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cfcd4><colcolor=#000> 스웨덴의 왕세자비 코넛의 마거릿 공녀 Princess Margaret of Connaught | ||
이름 | 영어 | 마거릿 빅토리아 샬럿 오거스타 노라 (Margaret Victoria Charlotte Augusta Norah) |
스웨덴어 | 마르가레타 빅토리아 샤를로테 아우구스타 노라 (Margareta Victoria Charlotte Augusta Norah) | |
출생 | 1882년 1월 15일 |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서리 백샷 공원 | ||
사망 | 1920년 5월 1일 (향년 38세) | |
스웨덴 스톡홀름 스톡홀름 왕궁 | ||
장례식 | 1920년 5월 13일 | |
스웨덴 스톡홀름 스톡홀름 대성당 | ||
배우자 | 구스타프 6세 아돌프 (1905년 결혼) | |
자녀 | 구스타프 아돌프, 시그바르드, 잉리드, 베르틸, 칼 요한 | |
아버지 |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 |
어머니 | 프로이센의 루이제 마르가레테 공주 | |
형제 | 아서, 패트리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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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왕손이자 스웨덴의 왕세자비.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와 프로이센의 루이즈 마거릿 공주의 장녀로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첫 번째 아내이다.2. 작위
영국에서의 문장 | 스웨덴에서의 문장 |
- 코넛의 마거릿 공녀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Margaret of Connaught (1882년 1월 15일 ~ 1905년 6월 15일)
- 스웨덴의 왕자비, 스코네 공작부인 마르가레타 전하 Her Royal Highness Margareta, Princess of Sweden, Duchess of Skåne (1905년 6월 15일 ~ 1907년 12월 8일)
- 스웨덴의 왕세자비, 스코네 공작부인 마르가레타 전하 Her Royal Highness Margareta, Crown Princess of Sweden, Duchess of Skåne (1907년 12월 8일 ~ 1920년 5월 1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1885년 카를 루돌프 손의 초상화[1] |
런던 외곽 백샷의 드넓은 자연에서 마거릿은 식물학과 정원 가꾸기, 그림에 대한 열정을 싹틔웠다. 이른 아침과 해질 녘에 물감을 들고 밖으로 나서곤 했다. 테니스와 골프를 치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연못에서 스케이트와 하키를 했다. 피아노와 댄스, 승마 레슨도 받았다.
갠갠(Gan-Gan)[3] 빅토리아 여왕과도 가까웠다. 부모님이 멀리 떠날 때면 할머니에게 맡겨졌고 휴일과 크리스마스는 할머니가 있는 밸모럴 성과 오스본 하우스에서 지냈다.
빅토리아 여왕과 마거릿 |
1893년 가족 사진 |
3.2. 결혼
구스타프 아돌프와 마거릿 |
1905년 2월 25일 약혼이 공식 발표 되었다. 코넛 공작 부부와 왕세손의 할아버지 오스카르 2세가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스웨덴과 영국의 혼사는 1406년 필리파[4]와 에리크 7세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5일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언니와 친했던 여동생 패트리샤는 아쉬움에 눈물을 보였다. 마거릿의 결혼식 베일은 고명딸 잉리드가 물려받아 여계 후손들의 웨딩베일로 쓰이고 있다.
1905년 6월 15일 결혼식[5] |
1906년에 구스타프 아돌프가, 그 이듬해 1907년에는 시그바르드가 태어났다.
소피에로 궁전[6] |
3.3. 왕세자비
1907년 12월 8일 시친할아버지인 오스카르 2세가 사망해 왕세자였던 구스타프 5세가 스웨덴 국왕이 즉위함으로서 남편 구스타프 아돌프가 왕세자가 되어 마거릿도 왕세자비가 되었다.1917년 |
마거릿은 정원 가꾸기를 좋아했고 그녀의 남편도 식물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소피에로 궁전에 영국식 정원을 만들었고 이곳 정원에는 현재도 그녀가 결혼할 때 영국에서 가져온 머틀이 있으며 로열 웨딩에 쓰이고 있다. 가드닝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이에 마거릿 왕세자비는 Flower Princess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녀의 이 취미는 고명딸 잉리드가 물려받았다.
또한 스포츠와 미술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스웨덴 최초의 여성 밴디팀을 결성하였고 1914년 말뫼의 발틱 전시회에 자신의 그림을 전시하기도 하였다.
왕세자 부부는 사적인 관심사를 언론에 내보인 최초의 왕족이기도 했다. 가드닝, 미술, 스포츠 등 취미 활동을 하는 부부의 모습은 스웨덴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징병군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는 중앙 협의회를 창설하고 왕실 친인척들간의 소식을 전해주는 역할도 하였다. 독일을 지지하는 시어머니 빅토리아 왕비와 잠깐 사이가 안 좋았으나 그 이후에는 고부관계가 나아졌다고 한다.
