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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0:52:55

칠종칠금

고사성어
일곱 놓을 일곱 잡을

1. 개요

삼국지,三國志, 배송지,裵松之,주,, 한진춘추,漢晉春秋 자치통감, 삼국지연의에서 유래된 고사성어로 칠금칠종,七擒七縱,,,이라고 사용하기도 한다.

제갈량남중 정벌맹획을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놓아줌으로써 남만을 복속시켰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2. 연의에서

남만과 전쟁을 하는데 맹획은 패배할 때마다 핑계를 대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제갈량도 "그러면 어디 마음 내킬 때까지 덤벼보아라"하면서 그를 번번이 놓아주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의외로 촉군도 꽤 고전한 싸움이다. 칠종칠금은 흔히 제갈량이 맹획을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놀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되지만, 4차전까지는 몰라도 5차전 이후부터는 타사대왕, 축융부인, 목록대왕, 올돌골 등을 상대하면서 촉군도 장억마충이 사로잡히고, 천하의 조운이 맹수부대를 보고 기겁해서 달아났으며,[9] 위연도 등갑군에게 격퇴당하는 등 힘든 싸움을 벌였다. 특히 5차전에서는 산신과 맹절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촉군은 그대로 후퇴하거나 아니면 독에 중독되어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그 제갈량조차도 이러면 한실 부흥이 물건너갔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괴롭다고 절망적인 넋두리를 할 정도였다.

결국 7차전이 끝나고 나서 제갈량은 포로로 잡힌 맹획 일가를 융숭하게 대접한 뒤, 자신은 자리를 떠난다. 이때 한 사람이 술자리에 들어와서 "승상께서는 너무 많은 이 땅 사람들을 죽여 공과 얼굴을 맞대기 부끄럽다고 하오. 그래서 저를 대신 보내시고 당신들이 다시금 싸울 수 있도록 풀어주라고 명령하셨소."고 하자 마침내 맹획이 눈물을 흘리며 감복하며 마침내 진정으로 항복하고, 덕분에 촉군은 드디어 촉으로 돌아간다.

이후 제갈량이 편히 퇴각하려 하자 비의가 "왜 군사를 남기지 않으십니까?"라고 묻는데.
1. 군사를 남기면 군량도 남겨야 한다.
2. 관리들만 남기고 군사를 남기지 않으면 보복이 뒤따른다.
3. 설령 보복을 하지 않는다 해도 (남)만인들은 의심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큰 사건이 생길 것이다.

라고 답하여 남만을 믿는다는 뜻을 보였다. 사실 정사에서도 제갈량이 비슷한 말을 한다. 남중에 군사를 남기지 않아 서로 평안하게 하겠다는 식으로. 다음은 한진춘추에 기록된 제갈량 본인의 발언이다.
"만약 외인(外人-남중 바깥의 사람, 즉 중국인)을 남겨두면 응당 군사도 남겨야 하는데, 군사를 남기면 먹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첫 번째 어려움이요. 게다가 이인(夷人)들이 이제 막 상하고 격파되어 그 부형(父兄)들이 죽었는데, 외인들이 남아 있으면서 군사가 없으면 필시 재앙과 우환이 생길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요. 또한 이인들이 누차 폐살(廢殺)하는 죄를 지어 스스로 자신의 죄가 중함을 꺼림칙해 하는데, 만약 외인을 남겨두면 끝내 서로 믿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어려움이오. 지금 나는 군사를 남기지 않아 운량(運糧)할 필요를 없애고, 강기(綱紀-기강, 법령)를 대략적으로만 정해 이인과 한인들이 대체로 편안케 하려 하오.”
이는 정확하게는 중앙에서 간섭하기보단 적절하게 남만에 어느 정도 자치권을 부여하고 그 대신 남만 쪽에선 촉한 중앙정부에 안정적인 자원과 인력을 제공하는 식으로 복속시킨다는 의미에 가깝다. 실제로 화양국지 등에는 이 당시 복속시킨 호족들에게 벼슬과 권한을 주고 재물을 풀어 민심을 안정케하여 한족과 만족이 뒤섞여서 평안해졌으며 이곳에서 나온 물자를 군국에 대고 정예군을 선발했다는 식으로 기록했다. 그 결과 반란이 빈번하던 남만이 제갈량 정벌 이후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 후 촉한이 멸망하기 직전에도 남만으로 망명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상당히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삼국지 초주전).

이때 남만을 정벌하고 제갈량이 촉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물로 만두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만두 항목에 그 일화가 나와 있다.

3. 관련 논쟁

3.1. 칠종칠금은 실화인가?

실제 역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소설적이고 허구적인 부분이 많아, 칠종칠금이 진짜로 일어난 일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3.1.1. 허구설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남만을 정벌했다고 짤막하게 나오는 것이 전부이며,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도 "그건 그냥 뻥이지. 애초에 제갈량은 남만을 신속히 진압하려 했는데 그렇게 시간 끌었다는 게 말이 됨?" 이라며 칠종칠금의 존재를 부정했다.

