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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7 14:56:57

사첼 페이지

사첼 페이지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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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미국 스포팅뉴스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 목록으로 약 25년 전 기록이기 때문에 21세기 스타들이 없는 것을 감안하며 보아야 한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베이브 루스 윌리 메이스 타이 콥 월터 존슨 행크 애런
6위 7위 8위 9위 10위
루 게릭 크리스티 매튜슨 테드 윌리엄스 로저스 혼스비 스탠 뮤지얼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조 디마지오 피트 알렉산더 호너스 와그너 사이 영 지미 폭스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자니 벤치 미키 맨틀 조시 깁슨 사첼 페이지 로베르토 클레멘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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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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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 애버릴 멜 하더 슈리스 조 잭슨 켄 켈트너 냅 라조이
스티브 오닐 조 슈얼 트리스 스피커 할 트로스키 사이 영
루 보드로 빌 브래들리 밥 펠러 밥 레몬 엘머 플릭
사첼 페이지 스탠 코벨레스키 래리 도비 짐 헤간 얼리 윈
레이 채프먼 로키 콜라비토 애디 조스 알 로페즈 샘 맥도웰
알 로젠 허브 스코어 짐 배그비 마이크 가르시아 찰스 내기
안드레 손튼 조 고든 마이크 하그로브 샌디 알로마 주니어 웨스 페럴
딕 제이콥스 빌 비크 케니 로프턴 사이 슬랩니카 게일로드 페리
잭 그래니 짐 워필드 카를로스 바에르가 존 하트 오마 비즈켈
지미 더들리 알버트 벨 찰리 제이미슨 프랭크 로빈슨 짐 토미
매니 라미레즈 데일 미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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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Paige%20Satchel%20Plaque_NBL.png
사첼 페이지
헌액 연도 1971년
헌액 방식 니그로리그 위원회(NC)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48

}}} ||
파일:Satchel Paige.jpg
리로이 로버트 "사첼" 페이지
Leroy Robert "Satchel" Paige
생년월일 1906년 7월 7일[1]
사망 1982년 6월 8일 (향년 75세)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앨라배마 주 모빌
포지션 선발 투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 190cm, 81kg
소속 구단 니그로 리그 베이스볼[2]
차타누가 블랙룩아웃스 (1926)
버밍엄 블랙바론스 (1927~1930)
볼티모어 블랙삭스 (1930)
클리블랜드 컵스 (1931)
피츠버그 크로포즈 (1932~1934)
비스마르크 처칠즈 (1935)
캔자스시티 모나크스 (1935)
피츠버그 크로포즈 (1936)
트루히요 올스타즈 (1937)
캔자스시티 모나크스 (1939~1947)
뉴욕 블랙양키스 (1941)
멤피스 레드삭스 (1943)
필라델피아 스타스 (1946)
필라델피아 스타스 (1950)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48~1949)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1951~1953)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1965)
1. 개요2. 유년 시절3. 선수 경력
3.1. 니그로리그와 중남미 리그의 전설3.2.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
4. 은퇴 이후5. 평가6. 연도별 기록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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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 나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 나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100살이 되어도, 저 녀석들은 삼진으로 잡을 수 있을거야."
1952년 현역 최고령 완봉, 완투승을 따냈을 때.

니그로리그, 멕시칸 리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역대 최고령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역대 최고령에 은퇴한 선수이기도 하다.

니그로 리그, 멕시칸 리그에서 활약했으며 1948년 42살의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6번째로 진출한 흑인 선수로, 메이저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 투수가 되었다.[3] 그 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서 활약하고 1953년 은퇴를 선언했지만 12년 후, 1965년에 58세의 나이에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의 선수로 등록되어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 3이닝 선발 등판해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며 메이저리그 최고령 선수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1971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고, 1982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2. 유년 시절

1906년[4] 11명의 형제 중 7번째로 태어난 사첼 페이지는 본래 이름이 '리로이 페이지'(LeRoy Paige)였다.

