나 팀이 6위로 승격하지 못해 아쉬운 한 해였다.

결국 승격에 실패한 팀이 시즌 종료 후 고액 연봉자인 최용수의 이적을 막지 않으며 1년 만에 팀을 떠나게 됐다.

1.4. 주빌로 이와타

감바 오사카산프레체 히로시마와 더 일찍 협상했지만, 연봉과 계약 기간에서 이견을 보였고, 결국 이적료 8천만엔에 1년 계약으로 주빌로 이와타에 합류했다. 연봉은 한참 깎인 8천5백만엔.

시즌 전부터 부상을 달고 시작하는 등,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하며 15경기에 나서 1골을 넣는데 그쳤다.

그럼에도, J리그에서 121경기 75골이라는 기록적인 득점 행진을 보였다.

1.5. FC 서울

2006년 FC 서울의 플레잉 코치로 입단했다. 등번호는 11번. 사실 예전에 고향 팀인 부산 아이파크에서 영입 시도를 했지만, 주저하지 않고 친정 팀으로 복귀를 선택했다.

정규리그 2경기에 출전하였고 같은 해 8월 5일 FC 도쿄와의 친선 경기에서 은퇴하였다. 이때당시 당시 나이 만 34세로 은퇴하기엔 약간 이른 나이였지만 최용수는 어머니가 출생 신고를 뒤늦게 해 실제 나이는 +2인데다 2004년 부상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본인도 은퇴에 후회가 없다고 밝혔다.

2. 국가대표 경력

2.1.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2.1.1.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대표팀에는 연세대 4학년 때 입성. 1995년 좋은 피지컬을 가진 선수를 좋아하는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의 특성으로 올림픽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해 1월 31일 1995 칼스버그컵 콜롬비아전에서 A매치에 데뷔하여 선제 결승골을 기록하였고, 2월 다이너스티컵에도 출전하였다.[7] 득점은 홍콩전 정도 뿐이었지만 많은 공격에서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상대를 괴롭혔다.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은 당시 역대 어느 때보다도 메달권 진입에 대한 기대를 높였고, 윤정환과 함께 올대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다.[8] 1차 지역 예선에서 홍콩과 인도네시아를 가볍게 쌈 싸먹고, 최종예선 조별리그의 사우디, 중국 전에서 어시스트 한 개로 그쳤으나 준결승 이라크 전에서 혼자 두 골을 뽑아내고 결승전에서 페널티킥까지 성공시켰다. 그러나 본선 와일드 카드로 나온 황선홍에 밀렸는지 1차전 가나 전에는 결장했다. 멕시코, 이탈리아 전에서 출장했으나 공격 포인트를 올리지는 못하고 한국도 8강 진출에 실패했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때 훗날 아챔에서 광저우 에버그란데의 감독으로 만날 파비오 칸나바로와 이때 선수로 만났다.

2.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2.1. 19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

차범근호 출범 후, 피지컬이 좋은 선수를 선호하는 차 감독의 특성으로 최용수를 코리아컵에 시험삼아 기용하게 된다. 이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결국 최용수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예선에서 주전 원톱으로 낙점되게 된다.[9]

월드컵 지역 예선 홍콩전 해트트릭을(관련 영상) 시작으로, 최종예선 카자흐스탄전 4골[10], 우즈베키스탄전 3골[11], 일본전 2어시스트로 7골 2어시스트를 몰아치며 바야흐로 최용수 시대를 여는가 했다. 1997년은 최용수 축구 인생의 리즈시절로 기억된다. 그때 당시 활약상 무엇보다 라이벌 일본에서 조차 부러워하는 스트라이커 였으며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체코와의 평가전 후(체코와의 평가전 하이라이트) 투톱 파트너로 복귀한 황선홍이 하필이면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입었고, 최용수 본인도 본선 첫 경기인 멕시코 전에서 결장했다. 당시 왜 최용수를 기용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차범근 감독과의 불화설까지 있을 정도였다.[12] 차범근 감독이 해명하기를 '황선홍 부상 후 투톱이 아닌 원톱으로 가야 했는데 원톱으로 최용수를 세우는 것보다 김도훈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했다.[13]# 그 후 네덜란드 전과 벨기에 전에서 출전했지만 좋은 활약을 보이지는 못한다.[14]