애초에 전투에서 적의 장수를 사로잡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맹획은 사령관이었다. 동서고금 전투에서 총사령관은 가장 중요한 존재이기에 직속 친위부대 등으로 철저히 보호받고 패색이 짙어지면 총사령관은 친위대의 보호를 받으며 퇴각하는게 일반적이다. 때문에 맹획을 한 번 사로잡는 것만으로도 일일 텐데, 한 번도 하기 힘든 일을 일곱 번이나 반복했다는 점은 당연히 신빙성이 크게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어찌저찌 사로잡았다 치더라도 6번이나 풀어주었다는 것 또한 문제다. 한 번 잡혔을 때 충성을 약속받고 풀어주는 일이야 역사를 찾아보면 꽤나 많지만, 그랬다가 또 통수를 쳐서 두 번째로 잡히면 용서해봐야 또 배신할 게 뻔하니 약속을 어긴 죄를 물어 얄짤없이 사형하는 게 전근대의 일반적인 관례다. 당장 삼국지연의에서도 통수를 쳤다가 두 번째로 사로잡히면 처형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10]

3.1.2. 실화설

배송지가 인용한 《한진춘추》와 《화양국지》에는 맹획의 이름과 칠종칠금의 기록이 등장한다.
#1. 한진춘추(漢晉春秋)
제갈량이 남중(南中)에 도착해 싸우는 곳마다 이겼다. 맹획(孟獲)이라는 자에게 이인(夷人)과 한인(漢人)이 복종한다는 것을 듣고 그를 생포하도록 했다. 그를 붙잡은 후, 영진(營陳) 안을 살펴보게 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우리 군이 어떠하오?”
맹획이 대답했다.
“이전에는 허실을 몰랐기 때문에 패했소. 지금 허락을 받고 영진을 살펴보니 다만 이 정도라면 쉽게 이기겠소.”
제갈량이 웃으며 그를 풀어주어 다시 싸웠다. 일곱 번 풀어주고 일곱 번 사로잡았는데(七縱七禽), 제갈량은 여전히 맹획을 보내주려 했다. 맹획이 떠나지 않으며 말했다.
“공은 천위(天威)를 지닌 분이니, 우리 남인(南人)들은 다시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자치통감》에서도 칠종칠금을 묘사했다. 『일곱 번 놓아주었다가 일곱 번 잡았는데, 제갈량이 오히려 맹획을 가라고 하니, 맹획은 머물고 가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공은 하늘의 위엄을 가지신 분입니다. 남쪽 사람들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권중달 역 자치통감 8권 126페이지 참조.) 게다가 기록자 모두 다 평론(評論: 평하여 말하다)에서 칠종칠금에 대해 찬양(讚揚) 일색이다.

즉 한진춘추, 화양국지, 심지어 자치통감에도 버젓이 나온 내용을 우리가 보기에 터무니없이 말이 안 된다고 보인다고 무작정 허구 취급하는 것도 그다지 좋은 태도는 아니다. 화양국지를 보면 제갈량이회, 마충 등을 여기저기 파견하여 남중 각지를 평정하였고 한번 평정한 지역이 다시 일어나자 재평정 하는 등 여러 곳에서 지속적인 전투를 벌였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일부 연구자들은 칠종칠금 그 자체로 신빙성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맹획이 패퇴할 때마다 계속 원군을 불러왔던 게 오히려 촉군이 남중 구석구석을 수색할 노고를 줄여줬다는 것이다. 맹획은 연의와 달리 실제로는 건녕 지역의 호족으로 중국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맹획 정도의 남중에서 알아주는 명사가 "우리 모두의 적이니 힘을 합쳐서 막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 남중의 유력 토호들이 필시 직접 도와주러 올 것이고, 제갈량 입장에서는 시간 들여서 움직일 필요없이 알아서 오는 자들만 잡으면 된다는 것. 게다가 맹획의 원군으로 출정할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졌거나 규모가 있다는 뜻이므로, 이기면 남중 영내에서 촉한의 위세나 명망이 높아지고 또 평정에도 도움이 된다. 즉 맹획을 여러 번 놓아주고 잡는 것이 확률도 낮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그만큼 리턴이 크기 때문에 실제로 칠종칠금을 고려했으며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항복하고 난 후 촉한 조정에서 어사중승까지 승진한 맹획도 건녕 일대에 사는 이민족은 물론 한족에게도 존경받던 인물이었다고 하니 맹획의 진심어린 충성을 받아 촉한 내부의 결속을 더 이끌어내는 일석이조 효과도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11] 반면에 이민족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위를 이은 서진은 결국 팔왕의 난 등을 비롯한 대륙의 기상급 막장 드라마의 발생 및 급격한 붕괴로 그동안 탄압당하던 이민족들의 복수심+쟤네들 지금보니 별 거 없으니 우리가 중국을 먹으면 되겠다는 이유가 복합으로 작용하여 오호십육국시대라는 혼란기를 초래했다.

연의에서는 이러한 제갈량의 덕치를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마지막으로 올돌골등갑군을 반사곡에서 화공으로 괴멸시킬 때[12] 제갈량이 '저 많은 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였으니 내가 어찌 오래 살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하며 심하게 죄책감을 가지는 모습도 나온다.[13] 그리고 이에 만인들이 감읍하여 제갈량의 이름을 딴 둑이 건설되거나 채소가 재배되었다는 언급도 나온다.