정원사 일을 하던 아버지와 가정부로 살림을 꾸려나간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페이지의 말에 따르면 7세 때 돈 벌이를 위해 기차역에서 짐꾼으로 일하는데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여행가방 나무(Satchel Tree) 같다' 고 말했고, 그 이후부터 '리로이'(LeRoy)라는 이름 대신 '사첼'(Satchel)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반면 어머니가 여행용 가방(Satchel)에 7살이었던 그를 넣어 놓고 기차를 이용한 일이 있어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 얘기도 있고, 어렸을 때 남의 가방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그런 별명이 붙여졌다는 말도 있다. 하여튼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고향 프로 팀의 잔심부름을 시작으로 10살부터 야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고등학교 졸업후 세미프로 팀에서 한 경기당 1$를 받는 조건으로 본격적인 프로 생활을 하게 된 그는 1926년부터 니그로리그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3. 선수 경력

3.1. 니그로리그와 중남미 리그의 전설

파일:external/static.ddmcdn.com/satchel-paige-hof.jpg
뉴욕의 니그로리그에서 뛰던 시절의 사첼 페이지.

사첼 페이지는 선수 생활을 하면서 니그로리그의 전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장신인 192cm의 키를 가진 페이지는 긴 팔다리를 최대한 이용해 엄청난 강속구를 뿌렸고, 1930년대 니그로리그의 여러 팀에서 활약을 한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페이지는 20여년 이상 니그로 리그, 멕시칸 리그, 각종 독립 리그를 순회하며 2000경기 이상에 등판했다고 한다.[5]

사첼 페이지의 기록은 너무나도 놀라워 지금까지도 여러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일설에는 승리만 2000승이라고도 한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우선 니그로 리그에서는 최고의 스타이자 흥행 보증 수표인 페이지의 등판은 매년 100경기를 전후했고, 니그로 리그가 종료되면 멕시코 리그나 독립 리그 등에서 뛰면서 매년 200경기 정도를 등판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니그로 리그의 팀에서 뛴 것을 봐도 알 수 있지만, 부르면 거절하지 않고 뛰어주고,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리그로 떠나는 형태의 상상을 초월하는 플레이가 이루어졌다. 때문에 사첼 페이지의 전설 가운데 1년 최고 기록은 141승 1패, 혹은 연 평균 100승 등 어지간한 투수의 커리어 기록이 나온다. 때문에 2000승은 몰라도 1000승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전문가들이 부지기수이다. 일단 데뷔부터 은퇴까지 기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경기 수도 답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모두 그가 가진 야구에 대한 순수하고도 무한한 열정에서 비롯된다. 야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공을 던지는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지금도 사첼 페이지는 어디선가 공을 던지고 있다' 고 말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50타자 연속 삼진, 수비수들을 모두 덕아웃으로 보내 놓고 9구 3탈삼진으로 이닝 종료, 워밍업 때 성냥갑을 홈 플레이트 삼아 스트라이크 던지기 등 확인되지 않은 민간 신앙급 전설이 퍼져나갈 정도로 확실하게 경기를 압도하는 투수였다. 문제는 그 누구도 정확한 기록을 알지 못해서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1920년대부터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한 그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니그로리그 선수들에 대한 근거 있는 정확한 자료가 없어서 많이 부풀려진 면이 있겠지만, 1932년 이벤트로 치러진 메이저리그와 니그로 리그 대표팀 간의 경기에서 사첼 페이지는 메이저리거들을 상대로 위력적인 공을 구사했다. 1930년 메이저리그 올스타들을 상대로 22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완봉승을 거둔 것과 뒷날 1948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여 나이 40 중반인데도 150km이상의 직구를 뿌린 것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있는 주장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6][7] 1936년 사첼 올스타팀과 양키스 마이너리그팀과 열린 시범경기에서도 9이닝 1실점 12K를 기록한다.[8] 많은 메이저 리그 선수들도 페이지의 기량은 인정하고 있었으니, 그가 당시 최고의 투수였음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저 믿기 어려운 전설이지만, 전성기가 지나도 한참 지난 40대에서야 데뷔했던 메이저리그에서 세운 기록과 메이저리그에서 유명세를 떨친 스타들이 일관되게 그를 최고라고 인정했다는 증언들만 바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비공인 기록.