최용수는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와의 경기 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골 결정력이 네덜란드베르캄프에게 뒤지지 않고 네덜란드를 상대로 1승을 얻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과는 대패였다.마르세유 1승 기적은 있다

2.2.2.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 2000년 AFC 아시안컵

프랑스 월드컵 후 허정무가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1998년 12월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해 조별 예선부터 16강 쿠웨이트 전까지 팀 내 최다 골인 7골을 넣으며 공격진을 책임졌으나 8강에서 2명이나 퇴장당한 태국에게 2-1로 덜미를 잡혀 탈락했다. 그 뒤로 허정무 감독은 최용수를 더는 대표팀에 선발하지 않았다. 2000년 최용수는 K리그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여 그 해 K리그 우승과 MVP를 달성했지만 몇몇 평가전에만 불렀고,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최종 명단에는 제외했다. 심지어 중동에도 강하고 아시아 킬러인 그의 활약을 생각하면 참 미묘한 결과다. [15]

아시안컵 후 허정무 감독이 사퇴하면서 2000년 12월 20일 거스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대표팀 감독으로 내정된 직후 열린 일본과의 원정 친선 경기에서 최용수는 대표팀에 복귀했다.[16]

2.2.3.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2001년 히딩크호 초기 시절부터 불리면서 많은 시합을 치렀다. 컨페더레이션스 컵에도 출전했으나 호주전만 출장. 첫골은 9월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서 1골 1어시를 기록하고, 11월 크로아티아와의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했다. 히딩크의 자서전에서도 멋진 골이라고 평가 받는 골이었다. 그뒤 2002년 골드컵에서도 미국 전, 멕시코 전 등에 출장했으나 대회 도중 엔트리에서 사라졌다.[17] 3월 유럽 평가전 핀란드전에서 황선홍의 2번째골을 어시스트했다. 터키전에서도 선발 출장했으나 0-0으로 끝났다. 중국전도 선발 출장했으나 그리고 마지막 평가전인 프랑스전에서 후반 교체 출장해서 옆구리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본선인 2002년 월드컵에서도 뛰었으나,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이렇다 할 활약은 보이지 못했다. 32강 본선 조별리그 2차전 미국전에서 노마크 10m 안되는 거리에서 골대 위로 독수리 슛을 날리는 바람에 폭풍 같이 까였다.넣으라는 골 안넣고 홈런을 날린 홈런왕 최용수 절묘한 패스를 넣어줬던 이을용이 슛이 빗나가는 순간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장면이 백미(관련 동영상). 다만 이을용도 패스 타이밍과 패스 강도를 잘못 계산해서 준 탓도 있었다. 바로 줬으면 되는데 애매하게 시간을 끌다가 수비가 복귀할 시간을 벌어준 것도 있었고 패스도 굴려서 준 것이 아니라 지면에 떠서 왔다.[18]

파일:QOhK2f.gif
"야이! 이걸 못넣네요!"
신문선 해설위원
"일부러 저렇게 차기도 힘들어요"
송재익 캐스터

2002년 월드컵에서는 황선홍이 선발 원톱으로 낙점된 상황에서 안정환과 교체 멤버로 경쟁하던 상황이라 출전 기회도 별로 없었는데 저런 실수까지 저질러서 그 후로 경기에서 볼 수 없었다.[19] 미국전 후 히딩크 감독이 선수단 전원 휴식을 취하게 해도 혼자서 연습했다지만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16강 이탈리아전에는 후반 역전을 노리고 공격수만 5명을 세웠는데 이미 황선홍안정환이 모두 투입된 상태라 중앙 공격수인 최용수는 윙 포워드인 이천수, 차두리에게 밀려서 나오지 못했다.

