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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24:56

진토 협정

秦土協定
Chin–Doihara Agreement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중일 양국의 준비 상황3.2. 1차 정식회담3.3. 2차 회담3.4. 협정의 체결3.5. 중일 양국의 입장 표명3.6. 장송협정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1935년 6월 27일 차하얼 정부주석 대리 친더춘관동군 대표인 봉천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 사이에서 체결된 비공식 합의. 하매 협정과 마찬가지로 폭주하는 일본군의 만행이었으며 정식 협정이 아니었다.

친더춘-도이하라 협정이라고도 한다.

2. 배경

1931년 만주사변, 1933년 열하사변을 통해 동북삼성과 열하성을 병탄한 일본 제국은 이번에는 화북 5성의 괴뢰화를 노리며 화북 분리공작을 취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 기자 2명이 암살당한 하북 사건과 손영근의 동북의용군이 난주에 주둔한 사건을 빌미로 일본군은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대리 위원장 허잉친을 위협해 6월 10일 하북성의 중국국민당 당부와 중국군을 퇴거시키는 하매 협정을 체결했다. 이 하매 협정의 체결은 화북주둔군의 주도였는데 한편 관동군은 차하얼 성에서 비슷한 공작을 취하고 있었다.

1935년 6월 5일, 장북에 잠입한 일본군 특무기관원 4명이 장자커우 지역의 불법 측량을 하던 중 차하얼 성 주석 쑹저위안의 제29군 병사들과 조우했다. 29군 병사들이 통행증을 요구했으나 이들은 제시하지 못해 중국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를 장북 사건이라고 하는데 일본과의 충돌을 원치 않았던 쑹저위안의 지시로 29군은 이들을 8시간 만에 석방했지만 관동군의 도이하라 겐지는 이를 일본군인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하면서 확대를 꾀했다.

6월 10일, 도이하라는 중국 측이 이유 없이 일본인들을 구타하고 모욕했다고 주장하며 장가구의 특무기관장 마쓰이 중좌에게 지시하여 사건의 직접 책임자를 처벌하고 쑹저위안의 사죄를 5일 안에 받아낼 것을 중국 측에 요구했다. 국민정부는 하매 협정의 전례를 볼 때, 일본군이 다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것이라 여겨 선수를 치기 위해 일본 측에서 쑹저위안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노려 6월 18일 쑹저위안을 차하얼 주석에서 해임하고 민정청장 친더춘을 차하얼 주석으로 임명하고 일본 측과 협상하게 했다.

3. 전개

3.1. 중일 양국의 준비 상황

도이하라는 전투기를 출격시켜 베이핑에서 무력시위를 하는 한편 6월 20일, 화북 주둔군 참모장 사카이 대좌와 함께 톈진에서 베이핑으로 가서 6월 20일 밤과 6월 21일 아침에 일본 대사관 무관 타카하시 소좌와 행동 방침에 대해 논의하였다. 6월 21일 아침 9시, 타카하시는 베이핑 군분회를 방문, 사무청 주임 포문월에게 도이하라 겐지와 친더춘이 사건 해결을 위해 직접 회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포문월은 전보를 보내 친더춘을 베이핑으로 불렀다. 이날 정오, 타카하시는 기자회견을 열어 "차하얼 문제의 교섭은 장래 도이하라와 마쓰이가 책임지고 베이핑에서 진행시킬 것이다. 차하얼 주석은 이미 친더춘이 대리함에 따라 장래 쉽게 해결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이날 도이하라도 외국 기자를 접견하여 "중국 당국이 하북에서 채택한 절차에 대해 자못 만족한다. 베이핑에 온 것은 차하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차하얼 당국과 교섭한 후 이 일은 쉽게 처리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중일 사건이 일단 해결되면 양국관계는 증진될 수 있을 것이다.

6월 22일, 친더춘은 장자커우에서 베이핑으로 돌아왔다. 친더춘은 거처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 일은 바로 관계면에서 직접, 간접적으로 협의 중에 있으며 현재 아직 최종 해결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다. 나 개인은 최대의 성의를 갖고 이 일을 처리할 것이다. 그중 절차의 주요 면에 있어서는 반드시 중앙에 보고하여 지시를 받아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기자회견 후 친더춘은 문제 해결을 위해 베이핑 군분회 사무청 주임 포문월과 베이핑 정정회 비서장 유가기와 회견했다.