참고로, 메이저리그와 니그로리그의 역대 전적은 6할대로 니그로리그가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9] 이 데이터 때문에 니그로리그의 수준이 메이저리그보다 높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니그로리그와 메이저리그 간 우열 논쟁은 00년대부터 있어왔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대표팀에 진짜 메이저리거가 5명 정도만 끼어있어도 메이저리그 올스타로 간주했다. 즉 메이저리거를 5명만 넣고 나머지 자리를 마이너리거 내지는 아마추어 선수로 구성해도 '메이저리그 대표팀'이 되었다는 것. 니그로리그 팀이 메이저리거가 4명~6명이 포함된 '메이저리그 대표팀' 상대로는 .615의 승률을 기록하며 압도한 건 사실이지만, 7명 이상의 메이저리거가 포함된 '메이저리그 대표팀' 상대로는 승률이 .451로 폭락했다. .451이 준수한 성적이긴 하지만 1위팀과 꼴찌팀 사이의 승률 격차가 잘 나지 않는 야구 특성상 니그로리그 팀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더라도 메이저리그 팀들을 압도했으리라 보기는 매우 힘들다. 한 예로 2022 KBO 리그 8위였던 롯데 자이언츠의 승률이 .457이었다. 더구나 메이저리거들이 한창 경기를 하는 시즌 중에는 니그로리그 팀과 경기를 할 수 없으니 주로 오프시즌에 대결을 했는데, 오프시즌에 시범경기 하듯 경기를 했을 메이저리거들이 제 기량을 펼쳤을 지도 의문이다.

또, 위의 링크에서 메이저리그와 니그로리그 팀이 쿠바 팀과 붙었을 때의 전적을 확인할 수 있는데 메이저리그 팀은 쿠바 팀 상대로 .601, 니그로리그 팀은 쿠바 팀 상대로 .478을 기록했다. 결론은 당시 니그로리그가 수준이 높긴 했으나 소수의 탑급 선수들을 제외하고는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사첼 페이지는 니그로리그에서 최고의 투수였으니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더라도 잘 했을 것이며,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준의 성적을 냈을 수도 있겠지만 몇몇 사람들의 호들갑처럼 월터 존슨 이상의 투수라느니 메이저리그를 폭격했을 것이라느니 하는 예측은 과장된 면이 있다. 구전 설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50타자 연속 삼진, 통산 2000승 등의 '신화'는 베이스볼 레퍼런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첼 페이지의 통산 성적과 괴리가 있다. 물론 니그로리그의 기록이 완전치 못하다는 지적도 있지마는, 기록원이 페이지의 컨디션이 영 별로일 때에만 기록을 남겼을 리는 없으니 기록으로 남은 것과 큰 차이가 나는 선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페이지가 니그로리그에서 보여준 모습을 다른 선수에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대략 전성기의 크리스 세일[10] 내지는 제이콥 디그롬 수준이었는데, 이들도 50타자 연속 삼진을 잡고 동료들을 전부 덕아웃에 앉혀놓고 3타자 연속 3구삼진을 기록하는 재주를 부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페이지가 45살~46살에 보여준 좋은 투구내용 역시 그 자체로만 평가를 해야지 '40대 때도 이렇게 잘 하는데 20대~30대 시절이었다면 얼마나 잘했을까?' 같은 가정은 큰 의미가 없다. 40대 중반에 호투를 펼친 케이스가 사첼 페이지 혼자 뿐인 건 아니며, 유명한 선수들 중에서도 필 니크로, 놀란 라이언, 제이미 모이어 등 45살~46살 때도 젊을 때 못지 않게 잘 한 선수들이 있다. 물론 이들도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명선수들이니 그 선수들처럼 나이 먹고도 잘 했던 사첼 페이지 역시 메이저리그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정도의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소결하자면, 페이지의 비교대상으로 꼽힌 선수들이 필 니크로, 놀란 라이언, 제이콥 디그롬, 전성기 때 크리스 세일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페이지는 당대 최상급 선수였고 어려서부터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더라도 명예의 전당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해봄직 하다. 젊었을 때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니그로리그에서 타자들을 압도하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나이를 먹어서도 기량이 잘 떨어지지 않는 여타 특급 선수들처럼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메이저리그에서 통하는 기량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그가 남긴 기록만 보더라도 안타 잘 안 맞고 삼진 잘 잡는데다 피홈런을 극도로 잘 억제하는[11], 현대 야구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투구 스타일을 보여주므로 어깨가 싱싱할 때부터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더라면 300승, 3000삼진 등 실력만으로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는 수준의 마일스톤을 달성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결국 추측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남겨진 기록이 너무 적다 보니 마냥 역대 최고의 투수라고 단언하기도 어렵고, 데드볼 시대의 월터 존슨이나 라이브볼 시대의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 수준의 선수가 될 수 있었느냐에 대해선 확신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못해도 HoF는 갈 수준의 성적을 남겼을 것이다'라는 말이 반쯤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니, 하나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시대를 잘못 타고나 인종차별이라는 벽에 막혀 자신의 모든 것을 역사에 다 남기지 못한 비운의 대투수라는 것.