월드컵 후에도, 국대 경기에 간혹 주전으로 나왔었는데, 코엘류 시절 콜롬비아전, 일본전, 우루과이전 전부 선발로 나왔으나 당시 지나치게 비대해져 많은 문제를 일으키던 중이었던 붉은 악마 중 일부는 국내에서의 A매치 시에 저 월드컵 때의 일을 빌미로 최용수가 공만 잡으면 야유를 보내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도중 2003년 1회 동아시아컵때 엔트리에 뽑혔으나 중국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보는날은 없게 되었다. 동아시아컵을 마지막으로 최용수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했다.[20]

2.3. 총평

1998 월드컵 예선에서 황선홍이 부상 중으로 없던 대표팀을 훌륭히 본선으로 이끌었던 공로에도 불구하고[21] 2002 월드컵의 영광의 그림자였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선수이다. 하지만 선수 시절 상대를 죽일 듯한 포스와 높은 제공권으로 기억하는 팬도 많다. 실제로 감독 시절 황선홍과 자주 부각되며 국대에서의 활약 또한 모두가 잊었다고 하기엔 기억하는 사람 또한 많다.

현역 때는 일본에서 가장 부러워하고[22] 무서워했던 공격수로 통했다. J리그에서의 활약이 워낙 좋았고[23] 95 다이너스티컵에서 홍콩전 외에는 최용수는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음에도 직접 대결 시 공격진에 제일 경계해야 할 선수라 하면서 패스만 보내면 일본 측 중계석에서 최용수만 부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웃기다. 그러나 이건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일본의 컴플렉스 덩어리 같은 선수인지라[24][25] 일본이 부러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2000년 겨울 친선전에서도 "드디어 그 최용수가 돌아왔습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선호하는 배번은 10번으로 소속팀에서나 국대에서나 별 일 없으면 항상 10번을 달고 뛰었다. 다만 LG 치타스에선 데뷔년도인 1994년과 1995년을 제외한 모든 해에 10번을 달았다가, 1995년 한 시즌만 선배 최대식에게 넘기고 잠시 9번을 달기도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11번을 달았다.[26] 그 후로도 2003년 콜롬비아 전을 제외하고 잠시 10번을 달았으나 은퇴할 때까지 11번으로 고정되었다. 교토 시절 21번, 이와타 시절 16번, FC서울에서 은퇴할 때는 11번을 달았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 기록

3.3. 수훈

4. 플레이 스타일


플레이 스타일은 과감한 몸싸움과 포스트 플레이를 주무기로 삼았던 전형적인 파워넘치는 타겟형 스트라이커로, 준수한 골 결정력과 능숙한 포스트 플레이, 뛰어난 제공권 등 현대 축구에서 스트라이커에게 요구하는 거의 모든 덕목을 갖췄다. 현 시대의 호베르투 피르미누(리버풀), 카림 벤제마(레알 마드리드)처럼 전형적인 최전방 공격수지만 수비수들을 끌고 공간을 창출하는 능력과 수비적으로 내려와 2선과 연계해주는 플레이만 결합되었다면 현대 축구에서 가장 교과서적인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먼저 184cm라는 신장을 가졌다. 타겟형 스트라이커치곤 그리 장신은 아니지만 당시 한국 축구에서는 꽤 큰 편이었다. 그런데 볼의 낙하 지점, 헤더 타이밍과 더불어 점프가 높아서 제공권은 국내를 넘어 아시아권으로 넓혀도 톱클래스였다. 특유의 내려찍는 헤더는 지금도 구사해 내는 선수가 전무하다.[27] 또한 준수한 주력과 포스트 플레이에 최적화된 몸싸움으로 전방에서 꿋꿋이 버텨주는 선수였으며 페널티 박스 내에서 최고의 폼을 구가했다.

이와 같은 플레이스타일, 그리고 본인의 전성기가 겹쳐 시너지효과를 일으킨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는 최다 득점을 기록하며 당시 부상 중이던 황선홍의 공백을 완벽히 메웠고 이와 같은 활약에 힘입어 당시 세계 공격수 국제대회 득점랭킹 9위에 오르기도 했다.당시 기사