아니면 허구설과 실화설을 반씩 섞은 절충안으로, 칠종칠금 자체는 허구이지만 그렇게 기록이 될 정도로 (1) 일곱 번의 중요한 승전이 일곱 번 사로잡은 일화로 윤색되었거나, (2) 맹획을 사로잡았다 풀어준 건 처음과 마지막 한두 번이지만 그 외의 장수들을 일곱 번을 사로잡았거나, (3) 남중의 호족 및 유력자들을 여러 번 복속시킨 것이 칠종칠금으로 압축되어 알려졌다는 가설이다.

3.2. 남만인들은 야만족이었나?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부터 각종 만화, 애니메이션 등 삼국지를 다룬 매체에서는 제갈량의 남중정벌 당시 촉군이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정글 같은 지역을 돌파하며 중요부위만 가린 반라의 전사들과 싸우고, 축융부인 같은 여캐는 여캐팔이를 위해 과감한 갸루 패션을 하고 있으며, 맹획은 깃털 및 나뭇잎 장식을 하고 있는 등 완전히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 원주민처럼 석기시대 수준의 부족사회 원주민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특히 제갈량이 남만의 인신공양 풍습을 없애기 위해 만두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즈텍이나 마야같은 중남미 국가들이 스페인에게 정복당한 후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인신공양이 없어졌던 역사랑 맥락이 아주 비슷하다.

하지만, 남중정벌 전역에서 역사상 이름을 올리게 된 남만측 각 인물들의 항목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 그 상당수는 이미 한나라의 통치 아래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한의 지방정권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거나, 맹획처럼 아예 한인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있을 정도로 이미 한나라의 문물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남중정벌의 무대가 되는 운남지역은 멀리는 이미 춘추전국 시대의 진나라의 정벌이 있기도 하였고, 동시기에 전나라라고 초나라 출신 장군이 세운 나라가 한무제가 정벌하기 전까지 존속했다.[14] 통일 진나라 시기에도 몇 차례 정벌이 있었다. 본격적인 중국세력의 확장은 기원전 109년, 곽창이 한무제의 명에 따라 익주군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해당 지역은 중국문화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으면서 이미 후한대에 이르르면 이미 청동기를 지나 철기시대로 넘어간 상황이었으며 그에 수반 된 사회적 변화의 흔적 또한 발굴, 관측이 된다. 따라서, 해당 지역이 한나라에 복속되어 있던 "부족"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 "부족"이라는 게 아프리카 정글의 석기시대 수준 원주민들이 팬티한장만 달랑 걸치고 우가우가하던 그런 시절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 당장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도 부족국가들이 있었으나 짐승가죽 대충 걸쳐 입고 돌도끼랑 나무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원시인이 아니었던거랑 마찬가지다.

유럽이나 중국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명권도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는 지역이 아닌지라 상당히 인지도가 낮지만, 실제로는 운남지역의 고대사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꽤 오래동안 진행되어 왔다. 제갈량의 남중정벌의 무대가 되는 지역들은 기원전 1세기 한의 익주군의 설치 전까지는 뎬(Diān[滇(전)]) 문화로 알려진, 고도로 발전된 청동기 문명권이었다. 실제로 남중 각지에서 발굴 및 출토되는 한나라 전 시기 청동기 유물들은 매우 수준이 높은 것들이며, 부장품 등에서 묘사되어 있는 뎬 민족의 의상은 당연히 팬티 한 장이 아니다. 이미 기원전 5세기~1세기 시점에 상당히 발전 된 청동기 문명이 들어서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남중정벌이 발생하는 기원후 225년이면 익주군이 설치 된 이래 중국문화가 해당 지역에 침투하기 시작한지가 벌써 300년이 넘는 시점이다. 해당 시점의 남중의 모습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추측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만, 주나라 이래 분봉을 통해 중국의 세력이 오지에 진출하여 식민화를 이루는 과정, 그리고 소위 '야만'지역에 대제국이 진출하여 식민화를 이루던 여타 역사적 사례들을 미루어 짐작할 때 3세기의 남중은 카이사르의 정벌 이래 로마에 편입되어가던 1~2세기 갈리아의 상황과 비슷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대도시, 군사적 주둔지 등 주요 거점을 중심부로 하여 그 주변에는 상당부분 건축물, 관아 및 행정부의 설치 등 분야에서 한나라의 양식이 침투해있었을 것이며, 그런 지역의 주민들은 한의 복장, 생활양식, 예법을 따르고 있었을 것이다. 반면, 해당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아직 융화가 미진했던 부족들의 지배지역에서는 한나라의 색이 점점 옅어졌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앙의 조직, 관습, 문화, 생활상과 멀어지면서 반대로 해당 지역의 특색, 부족들과 역으로 융화가 진행되던 한족들이 뒤섞여있는 공간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제갈량이 남긴 일부 편지 등 문서들을 근거로 여전히 문신하고 벌거벗고 다녔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그러한 편지를 쓰고 기록을 남긴 시점에 제갈량이 실제로 남중까지 가 본 일이 없었음은 거의 확실하다. 초목이 빽빽히 우거지고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오지에 벌거벗고 문신한 야만인들이 그득하다는 식의 서술은 해당 시기의 남중보다는 오히려 기원전 5~6세기,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만족의 모습이라고 알려진 것에 더 가까운데, 이는 제갈량 시절로부터 700년 전의 만족의 모습이다. 즉, 춘추전국 시대의 장강 이남 만족과 제갈량의 시절 사이의 시간적 간극은 현대 한국인들과 조선왕조의 수립 시기 사이의 시간적 간극만큼이나 크다. 즉, 해당 편지를 보낼 때 제갈량이 객관적 사실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문인들의 전형적인 화법에 따라) 옛 시대의 고전에서 인용, 레퍼런스를 따와서 서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3세기의 남중지역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면, 한나라 중앙과의 연결이 희미해지는 상황이 오래동안 계속되면서 완전히 군/현 단위에서 한의 행정력에 예속되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지방정권과 유착한 부족들은 한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유착관계가 없었던 다른 부족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색채의 생활양식을 영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지의 한족들은 점차 호족, 토호화 되면서 지방 부족의 유력자들과 유착하여 반독립 상태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한나라와 남만의 모습이 뒤섞인 상태로 파악할 수 있다. (지역 내의 이러한 다양한 색채는 제국의 정 반대편, 먼 동북쪽의 낙랑군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확실히 남아있는 유물이 없어서 쉽지는 않지만, 남만의 군사적인 모습 또한 어느 정도는 추측이 가능하다. 일단 청동기 말기에서 철기 초기에 이르는 양식의 갑옷의 파편 등은 확인이 된 상태이며, 특히 앞서 언급한 뎬 문화권(기원전 5~1세기)의 예술품에서는 고대 한반도, 일본의 단갑, 판갑양식과 굉장히 유사한 형태의 갑옷을 갖춘 병사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Dian_Kingdom
* (영문 위키피디아 "Dian Kingdom" 항목에 등재되어 있는 뎬 청동장식의 사진. 완전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한국 삼국시대 초기의 갑옷과 굉장히 유사히다)