3.4. 사망
1919년 늦가을부터 마거릿은 여러 차례 아팠다. 귀와 턱에 통증을 느꼈고 11월에는 심한 귀 염증으로 수술을 받았지만 잘 회복되지 않았다.[7] 이때 마거릿은 임신 중이었는데 그것이 그녀를 더 약하게 했다. 다음 해 2월에는 좀 나아졌지만 3월에는 심한 감기와 악성 수두에 걸렸다. 4월 29일 목요일 오른쪽 귀 주변에 불편함을 느꼈고 금요일에 오른쪽 귀 주변이 부으면서 저녁에 39.8도까지 열이 올랐지만 전반적인 상태는 별 문제가 없었다. 토요일에는 상태가 갑작스레 악화되어 심부전과 패혈증 증상이 나타났고 다음날 5월 1일 오후 2시 38세로 사망했다.[8] 여섯째 아이를 임신한지 8개월째였다.1920년 5월 1일 화창한 봄날에 우리[9]는 밖에서 책을 읽으며 쉬는 날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스톡홀름에서 걸려온 전화로 우리는 바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위독하셨다. 기차에서 우리는 무척 조용히 각자의 생각에 빠진 채 앉아 있었다. 굉장히 심각한 상황일 터였다. 아니라면 집으로 불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그토록 가까웠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생각들을 밀어냈다. 우리는 오후 늦게 스톡홀름에 도착했고 어머니가 몇 시간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완전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울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마비된 것 같았다. 레욘바켄[10]을 올라가면서 왕궁 옥상의 깃발이 깃대의 중간에서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그제서야 어머니가 영영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이미 검은 옷을 입고 엄숙한 얼굴을 하고 계셨는데 울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지 물으셨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뵈었던 모습으로 어머니를 기억하고 싶었다. 학교로 떠나기 전 작별 키스를 해주셨던 미소 짓는 따스하던 어머니로. 사랑했던 사람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죽음을 마주한 나는 두려웠다. 아버지는 블루 살롱에 우리 다섯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가장 작은 두 아이들을 팔로 감싸 안으시며 자기는 이제 혼자고 이제는 함께 뭉쳐서 서로를 도와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울었다.
둘째 아들 시그바르드의 회고
둘째 아들 시그바르드의 회고
마거릿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스웨덴 왕실과 영국 왕실에 굉장한 충격이었다. 연설 중이던 스웨덴의 총리는 급히 궁전으로 달려와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자를 안으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고 물었다.
이제 스톡홀름 궁의 햇살이 사라졌습니다.
얄마르 브란팅 총리
얄마르 브란팅 총리
1920년 5월 13일 장례식[11] |
마거릿이 세상을 떠난 직후 전국적으로 기금 모금 행사가 일어났고 7주 후 약 130만 크로나(현재 가치 약 2,300만 크로나)가 모였다. 남편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손녀 크리스티나 공주를 거쳐 현재 증손녀 빅토리아 왕세녀가 재단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3년 후인 1923년, 구스타프 왕세자는 루이즈 마운트배튼[12]과 재혼했다. 구스타프의 재혼에 어머니 마거릿에게 각별했던 고명딸 잉리드는 불같이 화를 냈고, 새어머니인 루이즈도 많이 어려워했으나 나중에 루이즈와 잉리드 모두 화해했다고 한다.
4. 가족관계
4.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 (Prince Gustaf Adolf, Duke of Västerbotten) | 1906년 4월 22일 | 1947년 1월 26일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지빌라 공녀 슬하 1남 4녀[13] |
2남 | 시그바르드 베르나도테 (Sigvard Bernadotte) | 1907년 6월 7일 | 2002년 2월 4일 | |
슬하 1남 | ||||
마리안 린데베리 | ||||
1녀 | 덴마크의 잉리드 왕비 (Ingrid, Queen of Denmark) | 1910년 3월 28일 | 2000년 11월 7일 | 프레데리크 9세 슬하 3녀[14] |
3남 | 할란드 공작 베르틸 왕자 (Prince Bertil, Duke of Halland) | 1912년 2월 18일 | 1997년 1월 5일 | 릴리안 데이비스 |
4남 | 칼 요한 베르나도테 (Carl Johan Benradotte) | 1916년 10월 31일 | 2012년 5월 5일 | 셔스틴 비크마크 슬하 1남 1녀 |
요한니셔스의 귄닐라 바크트메이스터 |
5. 여담
여성 계승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이는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영향인 듯하다.[1] 빅토리아 여왕은 손이 데이지의 사랑스러운 그림을 그렸다고 적고 있다.[2] 루이제 마르가레테의 아버지이자 마거릿의 외할아버지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카를 왕자가 프리드리히 3세의 친사촌이었다. 참고로 프리드리히 3세는 마거릿의 첫째 고모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남편이기 때문에 마거릿에겐 6촌 할아버지이자 첫째 고모부가 된다.[3] 남아있는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전통은 현재에도 이어진다.[4] 헨리 4세의 딸[5] 왼쪽부터 신부 들러리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 공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베아트리체 공녀, 웨일스의 메리 공녀, 여동생 코넛의 패트리샤 공녀[6] 마거릿이 사망한 후에도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의 여름 거주지였다.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평생 사랑했던 궁전을 헬싱보리에 남겼고 그의 진달래 컬렉션과 마거릿이 가꾼 정원은 현재에도 남아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 명소다. 2010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에 선정되었다.[7] 귀 문제는 지난 해부터 있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 9월 귀에서 불쾌한 '노랫소리'가 들려 계피와 아스피린, 퀴닌을 복용했다고 편지에 적었다.[8] 이 날은 공교롭게도 그녀의 아버지 코넛 공작 아서 왕자의 70세 생일이었다.[9] 구스타프 아돌프가 기숙학교에 같이 있지 않고 스톡홀름에 있었다는 신문기사도 있다.[10] 스톡홀름 왕궁의 북쪽 입구로 이어지는 경사로[11] 자신의 장례식에서 자식들이 아직 어리다면 흰 옷을 입길 바랐던 마거릿의 뜻대로 잉리드와 베르틸은 흰 옷을 입었다. 막내 칼 요한은 너무 어려 참석하지 못했다. 구스타프 아돌프와 아이들 뒤로 아버지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호콘 7세, 시아버지 구스타프 5세, 크리스티안 10세와 스웨덴 왕실 사람들이 보인다.[12] 공교롭게도 루이즈는 마거릿의 고종 사촌 언니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의 차녀이다.[13] 칼 16세 구스타프 등[14] 마르그레테 2세, 베네딕테 공주, 그리스인의 왕비 아나마리아