3.2.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

페이지는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인종분리가 만연한 당시 미국에서는 초대 커미셔너 케네소 랜디스가 반대해 흑인이라는 이유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할 수 없었고, 랜디스 사후 후임 커미셔너가 된 해피 챈들러 구단주는 흑인들도 메이저리그 데뷔를 할 수 있게 적극 나섰으며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 데뷔를 이룬 이듬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호출을 받는다. 그 계약은 3개월 동안 계약금 4만 달러. 페이지 자신은 나이가 40을 넘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처음엔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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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 클리블랜드 구단주 빌 빅(Bill Veeck)[12]은 물러설 수 없었다. 40이 넘어서도 145km 이상의 강속구를 뿌릴 수 있는 실력일 뿐만 아니라, 이미 니그로 리그에서의 족적으로 엄청난 유명세를 타고 있던 페이지는 존재 자체로 흥행 보증수표 역할도 가능했던 것.

이후 같은 흑인 선수인 래리 도비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유니폼을 입으면서 AL 첫번째 흑인 선수로 데뷔하자, 사첼 페이지는 결국 1948년 7월 7일 42세 생일이 되는 날 클리블랜드에 입단, 메이저리그에 6번째로 진출한 흑인 선수라는 타이틀과 함께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의 최초 흑인 투수가 되었으며, 이틀 후 최고령 신인 투수 기록을 새로 세우며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다.[13]

그의 첫 3경기 등판 동안 무려 20만명이라는 엄청난 야구 팬이 각 구장마다 몰려들었고, 그가 몸을 푸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여 박수와 환호를 질렀다고 한다.[14] 전성기가 한참 지나가버린 그였지만,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1948년 시즌 72.2이닝 6승 1패 방어율 2.48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클리블랜드가 그 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사첼 페이지와 래리 도비는 최초로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흑인 선수로 역사에 남았다.