이 지역의 갑옷 양식의 발전상만 유독 특이한 그런 케이스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철기시대가 진행되면서 기술력의 발전과 함께 단갑, 판갑의 양식이 찰갑 양식으로 바뀌어가는 일반적인 코스를 (중국 본토, 한반도, 일본 모두 비슷한 변화를 겪은 바 있다) 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찰갑 유물들이 발견이 되고 있다.

다만, 아직 완전한 한 벌이 발견된 바가 없기 때문에 그 전체적인 얼개는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대체로, 한나라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인 지역에서는 한나라의 양식을 따랐을 것으로 보이며, 그 외 부족들의 경우에도 역시 (정확한 형태를 추측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나라 양식의 찰갑과의 차이점을 확인할 방도가 없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찰갑이 가장 보편적인 갑옷의 양식인 듯 하다. 그 외 운남 지역에서 발견 되된 갑옷 유물 중에는 (일본의 오요로이 양식과 유사해보이는) 대리국의 갑옷이라든가, 옻칠을 한 가죽제 갑옷 등도 있으나, 이는 모두 삼국시대를 한참 지난 중세의 것이기 때문에 삼국시대 당시의 운남 갑옷과 직접적인 유사성이나 연관성을 찾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칠종칠금"의 모델이 된 실제 남중정벌에서 제갈량이 만난 것은 빽빽한 정글에서 반라의 상태로 동양판 콩키스타도르와 게릴라전을 하는 석기시대 야만용사들이 아니라[15], 넓은 운남 분지의 주요 거점들에서 지연전,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을 잘 무장한 고전 철기식의 군대였을 것이다. 지역에서 관부의 병사로 있다가 반란에 동참한 정규군 출신의 정예병들은 완벽하게 한나라식 철제 찰갑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 외 대다수를 이루었을 일반 부족 병사들은 주요 부위에 금속제 찰갑을 덧댄 보다 경장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기타 잡병들이나 궁병 등은 갑옷을 갖추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운남지역의 전통적인 장옷을 단단히 동여맨 차림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남만인들은:
(1) 이미 한나라의 익주군 설치 이전부터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이루고 있었으며
(2) 익주군 설치 이후로 3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였고
(3) 반란을 일으킨 지도자들은 모두 한나라의 지방정권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한나라의 행정, 군사제도 등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 옛 협조자들이었다

여담이지만 대리국 전설 중엔 맹획이 사실 이 지역 군주였고, 칠종칠금도 사실은 정반대로 오히려 맹획이 제갈량을 7번 사로잡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카더라.[16] 물론 이 대리국 전설의 언급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서를 보면 오히려 맹획은 이후 촉한의 벼슬을 받아서 활동했다. 대리국이 있던 위치가 현 운남성 지역임을 감안하면 맹획 띄워주기로 볼 수 있다.

4. 기타 창작물에서

4.1. 출판물에서의 칠종칠금

4.1.1. 삼국전투기

제갈량보다 조운이 더 부각되는 칠종칠금이다(...).

맹획은 5번 연속으로 조운에게 니킥을 얼굴에 맞아 코피를 쏟고 코끼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다시 코피를 쏟고, 마지막에는 조운에게 맞는 게 무서워서 자기 스스로 코를 때려 또 다시 코피를 흘리고 GG친다.

4.1.2. 소설 제갈공명

실화 여부 때문인지 사실 이거 다 짜고친 고스톱이었다는 설이 진순신소설 제갈공명에서 사용되었다.