6월 22일 밤, 차하얼성 정부위원 소진영(蕭振瀛)이 사천성에서 4차례 장제스와 회견하여 화북의 군정 외교 상황을 보고한 다음 비행기를 타고 우한으로 이동, 다시 평한선 기차를 타고 베이핑에 도착하였다. 친더춘과 포문월이 기차역에서 소진영을 맞이하였고 소진영은 기자들에게 "은 차하얼의 일이 속히 해결되기를 바래서 나로 하여금 빨리 북상하게 하였다. 찰성 사건은 기필코 중앙의 의지를 받들어 진행할 것이다."라고 발언하였다. 이들은 통리(通利) 호텔로 이동, 일본의 위협에 대해 대응을 상의하였다. 이날 친더춘은 난징에 전보를 보내 일본 측이 제출할 가능성이 있는 요구에 대해 보고하고 처리 방침을 정했다.

6월 23일, 국민정부는 국방회의를 개최하여 2가지 사항을 결의하였다.

회의 종료 후 국민정부는 친더춘에게 전보를 보내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일본 측과 교섭하라고 명령했다.

3.2. 1차 정식회담

6월 23일 저녁, 도이하라, 다카하시, 마쓰이 등이 친더춘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중국 측에는 친더춘 외에 소진응, 베이핑 정정회 고문 정극(程克), 진각생(陳覺生), 장북 경비사령 장윤영(張允榮) 등이 참석했다. 일본 측은 29군을 정전 협정선의 연장선 이서 지역으로 철수할 것, 헌병대, 국민당 당부 및 남의사를 차하얼성으로 철수키기고 반일 행위를 금지시킬 것, 위의 상황을 2주일 내에 실시를 완료할 것, 장북 사건에 대해서 사과를 하며 직접 책임자를 처벌할 것 등 5항의 요구사항과 차하얼 성에서 일본 특무기관의 활동 원조에 대한 6항의 요망사항을 전달했다. 도이히라는 노골적으로 무력 사용을 암시하며 친더춘을 위협했다.
"친더춘 장군, 당신은 외교의 뒷배경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분노한 친더춘은 이렇게 맞받아쳤다.
"그렇다면 군대를 파견해 차하얼을 점령하면 되지 않소? 29군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오."

친더춘은 크게 분노하였지만 일단 분을 참고 중앙에 훈령을 청해 답할 것을 약속했다. 3시간에 걸친 담판이 끝난 후 친더춘, 소진영은 연명으로 난징에 전보를 보내 보고하였다. 또한 소진영은 기자회견을 열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차하얼 사건 교섭은 23일 밤에 일본측 책임자와 우리 측이 만나 이미 정식 교섭 단계에 진입하였으며 내용 및 절차는 모두 중앙에 지시를 청한 상태이다. 나 개인은 성의를 갖고 옆에서 협조하고 있으며 사건이 빨리 마무리되어 지방이 편안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친더춘 대리 주석이 쑹저위안 주석과 진퇴를 함께 하겠다고 사직함에 따라 사태를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중앙은 이에 대해 아직 회답이 없다. 차하얼성의 군정질서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안정되어 있다."

24일, 도이하라도 담화를 발표하였다.
"어제 밤의 회견에서는 결정된 것도 있지만 난징 정부의 훈령을 필요로 하는 것도 있어서 결코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교섭에 있어 두번, 세번째의 만남을 필요로 하게 될런지도 아직 모른다."