파일:external/www.libaseballmag.com/1952toppsbaseballcards.jpg
1950년 독립 리그로 잠시 외도를 하였다가 1951년 다시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 입단해 메이저리그로 복귀한다. 이것은 모두 사첼 페이지를 메이저리그로 끌어들인 빌 빅의 행보와 연결된다. 빌 빅이 떠나면서 사첼 페이지도 팀을 떠났고, 빌 빅이 세인트루이스로 복귀하면서 사첼 페이지를 부른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페이지가 브라운스를 떠난 이유도 빌 빅이 팀을 매각하고 떠났기 때문. 즉, 나이나 실력과는 무관하게 인간 관계로 팀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를 반복한 것이다. 기량은 여전하여 1952년 페이지는 45세의 나이로 12승 10패 방어율 3.07을 기록하였는데, 이 시즌에 역사상 최고령 완봉, 완투승을 이뤄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53년 47세의 나이로 3승 9패 3.53을 기록했는데, 이 때 2년 연속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1953년 시즌 종료 후 빌 빅이 브라운스를 매각하고 팀이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개편되자 팀을 떠났다. 이후 야인으로 지내던 페이지는 빌 빅이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트리플A 팀 운영권을 가지게 되자 빌 빅을 따라 1955년 8월 필라델피아 산하 트리플A 팀인 마이애미 말린스[15]에 입단했다. 페이지는 1956년부터 3시즌간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한 후, 빌 빅이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구단주로 자리를 옮기며 팀을 떠났다. 이후 1961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산하 트리플A 팀인 포틀랜드 비버스[16]에 입단하여 딱 5경기에 나섰다. 그리고 다시 팀을 떠났고, 한동안 페이지의 소식은 없었다.

가끔 독립리그나 중남미리그에서 한달 혹은 석달씩 단기계약을 맺으며 마무리투수로 뛰었다는 소식 정도. 선발은 무리고, 한두이닝 정도는 전력투구가 가능하다는 모양. 남의 부탁을 거절할 줄 모르는 성품인지라 50대에도 꾸준히 공을 던져왔다고 한다. 그가 떠난 뒤에도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 목돈을 들고 와서 사첼에 구애를 펼치기도 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다시 올 거라는 생각은 없었던 모양. 그렇게 페이지는 은퇴한 것으로 모두가 생각했는데...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35c2e9fabc8b345162f9254374113a7b.jpg 파일:external/30e40be60e9884a0a722a976872f79a1d83410906c1c3e866a6f5646b9ee998e.jpg
끝이 아니었다. 4년이 더 지난 1965년, 메이저리그 연금 규정이 개정되어 페이지가 3이닝 차이로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의 구단주 찰리 핀리[17]는 딱 한 경기를 위해 58세의 페이지를 영입하기로 한다. 페이지는 9월 25일 보스턴 레드삭스 전에 선발 등판하며 12년 만에 메이저리그 무대에 돌아왔고, 환갑을 바라보던 노인은 그 당시 불같던 보스턴의 타선을 3이닝을 28개만 던지고, 1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기염을 토한다.[18] 당시 유일한 1안타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간판 타자이자, 훗날 명예의 전당으로 가는 역사상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인 안타 제조기 칼 야스트렘스키가 뽑아낸 2루타였고, 최고령 루키와 최고령 선수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며 은퇴를 하게 된다. 만약 5이닝을 던졌고, 팀이 승리했다면 절대 깰 수 없는 역대 최고령 승리 투수가 되었을지도.
페이지는 이후 연금 규정이 더 빡빡하게 바뀌어 또 지급대상에서 제외되자 다시 와서 공을 던지려 했지만 노령이라(최소 62세였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커미셔너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연금 지급 기준이 다시 바뀌면서 페이지가 추가등판할 없이 다시 연금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4. 은퇴 이후

그가 기록한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은 5시즌 동안 28승 31패 4세이브 3.29. 은퇴 이후인 1966년부터 자신의 첫 입단팀이였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19]의 투수 코치로 2년간 활약했다.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니그로리그의 성적은 146승 64패 3.10.

1971년, 니그로리그에서의 업적을 인정 받아 니그로 리그 위원회(Committee ----on Negro Leagues)를 통해 헌액되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다.

