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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케네소 랜디스 1920~1944 | 2대 해피 챈들러 1945~1951 | 3대 포드 프릭 1951~1965 | 4대 윌리엄 에커트 1965~1968 | 5대 보위 쿤 1969~1984 | |
6대 피터 웨베로스 1984~1989 | 7대 바트 지아마티 1989 | 8대 페이 빈센트 1989~1992 | 9대 버드 셀릭 1992~2015 | 10대 롭 맨프레드 2015~ |
케네소 랜디스의 수상 경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케네소 랜디스 | ||
헌액 연도 | 1944년 | |
헌액 방식 | 사후 특별투표 |
<colbgcolor=#001840><colcolor=#fff> 초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커미셔너 케네소 랜디스 Kenesaw Landis | |
본명 |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Kenesaw Mountain Landis |
출생 | 1866년 11월 20일 |
미국 오하이오 주 밀빌 | |
사망 | 1944년 11월 25일 (향년 78세) |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 |
묘소 |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오크 우즈 묘지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재임기간 | 초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커미셔너 |
1920년 11월 12일 ~ 1944년 11월 25일 | |
부모 | 아버지 아브라함 호흐 랜디스 어머니 메리 샌즈 랜디스 |
형제자매 | 6명 중 4남 |
배우자 | 위니프레드 리드 (1895년 7월 25일 결혼) |
자녀 | 3명 |
학력 | 노스웨스턴 대학교 프리츠커 법과대학 (법학 / 학사) |
직업 | 스포츠 행정가, 판사, 변호사 |
소속 정당 | |
경력 | 로건스포트 저널 법원출입기자 (1883년 ~ 1886년) 인디애나주 국무부 직원 (1886년 ~ 1889년) 일리노이주 변호사시험 합격 (1891년) 노스웨스턴 대학교 프리츠커 법과대학 조교수 (1891년 ~ 1893년) 월터 Q. 그레샴 국무장관 비서 (1893년 ~ 1895년) 일리노이주 북부 지방법원 판사 (1905년 3월 18일 ~ 1922년 3월 1일) 초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커미셔너 |
별명 | 판사, 스콰이어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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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구는 미국의 소년들에게 단순한 게임 이상의 존재다. 인생의 훈련장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한 야구에 관한 신념, 정직을 파괴하는 것은 소년들에게 모든 것에 관한 의심을 심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1]
미국의 법조인이자 스포츠 행정가로,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의 초대 커미셔너(즉, 연맹 총재)를 역임한 인물이다. 야구 역사에 큰 존재감을 남긴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공과 과가 명확하게 갈리는 인물.2. 야구계 입문 이전
1866년 11월 20일, 오하이오 주 밀빌에서, 6자녀 가운데 4남으로 출생했다.1891년에 법대를 졸업하여 법조계 생활을 시작했다. 1905년부터는 시카고에 위치한 일리노이 주 북구 연방법원 판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판사 재직 시절 몇몇 중요 판결을 맡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1907년 8월 스탠더드 오일의 불공정 거래에 대해 당대 최고의 기업가였던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에게 2,924만 달러의 무거운 벌금형을 선고한 것이다.
3. 메이저리그의 초대 커미셔너
1919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일부 선수들이 도박사들과 공모하여 상대팀 신시네티 레즈에 고의 패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그 유명한 블랙삭스 스캔들. 이 사건으로 메이저리그의 신뢰는 근본부터 위협받게 되었다. 당시 메이저리그의 행정은 내셔널리그, 아메리칸 리그 협회장을 포함하는 '3인 위원회'(three-man National Commission)가 최종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결국 주요 구단의 구단주들을 비롯한 미국 프로야구계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양대 리그에 대한 총괄적 권한을 행사할 '연맹 총재'직의 신설을 결의했다. 당초 구단주들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전 대통령, 존 조지프 퍼싱 1차대전 미군 사령관 등의 인물들을 물색하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낙점된 후보는 랜디스였다.
초대 커미셔너에 취임하는 랜디스. 주요 구단의 구단주들과 함께 |
시구 모습 |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로서 조시 깁슨, 사첼 페이지 등 당대의 훌륭한 흑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것을 반대한 오점도 남겼다.[2] 이들 가운데 조시 깁슨은 끝내 생전에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되었고, 사첼 페이지와 재키 로빈슨은 랜디스의 사후 후임 커미셔너인 해피 챈들러의 승인으로 비로소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그리고 블랙삭스 스캔들 선수들에게 강경 대응한 것과 달리, 로저스 혼스비의 경마도박 문제라거나, 타이 콥과 트리스 스피커가 같이 얽혔던 야구 조작 의혹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하게 넘어가서 이중잣대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많았다.
4. 사망과 이후
1944년 11월 25일, 향년 78세로 타계했다. 그리고 사망 직후에 소집된 특별위원회 투표에 의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 커미셔너직은 해피 챈들러가 이어받았다.1968년 세인트루이즈 카디널스의 에이스 밥 깁슨에게 수여된 MVP 트로피 |
결국 공식적으로 2020년부터 MVP 상패에서 그의 초상과 이름이 제외되었다. 관련기사
5. 여담
외아들인 리드 G. 랜디스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항공대로 전투를 치렀으며 8기를 격추시켜 수훈비행십자장을 수여받았다.[1] 본인이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로 취임한 계기가 된 블랙삭스 스캔들을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Baseball is something more than a game to an American boy; it is his training field for life work. Destroy his faith in its squareness and honesty and you have destroyed something more; you have planted suspicion of all things in his hear."[2] 생전 랜디스는 틈만 나면 "야구판이 검둥이들에게 오염당하는걸 내가 막아냈다." 라며 자랑했다.[3] 초대 커미셔너라는 상징성이 컸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는 초대 각 리그 이사장, 랜디스를 포함해서 2,3,5대 커미셔너, 초기의 구단주들이 헌액되어 있는데, 공로보다는 상징성이 더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