3.3. 2차 회담

24일 밤, 국민정부는 "장북 사건은 계속해서 차하얼성 당국이 책임지고 교섭할 것이니 군분회와 함께 밀접하게 합작하라. (...) 무릇 우리나라의 영토 주권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참작하여 처리하라."라는 초보적인 훈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25일 밤 9시, 차하얼성 당국 관계자들이 거인당에서 임시 회의를 소집하여 일본측 요구에 대해 토론했다. 그날 밤 친더춘과 소진영은 도이하라를 방문, 2차 담판을 진행하였으나 지엽적인 문제에서 계속 의견이 엇갈려 합의를 보지 못했다. 도이하라는 협정 달성을 위해 자신이 26일 밤에 베이핑을 떠나 장춘으로 가야 하니 오늘밤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친더춘은 난징에 급보를 보내 지시를 청하고 26일 아침, 진각생을 파견하여 도이하라를 만나게 했다. 진각생은 2,3시간 동안 도이하라에게 해명하여 도이하라가 베이핑을 떠나지 않게 막았다. 도이하라는 진각생의 설득에 난징의 전보가 온 후에 담판을 계속하기로 허락하였다. 26일 밤 11시, 난징에서 보낸 최후의 훈령이 도착했는데 이는 한두 가지 정도만 수정하고 나머지는 일본 측의 요구에 따르라는 것이었다. 친더춘은 즉각 베이핑 정정회를 소집, 참의 뢰수영(雷壽榮) 등과 함께 상의하여 일본에 회답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27일 새벽 1시, 진각생을 도이하라에게 파견하여 난징의 훈련이 도착하였음을 알리게 했다. 쌍방은 오전 10시, 일본 대사관 무관실에서 협정에 관한 최종 수속을 밟기로 합의하였다.

3.4. 협정의 체결

6월 27일 아침 9시 15분, 도이하라 겐지는 일본 대사관에 도착하여 타카하시와 상의한 후 무관실에서 국민정부측 대표를 기다렸다. 친더춘은 오전 9시, 베이핑 군분회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교섭 상황을 종합보고하였다. 오전 10시 20분, 진각생과 뢰수영이 차를 타고 대사관에 도착하여 도이하라, 타카하시와 함께 이날 담판할 사무에 대해 교섭했다. 20분 간의 대담 후 뢰수영은 베이핑 군분회로 가서 친더춘을 만나 관련 사항을 보고하고 친더춘을 일본 대사관으로 안내했다. 11시 15분, 친더춘, 뢰수영은 대사관에 도착하여 무관실에서 도이하라를 만났다. 국민정부측 대표는 친더춘, 뢰수영, 진각생 3인이었고 일본측 대표는 도이하라, 타카하시 2인이었다. 일본 대사관 참사관 와카쓰키의 보고에 따르면, 이들의 태도는 매우 공손하여 도이하라는 이들의 태도에 크게 만족을 표했다고 한다. 마침내 11시 30분, 정식으로 서류가 교환되고 협정이 체결되었다. 일본이 제출한 서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일중 친서의 견지에서 장래 일본측이 차하얼성 내에서 행하는 합법행위가 장애를 받지 않기 위해 차하얼성 당국에게 아래와 같이 요구한다.
요구사항:
1. 철수지역:
창평(昌平), 연경(延慶)을 연결하는 연장선 동측과 아울러 독석구(獨石口) 북측에서부터 용문 서북 및 장자커우 북측을 거쳐 장북 남측의 선 이북의 쑹저위안 부대에 이르기까지 서남 지구로 이주할 것.
2. 배일 기관을 해산할 것.
3. 유감의 뜻을 표하고 아울러 책임자를 처벌할 것.
4. 6월 23일부터 시작하여 두 주일 내에 이상의 각항을 완료할 것.
5. 산동의 이민이 차하얼성을 통과하는 것을 제지할 것.
(2) 요구사항의 해석:
1. 일만의 대몽공작을 승인해야 하며, 특무 기관의 활동을 원조하고 아울러 이민을 중지하고 몽골인에 대한 압박을 정지할 것.
2. 일만의 경제발전 및 교통개발 공작에 협조할 것, 예를 들면 장자커우와 다륜 간, 기타 만주국과 화북 간의 자동차, 철로 교통을 원조할 것.
3. 일본인의 여행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각종 조사에 협력할 것.
4. 일본으로부터 군사 및 정치 고문을 초빙할 것.
5. 일본이 건립하는 각종 군사 설비(비행장 설비, 무선 전신국의 설치 등)을 원조할 것.
6. 철수 지역의 치안 유지는 마땅히 정전 지구의 방법에 따라서 처리할 것.