파일:external/90feetofperfection.files.wordpress.com/satchel-paige-hall-of-fame.jpg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당시 65세였던 페이지는 "현재는 물론이고 10년 뒤에 등판해도 승리할 수 있다."며 끝없는 자신감을 표출했다. 페이지는 실제로 나이에 무감각했으며, 나이를 핑계로 던지지 못한다고 하는 투수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나이에 대해 "나이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되고 싶은 나이를 생각하면, 그것이 자신의 나이가 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낭만이 따로 없다.

또한 자신의 나이와는 다른 젊은 몸과 마음의 비결에 대해 묻는 후배들에게 "늙어서 야구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야구를 제대로 하지 않으니까 늙어 버리는 것이다."라는 말도 남겼다.[20] 또한 그의 투구 지론은 스트라이크 존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지 못하는 투수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1982년,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5. 평가

야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선수. 사실 이러한 평을 내리기엔 페이지가 인종차별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메이저 리그에 합류한 시기가 너무 늦다보니 40대의 나이로 몇 시즌 던진 기록이 전부고, 니그로리그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부실한데다 동시기 메이저 리그와의 1대1 비교도 쉽지 않아서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평가를 받는 다는 점에서 페이지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페이지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공식 기록보다는 당대 인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이야기가 큰 영향을 끼쳤다. 당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슈퍼 스타들은 그를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고 찬양할 정도였는데, 100마일을 찍었던 파이어볼러로 유명한 밥 펠러가 "내 직구는 사첼 페이지의 직구에 비하면 체인지업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하며 페이지에게 무한에 가까운 경의를 표했고, 디지 딘은 "내가 페이지와 함께 뛰면 7월 초에는 리그 우승을 확정하고 남은 세 달은 낚시나 다녀도 될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심지어 평생동안 자신을 자랑하기를 꺼리던 조 디마지오가 딱 하나 유일하게 자화자찬하고 다니던 것이 자신이 페이지에게 4타수 1안타를 친 사실이었다고 하니, 당대 메이저리거들에게 페이지가 어떤 선수였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 이러한 평가는 후대에도 이어져서 그렉 매덕스는 사첼 페이지를 존경하는 의미로 아들과 딸에게 각각 사첼과 페이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테드 윌리엄스는 1966년 첫 투표 당시, "사첼 페이지 같은 니그로리그 선수도 명전에 가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 참고로 지금 이 문단에서 언급된 모든 선수는 전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올 타임 레전드들이다. 그런 레전드들이 한 목소리로 존경할 정도라는 것.

다만 아무래도 니그로리그에서의 활약은 부실한 기록, 메이저 리그와의 수준 비교 문제 등으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구두로 전승되는 이야기들도 결국 사람의 주관이라는게 들어갈 수밖에 없다보니 공신력 있는 매체에서는 페이지를 '논외'로 치는 편이다. 물론 40대의 나이에도 메이저 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출중한 기량을 지녔음은 확실하지만, "젊은 시절에 메이저 리그 무대에 나섰다면 어떤 활약을 보였을까?"는 결국 if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 위에서도 길게 언급했듯 페이지가 젊었을 때부터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더라면 명예의 전당급 기록을 남겼을 거라는 점은 크게 이견이 없으나 메이저리그보다 떨어졌던 당대 니그로리그의 수준이나, 지나치게 부족한 기록 등 여러가지 제약이 있어 월터 존슨 내지는 그렉 매덕스 같은 최고의 투수들과 비교할 만한 선수였는지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임은 분명하지만 그 실력을 정확히 가늠할 방도가 없다 보니 메이저 리그의 전설적인 선수들과 견주어 어느 정도 수준의 투수였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페이지보다도 더 불운한 경력을 보낸 조시 깁슨도 마찬가지. 이러다보니 주요 매체에서는 위대한 투수들을 죽 나열할 때 대개 월터 경을 시작으로 사이 영, 피트 알렉산더가 따라오며 그 뒤로는 각각의 주관에 따라 여러 투수들이 이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앞서 언급한 대로 당대 투수들이 일관적으로 페이지를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는 점, 40대의 나이에도 훌륭한 투구 내용을 선보이며 호투한 점 등을 부족하긴 해도 워낙 높은 평가를 받는 근거가 있기에 페이지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위대한 투수로 치켜세워지고 있다. 역대 투수 가운데 열손가락 안에 꼽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 인종적인 문제로 사첼 페이지가 메이저리그에 뒤늦게 등장한 것이지, 평가가 인종차별적인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사첼 페이지의 선배 투수이자 또 다른 니그로 리그의 전설인 "사이클론 조" 조 윌리엄스를 페이지보다 위대한 선수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둘 중 누가 위대한가에 대한 설문 조사가 있었고, 윌리엄스가 페이지를 누른 바 있다. 또 둘은 단 한번 맞대결을 펼쳤는데, 황혼기를 지내고 있었던 윌리엄스가 떠오르는 슈퍼 스타 페이지를 1-0으로 제압했다. 조 윌리엄스 역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6. 연도별 기록