4.1.3.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반대로 아예 제갈량을 확 띄워주기 위해 온갖 황당하고 엽기스러운 남만군을 최대한 많이 등장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특히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 이런 제갈량 띄워주기는 극에 이른다.[17]

보통 칠종칠금을 길어봐야 2~3챕터 정도 다루고 마무리하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에 비해 이 만화에서는 60권 중 무려 3권이나 남만 파트가 차지할 정도로 칠종칠금 항목을 엄청나게 공을 들여 서술하고 있다. 정확히는 예전 버전 기준으로 47권에서 맹획과 본격적으로 붙는 이야기, 48권에서 타사대왕의 독룡동 이야기와 목록대왕과 축융의 이야기, 49권에서 올돌골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남만 정벌이 45권의 끝부분에서 고정, 옹개, 주포의 난을 진압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사실상 60권 중 4권 정도를 차지한다. 남만의 각종 기묘한 풍물과 풍토를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을 정도로 자세히 묘사해놨다. 60권 전체에서 중국의 한족 세력이 아닌 다른 민족 및 국가가 직접적으로 묘사된 것은 이 칠종칠금의 남만군을 제외하면 제갈량의 북벌 당시 위나라가 끌어들인 서강(西羌) 정도가 고작인데, 이 서강의 비중도 51권의 2개 챕터 정도뿐이다. 다른 전투와 비교해도 상당한 분량인데, 적벽대전도 이 만화에서는 제갈량이 오나라에서 설전을 벌이는 부분부터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살려주는 부분까지 통틀어도 딱 3권을 간신히 채운다. 즉 분량만 따지면 적벽대전보다 이 남만 정벌의 분량이 더 많은 것.

그리고 작중 묘사를 보면 제갈량이 정벌한 곳이 지금의 윈난성, 귀주성 지역이 아니라 숫제 베트남이나 미얀마 등 인도차이나 지역 수준으로 등장한다. 당연히 고증도 잘못되었다. 맹획을 비롯한 남만 세력 자체는 올돌골을 제외하면 일개 부족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국가 세력 수준으로 묘사하며, 문물도 중국의 그것과 성격이 다를 뿐이지 격차는 크지 않다.

하지만 연의의 남만 파트 자체가 당시 고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 참 먼 판타지에 가까운 파트였고 연의 원작에서도 남만 파트는 재미있고 신비스러운 소재였다. 요코야마 삼국지에서는 이례적으로 자세히 묘사하다보니 타 삼국지와는 다른 남만 파트의 특징 재미가 뚜렷한 편이다. 60권 책 기준으로 47권에서 나오는 독천, 48권에서 나오는 나무 맹수, 49권에서 나오는 등갑군과 화약 그리고 심지어는 강의 신과 만두설화까지 나온다. 그리고 이렇게 이채로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삼국지 60권 시리즈는 42권에서 관우, 조조가 죽고 43권에서 장비가 죽으며, 45권에서 심지어 유비(!)가 죽기 때문이다. 삼국지의 중반부가 정리되는 파트가 바로 이 부분이다. 따라서 이후 제갈량의 하이라이트인 제갈량의 북벌 파트(50권부터 시작)로 넘어가기 위해선 46권부터는 조금 이야기를 새로이 시작할 필요도 있었다. 이 만화에서는 그 도구가 칠종칠금을 행한 남만 정벌인 것.

대부분의 삼국지에서 남만 출신 인물들을 야만인 추장으로 묘사하는 것과 다르게 여기서는 맹획부터 중국의 군주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갑옷 복식과 외모를 한 채로 등장하며 나름의 체계적인 문명을 갖추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높은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맹수를 부리는 목록대왕이나 주번 지리를 꿰고 있는 타사대왕 등 올돌골을 제외한 다른 추장들도 다르지 않다. 맹획의 아내인 축융의 경우 복장부터 중국 여성들과 차별화돠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거친 남만의 여성이라는 것이 강조되어 촉의 장수 여럿을 사로잡는가 하면 촉에게 포로로 잡혀 제갈량 앞에 끌려온 상황에서도 언쟁으로 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예외로 올돌골은 전형적인 야만족의 추장으로 묘사되는데 원숭이나 거대 뱀, 열대 과일들로 만든 괴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에 기겁하는 맹획 부부와 측근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문명화된 모습으로 나오는 대부분의 남만인 입장에서도 올돌골은 별종 중의 별종으로 묘사된다.

참고로 대현출판사에서 나온 판본을 아동용 신문에서 자주 광고하곤 했는데, 남만 파트가 흥미를 끌 것이라 생각했는지 제갈량의 목수(木獸)와 축융부인, 올돌골을 내세워 광고했다. 아마 올돌골을 정면으로 내세운 삼국지 책 광고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4.2. 게임에서의 칠종칠금

4.2.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남만 정벌 자체를 시작 시점으로 둔 시리즈는 많았는데 그 이유를 보면 일단 맹획 세력 자체의 유니크함도 있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형주공방전~이릉전투 이후 세대가 한번에 확 바뀌어버린 촉을 비롯한 삼국시대를 플레이하게 되는 후기 시점의 시작을 남만정벌 시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 시리즈를 할 때마다 대다수의 경우 항상 225년 시점의 남만정벌은 매번 등장했다.

남만정벌 이후 칠종칠금 이벤트까지 구현된 경우는 조건부 이벤트 방식이었던 삼국지 8, 그리고 도전 스토리로 볼 수 있는 삼국지 9, 역사 이벤트로 보는 삼국지 10 등이 있다.