다만 단점으로는, 같은 시기 대표팀의 주전 스트라이커 경쟁자였던 황선홍이나 김도훈에 비해 페널티 박스 밖에서의 움직임이 단조롭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플레이 기복이 심한 편이라서 잘 되는 날에는 언터쳐블이었지만 안 되는 날에는 완전히 버로우를 타는 날도 있었다.[28] 황선홍은 센스가 뛰어나며 윙 포워드 및 섀도우 스트라이커 쪽도 할 수 있고 최전방에서 움직이며 2선 공격수들에게 기회를 만들 수 있는 포워드[29], 김도훈은 감각이 뛰어나며 결정력을 가진 포워드라면 최용수는 발군의 파괴력을 가지며 가장 좋은 제공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원톱 외의 포지션은 불가했고 축구센스도 떨어지며 골 결정력 또한 위 둘에 비해 확연히 뛰어나다고 하기 힘들다. 그나마 말년에는 약간 처진 세컨드 스트라이커도 소화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면 최용수의 장점이 많이 사라지는 격인지라 자주 중용되는 포지션은 아니었다.

결국 미드필더들이 양질의 패스[30]를 넣어줘야 득점을 한다는 제약과 더불어, 세계적 강호를 상대로는 공격수를 한 명을 내려 허리를 두텁게 세우는 수밖에 없다는 전술적 한계까지 겹쳐 최전방에서 혼자 무기력하게 겉도는 경우가 잦았다.[31] 자연스럽게 팬들에겐 국내용이란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었다.[32] 그래서 뛰어난 미드필더가 많은 일본에서는 대단한 공격수로 칭송받았지만 대표팀에서는 결국 커리어의 정점에서 출전한 1998 월드컵 본선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첫 번째 경기인 멕시코전에는 김도훈이 쥐가 나서 다리에 침 치료를 받아가며 풀타임을 뛰는데도 에이스 취급을 받던 최용수를 아예 투입하지 않아 차범근 감독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고, 두 번째 경기인 네덜란드전은 출전하긴 했지만 누구 하나 못했다고 할 수 없을 수준으로 0:5로 무참하게 밀리던 경기였다. 그리고 대망의 예선 마지막 경기였던 벨기에전에서는 결정적인 찬스 2번[33]를 날려먹으며 지탄을 받았다. 당시 벨기에전이 끝나고 인터뷰도 거부하고 혼자 숙소에서 씩씩대고 있었는데 당시 끗발이 있던 신문선이 숙소 문 앞에서 '최용수'라고 나지막히 부르니 문을 열어주던 모습이 생방송을 타기도 했다.

그리고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공격수들이라 할 수 있는 황선홍, 최용수, 김도훈의 은퇴 후 한국은 최전방 포지션에 상당한 난항을 겪게 되는데, 안정환이 있긴 했지만 안정환 본인은 공격형 미드필더 내지 섀도우 스트라이커를 선호했으며, 대신 싸워줄 파이터 타입의 최전방 포지션이 비어서 유상철을 최전방으로 올리는 비정상적인 운영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후발 주자인 이동국의 경우 이러한 파이터형의 공격수로서의 플레이를 보여주는 것은 2000년대 중반에서야 가능했고[34] 2000년의 혹사와 2006년의 십자인대 파열 부상으로 인해 부침이 많았다. 그리고 이어서 청대부터 탄탄하게 성장한 조재진이 그 재목으로서 기대했으나, 알다시피 조재진은 득점력이 많이 부족해 기대에 걸맞은 선수도 아니었고 결국 잦은 부상으로 낙마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간 보여준 등지는 스킬[35]이나 제공권 장악[36]은 대한민국 축구에 큰 도움이 될 정도였다. 나중에 정조국이 청대 및 올림픽에서의 활약에 힘 입어 차세대 대표팀 공격수로 각광 받았으나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고, 그 후에 나온 박주영은 '드디어 한국 축구의 정통 공격수의 계보를 잇는 선수가 나왔구나' 싶었지만 선수로서 완성되어 갈 무렵에 아스널로 이적해 오히려 기량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서 거론된 석현준, 김신욱, 이정협 등은 황선홍, 최용수, 김도훈 급의 재능에 전혀 미치지 못했으며, 그나마 2018년부터 황의조가 부상했고, 그 뒷세대로는 조규성오세훈, 그리고 오현규가 등장해 명맥이 다시 이어지고 있는데, 오세훈이 일본으로 가서 계속 헤매는 동안 오현규가 조규성의 라이벌로 올라오고 있다.