파일:MLB 로고.svg 사첼 페이지의 역대 MLB 기록[21]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27 BBB[22] 20 7 2 1 98 2.39 79 [-] 27 2 93 1.082 157 2.6 2.6
1928 25 11 4 4 132 2.32 113 2 25 3 121 1.045 175 4.0 4.5
1929 29 11 9 2 185⅔ 3.68 188 [-] 43 2 189 1.244 116 2.6 2.7
1930 12 7 2 1 75⅓ 2.87 52 [-] 9 1 69 0.810 166 2.7 2.7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31 CCU[26] 5 1 1 0 25⅓ 2.13 19 2 4 1 18 0.908 199 0.4 0.9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33 PC[27] 12 4 5 1 78⅔ 1.94 49 2 16 0 77 0.826 221 2.4 3.1
1934 19 13 3 0 145⅔ 1.54 97 2 30 2 152 0.872 269 4.8 6.1
1936 11 8 2 1 71⅔ 3.64 67 5 28 0 72 1.326 133 1.6 1.9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40 KCM[A] 1 1 0 0 5 5.40 3 0 3 0 10 1.200 83 [-] 0.0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41 KCM[A]/NBY[31] 13 8 0 0 65⅔ 2.06 52 0 7 5 56 0.898 180 2.1 2.1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42 KCM[A] 11 2 5 0 72⅓ 2.12 62 [-] 11 1 56 1.009 184 2.6 2.0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43 KCM[A]/MRS[35] 28 10 8 1 123⅔ 2.91 109 2 31 2 102 1.132 131 2.9 2.2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44 KCM[A] 16 6 4 0 98⅓ 1.10 62 0 27 1 105 0.905 313 3.2 3.9
1945 9 3 4 0 44⅓ 4.67 42 0 15 0 43 1.286 88 1.3 0.0
1946 8 4 0 0 35 1.29 24 0 5 0 32 0.829 323 1.3 1.6
1947 5 0 2 0 19 2.37 19 0 2 0 18 1.105 206 0.8 0.5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48 CLE 21 6 1 1 72⅔ 2.48 61 2 22 1 43 1.142 165 1.6 1.6
1949 31 4 7 5 83 3.04 70 4 33 1 54 1.241 132 1.4 1.7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51 SLB 23 3 4 6 62 4.79 67 6 29 1 48 1.548 93 0.8 0.3
1952 46 12 10 10 138 3.07 116 5 57 3 91 1.254 127 2.5 3.5
1953 57 3 9 11 117⅓ 3.53 114 12 39 1 51 1.304 119 0.8 3.0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65 KCA 1 0 0 0 3 0.00 1 0 0 0 1 0.333 0.1 0.2
MLB 통산
(22시즌)
403 124 82 44 1751⅔ 2.73 1466 44 463 27 1501 1.101 150 42.5 47.0