특히 삼국지 9 같은 경우에는 가뜩이나 난이도 높은 도전 스토리에서 유저가 직접 칠종칠금을 체험하면서 제갈량의 기분을 체감하게 해 주는 수준이었다.[18]
( 1번째 출진 )
맹획 : 좋다! 출진이다!
맹우 : 예!
위연 : 승상, 맹획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갈량 : 그래 봤자 지금뿐이다. 격퇴 하겠다!

( 1번째 격파 )
제갈량 : 맹획, 항복하겠느냐.
맹획 : 어째서 항복해야 하는 거지? 난 안 졌단 말이다!
제갈량 : 그럼, 풀어 주마. 언제든지 공격해 와도 좋다.

( 2번째 출진 )
맹획 : 이번엔 어쩌다 졌을 뿐이다. 다음엔 우리가 이긴다!
맹우 : 맞아! 겨우 두 번 졌을 뿐이다. 아직 멀었다!
위연 : 승상, 예상대로 맹획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갈량 : 이번에도 본때를 보여 줘라!

( 2번째 격파 )
제갈량 : 맹획, 항복하겠느냐.
맹획 : 이번 싸움은 납득이 안 간다. 계속 싸우겠다!
제갈량 : 억지가 센 녀석이군. 언제든지 상대해 주마.

( 3번째 출진 )
맹획 : 으랴앗, 이번에도 출진한다! 제갈량 따윈 겁 안 난다!
맹우 : 맞아! 아직 세 번 졌을 뿐이다. 이건 진 것도 아니다.
위연 : 승상, 또 맹획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갈량 : 그 자들은 질리지도 않나 보군…….

( 3번째 격파 )
제갈량 : 맹획, 항복하겠느냐.
맹획 : 아직 비책이 남아 있다. 한번 더 싸우자.
제갈량 : 가도록 해라. 기대하고 있겠다.

( 4번째 출진 )
맹획 : 으랴앗, 한 번 더 출진한다! 전엔 운이 나빠서 그렇지 진 건 아니다!
맹우 : 맞아! 아직 네 번째다. 이길 때까지 해 보자구!
위연 : 승상!
제갈량 : 맹획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하려는 것 아니오. 말하지 않아도 알겠소.

( 4번째 격파 )
제갈량 : 맹획, 항복하겠느냐.
맹획 : 내가 항복할 성싶으냐!
제갈량 : 그럼, 어디 한번 마음껏 덤벼 보아라. 도망치지 않고 있을 테니.

( 5번째 출진 )
맹획 : 또 출진한다! 나를 따라라!
맹우 : 다섯 번째가 돼서 그런지 이젠 사람도 얼마 없군!
위연 : 이번에도 그 맹획군입니다.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갈량 : 정말 끈질기군…….

( 5번째 격파 )
제갈량 : 맹획, 항복하겠느냐.
맹획 :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빨리 풀어 달란 말이다.
제갈량 : 용감하군. 어디, 할 테면 해봐라.

( 6번째 출진 )
맹획 : 남만병의 의지를 보여 주자! 한 번 더 출진한다!
맹우 : 벌써 여섯 번째라고요. 또 출진하는 겁니까?
위연 : 말씀드리기도 죄송합니다만 맹획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갈량 : 이렇게까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줄은 몰랐군…….

( 6번째 격파 )
제갈량 : 맹획, 항복하겠느냐.
맹획 : 난 아직 싸울 수 있다.
제갈량 : 또 해보겠느냐. 할 수 없군. 네 마음대로 해라.

( 7번째 출진 )
맹획 : 이젠 될 대로 돼라! 출진하겠다!
맹우 : 벌써 일곱 번째입니다. 그만둘 때도 됐잖습니까?
위연 : 또 맹획군입니다…….
제갈량 : 이젠 지긋지긋하군…….

( 7번째 격파 )
제갈량 : 맹획, 포박을 풀어 줄 테니 덤빌 테면 언제든지 덤비거라.
맹획 :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풀어주었단 얘기는 들어 보질 못했습니다. 감복했습니다. 항복하겠습니다.
제갈량 :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 칠종칠금 이후 )
맹획 : 남만대왕, 제갈 승상이란 자, 정말 굉장한 사내라구. 우리 같이 항복해서 촉을 섬기지 않겠나?
남만대왕 :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틀림없겠군.

*맹획군과 남만군을 심복시켰습니다.

해당 스테이지에서는 분기가 2개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남만에 있는 남만대왕[19]을 격파면서 기존 성도, 건녕과 더불어 남만을 점령하는 것, 다른 하나가 운남에서 계속 오는[20] 맹획을 일곱 번 잡는 것이다. 헌데 문제는 삼국지9 특유의 확률빨 전투에 이어 시간 자체도 6개월이라 18턴 한정이라는 것이 문제다.

시작하자마자 눈 앞의 대릉성채와 옆의 완온요새를 점령하면서 인근 시설의 지원공격에 어그로가 끌리는 것도 체크해야하며, 이후로는 맹획이 제때제때 격파당하주고 곧바로 다음 턴에 집에가서 또 병력끌고 나오는 것까지 시간이 맞아야 한다. 즉, 제한된 시간 안에 7번이나 딱딱 들이맞춰서 격파해야할 정도로 사람 피곤하게 하는 스테이지다.

10 이후로는 후기 시리즈에서 위에서 말한 설명대로 남만정벌 시나리오 자체가 나오지 칠종칠금 이벤트 자체를 중점적으로 두는 편은 아니다.