[1] 축구 명가로 유명한 명문고다. 전통적으로 야구보다는 축구 쪽에 투자를 하는 학교. 박정태, 박지철 등을 배출해 낸 동래고등학교 야구부는 IMF를 맞아 해체되었지만 김호, 김호곤, 최용수, 윤성효등을 배출한 축구부는 아직까지 운영되고 있다.[2] 알다시피 한일 월드컵 개최지 결정일이 얼마 안남은 시점이었기에 일본보다 위에 서기 위해서 국대>클럽 우선으로 일정을 KFA가 짠걸로 추정된다 최종예선이 3-4월에 있었고 돌아와서 바로 국대와의 친선전 8월초엔 본선이 있기에 클럽에 집중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3] 훗날 이영표를 PSV에 내보낼 때 안양 LG 관계자의 인터뷰에 의하면 협상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임했다는 발언이 있다. 실제로 협상을 잘 했어도 웨스트햄 입단이 되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협상 자체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는 이야기. 덧붙여 김도근은 에이전트가 억지로 붙인 덤이었는데 워크퍼밋 발급 조건이 미달돼 갈 수도 없었다.[4] 젊어서는 이게 정말 한스러웠지만 나이들고 나서는 초탈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이 해외진출하려고 하면 웨스트햄으로 보내겠다고 자학개그를 자주 한다.[5] 연봉 이적료 등은 비쌌지만 당시 제프에 한국인은 처음인데다 갑자기 10번을 주고 이러면서 팀 내에서 견제가 들어간걸로 추정된다. 게다가 일본에 온지 얼마 안되니 일본어를 잘 할리도 없으니 견제가 심했지만 점차 전반기에만 독보적인 활약을 보이면서 팀원들이 마음을 연걸로 추정된다. 또 하나의 의견은 알다시피 최용수 자신은 잘 모르지만 내면을 모르면 인상이 무섭고 피지컬도 뛰어나기에 동료들이 무서워 한거일 가능성도 있다.[6] 최용수가 있을때 제프는 중위권에서 선두 경쟁을 하는 우승후보 였다. 게다가 일본인에 없는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관객에서는 OUR KOREAN EAGLE 崔龍洙라는 엄청 큰 현수막에 경기장에 최용수 팻말이 가장 많았다.[7] 국대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올림픽 대표라고 하는게 정상일 정도로 2-3군에 23세 이하였다. 이때 주장 완장도 차기도 했다.[8] 1996년 올림픽 대표는 1995년 초부터 발 빠르게 움직였는데, 지원도 1998년 국대나 2002년 국대에 맞먹을 정도로 남미나 북유럽과도 평가전을 자주 치렀다.[9] 당시 황선홍은 무릎 부상 재활 중으로 예선전에 아예 나서지 못했다가 본선 진출이 확정되고 복귀했다.[10] 홈에서 해트트릭, 원정에서 1골.[11] 홈에서 2골, 원정에서 1골.[12] 그러나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도 동반출연해 98 월드컵 얘기가 나왔을때 화기애애 했던점을 봤을때 서로 나쁜 감정은 없었던 듯 하다.[13] 후반전에 투입될만도 했지만, 하석주의 퇴장으로 기회조차 날라갔다.[14] 그나마 벨기에 전에서는 후반전 때 얻은 헤딩슛이 정말 아깝게 크로스 바를 넘어갔다.[15] 허정무 감독은 유소년 즉, 젊은 선수들을 대거 발굴하고 발탁하는데 이때문에 아마 명단에 뽑지않았을것으로 추측된다.[16] 당시 박항서 국가대표팀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고, 경기는 안정환의 선제골로 앞서갔으나, 김상식이 퇴장당해 10명으로 싸운 끝에 동점골을 내줘 1-1 무승부로 끝났다.[17] 하지만 이때부터 김도훈이동국은 최용수에게 밀려 2002 월드컵 최종 명단에서 결국 탈락했다.[18] 어디까지나 결과론이지만 전반에 이을용이 PK를 실축하지 않았고 이 골까지 들어갔다면 안정환의 동점골 포함 3대1로 승리를 할 수 있었으며 한국은 월드컵 경기에서 3골 이상을 넣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19] 안정환은 황선홍의 교체 멤버로 선발된 것이지만 황선홍의 폴란드전 허벅지 부상 후 미국전 머리부상까지 겹쳐 포르투갈전부터 스페인전까지는 안정환이 선발로 나왔다.[20] 공교롭게도 은퇴할때의 행적이 같은 10번인 박주영과 비슷한데 본인이 은퇴한다는 확실한 말은 안한체 은근슬쩍 대표팀에서 제외 되었다. 출전시합도 미묘하게 70시합 언저리인것도 비슷하고.[21] 어느정도였냐면 월드컵 본선을 단 한번의 위기감없이 완벽하게 진출한적이 2022 카타르 월드컵 예선 전까지는 그때가 유일했다.