친더춘은 관동군 대표 도이하라 겐지 소장 앞으로 된 회답 서류를 제출했다.
<제1함>
1. 6월 5일 장북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하여 유감의 뜻을 표명한다. 그리고 사건의 책임자를 면직처분한다.
2. 귀방이 국교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되는 기관을 철폐한다.
3. 귀국의 차하엉ㄹ성 내에서의 정당한 행위를 존중한다.
4. 하북성의 창평으로부터 본성의 연경, 대림보(大林堡)를 거쳐 장성에 이르는 선 이동의 지역, 그리고 독석구 북측에서 장성에 연하여 장자커우 북측을 거쳐 장북현 남측에 이르는 선 이북의 차하얼성 지역 내의 쑹저위안 부대는 서남방 지역으로 이주한다. 그 철수한 지역 내의 치안은 차하얼성 보안대가 유지하고, 군대는 진입하지 않는다.
<제2함>
본성 정부는 산동 등의 이민에 대하여 중일간의 분규를 야기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 중지에 노력한다.

6월 28일, 일본 대사관의 와카쓰키 카나메 참사관이 히로타 고키 외상에게 보고한 것에 따르면 친더춘은 다음과 같은 사항도 승인하였다고 한다.

협정 체결 후 친더춘은 향하(香河)현장 조종박(趙種璞)에게 "협정은 중앙이 비준한 것이며 바로 허잉친이 비준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하토협정>이라고 하여야 마땅하니, 협정 체결의 책임을 나에게 전가해서는 안된다."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3.5. 중일 양국의 입장 표명

체결이 끝난 후 도이하라는 타카하시와 함께 27일 오후 1시, 무관실에서 일본과 중국 신문기자들을 마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하얼 사건은 지금에 이르러 원만히 해결되었다. 차하얼성 당국의 성의 있는 교섭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중일 양국 관계가 더욱더 친선과 제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친더춘은 도이하라와 헤어진 후 펑위샹의 전 비서인 뢰계상(雷季尙)의 사택으로 가서 서면 담화를 발표했다.
장북 사건에 관해 관동군은 현지 해결의 뜻을 견지하고 있었다. 나는 중앙의 전보 명령을 받들고, 군분회를 받들어 교섭을 진행하였다. 베이핑에서 도이하라 겐지와 직접간접으로 수차례 만나 서로 흉금을 터놓고 성의있게 대하여 최후 결정을 내렸다.
(1). 사건의 책임자를 처벌하고 132사의 참모장, 군법처장을 교체한다.
(2). 상호 양해하여 이후에는 이와 같은 오해를 일으키지 않는다.
교섭은 이에 이르러 원만히 해결되었다. 그중 경과는 수시로 중앙에 지시를 청하여 완전히 중앙의 훈령에 따라 처리하였기 때문에 나는 오직 지방 당국 본분 내에서 마땅히 책임질 뿐이다. 또 나는 오늘 아침에 도이하라 겐지 소장에게 갔었는데 그것은 23일 방문해 준 것에 대한 답례였다. 타카하시도 또한 그 자리에 있어서 피차 간에 감정이 좋았다.

6월 28일, 화북 주둔군 사령관 우메즈 요시지로도 성명을 발표하였다.
"화북과 차하얼성에서 연속하여 발생한 일부 중국 국민의 불법 행위에 대한 교섭은 다행히 중국 군헌이 우리 측의 공정한 요구를 수락하여 여러 이행을 보임에 따라 잘 진행되고 있다. 나는 그 성의를 인정하고 있으며 잠시 체결이 실행되는 추이를 주시하면서 국면의 호전을 기대한다. (...) 일중간의 진정한 친선 제휴는 결코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언사로서만 가히 실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이보다 먼저 국민정부가 발표한 전 중국의 배외배일의 금지 포고는 상술한 화근을 근절하는 것을 진일보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니 가히 경출할만한 일이다. (...) 만주지역과 인접한 지역의 치안 유지에 대해 중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일본군은 이 지역의 모든 항일 반만 행위가 근절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날 주중 일본 대사 아리요시 아키라도 성명을 발표했다.
"나도 이번 주중국 사령관의 성명에서 바라는 바와 같이 중국 측이 평화유지에 더욱 노력해주기를 희망한다. 그외 일중양국간의 국교의 원만함을 위해 한 지역에 한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전 중국에 배일풍조가 일소되어야 한다. 현재 이런 풍조는 아직 절멸의 정도까지는 오지 않았다. 이번 기회를 빌어 중국측은 마땅히 이번에 발포한 돈목방교령 등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배일 풍조를 더욱더 근절시켰으면 한다."

