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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1:03:40

츠부라야 에이지

<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츠부라야 에이지
[ruby(円谷 英二, ruby=つぶらや えいじ)] | Eiji Tsuburaya
본명 츠부라야 에이이치
([ruby(円谷 英一, ruby=つぶらや えいいち)])[1]
출생 1901년 7월 7일
일본 제국 후쿠시마현 스카가와시
사망 1970년 1월 25일 (향년 68세)
일본 시즈오카현 이토시
국적 [[일본|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가족 아들 하지메, 노보루
손자 히로시
증손자[2]
직업 영화 제작자
종교 기독교 (가톨릭)
소속 도호
츠부라야 프로덕션
서명
파일:Eiji_Tsuburaya_Signature.svg
1. 개요2. 상세3. 특징4.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영화 제작자. 울트라 시리즈로 유명한 츠부라야 프로덕션의 설립자다.

2. 상세

후쿠시마현 스카가와 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 항공학교에 입학했지만 추락 사고가 일어나 제적.[3] 하지만 비행기를 만들고 다뤄보고 싶다는 꿈은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 후에 장난감 회사에서 일하며 여러 발명 특허를 내서 18살 나이임에도 특허료로 적잖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4] 그러다 영화 업계에 들어오면 비행기를 볼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카메라 촬영기사로 일했다.[5] 그러다 1933년작 킹콩을 보고 감명을 받고 특촬 기술에 깊이 빠진다. 당연히 누가 가르쳐줄 리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독학으로 연구를 시작한다. 카메라를 뒤집어서 촬영하거나 카메라를 회전대에 고정시키고 회전시키거나, 필름을 긁어내기도 하고 독학으로 필름 합성이 가능한 옵티컬 프린터를 자체 제작하기도 했다. 전투기 공중전을 묘사할 때는 사람이 줄에 비행기를 메달고 흔들면 자연스럽지 않자 "그럼 배경을 이동시키면 된다."라고 하면서 전투기를 공중에 실로 고정시켜놓고 배경이 되는 세트를 기차 레일 위에 만들어놓고 밀어서 이동하는 식으로 촬영하는 방식을 고안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나중에는 킹콩이 시리즈화되면서 제작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일을 돕기도 했으며 요제프 괴벨스의 요청으로 나치독일의 프로파간다 영화를 대신 만들어주기도 했는데 괴벨스도 감탄했다고 한다.

일본 영화 업계에서 이름을 알린건 2차대전 당시 프로파간다 영화(1942년작)였던 "하와이 말레이만 해전"[6]에 특수 기술 감독으로 참여한 것이 시작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당시 전투필름은 거의 없었고 있었다고 해도 군사기밀이었던 고로 영화에 쓰면 큰일이 나므로 기록에 근거해서 해당 전투를 전부 미니어쳐로 재현하여 촬영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 전쟁 영상하고 너무나 똑같아 보였는지라, 군에서 군기밀을 무단 촬영해서 유출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는 황당한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것이 이후 일본 특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44살때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 군의 프로파간다 영화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추방된다. 이에 대해서는 츠부라야는 비행기와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으며 자신이 한 것은 잘못됐단 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7] 공직 추방 이후에 만든 작품 '태평양의 날개'에서 카미카제 특공대를 비난하기도 했고 '연합함대 사령 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는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했으며 고지라와 울트라맨에서는 반전 에피소드를 많이 넣은 걸 보면 이 이후로는 정신을 차린 듯 하다.

영화업계를 떠나 장난감 자동차나 카메라를 만들어 생활하던 츠부라야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통치가 끝나고 공직추방이 해제되자(51살) 그 동안 만들어싶었던 해저에서 거대한 문어가 나타나서, 선박들을 마구잡이로 침몰시킨다는 내용의 영화 제작에 착수했는데 그 작품이 바로 1954년작 고지라였다. 이후에도 고지라 시리즈를 계속 제작하면서 고지라의 대표 제작자이자 특촬의 신이라는 위치에 등극한다. 애초에 특촬이란 단어도 이 사람이 만든 것이다.

토호와의 계약이 끝난 뒤에는 자신만의 회사인 츠부라야 프로덕션을 만들어 토호의 촬영을 도와주거나 울트라 Q, 울트라맨, 울트라 세븐, 괴기 대작전 등의 특촬에 기술감수로 참여해 SFX TV 드라마의 시대를 열었다. 이때는 이미 말년이었기 때문에 후계자 양성에 주력했으며 그래서 울트라맨에서는 고지라만큼 크게 참여하지 않았고 스탭도 20대~30대의 젊은 스텝만으로 구성했으며 '이제부터는 너희들 젊은이의 시대다' 라는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후 얼마 안 가서 천식으로 인한 협심증으로 시즈오카현 이토시에서 사망했다.그로부터 5일 후인 1970년 1월 30일 일본정부에서는 그에게 훈사등서보장을 추서하였다.그리고 츠부라야 에이지가 사망한지 49년 뒤인 2019년 1월에 그의 고향인 스카가와시에 츠부라야 에이지 뮤지엄이 오픈하였다.

3. 특징

미니어처 특촬 분야에서는 그냥 압도적이었다. 다양한 아이디어와 철저한 촬영 현장 통제로 대체 그 시절 기술로 어떻게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영상을 만들었다. 이 분야에서 당시 츠부라야 에이지와 견준다는 소리를 듣는 건 제리 앤더슨 정도다.[8] 츠부라야의 작품은 1950 ~ 1960년대 특촬임에도 2000년대 특촬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흔히 울트라맨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쪽은 감수만 해서 가끔 츠부라야가 만든 장면이 들어가는 정도이며[9] 진짜 츠부라야가 미니어처 만들고 촬영 컨트롤까지 한 작품은 고지라 시리즈이므로 츠부라야의 실력을 알고 싶다면 고지라 시리즈를 보기를 권한다.