4.2.2. 삼국지 영걸전 시리즈

4.2.2.1. 삼국지 공명전
2장의 대부분(2장의 도입부인 위의 5로 침공을 다룬 양평관 전투 제외)이 공명의 남만 정벌을 다루고 있는지라 위에 묘사된 맹획 잡는 전투 7가지가 전부 게임에 나온다. 7개 전투 중 2개 전투는 반드시 맹획을 잡게 되며 4개 전투는 계략 실패를 깨달은 맹획이 특정 지역까지 도망가는 것을 저지해야만 포획이 가능한데, 맹획을 잡든 도망가게 하든 전투 자체는 이긴 것으로 되지만 맹획이 도망가는 전투에서 맹획을 모두 잡는 데 성공하면 보너스 경험치 50과 더불어 추후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맹획, 축융, 맹우가 도우러 온다. 이후 맹획과 축융은 아군으로 완전 합류. 나머지 1번은 동도나를 감화시켜 배신시키는 것인데 칠종칠금을 고사대로 완성하고 싶으면 해야겠지만 맹획 합류조건은 아니다.

맹획은 전용조형이 있으며 남만병, 남만기병, 독사대, 상아대, 등갑병 등의 병종이 다채롭게 등장한다. 다만 후일 종장에서 아군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은 남만기병뿐이다. 남만기병은 숲을 통과해야하는 최후의 낙양전투2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더미 데이터로 오나라의 배신 대신 맹획의 배신, 이른마 '맹획 뒷치기'가 있다. 게임 데이터는 전부 국역 되었기에, 대사로나마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게 특징. 맹획을 제대로 복속시키니 않으면 나오는 조건으로 추정되는데, 다른 증거로 뜬금 없는 강유와 맹획의 일기토 영상이 있다.
gba판에서는 맹획 뒷치기가 구현되어 있다.
4.2.2.2.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연의 제갈량전(하)의 초반부를 할애한다. 본 게임에서 맹획과 싸우는 임무는 연의의 두 번째(오계봉 전투)/세 번째(독룡동 전투)/네 번째(은갱동 전투)/다섯 번째(반사곡 전투)로 모두 4개뿐이고 나머지 3가지 전투는 임무를 시작하기 전에 살펴볼 수 있다. 7가지 전투를 모두 넣기엔 연의의 전체 분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4가지 전투만 플레이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보인다.

4.2.3. 연희 시리즈

1을 모토로 한 진 연희무쌍 본편에 등장하는 이벤트. 미연시에선 혼고 카즈토마대에게 '바보도 안 걸릴 함정으로 잡아라' 라고 명령. 마대가 정말 바보도 안 걸릴 함정을 설치했으나 맹획은 넙죽넙죽. 결국 1번 항목대로 7번째 잡힌 맹획이 울면서 항복한다(...).

애니메이션에선 마대, 유비, 위연, 장비, 제갈량에게 번갈아가며 놀이감(...)이 되어버렸다. 6번째 잡힌 후 애완용 코끼리에게 악령을 빙의시켰으나, 오히려 역관광을 타버리는 바람에 출동한 마대, 위연, 장비에게 도움을 받게 되고 항복하게 된다.

4.2.4.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2의 남만 평정전에서 맹획을 총 7번 격파하면 맹획이 '나도 바보는 아니다. 이 정도 당하고도 살아남았으면 따르는 것이 맞겠지' 라면서 칠종칠금 이벤트가 일어나고, 맹획이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해금된다. 7번 격파하기 전에 본진으로 진입하면 맹획이 바로 본진에서 등장하며 칠종칠금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이후 시리즈로도 쭉 계승된다.

이상하게도 촉군 시나리오만 있는것이 아니라 오군 시나리오도 존재한다. 다만 맹획을 7번 격파하기 전에 아군이 훅 가버린다는 것이 문제. 스테이지 특성상 아군 사기가 매우 낮고, 병력 숫자도 월등히 차이나는 데다가 아군 NPC들도 그리 강하지 않기 때문에 7번 잡기 전에 총대장인 제갈량 혹은 육손이 먼저 패주해서 플레이어들의 뒷골을 잡게 만들었다.

여담으로 진삼국무쌍 2 맹장전의 맹획전의 경우 이 칠종칠금이 반대 상황으로 펼쳐진다. 즉 맹획이 제갈량을 7번 패배시킨다(...). 7개 스테이지의 매 전투마다 아슬아슬하게 도망치는 제갈량을 보며 빡도는 맹획이 감상포인트.

진삼국무쌍 8에서도 역 칠종칠금이 나오면서 제갈량을 제작진이 작정하고 엿 먹이는 것이 맹획 스토리 모드 엔딩이다. IF루트가 없는 일직선 스토리 진행임에도 이런 쪽의 IF 엔딩을 넣은 것이 실로 악의적이다.

직접적 관계는 없지만 진삼국무쌍 3 맹장전의 개그 시나리오 '월영 획득전'에서 제갈량이 월영에게 청혼하고자 대결(전투)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데, 월영을 총 7번이나 잡아야 그제서야 인정받고 올클리어할 수 있다. 하필이면 7번이라는 점에서 전작에도 나온 칠종칠금을 의식한 게 틀림없을 듯.