3.6. 장송협정

일본 측의 요구 중 쑹저위안의 면직과 중국의 사과는 이미 실현되었으므로 협정 체결 이후 실시된 것은 29군의 철수였다. 29군이 철수한 후 약속에 따라 철수지역을 보안대가 접수하였다. 보안대는 장윤영이 지휘하는 중국군 보안대와 몽골인 보안대가 따로 조직되어 각각 한족 거주 지역과 몽골족 거주 지역을 수비하였다. 친더춘은 난징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에 대해 친더춘의 사직으로 차하얼성 주석 대리가 된 장자충은 각 현성에 몽골인이 한 사람도 없는데 몽골인 보안대가 진주하는 것은 도리어 분규만을 발생시킬 것이라고 반대했으나 일본 측은 오히려 장윤영의 보안대의 행동을 용납하지 않고 장윤영을 협박하여 8월 5일, 마쓰이 중좌가 장윤영과 <장송협정>을 추가로 체결하여 한족지구의 치안까지 일본군의 조종을 받는 몽골군이 장악해버렸다. 또한 데므치그돈로브의 부하 이수신이 남하하여 12월, 일본 군관과 만주국 공군의용부대의 지원을 받아 차하얼 동쪽의 장성 이북 6개 현을 점령하였다.

4. 결과

진토 협정은 일본 측 요구를 받아적은 문장을 일본 측에 제시한 것에 불과하여 전혀 정식 협정이 아니었지만 일본군이 무력으로 위협하는 판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일선 지휘관들의 폭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하매 협정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제어하지 않았다. 6월 27일 자신이 주재한 외무성 회의에서 시게미츠 마모루 차관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지나측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21개조 요구처럼 하나하나 요구를 열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안해결에서 순차적으로 다른 현안해결로 옮겨가는 것 같은 안 즉 한개에서 지나측을 조금씩 질질 끌고 가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나측에 대하여 만약 차하얼을 일본의 자유에 일임하지 않으면 지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말하는 풍으로 위협하여 질질 끌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

쑹저위안의 29군은 베이핑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주둔하게 되었는데 일본이 허잉친이나 우학충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위협만 한것과 달리 쑹저위안에 대해서는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하북의 군정대권을 장악하는 것을 용인하여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일본에 대해 다시 한번 양보한 국민정부에 대해서 불만이 고조되어 장쉐량은 동북대학 대리교장 왕탁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국민은 그 전에 나를 부저항이라고 욕하였다. 지금 나는 영수에게 내 과업을 변경해 주기를, 그리하여 초비가 아니라 항일을 하게 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초비에 대한 희생은 항일에 의한 희생보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9.18 이후 우리들은 국제연맹이나 그 밖의 평화 기구를 잘못 믿고 조금씩 양보하면서, 정의가 강권을 제재하리라는, 외국의 도움에 기대하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환상이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스스로 죽음 속에서 삶을 찾는 것이다. 정부는 전 국민을 동원하여 일본과 생사를 결판짓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11월 1일, 일본에 대한 유화정책의 중심인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왕징웨이대한 암살 시도가 벌어졌고 장쉐량은 1936년 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에게 2차 국공합작을 강요하였다.

일본군은 계속 도발, 1935년에 기동사변을 일으켰으며 1936년에는 수동사변을 일으켰다. 이후 29군은 1937년 7월 7일 무타구치 렌야의 일본군과 충돌하여 루거우차오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는 중일전쟁으로 번졌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