일에 대해서 상당히 엄격한 인물로[10] 덕분에 촬영장에서 직원들이 얼빠진 모습을 하는 일은 없었다. 허나 그런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촬영과 작업에는 크게 관여를 하지 않고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 입을 벌리고 잤다고 한다. 촬영 아이디어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촬영 중 갑자기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바람에 직원들이 임기웅변으로 대응했을 정도. 일이 끝나면 직원들과 술을 먹으러 간다거나 옷차림에 신경쓰지 않고 항시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맞이해 상당히 이상적인 모습의 상사로 비춰진다.

특촬기술에 있어서 항상 새로운 소재를 사용했고 소재 가격에 대해서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만든 옵티컬 프린터가 성능이 별로라 한계를 보이자 당시 세계에 2대. 가격이 4000만엔이나 되는 최신 옵티컬 프린터를 주문한 일화가 있다.[11] 우주대괴수 도고라 촬영시 아직 판매되지 않아 가격이 비싼 소재인 소프트 비닐을 사용해서 조형을 한 것을 직원이 걱정하자 '그런 건 네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또한 잔혹하고 엽기적인 표현을 싫어했기 때문에 영상을 제작할 때는 직접적으로 피가 튀거나 사람이 살해되는 장면을 넣지 않았다. 이는 근무처인 도호의 모토가 '밝고 즐거운 도호 영화'인 점도 있었다. 근데 이건 그가 죽자마자 바로 엎어진다. 대표적인 예로 고지라 시리즈의 헤도라가 있다. 사실 그가 살아있을 때도 피만 안 나왔지 상당히 잔혹한 장면이 있었다. 유혈 묘사만 싫어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

4. 여담



[1] 어째서인지 일본어 위키에서는 츠무라야 에이이치(圓谷 英一)로 표기하고 있다.[2] 츠부라야 히로시의 아들.#[3] 이렇게 문장만 보면 츠부라야가 사고를 일으킨 것 같지만 실은 그 학교에 교육용으로 가지고 있던 유일한 비행기와 교관이 추락사해서 더 가르칠 수 없어서 학교가 폐교된 것이지, 츠부라야 본인이 사고를 낸 것이 아니다.[4] 자판기처럼 증명사진을 촬영해주는 증명사진 박스를 츠부라야 에이지가 발명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울트라맨 오브 1화에서 쿠레나이 가이는 증명사진 박스에서 울트라맨으로 변신한다.[5] 황당하게도 꽃놀이를 갔다가 싸웠던 사람이 영화계 사람이어서 그 사람에게 제안받았다고 한다.[6] 제작 후 70년이 지나서 저작권이 소멸했다. 근데 도호에서 저작권 요구로 차단되어 있다(…).[7] 사실 2차대전 때의 일본 정부는 다른 영화는 만들게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 개봉한 영화는 다 프로파간다물이었다고 보면 된다.[8] 실제로 츠부라야는 제리 앤더슨의 신작이 나온다고 하면 어떻게든 구해서 제자들과 함께 보았다고 한다.[9] 엄밀히 말하면 울트라맨은 아들 츠부라야 하지메 작품이다.[10] 장비 취급, 모형 제작, 필름 낭비 같은 일이 있을 때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11] 이 옵티컬 프린터는 울트라맨 시리즈에서 주구장창 써먹는다.[12] 아버지에게 대부분의 기술을 이어받아 실력은 아버지 에이지 못지 않다는 평을 받은 인재이다. 하지만 돌아온 울트라맨 제작 후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죽은 후 겨우 3년만인 1973년 뇌출혈로 41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하고 말았다. 울트라맨 시리즈의 주제가를 작사하기도 했다.[13] 경영에 재능은 있었으나 지나치게 영업이익에 집착하는 경영으로 온갖 실책을 남겼다. 인건비 낮춘다고 구조조정해서 킨조 테츠오를 잘라버렸다거나 만들면 만들수록 적자가 난다고 울트라맨 80 이후 16년 동안 제대로 된 작품 하나를 안 내놓는 등 실책이 장난이 아니게 많아서 지금도 울트라맨 팬들에겐 욕을 먹는다. 1995년 향년 60세로 사망.[14] 츠부라야 하지메의 아들. 특촬 팬들에겐 매우 인기 있는 명배우였지만 당시 주로 일하던 토에이가 술 회식이 잦았던 회사였는데 이를 모두 참가하다 보니 간에 이상이 와서 결국 간부전으로 2001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를 봐도 알지만 당시 특촬업계는 화학물질을 녹이고 태워가며 마구 쓰는 게 기본이었는데 제대로된 방독면조차 안 하고 근접해서 촬영하는 경우가 많아 자주 참여하는 사람들은 요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15] 배우는 베테량 배우인 타키타 유스케(滝田裕介). 2015년에 작고. 한국어 더빙판 성우는 ???.[16] 빛의 나라 세계관의 울트라맨이 아닌 티가 세계관의 평행세계 울트라맨.[17] 스페시움 광선의 효과음도 그때 그대로.[18] 참고로 이 편에선 츠부라야 프로덕션의 2대 사장인 츠부라야 하지메, 킨조 테츠오도 나오며 츠부라야 하지메의 역할은 츠부라야 에이지의 손자인 츠부라야 히로시(2001년 사망), 킨조 테츠오의 역할은 오키타 히로유키(1999년 사망)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