4.2.5. 토탈 워: 삼국

전투에서 맹획을 7번 사로잡고 7번 풀어주면 맹획 세력과 연맹을 이루는 이벤트가 나온다. 세력 군주에다 유니크인지라 한번 잡기도 힘든데 7번이나 잡아야 해서 보기 정말 힘든 이벤트.


[1] 지형과 환경을 파악하고 전술, 전략을 짜는 건 장수로서 아주 기본인 부분이다.[2] 부하들의 인망을 잃고 매질까지 해서 배신하게 만든 건 결국 맹획 본인의 책임이다.[3] 맹우의 실수라기보다는 제갈량이 이미 맹획의 계략을 간파하고 있었다. 애초에 항복한답시고 본인이 아니라 동생을 보낸 점에서부터 티를 냈고, 판본에 따라서는 화해의 선물을 들고 온 짐꾼들의 건장한 체격을 묘사해 내응작전의 일환이라는 식으로 약간의 복선을 뿌리기도 한다.[4] 이쯤되면 억지에 가깝다. 당장 3차전에서 맹획 본인도 계략을 시도했다.[5] 여담으로 이 부분은 거의 유일하게 제갈량이 별다른 계책 같은 걸 내놓지 못하고 순수하게 타인에게 의존한 부분이라고도 하나, 애초에 제갈량의 목적이 맹획을 비롯한 남만인들의 교화가 목적이었다. 그래서 양봉이 투항 의사를 밝히자 제갈량이 드디어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며 기뻐하는 장면도 있다.[6] 2차전과 비슷한 맥락으로, 인망을 잃고 남만인들이 등돌리게 만든 건 결국 맹획 본인의 문제다.[7] 맹획과 측융부인 등을 묶어놓고 제갈량에게 바쳤다. 틈을 노려 제갈량을 암살하려 했지만 제갈량은 이미 맹획의 꾀를 내다보고 모두 꽁꽁 묶은 뒤 각자의 몸을 수색해 단도를 지닌 것을 확인했다.[8] 스스로의 삽질로 잡혀버렸다는 건 결국 맹획 본인이 무능하다는 걸 입증해주는 꼴이다.[9] 조운의 무용을 생각해보면 가장 먼저 줄행랑을 쳤다기보다는 휘하 병사들이 놀라 달아나서 통제가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비슷하게 연의 극초반에 유관장 삼형제가 장보와 싸울 때 장보가 부리는 도술에 겁먹은 병사들이 아무리 질타해도 움직이질 않아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고 나온다. 물론 그 직후 주준의 조언에 따라 양과 돼지의 피를 모아 괴물들에게 뿌려 인형임을 알아채는 식으로 퇴치했다.[10] 연의 기준으로 유비의 입촉 당시 냉포가 위연에게 잡혀놓고 항복을 권유하겠다더니 돌아가서 원군을 청해 오의를 불러왔다. 하지만 부질없이 다시 위연에게 잡혔고 가차없이 처형을 당했다. 반면 오의는 깔끔하게(?) 진심으로 항복해서 목숨을 건졌다.[11] 달리 말하면 맹획은 일곱번 사로잡았다 풀어주며 그만큼의 시간낭비와 병력 및 군량 소모를 감수할만한 지역의 명사라는 의미도 된다. 맹획의 진심어린 항복 한번만 받아내면 다시는 또 원정을 갈 필요가 없지만 어설프게 처리했다간 다시 또 군사를 이끌고 와야 하는데 여기까지 오는데 드는 물적 손실에 또 싸우기 위해 드는 병력낭비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한번 끈질기게 싸우고 마는게 나을수도 있다. 특히 제갈량의 주 전선은 남만이 아니라 북쪽의 위나라이므로 위나라와 상대하기 위해선 후방인 남만을 반드시 안정시켜야 한다.[12] 등갑군의 갑옷은 칼도 활도 소용없을 정도로 대단해서 제갈량도 애먹였지만 애석하게도 기름 먹여 만든 갑옷이다보니 불에 너무나도 취약해 화공 한번에 올돌골과 휘하의 등갑군 3만명 전원이 순식간에 불타 죽었다.[13] 이는 추풍오장원에서 제갈량이 끝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사망한다는 복선 중 하나로 이어진다.[14] 초나라는 비록 중원국가에게는 오랑캐 취급 받았지만 이 시기쯤 되면 초나라 역시도 중원화가 많이 진행되긴 했다.[15] 사실 연의 기준으로도 남만 부대가 강철 작살을 사용했다거나 양봉의 군사가 철갑을 입었다는 언급이 있으므로 남만인들은 철기 문명이다. 애초에 나관중 시대에 제대로 된 고고학 같은 것도 없었으므로 석기시대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16] 제갈량 안티로 유명한 진삼국무쌍 시리즈 8에서 이걸 반영한 맹획 엔딩이 나왔다.[17] 남만병 등장 자체는 조비의 5로 전법 과정에서 잠시 등장했다. 물론 위연의 의병지계로 인해 관광당했지만.[18] 맹획의 동생인 맹우도 5번째까지는 열혈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형을 따라 참전하였으나 6번째부터는 점점 회의감을 느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19] 삼국지9는 이민족이 있는 시리즈이기 때문에 이민족 남만대왕은 남만에, 맹획 본인은 운남에 있다.[20] 2턴 후인 3월 하순부터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