[22] 트루시에 시절 전성기를 달렸던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 유일하게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부러워하는 점이 최용수를 벤치 워머로 박아둘 정도로 공격수 자원이 넘쳐난다는 것이었다는 말도 있었다.[23] J리그에서의 활약만으로 따지면 득점왕까지 차지했지만 잦은 부상에 시달린 황선홍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가 최용수이다.[24] 넘쳐나는 투지에 좋은 피지컬, 그리고 최고의 제공권. 이런 타입의 대형 공격수는 일본에서 예나 지금이나 전혀 없다.[25] 일본과 달리 한국은 각각 스타일은 달라도 대형 공격수들은 계속 있어왔다. 이동국도 좋은 피지컬을 가진 아시아 최고 레벨의 공격수 였고 한때 천재 공격수라는 찬사와 함께 유럽에 진출하고 일본전에서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줬던 박주영[37], 일본과의 경기에서 196cm라는 무지막지한 피지컬로 압도하며 두골을 넣었던 김신욱 등이 있었다. 2019년 한국에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데, 현재 황의조가 정통 공격수 계보를 잇기는 했지만, 플레이스타일을 보면 최용수와는 달리 테크닉을 좀 더 중시한 플레이를 보인다. 그 후 조규성이 정통 9번 계보를 이을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26] 당시 10번은 이영표가 달았다.[27] 훨씬 피지컬이 좋은 김신욱의 헤더를 보면 전형적인 피지컬을 이용해 밀어내는 헤더지 정확히 내려찍어서 성공률을 높이는 헤더가 아니다.[28] 이건 이런 타입의 공격수들이 원래 그렇다. 팀 기복+본인 기복이라.[29] 최용수, 김도훈은 미드필더에서 밀리면 최전방에 고립되어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잦았다.[30] 이 방면에서 천재 미드필더라 불리던 윤정환은 독보적이었다. 날카로운 스루 패스에 최용수의 폭발력은 당시 국대 축구를 보는 즐거움이었다. 특히 절정에 달했던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윤정환-최용수 콤비는 역대 베스트 콤비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31]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 전 전술은 3-5-2이지만 투톱 파트너 김도훈을 처진 스트라이커처럼 썼기 때문에 3-6-1 형태와 흡사했다. 더구나 허리 싸움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사실상 5-3-2로 흘러갔다.[32] 히딩크 부임 전 한국 축구계는 피지컬의 의미와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막연히 개인기 타령, 조직력 타령이나 하던 시절이었다. 반면 프랑스 월드컵에서 만난 상대는 네덜란드벨기에의 장신 거구들이었으니, 심한 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랄까.[33] 노마크 헤딩 찬스와 각이 제법 열린 1:1찬스.[34] 통념과는 달리 유망주 시절의 이동국은 포처형 공격수에 가까웠다. 청대 시절에도 소위 '궂은 일'을 하는 역할은 투톱 파트너였던 김은중이 더 자주 보여주었으나, 한쪽 눈을 실명한 것 때문에 국가대표에는 기용되지 못했다.[35] 당시 이영표는 조재진이 한국에서 등지는 플레이를 제일 잘하며 세계에서도 높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36]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상당히 빛났다. 프랑스 전 박지성의 골을 어시스트한 헤딩이 조재진의 헤딩이었다. 거기에 크로스는 역대 한국에서 런닝 크로스가 제일 정확했던 설기현의 크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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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박주영도 헤딩 능력이 매우 탁월한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