7. 관련 문서


[1] 더 나이가 많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들도 많다. 19세기 말 출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주류이고, 심지어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마지막 메이저리그 등판 경기 때 나이가 59세가 아니라 68세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2] 기록이 완전하지 않다.[3] 최초의 흑인 선수는 래리 도비였다.[4]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페이지가 1906년보다는 예전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고 사실상 정설이지만,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5] 당장 니그로 리그 시절에도 약 20개 팀을 순회하면서 미국 전체에서 적을 두고 활약했다.[6] 여담으로 저 메이저리그 팀의 선발투수가 다름 아닌 디지 딘인데, 사첼 페이지에게 두 번 다 졌다고 한다. 이후, 디지 딘은 뻑이 가서, "내가 본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고 극찬했다.[7] 이 때 베이브 루스는 나오지 않았다. 흑인하고는 같이 경기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근데, 삼진 당할까봐 못 나왔다는 디지 딘의 주장도 있긴 하다.[8] 여기서 사첼에게 1안타를 친 조 디마지오는 선수 시절 내내 그의 자랑거리였다고 한다.[9] 혹자는 니그로리그의 메이저리그 상대전적이 268승 168패라고 하고, 혹자는 309승 129패라고도 한다.[10] 베이스볼 레퍼런스에서 제공하는 유사도 점수(Similarity Scores)에서 909점으로 1위다. 158이닝만 던지고도 bWAR 6.5/fWAR 6.2를 기록한 2018년의 포스를 감안하면 전성기 때는 세일이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가 맞았다.[11] 설사 확인할 수 있는 니그로리그의 기록을 제외하고 1948년에 메이저리그에 합류한 이후의 기록만 따지더라도 노쇠화로 인한 구위 저하 탓인지 삼진은 많지 않으나 H/9 5.4에 HR/9는 0.5에 불과할 정도로 피안타와 피장타를 억제하는 능력이 매우 빼어났다.[12] 역사상 최고의 흥행사로 꼽히는 인물. 야구 토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1/8이라는 등번호로 유명한 에디 게이델을 대타로 출장시킨 인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조시 깁슨을 영입하려고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사려고 했던 인물이다.[13] 2차대전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40대 루키 선수는 사첼 페이지 외에 1960년 피츠버그 파이리츠디오메데스 올리보, 2009년 뉴욕 메츠다카하시 켄뿐이다.[14] 오죽하면, 경찰이 동원될 정도였다고 한다.[15] 현재 존재하는 메이저리그 구단인 마이애미 말린스와는 무관한 별개의 팀이다. 말린스는 1960년 이후 몇 차례의 연고이전을 거친 후 현재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산하 트리플A팀인 그위넷 스트라이퍼스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16] 이후 연고이전과 프랜차이즈 변경을 거쳐 현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산하 트리플A 팀인 엘패소 치와와스가 팀을 계승중이다.[17] 코니 맥 시절 이후 암흑기에 빠진 애슬래틱스를 인수, 이후 오클랜드로의 연고 이전을 성사시킨 후 1970년대 A's의 월드 시리즈 3연패로 대표되는 영광의 시대를 이끌어 낸 구단주다.[18] 이 때 사첼과 배터리를 이룬 포수는 무려 33살이나 어렸다.[19] 브레이브스는 1966년에 연고지를 애틀랜타로 옮겼다. 밀워키 브루어스는 4년 뒤에 생기게 된다.[20] 역대 최고의 권투선수인 무하마드 알리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은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나이먹었다. 나이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이다."[21] 니그로리그 기록이 메이저리그의 역사로 인정되었으므로 니그로리그 기록이 포함된다.[22] 버밍엄 블랙바론스(니그로리그 팀)[-] 기록 없음[-] [-] [26] 클리블랜드 컵스(니그로리그 팀)[27] 피츠버그 크로포즈(니그로리그 팀)[A]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니그로리그 팀)[-] [A] [31] 뉴욕 블랙양키스(니그로리그 팀)[A] [-] [A] [35] 멤피스 레드삭스(니그로리그 팀)[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